마쓰모토 게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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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모토 게이지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외야수였다. 지바 경제대학 부속 고등학교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8년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1순위로 입단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요코하마·DeNA 베이스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2017년 시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이후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하다가 2020년에 은퇴했으며, 현재는 베이스타즈 베이스볼 아카데미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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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게이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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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팀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09–2017) 신닛테쓰 스미킨 가즈사 매직/일본제철 가즈사 매직 |
등번호 | 61 |
던지는 팔 | 좌 |
치는 손 | 좌 |
생년월일 | 1986년 6월 24일 |
출생지 | 지바현 오아미시라사토시 (출생지는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프로 입단 년도 | 2008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1위 |
데뷔일 | 2009년 4월 3일 |
최종 출장일 | 2017년 9월 7일 |
고향 | 일본 지바현 오아미시라사토시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지바 경제대학 부속 고등학교 |
대학교 | 와세다 대학 |
프로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09-2017) |
사회인 야구 | 신닛테쓰 스미킨 가즈사 매직/일본제철 가즈사 매직 |
코치 경력 | |
코치 팀 | 일본제철 가즈사 매직 |
2. 선수 경력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2009년 ~ )
; 2009년
가네시로 다쓰히코, 요시무라 유키와 외야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결과[3], 같은 신인인 호소야마다, 야마자키 노리하루와 함께 개막부터 1군에 등록되었다. 나고야 돔에서 맞이한 4월 3일 개막전에서는 선발 1번 센터로 기용되었지만 4타석 무안타로 끝났다[4]。신인이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는 것은 구단에서는 38년 만이었다[1]。그 후에도 프로 투수의 구위, 변화구에 고전하여 타격이 부진하여 4월 말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5]。프레시 올스타 게임에서는 운송 회사의 실수로 인해 쇼난 시렉스의 선수·코치진의 유니폼, 용품류가 도착하지 않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연습복을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지만 2안타를 기록하여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1][6]。후반에 다시 1군에 승격했지만 22경기에서 타율 .136, 도루는 불과 1개에 그쳤다[5]。
; 2010년
춘계 캠프에서 40도루를 목표로 내걸었지만[5], 개막 1군을 놓치고 2군에서 타율 .310(이스턴 리그 4위)을 기록[7]한 후, 시즌 후반의 8월 19일에 1군 승격. 9월 25일에 첫 홈런을 기록하는 등, 9월 하순부터는 선발로 많이 기용되었다.
; 2011년
초반에는 수비 강화나 대주자를 중심으로 기용되었지만 1군에 정착하지 못하고 2군에서 타율 .283(이스턴 리그 6위)을 기록한 후, 시즌 후반에 1군 재승격. 9월 이후에는 선발로 기용이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전년을 넘어선 47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212로 부진했다[7]。
; 2012년
등록명을 '''게이지로'''로 변경. 개막을 1군에서 맞이하여 4월 8일 히로시마전에서 적시타를 기록했지만, 이 해는 이 1안타에 그쳐, 자기 최저인 18경기에 출전에 그쳤다. 12월 27일에 오타 아토리, 시마무라 이치키와 함께 등록명을 본명으로 되돌리는 것이 발표되었다.
; 2013년
2년 연속 개막 1군에 진입하여, 시즌 초반에는 새 외국인 나이저 모건의 부진, 아라나미 쇼의 부상 이탈도 있어 선발 기용이 보였고, 4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1호 홈런을 쳤다[7]。그러나 5월 이후에는 월간 타율 1할대로 부진에 빠져, 다른 외야수진의 복귀나 호조로 인해 출전 기회가 감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최다인 72경기에 출전했다.
; 2014년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며칠 만에 2군으로 강등되었고, 이후에는 1군과 2군을 오갔다. 대타 타율 .357과 좌타 대타 요원으로 활약했다. 팀 사정으로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1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12월 4일, 다음 시즌부터 등번호가 6번에서 '''61'''번으로 변경될 것이 발표되었다.
; 2015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2군과 오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7월은 타격 호조로, 같은 달 13일에는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지만 차츰 부진해졌다. 대타 타율 .194와 좌타 대타로도 활약하지 못해, 결국 2군에서 시즌을 마쳤다.
; 2016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약 2주 후에 2군으로 강등. 6월 20일에 다시 1군에 승격했지만 불과 약 2주 만에 2군으로 강등. 이후 1군 승격은 없었다. 2군에서는 타율 .244, 5홈런(타수 201)의 성적이었다.
; 2017년
5월과 8월에 1군에 승격했지만, 모두 단기간에 2군으로 강등. 1군 공식전에는 13경기에 출전[8]하여,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 팀은 레귤러 시즌 3위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돌파를 거쳐 19년 만에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마쓰모토 자신은 일본 시리즈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고[9], 시리즈 종료 후 11월 5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2. 1.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리틀 리그의 오미야 라이온스에 소속되어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소속된 오미야 시니어에서도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지바 경대 부속 고등학교 진학 후, 당시 감독이었던 친부 요시히로의 지도하에 3학년 때는 이노우에 유스케와 함께 투수진을 구성했고, 타자로서도 4번 타자로 활약했다. 여름 지바 대회에서 학교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고, 제86회 전국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3회전에서는 다르빗슈 유가 이끄는 도호쿠 고교를 연장전 끝에 이겼고, 이후 베스트 4까지 진출했다[1]。
와세다 대학 진학 후, 당시 감독 오오타케 아츠라의 권유로 외야수로 전향했고, 1학년 때부터 도쿄 육대학 야구 추계 리그전부터 주전 우익수로 자리 잡았다. 재학 중 리그전 통산 96경기에 출장했고, 타율.315 (333타수 105안타), 2홈런, 44타점, 38도루를 기록했다. 베스트 나인에 5번 선정되었고, 4학년 가을에는 수위 타자에 올랐으며[1], 리그 사상 27번째 통산 100안타도 달성했다. 와세다 대학 동기로는 우에모토 히로키, 호소야마다 타케시, 스다 코타 등이 있다.
대학 4학년 때인 2008년에는, 제4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일본 대표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대표팀에서는 오오타케가 코치를 맡았고, 와세다 대학 선수로는 우에모토, 호소야마다, 2년 후배 사이토 유키도 선출되었다. 주로 3번 타자로 기용된 마쓰모토는 예선 리그 6경기에서 2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며 팀의 결승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 미국 대표와의 결승전에서는 연장 12회 초 1사 1, 2루 우익 수비에서 안타를 처리하고, 홈으로 다이렉트 송구하여 보살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플레이 직후 1점을 내주어 팀은 0-1로 준우승에 그쳤다.
2008년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신 타이거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2], 중복 지명에 의한 추첨 결과 요코하마가 독점 교섭권을 획득하여 계약금 1억 엔, 연봉 1500만 엔 (금액은 추정)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요코하마 구단은 이 회의에서 호소야마를 4순위로 지명하여, 훗날 입단하여 마쓰모토와 다시 팀 동료가 되었다.
2. 2. 요코하마·DeNA 시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2009년 ~ ); 2009년
가네시로 다쓰히코, 요시무라 유키와 외야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결과[3], 같은 신인인 호소야마다, 야마자키 노리하루와 함께 개막부터 1군에 등록되었다. 나고야 돔에서 맞이한 4월 3일 개막전에서는 선발 1번 센터로 기용되었지만 4타석 무안타로 끝났다[4]。신인이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는 것은 구단에서는 38년 만이었다[1]。그 후에도 프로 투수의 구위, 변화구에 고전하여 타격이 부진하여 4월 말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5]。프레시 올스타 게임에서는 운송 회사의 실수로 인해 쇼난 시렉스의 선수·코치진의 유니폼, 용품류가 도착하지 않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연습복을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지만 2안타를 기록하여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1][6]。후반에 다시 1군에 승격했지만 22경기에서 타율 .136, 도루는 불과 1개에 그쳤다[5]。
; 2010년
춘계 캠프에서 40도루를 목표로 내걸었지만[5], 개막 1군을 놓치고 2군에서 타율 .310(이스턴 리그 4위)을 기록[7]한 후, 시즌 후반의 8월 19일에 1군 승격. 9월 25일에 첫 홈런을 기록하는 등, 9월 하순부터는 선발로 많이 기용되었다.
; 2011년
초반에는 수비 강화나 대주자를 중심으로 기용되었지만 1군에 정착하지 못하고 2군에서 타율 .283(이스턴 리그 6위)을 기록한 후, 시즌 후반에 1군 재승격. 9월 이후에는 선발로 기용이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전년을 넘어선 47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212로 부진했다[7]。
; 2012년
등록명을 '''게이지로'''로 변경. 개막을 1군에서 맞이하여 4월 8일 히로시마전에서 적시타를 기록했지만, 이 해는 이 1안타에 그쳐, 자기 최저인 18경기에 출전에 그쳤다. 12월 27일에 오타 아토리, 시마무라 이치키와 함께 등록명을 본명으로 되돌리는 것이 발표되었다.
; 2013년
2년 연속 개막 1군에 진입하여, 시즌 초반에는 새 외국인 나이저 모건의 부진, 아라나미 쇼의 부상 이탈도 있어 선발 기용이 보였고, 4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1호 홈런을 쳤다[7]。그러나 5월 이후에는 월간 타율 1할대로 부진에 빠져, 다른 외야수진의 복귀나 호조로 인해 출전 기회가 감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최다인 72경기에 출전했다.
; 2014년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며칠 만에 2군으로 강등되었고, 이후에는 1군과 2군을 오갔다. 대타 타율 .357과 좌타 대타 요원으로 활약했다. 팀 사정으로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1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12월 4일, 다음 시즌부터 등번호가 6번에서 '''61'''번으로 변경될 것이 발표되었다.
; 2015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2군과 오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7월은 타격 호조로, 같은 달 13일에는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지만 차츰 부진해졌다. 대타 타율 .194와 좌타 대타로도 활약하지 못해, 결국 2군에서 시즌을 마쳤다.
; 2016년
전년과 마찬가지로 개막 1군에 진입했지만 약 2주 후에 2군으로 강등. 6월 20일에 다시 1군에 승격했지만 불과 약 2주 만에 2군으로 강등. 이후 1군 승격은 없었다. 2군에서는 타율 .244, 5홈런(타수 201)의 성적이었다.
; 2017년
5월과 8월에 1군에 승격했지만, 모두 단기간에 2군으로 강등. 1군 공식전에는 13경기에 출전[8]하여,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 팀은 레귤러 시즌 3위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돌파를 거쳐 19년 만에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마쓰모토 자신은 일본 시리즈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고[9], 시리즈 종료 후 11월 5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2. 3. 사회인 야구 시절
2017년 11월 15일, NPB 다른 구단에서의 현역 속행을 희망하며 MAZDA 스타디움에서 열린 12개 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시트 배팅 형식으로 4명의 투수와 대결하여 2삼진을 당했지만, 마지막 타석에서 내야 안타를 기록했다[10]。NPB 다른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지 못했지만, 신일철주금 가즈사 매직의 입단 제의를 받아들여 신쇼와에 입사, 2018년부터 팀에 합류했다[11]。같은 해 제89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 남관동 2차 예선 제3대표 결정전에서 결승 득점을 올렸고[12], 1회전 세이부 가스전에서는 3안타를 기록하며 팀의 첫 승에 기여했다[13]。
2019년 제90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는 팀은 출전하지 못했지만, JFE 동일본의 보강 선수로 개인 출전하여 대학·프로 시절 팀 동료였던 스다와 일시적으로 다시 함께 플레이했다[14]。
2020년에는 외야수 겸 코치로 재직했으며[15], 같은 해 시즌 종료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하고 신쇼와도 퇴직했다[16]。
3. 지도자 경력
사회인 야구 선수 시절에 코치를 겸임한 경험이 있어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 2021년 4월부터 통신제 대학에서 교원 면허 취득을 목표로 하면서 취업 활동을 했지만[17][18], 6월부터 프로 시절에 소속되어 있던 DeNA로 돌아가 베이스볼 스쿨 코치로 취임하여 어린이들의 육성 및 지도에 종사하고 있다[19]。
4. 상세 정보
4. 1. 선수로서의 특징
타/공/수 3박자를 갖춘 외야수이다.[20] 타격에서는 적극성을 보이며[21], 부드러운 배트 컨트롤로 넓은 지역으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과 장타력을 갖추고 있다. 50m 달리기를 5.7초에 기록한[5] 준족이며, 강한 어깨를 살린 수비도 매력적이다.4. 2. 개인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2009년 4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차전(나고야 돔), 1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석 : 상동, 1회초에 아사오 다쿠야로부터 1루 땅볼
- 첫 안타 : 2009년 4월 11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말에 라이언 글린의 대타로서 출장, 마쓰오카 겐이치로부터 좌전 안타
- 첫 도루 : 2009년 4월 1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7회초에 2루 안착(투수 : 마이크 슐츠, 포수 : 이시하라 요시유키)
- 첫 타점 : 2009년 4월 2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말에 우메쓰 도모히로로부터 중견수 희생 플라이
- 첫 홈런 : 2010년 9월 25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말에 야마모토 마사로부터 우월 2점 홈런
4. 3. 출신 학교
- 지바 경제대학 부속 고등학교
- 와세다 대학
4. 4. 등번호
마쓰모토 게이지로는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등번호 6번을 사용했다. 2015년부터는 61번을 사용하고 있다.4. 5. 등록명
마쓰모토 게이지로(마쓰모토 게이지로/松本 啓二朗일본어, 2009년 ~ 2011년, 2013년 ~ )는 2012년에 게이지로(게이지로/啓二朗일본어)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다.5. 연도별 타격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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