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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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은 1824년 10월 4일 멕시코가 아구스틴 1세의 제국 붕괴 후 임시정부를 거쳐 채택한 헌법에 따라 수립된 연방 공화국이다. 헌법은 미국 헌법의 영향을 받아 각 주에 폭넓은 자치를 부여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선출되었다. 독립 전쟁과 제국 붕괴로 인한 국내 산업 피해,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권력 다툼, 스페인의 독립 불인정 등이 공화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후 보수주의 정부 수립, 중앙집권화 시도, 텍사스 독립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1835년 헌법 폐지로 멕시코 중앙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가 1846년 다시 연방 공화국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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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1제국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하여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수립되었으나, 의회와의 갈등과 반란으로 붕괴하며 멕시코 제1공화국으로 이행된 단명한 제국이다.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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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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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종교, 독립, 단결 |
로마자 표기 | Religión, Independencia, Unión |
위치 | 1830년 멕시코 |
역사 | |
성립 | 1824년 |
소멸 | 1835년 |
건국일 | 1824년 10월 4일 |
해체일 | 1835년 10월 23일 |
주요 사건 | 1824년 헌법 공포 1824년 멕시코 헌법 폐지 1827년 스페인인 추방 1828년 라 아코르다다 반란 1829년 스페인의 멕시코 재정복 시도 실패 (탐피코 전투) 1827년-1831년 테란의 텍사스 탐험 1833년-1834년 고메스 파리아스의 반성직자 캠페인 1834년 산타 안나가 고메스 파리아스를 축출하고 의회를 해산 |
정치 | |
정치 체제 | 연방 대통령 공화국 |
수도 | 멕시코시티 |
정부 형태 | 연방제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
의회 | 의회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주요 지도자 | 과달루페 빅토리아 (1824년–1829년) 비센테 게레로 (1829년)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1830년-1832년)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1833년-1834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1834년-1835년) |
인구 | |
1824년 | 6,500,000명 |
1834년 | 7,734,292명 |
언어 | |
공용어 | 스페인어 |
기타 언어 | 나와틀어 유카테크 마야어 믹스텍어군 사포텍어군 |
종교 | |
주요 종교 | 로마 가톨릭교 (공식 종교) |
통화 | |
통화 | 멕시코 레알 |
이전 및 이후 | |
이전 | 멕시코 임시 정부 |
이후 |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
2. 역사
아구스틴 1세의 제국은 실정과 공화파의 반란으로 붕괴되었고, 임시정부를 거쳐 각 주의 자치를 폭넓게 허용하는 연방제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미국 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에 따라 멕시코는 연방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헌법에 따라 각 주 의회의 간선제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고, 초대 대통령으로는 멕시코 독립 영웅인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독립 전쟁과 제국 붕괴를 거치며 국내 산업은 큰 피해를 입었고, 제정 시대를 지지했던 보수파 세력은 여전히 남아 카우디요라 불리는 지역 군벌 정치가로 변모하여 권력 투쟁을 벌이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재정복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멕시코 내 페닌술라르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1827년 추방령이 내려졌다. 이는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28년 대선 결과에 불복한 자유주의자 비센테 게레로가 쿠데타로 집권하여 노예제 폐지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는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이 시기 스페인의 재침공 시도가 있었으나 산타 안나에 의해 격퇴되었다. 1830년, 보수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가 쿠데타로 게레로를 축출하고 집권하여 중앙집권화를 시도했으나, 자유주의 세력과 각 주의 반발에 직면했다.
1832년 반란으로 부스타만테가 축출되고, 이듬해 산타 안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자유주의자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에게 국정 운영을 맡겼으나, 파리아스의 급진 개혁은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결국 산타 안나는 보수파와 손잡고 파리아스를 축출했으며, 1835년 연방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체제를 수립하며 제1연방공화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1. 독립 배경
스페인 제국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1808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전복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서는 나폴레옹의 형제인 호세 1세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식민지 시스템 개혁을 추구해 온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었던 성직자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는 1810년, 스페인 지배 계급이 호세 보나파르트를 인정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감금된 페르난도 7세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달고가 이끈 봉기는 수도 멕시코시티를 위협할 정도로 격렬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진압되었고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이달고의 죽음 이후에도 독립 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여 전쟁을 이끌었고, 뉴 스페인 남부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모렐로스는 1813년 칠판싱고 의회를 소집하여 페르난도 7세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독립된 공화국으로서의 멕시코 건국 계획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1814년 10월 22일 아파칭간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전쟁 상황으로 인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후 전세는 독립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모렐로스 역시 1815년에 스페인 군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한편, 스페인 본국에서는 망명 정부 역할을 하던 카디스 코르테스가 자유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식민지 대표들을 포함시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법은 식민지 지방 정부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멕시코 내 자유주의자들에게 개혁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뉴 스페인 식민 당국은 해방된 언론이 반스페인 정서를 확산시키고 모렐로스의 반란이 계속된다는 이유를 들어, 헌법이 공포된 해에 곧바로 그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는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이 스페인 식민 체제 내에서의 개혁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만들었으며, 잠시나마 경험했던 지방 자치권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멕시코의 독립은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발표한 이구알라 계획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스페인에서 발생한 자유주의 3년 혁명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반동적인 성격을 띠는 동시에, 법 앞의 평등을 추구했던 멕시코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안이기도 했다. 이 계획에 따라 멕시코는 스페인 왕족을 군주로 추대하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스페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스페인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계획은 수정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제1 멕시코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지지만, 독립 자체는 이구알라 계획을 통해 달성되었다.
2. 2. 멕시코 제1제국 (1821-1823)
멕시코의 독립은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이구알라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이는 스페인에서 발생한 자유주의 3년에 대한 보수적인 반동인 동시에, 법 앞의 평등을 추구했던 멕시코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의 결과였다. 이 계획에 따라 멕시코는 스페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입헌 군주제와 연방 제도를 채택했다. 스페인 왕자에게 왕위를 제안하기 위해 사절단이 스페인으로 보내졌으나, 스페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민중 시위로 인해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하면서 멕시코 제1제국이 시작되었다.그러나 황제는 즉시 입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려고 했으며, 심지어 의회를 폐쇄하고 충성스러운 인사들로 대체했다. 또한, 이투르비데는 군대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군대의 불만을 샀다. 결국 산타 안나가 카사 마타 계획에서 연방 공화국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퇴위를 제안한 후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는 다음 해인 1824년, 멕시코가 임시 정부 하에 있는 동안 귀국을 시도했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 3. 멕시코 임시 정부 (1823-1824)
대체 구성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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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미첼레나 | 미겔 도밍게스 | 빈센테 게레로 |
1823년 4월 1일 – 1824년 10월 10일 | 1823년 7월 2일 – 1824년 10월 10일 | |
임시 정부는 니콜라스 브라보, 페드로 네그레테, 과달루페 빅토리아로 구성된 삼두정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중 과달루페 빅토리아는 훗날 멕시코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임시 정부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헌법 제정 의회 선거를 실시했고, 새로 선출된 의회는 1823년 11월 7일에 소집되었다.[11]
새로운 공화국의 형태를 두고 연방제와 단일제(중앙집권제)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미 스페인 식민 통치 시절 1812년 스페인 헌법을 통해 도입된 스페인 아메리카의 지방 대표단 시스템 덕분에 어느 정도 지방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헌법 제정 의회가 소집될 당시에는 이미 연방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12] 그러나 이투르비데 황제에 대한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던 미에르 신부는 연방제 도입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멕시코가 스페인의 재정복 시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하며, 연방제는 이미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이 연합하는 미국과 같은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미에르 신부는 멕시코에서의 연방제는 통일보다는 분열을 가져올 것이며 내부 갈등만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13]
하지만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이미 확보된 지방 자치권을 유지하고, 지방 관료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한 기대감이 연방제 지지의 주요 동기였다.[14] 역사학자 티모시 안나(Timothy Anna)는 "연방 공화국으로의 전환은 멕시코 역사에서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15] 멕시코는 효과적인 국가 정부의 필요성과 지방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요구 사이에서 실용적인 타협점으로 연방제를 선택한 것이다.[16] 과거 스페인 코르테스의 멕시코 대표였고 연방주의를 강력히 주장했던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가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했으며, 그는 미국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14] 마침내 1824년 10월 4일, 1824년 멕시코 헌법이 공포되었다.
새로운 연방 공화국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식민지 시대의 법률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왕실 칙령은 효력을 잃었지만 새로운 법전은 아직 마련되지 않아 법적 공백 상태에 놓였다. 어떤 법이 유효한지 명확하지 않았고, 법원은 공석이 많았으며, 제대로 훈련받은 변호사도 부족했다. 대부분의 민사 및 형사 사건에 대한 권한은 각 주에 위임되었다. 상인들을 위한 특별 법원이었던 ''콘술라도''(Consulado)는 폐지되었지만, 군대와 교회의 특권(푸에로, ''fuero'')은 유지되어 군인과 성직자는 여전히 각각 군사 법원과 교회 법원의 관할 아래 있었다.[17] 원주민 공동체는 식민지 시대에 보장받았던 공동체 토지에 대한 보호와 일반 인디언 법원 접근 권한을 잃게 되어 새로운 공화국 체제 하에서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헌법이 공포된 같은 주에 첫 번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임시 정부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제1 멕시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24년 10월 4일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멕시코 제1제국이 붕괴된 지 약 2년 만에 연방 공화국인 멕시코 합중국(Estados Unidos Mexicanos)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이로써 멕시코는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며 국토를 여러 주로 나누고 의회를 설립하는 등 정치 체제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2. 4.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1824-1835)

1824년 10월 4일,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연방 공화국인 멕시코 합중국(Estados Unidos Mexicanos|에스타도스 우니도스 메히카노스es)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이는 멕시코 제1제국이 붕괴된 지 약 2년 만의 일이었다. 새 헌법은 국가를 여러 주로 나누고,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 분립을 명시하는 등 공화정 체제를 갖추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독립 영웅 중 한 명인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선출되었다.
빅토리아 행정부 시기에도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특히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요크 의례 프리메이슨에 기반한 ''요키노스'')과 중앙집권주의를 선호하는 보수 세력(스코틀랜드 의례 프리메이슨에 기반한 ''에스코세스'') 간의 대립이 격렬했다. 이들 프리메이슨 로지는 단순한 사교 모임을 넘어 중요한 정치 토론의 장이 되었으며, 정부의 금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다.
정부 재정 확보를 위해 영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으나, 1827년 해당 은행의 파산으로 멕시코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멕시코 내에 남아 있던 스페인인들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스페인인들은 주로 보수적인 ''에스코세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 했다. 결국 경제 붕괴를 막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한 자유주의 헌법 정신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1827년 12월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자유주의 지식인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는 이러한 조치가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스페인 상인들을 몰아내는 실책이라고 비판했다.[18]
같은 해 12월 23일, 보수파 ''에스코세스''는 몬타뇨 계획을 발표하며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여 조엘 포인세트 미국 공사의 추방, 비밀 결사 금지, 내각 총사퇴 등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요키노스''가 장악한 정부가 자신들을 탄압하려 한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반란은 빅토리아 행정부의 부통령이자 보수파 인사인 니콜라스 브라보가 주도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브라보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1828년 대통령 선거는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선거 결과 보수 후보인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자가 승리했지만, 자유주의 후보였던 빈센테 게레로 지지자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회에 무효화를 청원했다. 청원이 거부되자 게레로 지지자들은 무력 봉기를 일으켰고, 수도까지 폭력이 확산되었다. 결국 고메스 페드라자는 국외로 망명했고, 의회는 게레로를 대통령으로 승인했다.[19]
게레로의 집권은 멕시코 사회에 큰 의미를 지녔다. 그는 변방 출신의 메스티소로서, 그의 대통령 당선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이자, 1829년 한 평론가가 표현했듯 "정당한 주인에 의한 이 땅의 재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평론가는 게레로를 "불멸의 영웅, 네사우알코요틀의 총애하는 아들"이라 칭송하며 그의 원주민 혈통을 강조했다. 게레로 자신도 취임 연설에서 독립 전쟁에서의 공헌과 함께, 능력과 덕망이 있다면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역설했다. 그는 "행정부는 부유한 궁궐에서부터 가난한 노동자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사회 통합을 강조했다.
게레로 정부는 출범 직후 스페인의 재정복 시도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1829년, 스페인 군대가 탐피코 항구에 상륙했으나(바라다스 원정), 황열병과 멕시코 군대의 저항으로 패퇴했다. 이 위기 극복 과정에서 게레로는 의회로부터 비상 대권을 부여받았으나,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권한 반납을 미루면서 반대파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게레로 정부는 멕시코 테하스(텍사스) 지방의 미국인 정착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노예제 폐지를 단행하고, 언론 규제를 시도했으며, 재정난 타개를 위해 새로운 연방세를 도입하려 했으나 주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결국, 부통령이었던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는 게레로의 비상 대권 남용을 명분으로 1829년 말 쿠데타를 일으켰다. 게레로는 수도를 떠나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부스타만테는 1830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의회는 게레로가 대통령직 수행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하며 부스타만테 정부를 승인했다.
부스타만테 정부는 보수당(에스코세스)이 처음으로 정권을 잡은 사례였다. 저명한 보수 지식인 루카스 알라만이 내각에 참여하여 정책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는 미국인 정착민 증가로 분리주의 움직임이 커지던 텍사스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1830년 추가적인 이민을 금지하고 마누엘 데 미에르 이 테란 장군을 파견해 요새를 건설하는 등 중앙 정부의 통제력 강화를 시도했다. 또한, 만성적인 재정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하여 1832년에는 연방 정부와 다수 주에서 재정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831년 1월, 축출되었던 전 대통령 게레로가 체포되어[25] 군사 재판을 받고 다음 달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 영웅으로 추앙받던 게레로의 처형은 자유당 야권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부스타만테 정부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당은 군부 실력자였던 산타 안나에게 반정부 봉기를 촉구했고, 산타 안나는 1832년 1월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은 그해 말까지 이어졌고, 결국 부스타만테 정부는 무너졌다. 1828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쿠데타로 물러났던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자가 잠시 복귀하여 남은 임기 3개월을 채웠다.
1833년 선거에서는 당시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던 산타 안나가 대통령으로, 또 다른 급진적 자유주의자인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시기 산타 안나는 자주 자신의 고향 영지인 망가 데 클라보로 물러나 있었고,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부통령 고메스 파리아스가 주도했다. 고메스 파리아스 행정부는 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교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급진적인 반(反)성직자 개혁을 추진했다. 정부는 멕시코 시티의 국립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회 부속 학교를 폐쇄하고, 수도 서원을 무효화했으며,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정부가 행사하려 했다. 또한 북부 지역의 수도원들을 탄압했다.[27][28]
고메스 파리아스는 부스타만테 행정부 인사들에 대한 정치 보복을 완화하려 했으나, Ley del Caso|레이 델 카소es(카소 법)를 통해 부스타만테 전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보수 인사들을 국외로 추방하면서 반발을 샀다. 군 장성들도 대거 해임되면서 군부의 불만도 커졌다. 정부는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콜레라 유행병에도 대처해야 했다.
전국적인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반성직자 개혁이 계속되면서 고메스 파리아스 정부에 대한 반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보수파는 산타 안나에게 정부 전복을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처음에는 이를 무시하던 산타 안나도 1834년 4월, 입장을 바꿔 쿠에르나바카 계획을 발표하며 고메스 파리아스의 개혁을 비판하고 나섰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축출되었고, 저명한 자유주의 사상가인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와 로렌조 데 자발라 등도 망명길에 올랐다.[28] 고메스 파리아스가 추진했던 개혁들은 이후 라 레포르마 시대에 다시 시도되게 된다.[29]
산타 안나는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결국 1835년 10월 23일, 1824년 헌법은 폐지되었고, 연방 공화국 체제는 막을 내렸다. 멕시코는 중앙집권적인 멕시코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나, 이는 텍사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반발과 독립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5. 멕시코 공화국으로의 전환과 잇따른 독립 (1835-1846)
1834년 4월, 산타 안나는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부통령이 추진하던 자유주의적 개혁에 반대하며 쿠에르나바카 계획을 선포하고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저명한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와 로렌조 데 자발라 등이 국외로 추방되었다.[28] 산타 안나는 기존의 국회, 주 의회, 주지사 및 시 정부를 해산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했으나,[28] 표면적으로는 1824년 멕시코 헌법의 유효성을 주장하며 그해 말 새로운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후 산타 안나는 관례처럼 잠시 은퇴하였고, 미겔 바라간이 대통령직을 대행했다.1835년 10월 23일, 새롭게 구성된 양원제 의회는 스스로를 제헌 의회로 전환하고 통합을 결의하였다. 이는 기존의 연방 공화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단일 공화국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 조치로 1824년 멕시코 헌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제헌 의회는 새로운 중앙집권적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하여 1836년 12월, 시에테 레예스(Siete Leyes, 일곱 개의 법률)라는 이름의 헌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멕시코는 보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인 멕시코 중앙 공화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중앙집권화와 연방제 폐지는 각 지역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텍사스에서는 텍사스 혁명이 발발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후 캘리포니아 공화국, 바하칼리포르니아 공화국, 소노라 공화국 등 여러 지역에서 분리 독립 움직임이 잇따랐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중앙집권 체제는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중앙집권 공화국 시대는 약 10년간 이어졌으나, 끊이지 않는 내부 혼란과 미국-멕시코 전쟁의 위기 속에서 결국 1846년 8월 22일, 1824년 멕시코 헌법이 다시 부활하면서 멕시코는 연방 공화국 체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2. 6. 멕시코 합중국의 부활 (1846-1863)
1846년 8월 22일 1824년 헌법이 부활하면서, 멕시코는 다시 합중국이 되었다.그러나 이후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패배하여 멕시코 할양지를 통해 멕시코는 국토의 1/3을 잃었다. 또한 미국의 가즈덴 매입으로 멕시코는 더욱 영토를 잃었다.
1861년에는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출병을 시작했다. 결국 1863년 수도 멕시코시티가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어 공화국은 일시적으로 붕괴되었다.
2. 7. 멕시코 제2제국 (1864-1867)
1864년, 프랑스의 괴뢰 정부인 제2 멕시코 제국이 건국되었다.2. 8. 멕시코 합중국 (1867-현재)
1867년에 다시 멕시코 합중국이 부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3. 정치
1824년 멕시코 헌법은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유일한 국교로 지정하며, 공화국을 구성하는 주(state)들을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이 헌법은 미국 헌법의 영향을 받았으나, 멕시코의 현실과 맞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미국 헌법과 달리 종교의 자유나 배심원 재판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1824년 10월 4일,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멕시코 제1제국 붕괴 약 2년 만에 연방 공화국인 멕시코 합중국(Estados Unidos Mexicanos)이 공식 출범했다.
헌법에 따라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의 세 권력으로 분립되었다.
- 입법부: 양원제 의회로 구성되었다.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각 주에서 선출되었고, 상원은 각 주 의회에서 2명씩 선출했다. 특정 공직자(주, 연방, 군, 교회)는 의원직을 겸할 수 없었다.
- 행정부: 대통령이 행정권을 가졌으며, 각 주 의회가 대통령 후보 2명(1명은 타 주 출신)을 지명하여 간선제로 선출했다.
- 사법부: 11명의 판사와 법무장관으로 구성된 대법원이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대법관 역시 주 의회에서 대통령과 같은 방식으로 선출했다.
각 주 정부 역시 연방 정부의 모델을 따라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초대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 행정부 시기에도 연방주의와 중앙집권주의 간의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멕시코 내 프리메이슨 로지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중앙집권주의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과 왕정 지지자들은 주로 스코틀랜드 의례(Scottish Rite) 로지에 속해 '에스코세스'(''escoceses'')라 불렸고,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은 요크 의례(York Rite) 로지에 모여 '요키노스'(''yorkinos'')라 불렸다. 이들 로지에서의 정치 토론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정부의 금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빅토리아 정부는 재정 확보를 위해 영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으나, 1827년 해당 은행이 파산하면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당시 멕시코에 남아 있던 스페인인들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들은 주로 '에스코세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 했다. 스페인인 추방 요구는 법 앞의 평등을 명시한 자유주의 헌법 원칙과 충돌했다. 자유주의 지식인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는 원칙적인 문제와 더불어 스페인 상인들이 경제에 기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들어 추방에 반대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7년 12월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스페인인 추방이 단행되었다.
1827년 12월 23일, 보수적인 '에스코세스'는 '몬타뇨 계획'(Plan de Montaño)을 선포하며 미국의 초대 멕시코 공사였던 조엘 포인세트의 추방, 비밀 결사 금지, 현 내각 해임 등을 요구했다. 이는 '요키노스'가 장악한 정부가 '에스코세스'를 탄압하려 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 반란은 아이러니하게도 빅토리아 행정부의 부통령이자 보수파였던 니콜라스 브라보가 이끌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브라보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1828년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적 폭력은 더욱 심화되었다. 선거에서는 보수 후보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가 승리했지만, 자유주의 후보 빈센테 게레로의 지지자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회에 무효화를 청원했다. 청원이 거부되자 정부는 선거 결과에 도전하는 자유주의 야당을 탄압하려 했고, 이는 수도 멕시코 시티까지 번지는 폭력 사태를 유발했다. 결국 상황이 불리해진 고메스 페드라자는 국외로 망명했고, 의회는 게레로의 승리를 인정하여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19]
게레로의 대통령 취임은 멕시코 변방 출신의 혼혈 인물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일부 지지자들은 이를 "정당한 주인에 의한 이 땅의 재정복"으로 여기며 게레로를 고대 아즈텍 군주 네사우알코요틀에 비유하기도 했다. 게레로는 취임 연설에서 자신의 오랜 독립 투쟁 경력을 언급하며, 진정한 우월성은 출신 배경이 아닌 재능과 덕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또한 의회 연설에서는 부유층부터 가난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며 법 앞의 평등과 능력주의라는 자유주의 가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게레로 정부는 곧 위기에 직면했다. 1829년, 스페인이 멕시코 만 연안의 탐피코를 통해 멕시코를 재정복하려 시도한 바라다스 원정이 발생했다. 스페인군은 황열병과 멕시코군의 저항으로 패퇴했지만, 이 과정에서 게레로 대통령은 비상 권한을 부여받았다. 위기가 끝난 후에도 그가 비상 권한을 즉시 반납하지 않자 반대파의 비판이 거세졌다.
게레로 정부는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는데, 이는 특히 앵글로아메리카인 정착민들이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언론 규제를 시도하고 새로운 연방 세금을 도입하여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세금 정책은 대부분의 주에서 무시당하며 실패했다.
결국, 부통령이었던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와 야당 세력은 게레로의 비상 권한 유지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게레로는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수도를 떠났지만, 부스타만테의 군사 행동이 성공하면서 1830년 2월 부스타만테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의회는 게레로가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하며 쿠데타를 사후 승인했다.
4. 경제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은 출범 당시 이미 파산 상태인 국고를 물려받았으며,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유 재산을 저당 잡아야 했다. 또한, 재무 담당자들의 부패 문제로 인해 의회는 정부의 수입 관련 부서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할 필요성을 느꼈다.
1824년 11월, 의회는 기존의 수입 관련 부서를 해체하고, 새로 설립된 연방 재무총국(Federal Treasury General)을 중심으로 더욱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군의 각 부서에 흩어져 있던 지역 감사 사무소들을 폐지하고 중앙 집중화된 시스템으로 대체했으며, 군 재정 데이터를 관리하는 별도 사무소도 설립되었다. 수입과 관련된 모든 사무소는 재무 계정을 철저히 기록하고 사본을 재무총국에 보고해야 했다.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부패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정부는 여전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830년, 루카스 알라만은 제조업자와 농업인에게 대출과 기계를 지원하기 위해 자본금 100만 달러 규모의 방코 데 아비오(Banco de Avío)를 설립했다. 이는 멕시코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은행 설립 사례였다. 이 은행은 주로 섬유 산업 분야에서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멕시코 신생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정책도 시행되었다. 1827년 관세법은 생면과 일반 실의 수입을 금지했으며, 루카스 알라만 장관은 금과 은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수출을 제한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멕시코 상선 육성을 위한 조치들도 마련되었다. 외국 선박은 멕시코 선박이 없을 경우에만 멕시코 항구 간 물품 운송이 허용되었다. 멕시코 시민은 외국에서 건조된 선박을 구매할 수 있었으나, 선박의 선장과 승무원 3분의 2는 반드시 멕시코 시민이어야 했고, 외국인은 멕시코 국기를 게양하는 선박을 소유할 수 없었다.
또한, 1825년에는 밀수를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을 따라 감시 초소를 설치하는 조치가 시행되었고, 1827년에는 도로 개선을 목표로 하는 공공 고속도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 계획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나, 실제 건설은 멕시코 중앙 공화국 시대에 이르러서야 진행되었다.
정부는 담배 재배 및 판매에 대한 국가 독점을 폐지하여 국내 시장을 위한 담배 생산을 장려했으며, 올리브와 포도 생산에 부과되던 세금도 폐지하여 재배를 활성화했다. 제지 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는 공식 업무에 멕시코산 종이만 사용하도록 규정했으며, 멕시코 산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기술 학교들도 설립되었다.
5. 교육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시기 동안 교육에 대한 관할권은 정부 부처 사이를 자주 오갔으며, 부처 자체도 개편이 잦았다. 교육은 한때 내외 관계부 소관이었다가 법무 및 교회 관련부로 넘어갔고, 나중에는 신설된 법무부 산하에 놓이기도 했다.
1822년, 랭커스터 협회가 멕시코 신문 ''엘 솔''의 편집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모니터 시스템 교육 방식을 도입했으며, 여러 멕시코 주에서도 유사한 조직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협회는 주로 민간 기부에 의존했기 때문에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점차 정부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1831년 루카스 알라만 장관은 의회 보고서에서 기부 부족으로 협회 지부 중 하나가 문을 닫아야 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823년, 당시 관계부 장관이었던 루카스 알라만은 국가 교육의 기초가 초등 교육이어야 하며 교육 없이는 자유도 없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교육 시스템을 통합하여 모든 과학 분야를 아우르는 국가 교육 시스템 계획을 발표했다.
1824년 멕시코 헌법은 각 지방 자치 단체가 초등 교육을 제공할 책임을 지도록 규정했다. 치와와, 오아하카, 사카테카스와 같은 주 정부들도 이 시기에 중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32년, 알라만 장관은 국가의 고등 교육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신학은 공의회 신학교에서, 법학과 고전 문학은 산 일데폰소 대학교에서, 물리학은 광산 대학교에서, 의학은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국립 외과대학 교수진을 통합하도록 지시했다. 멕시코 고고학은 새로 설립된 식물원에서 가르칠 예정이었다.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행정부 시기에는 기존 고등 교육 기관에 새로운 학부가 추가되었다. 예수 나사레노 병원 학교에는 8개 언어, 철학, 자연 신학 학부가 신설되었고, 광산 학교에는 물리 및 자연 과학,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자연사, 지질학, 지리학, 광물학 분야의 교육 과정이 추가되었다.
1833년 10월에는 고메스 파리아스 대통령이 직접 이끄는 공공 교육 총국이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교과서 계획 수립, 공공 도서관 감독, 극장을 통한 공공 교육 증진 등의 임무를 맡았다.
6. 과학
식물학자 후안 호세 마르티네스 데 렉사르자는 1824년부터 1825년까지 사제이자 박물학자인 파블로 데 라 야베와 협력하여 다양한 멕시코 식물 종을 분류하고 목록화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Novorum Vegetabilium descriptiones''로 출판되었다.
1825년 국립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827년, 멕시코 정부는 텍사스의 국경을 연구하고 조사하기 위해 과학 탐험대를 파견했다. 이 탐험대는 마누엘 데 미에르 이 테란이 이끌었으며, 과학자 중에는 라파엘 초벨과 스위스 박물학자 장루이 베를란디에가 있었다. 라파엘 초벨과 장루이 베를란디에는 이후 4년 동안 광물학, 식물학 및 동물학적 관찰을 포함하는 기록을 공동으로 작업했다. 2천 종 이상의 식물을 포함하는 표본 컬렉션도 수집되었다.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1829년에는 멕시코 고대 유물(골동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국립 박물관은 1831년에 자연사, 고고학 및 역사를 주제로 하는 도서관과 함께 재조직되었다.
1833년 4월,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대통령은 ''국립 지리 및 통계 연구소''를 설립했다.
7. 문학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이며 멕시코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제1공화국 시기에 활동하며 생애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그는 1824년에 Conversaciones entre el Payo y el Sacristán|콘베르사시오네스 엔트레 엘 파요 이 엘 사크리스탄es (농부와 성직자의 대화)를 출판했으며, 1826년에는 마지막 신문인 Correo Semanario de Mexico|코레오 세마나리오 데 메히코es (멕시코 주간 우편)를 창간했으나 이듬해인 1827년에 사망했다.
멕시코의 극작가 페르난도 칼데론 이 벨트란은 제1공화국 시대에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827년부터 1836년까지 과달라하라와 사카테카스의 극장에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했다.
자유주의 성향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로렌소 데 사바라의 문학적 업적은 주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멕시코 독립 전쟁 시기부터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의 첫 번째 행정부까지의 멕시코 역사를 상세히 다룬 책을 출판했다. 또한 망명 기간과 멕시코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미국을 여행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정치가, 역사학자, 정치 이론가였던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는 이 시기에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Catecismo político de la Federación Mexicana|카테시스모 폴리티코 데 라 페데라시온 메히카나es (멕시코 연방의 정치 교리문답)와 Disertación sobre la naturaleza y aplicación de las rentas y bienes eclesiásticos|디세르타시온 소브레 라 나투랄레사 이 아플리카시온 데 라스 렌타스 이 비에네스 에클레시아스티코스es (교회 수입과 부의 본질 및 사용에 관한 논문)를 통해 자유당과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대통령 첫 번째 행정부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후자의 저서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정치 세력과 연계된 언론 활동도 활발했다. 초기 자유당의 한 축이었던 요키노 프리메이슨 예식은 여러 신문을 발행했는데, 대표적으로 El Águila Mexicana|엘 아길라 메히카나es (멕시코의 독수리), El Amigo del Pueblo|엘 아미고 델 푸에블로es (국민의 친구), 그리고 로렌소 데 사발라의 입장을 대변했던 Correo de la Federación|코레오 데 라 페데라시온es (연방 우편) 등이 있었다. 반면, 초기 보수당의 기반이었던 에스코세스 프리메이슨 예식은 El Observador|엘 옵세르바도르es (관찰자)를 발행했으며, 이 신문에는 프란시스코 마누엘 산체스 데 타글레 등이 참여했다.
1825년에는 쿠바 출신의 시인 호세 마리아 에레디아 이 에레디아가 자유주의 성향의 이탈리아 삽화가 클라우디오 리나티와 함께 멕시코 시티에서 잡지 엘 이리스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요키노 자유주의 계열에 속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패션, 수채화, 음악 악보, 그리고 캐리커처 석판화 등을 실었다.
정부는 El Gladiador|엘 글라디아도르es (검투사)라는 공식 신문을 발행하여 정부 입장을 대변했다. 이에 맞서 야당 신문인 El Atleta|엘 아틀레타es (운동가)와 El Federalista|엘 페데랄리스타es (연방주의자) 등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특히 El Federalista|엘 페데랄리스타es는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행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려 하자 야당의 주요 매체로 부상했으며, 안드레스 킨타나 로오가 주요 기고자로 활동했다.
8. 북부 멕시코 원주민과의 갈등
멕시코 공화국은 아파치족에 대해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정책, 특히 ''에스타블리시미엔토''(establecimiento|에스타블레시미엔토es)라 불리는 시스템을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아파치족을 특정 지역에 정착시키려 했던 정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평화로운 아파치'(Apaches de paz|아파체스 데 파스es)에게 물품과 토지를 제공하여 유목 생활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다.[31] 그러나 독립 이후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 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외부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북부 원주민 집단을 제압할 군사력이 부족했다. 특히 북부 주에서 코만치족과 아파치족에 대한 방어 체계가 미흡했다.[32]
멕시코는 스페인의 인디언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지역 주민과 원주민(los indios|로스 인디오스es) 사이에 맺어진 평화 조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파치족은 특정 마을을 공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약탈을 계속했기 때문이다.[32] 이러한 비효율적인 정책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코만치 제국[33]과 맞물려, 초기 공화국은 제대로 된 기반 시설 없이 강력한 적과 마주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독립 후 1820년대의 경제 불안정으로 인해 ''에스타블리시미엔토'' 정책에 따른 배급이 여러 지역에서 대폭 삭감되면서, 1830년대에는 이 정책이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이는 약탈에 대한 적절한 방어 부족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32]
한편, 아파치족은 미국 상인들로부터 총기를 공급받았다.[32] 총기뿐만 아니라 신발과 같은 물품도 아파치족에게 판매되었는데, 멕시코군은 아파치족의 전통적인 이동 경로에서 모카신 발자국 대신 미국식 신발 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32] 멕시코인과 아파치족 사이의 폭력은 점점 더 심해지는 악순환을 낳았고, 이는 아파치족에 대한 유혈 진압으로 이어지며 공화국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32] 북부 멕시코 주들의 불만은 1837년에 극에 달했다. 당시 소노라 주지사는 텍사스 합병 문제와 미국 시민들의 불법적인 무기 밀반입 및 판매를 지적하며 "미국은 이미 우리 두 국가 간의 전쟁 상태를 선언한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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