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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마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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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마쓰 번은 1639년 호리 나오토키가 에치고국 야스다에 3만 석 영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644년 무라마쓰로 진야를 옮기면서 정식으로 설치되었으며, 산간 지역의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다. 1814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막부 말기에는 존왕양이파와 보수파의 대립으로 혼란을 겪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 편에 섰으나,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니가타현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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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마쓰번
일반 정보
이름무라마쓰 번
원어 이름村松藩
로마자 표기Muramatsu-han
구분번 (藩)
국가도쿠가와 쇼군 시대 일본
수도무라마쓰 성
현재 위치니가타현
역사
성립1639년
폐지1871년
시대에도 시대
같이 보기
관련 정보가마바라 군
시모다
나나타니
미쓰케

2. 번의 역사

무라마쓰번은 간에이 16년(1639년), 호리 나오요리의 차남 호리 나오토키가 에치고 국 야스다(安田일본어)에 3만 고쿠의 영지를 분할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간에이 21년(1644년) 5월, 나오토키의 아들 호리 나오요시 대에 거점(진야)을 무라마쓰(村松일본어)로 옮기면서 정식으로 무라마쓰번이 성립되었다. 번의 영지는 대부분 산간 지역이라 고쿠다카 증대에 한계가 있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2대 번주 나오요시는 영내 검지를 실시하며 번 통치 기반을 다졌으나, 그의 사후 재정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러 차례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특히 8대 번주 호리 나오쓰네 시대에는 가로 호리 겐바(堀玄蕃일본어) 주도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져 분카 11년(1814년) 대규모 농민 잇키가 발생하기도 했다.

9대 번주 호리 나오히데는 가에이 3년(1850년) 성주격 지위를 얻고, 가에이 6년(1853년)부터 산업 진흥을 중심으로 한 번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만엔 원년(1860년) 후계자와 본인의 연이은 사망으로 개혁은 좌절되었다.

막부 말 시기에는 존왕론이 대두하며 번 내부는 존왕양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게이오 2년(1866년)에는 무라마쓰 칠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11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으나, 신정부 지지파인 정의당(正義党일본어)의 곤도 야스고로(近藤安五郎일본어) 등은 호리 나오히로를 새 번주로 옹립하고 신정부에 항복하여 영지를 보존받았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무라마쓰번은 폐지되어 무라마쓰현이 되었고, 같은 해 니가타현에 흡수되었다.

2. 1. 초기 역사 (1639년 ~ 1676년)

간에이 16년(1639년), 호리 나오요리의 차남 호리 나오토키가 에치고 국의 安田|야스다일본어 지역에 3만 고쿠의 영지를 분할받아 독립하면서 무라마쓰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오토키는 야스다에 거처(진야)를 마련했다. 그는 시나노 국 이이야마 번 번주 호리 나오요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빗추-마쓰야마 번 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딸과 혼인했으나, 1643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나오토키 사후, 그의 아들 호리 나오요시 (1637년 ~ 1674년)가 뒤를 이었다. 나오요시는 간에이 21년(1644년) 5월, 영지 교체를 통해 거점을 야스다에서 村松|무라마쓰일본어로 옮겼고, 이로써 무라마쓰번이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나오요시는 무라카미 번 번주 호리 나오츠구의 딸과 혼인했으며, 번의 통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영지 내 검지(토지 조사)를 실시하는 등 번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라마쓰번의 영지는 대부분 산간 지역이어서 농지 개간을 통한 고쿠다카 증가는 쉽지 않았다. 조쿄 4년(1687년) 당시 실질적인 고쿠다카는 약 4만 석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호리 나오요시는 1674년에 사망했다.

2. 2. 재정난과 개혁 시도 (1676년 ~ 1802년)

무라마쓰번은 영지의 대부분이 산간 지역이었기 때문에 농지 개간을 해도 고쿠다카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조쿄 4년(1687년) 당시 실질 고쿠다카는 약 4만 고쿠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번의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2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는 영내 검지를 실시하여 번 통치를 확립하려 했으나, 1676년 그의 사망 이후 번의 재정 악화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번 통치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번은 만성적인 부채에 시달렸다.

이 시기(1676년 ~ 1802년) 번을 통치한 주요 번주들은 다음과 같다.

  • 3대: 호리 나오토시 (재임 1676년 ~ 1711년)
  • 4대: 호리 나오유키 (재임 1711년 ~ 1736년)
  • 5대: 호리 나오타카 (재임 1736년 ~ 1785년)
  • 6대: 호리 나오노리 (재임 1785년 ~ 1795년)
  • 7대: 호리 나오카타 (재임 1795년 ~ 1802년)


이들 번주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번의 재정 상황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했으며, 만성적인 부채 문제가 지속되었다. 구체적인 개혁 시도와 그 내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나, 전반적으로 재정난 극복에는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2. 3. 농민 봉기와 번정 개혁 (1802년 ~ 1860년)

8대 번주 호리 나오쓰네( 堀直庸일본어, 1791년~1819년) 시대에 이르러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나오쓰네는 180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으나, 재정난 해결을 위해 가로(家老)인 호리 겐바(堀玄蕃일본어)를 중심으로 강압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호리 겐바는 재정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고, 이는 번 전역에 걸쳐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기간 누적된 번 관리들의 부패와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마침내 분카 11년(1814년), 무라마쓰번 전역에서 대규모 잇키( 一揆일본어,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가혹한 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1819년, 나오쓰네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호리 나오히데( 堀直央일본어, 1797년~1860년)가 9대 번주로 즉위하면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나오히데는 가에이 3년(1850년) 2월,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성주격(城主格) 지위를 인정받아 기존의 진야으로 개축하는 등 번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가에이 6년(1853년)부터 번 통치의 주도권을 잡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나오히데의 개혁은 번의 재정 건전화를 목표로 농업 개혁과 재정 긴축을 포함했으며, 특히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 그는 '무라마쓰 얼룩무늬'( 村松絞り일본어)로 알려진 직물 생산을 장려하고, 와시( 和紙일본어, 일본 전통 종이), 붓, 녹차, 그리고 '무라마쓰야키'( 村松焼일본어)라는 도자기 등 지역 특산품 개발을 지원하여 번의 수입 증대를 꾀했다. 이러한 나오히데의 개혁 노력은 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오히데의 개혁은 만엔 원년(1860년)에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나오히데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된 아들 호리 나오야스( 堀直休일본어)가 7월 12일에 급사하고, 개혁을 이끌던 나오히데 본인마저 같은 해 9월 6일에 사망하면서 개혁은 추진 동력을 잃고 결국 좌절되었다.

2. 4. 막부 말기의 혼란과 보신 전쟁 (1860년 ~ 1868년)

만엔 원년(1860년)에 9대 번주 호리 나오히데의 개혁을 이을 예정이던 차기 번주 호리 나오야스가 7월 12일에, 나오히데 본인마저 9월 6일에 사망하면서 번의 개혁 동력은 상실되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막부 말 시기 무라마쓰번에서는 존왕론이 부상하며 존왕양이와 군제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와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대립은 게이오 2년(1866년) 11월, 보수파가 존왕양이파 무사 7명을 처형한 무라마쓰 칠사 사건(村松七士事件)으로 이어지며 번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번의 분열은 더욱 명확해졌다. 11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좌막파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나가오카 번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나오요시 등은 요네자와번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신정부 지지를 주장하던 정의당(正義党)의 近藤安五郎|곤도 야스고로일본어 등은 번주가 도주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9대 번주 나오히데의 막내아들인 호리 나오히로를 새로운 번주로 옹립하고 즉시 신정부에 항복했다. 정의당의 이러한 결정 덕분에 무라마쓰번은 영지 몰수를 피하고 존속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호리 나오요시는 은퇴를 강요당했다.

2. 5. 폐번치현과 그 이후 (1868년 ~ 1871년)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무라마쓰번 내부에서는 신정부 편에 서야 한다는 정의당(正義党|쇼기토일본어)의 곤도 야스고로(近藤安五郎일본어) 일파와 11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 堀直賀|호리 나오가일본어 )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좌막파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다. 결국 번주 나오요시 등 보수파는 번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시키고 요네자와번으로 도주했다. 이에 곤도 야스고로는 9대 번주 호리 나오히데의 막내아들인 호리 나오히로(堀直弘일본어)를 새로운 번주로 옹립하고 신정부에 즉시 항복했다. 신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무라마쓰번의 영지 지배를 인정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 정책에 따라 무라마쓰번은 폐지되고 무라마쓰현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무라마쓰현은 새로 설치된 니가타현에 흡수 통합되었다.

폐번치현 이후, 마지막 번주 호리 나오히로는 조상의 옛 성씨인 '오쿠다'(奥田일본어)로 성을 바꾸었다. 1869년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무라마쓰의 지번사로 임명되었고, 폐번치현이 이루어진 1871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이후 화족에 편입되어 자작( 子爵|시샤쿠일본어 )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19년에 사망했다. 한편,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던 전 번주 호리 나오요시(나오가)도 오쿠다로 성을 바꾸었다. 나오히로의 아들 오쿠다 나오노부(奥田直暢일본어)는 무라마쓰 오쿠다가의 당주로서, 나오가의 아들 오쿠다 나오쓰구(奥田直韶일본어)는 시야번 오쿠다가에 양자로 들어가 당주로서 각각 자작 작위를 받았다.

3. 역대 번주

# 호리 나오토키(堀直時일본어) 재위 1639년 ~ 1643년

# 호리 나오요시(堀直吉일본어) 재위 1643년 ~ 1676년

# 호리 나오토시(堀直利일본어) 재위 1676년 ~ 1711년

# 호리 나오유키(堀直為일본어) 재위 1711년 ~ 1736년

# 호리 나오타카(堀直堯일본어) 재위 1736년 ~ 1785년

# 호리 나오노리(堀直教일본어) 재위 1785년 ~ 1795년

# 호리 나오카타(堀直方일본어) 재위 1795년 ~ 1802년

# 호리 나오야스(堀直庸일본어) 재위 1802년 ~ 1819년

# 호리 나오히데(堀直央일본어) 재위 1819년 ~ 1857년

# 호리 나오야스(堀直休일본어) 재위 1857년 ~ 1860년

# 호리 나오요시(堀直賀일본어) 재위 1860년 ~ 1868년

# 호리 나오히로(堀直弘일본어) 재위 1868년 ~ 1871년

3. 1. 호리 가문 (도자마 다이묘, 3만 석)

호리 나오요리 사후, 그의 차남 호리 나오토키에게 무라카미번 영지 중 3만 고쿠가 분할되어 1639년 무라마쓰번이 성립되었다. 초대 번주 나오토키는 에치고국 야스다에 거처를 두었으나, 2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 대에 진야를 무라마쓰로 이전하였다. 번의 영지는 대부분 산악 지형이어서 새로운 논 개발에 어려움이 있었고, 실제 고쿠다카는 표면상의 3만 석보다 약간 많은 4만 고쿠 정도였다. 나오요시는 측량과 토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완료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번은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었다.

8대 번주 호리 나오야스 (堀直庸일본어) 시대에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1814년에는 과도한 부담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9대 번주 호리 나오히데 시대에는 직물, 와시(일본 전통 종이), 녹차, 그리고 '무라마쓰야키'(村松焼일본어)라는 도자기를 개발하여 번의 재정을 확충하는 등 비교적 성공적인 개혁을 통해 번의 재정을 확충했다. 또한 1850년에는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진야에서 을 보유한 번(성주격 다이묘)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진야를 확장하였다.

막말에는 번 내부에서 사무라이들이 11대 번주 호리 나오요시가 이끄는 보수파와 존왕양이파로 나뉘어 심하게 대립했다. 보신 전쟁 발발 후, 나오요시는 번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시켰으나, 몇 달 만에 입장을 바꿔 메이지 정부 측에 가담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무라마쓰번은 폐지되어 잠시 무라마쓰현이 되었다가 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마지막 번주 호리 나오히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옛 무라마쓰 성터는 현재 공원으로 남아있다.

'''역대 번주'''
#이름 (원문)재임 기간관위고쿠다카
호리 가문 문장
호리 가문 (도자마 다이묘) 1639년 ~ 1871년
1대호리 나오토키 (堀直時일본어)1639년 ~ 1643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2대호리 나오요시 (堀直吉일본어)1643년 ~ 1676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3대호리 나오토시 (堀直利일본어)1676년 ~ 1711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4대호리 나오유키 (堀直為일본어)1711년 ~ 1736년종5위하 우쿄노스케 (左京亮)3만 고쿠
5대호리 나오타카 (堀直堯일본어)1736년 ~ 1785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6대호리 나오노리 (堀直教일본어)1785년 ~ 1795년종5위하 우쿄노스케 (左京亮)3만 고쿠
7대호리 나오카타 (堀直方일본어)1795년 ~ 1802년종5위하 우쿄노스케 (左京亮)3만 고쿠
8대호리 나오야스 (堀直庸일본어)1802년 ~ 1819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9대호리 나오히데 (堀直央일본어)1819년 ~ 1857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10대호리 나오야스 (堀直休일본어)1857년 ~ 1860년종5위하 단고노카미 (丹後守)3만 고쿠
11대호리 나오요시 (堀直賀일본어)1860년 ~ 1868년종5위하 우쿄노스케 (左京亮)3만 고쿠
12대호리 나오히로 (堀直弘일본어)1868년 ~ 1871년정5위하3만 고쿠


  • '''호리 나오토키''' (堀直時일본어, 1616년 ~ 1643년): 초대 번주. 시나노국 이이야마번주 호리 나오요리의 차남. 아버지 사후 에치고국 내 3만 고쿠 영지를 받아 분가했다. 빗추 마쓰야마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딸과 혼인했으나 후사 없이 28세에 사망했다.
  • '''호리 나오요시''' (堀直吉일본어, 1637년 ~ 1674년): 2대 번주. 나오토키의 차남. 아버지 사후 번주가 되었다. 1644년 거점을 야스다에서 무라마쓰로 이전했다. 무라카미번주 호리 나오쓰구의 딸과 혼인했다. 측량과 토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완성 전에 사망했다.
  • '''호리 나오토시''' (堀直利일본어, 1658년 ~ 1716년): 3대 번주. 나오요시의 차남. 아버지 사후 번주가 되었다. 1705년 소샤반, 지샤부교를 역임했다. 가노번주 도다 미쓰나가의 딸과 혼인했다. 1711년 은퇴하고 1716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유키''' (堀直為일본어, 1698년 ~ 1743년): 4대 번주. 나오토시의 차남. 아버지가 은퇴하자 번주 자리를 이었다. 오사카 가반을 역임했다. 소노베번주 고이데 후사사다의 딸과 혼인했다. 1736년 은퇴하고 1743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타카''' (堀直堯일본어, 1717년 ~ 1785년): 5대 번주. 나오유키의 장남. 아버지가 은퇴하자 번주 자리를 이었다. 모리야마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다의 딸과 혼인했다. 1785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으며, 그의 아들 다섯보다 오래 살았다.
  • '''호리 나오노리''' (堀直教일본어, 1761년 ~ 1812년): 6대 번주. 나오타카의 여섯째 아들. 아버지 사후 번주가 되었다. 마쓰야마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카의 딸과 혼인했다. 1795년 조카(형 나오야스의 아들) 호리 나오카타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1812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카타''' (堀直方일본어, 1767년 ~ 1805년): 7대 번주. 나오타카의 맏아들 나오야스의 장남. 숙부 나오노리의 양자가 되어 1795년 번주 자리를 이었다. 히지번주 기노시타 도시타네의 딸과 혼인했다. 1802년 은퇴했고 3년 후인 1805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야스''' (堀直庸일본어, 1791년 ~ 1819년): 8대 번주. 나오카타의 차남. 아버지가 은퇴하자 1802년 번주가 되었다. 우스키번주 이나바 히로미치의 딸과 혼인했다. 재임 중인 1814년, 번의 오랜 가로(家老)와 다른 번 관리들의 부패 및 과도한 조세에 반대하여 광범위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819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히데''' (堀直央일본어, 1797년 ~ 1861년): 9대 번주. 나오카타의 셋째 아들. 형 나오야스(8대) 사후 1819년 번주가 되었다. 이름은 '나오히사'(直ंख्य)라고도 읽는다. 히로사키번쓰가루 야스치카의 딸과 혼인 후, 쓰치우라번주 쓰치야 히데나오의 딸과 재혼했다. 1843년 우에노 대불 재건을 후원했다. 1850년 성주격 다이묘로 승격되어 무라마쓰 진야를 확장했다. 1853년부터 번의 전매 제도 강화, 농업 개혁, 재정 긴축 등을 통해 번 재정 재건에 힘썼다. 안세이 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우에노 대불 재건을 다시 후원했다. 1857년 은퇴했고, 1861년 사망했다.
  • '''호리 나오야스''' (堀直休일본어, 1836년 ~ 1860년): 10대 번주. 나오히데의 서자. 아버지가 은퇴하자 1857년 번주가 되었다. 오즈번주 가토 야스모토의 딸과 혼인했다.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으나, 1860년 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 '''호리 나오요시''' (堀直賀일본어, 1843년 ~ 1903년): 11대 번주. 6대 번주 나오노리의 손자. 선대 번주 나오야스(10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1860년 번주가 되었다. 막말 시기, 번은 존왕양이 운동 지지자와 막부 지지자 사이에서 격렬하게 분열되었다. 보신 전쟁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나가오카번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호쿠에쓰 전쟁 이후 많은 병력이 요네자와번으로 탈주했다. 번은 1868년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고, 나오요시는 강제로 은퇴당했다. 1877년 성을 '오쿠다'(奥田)로 바꾸었다. 1903년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야나카 묘지에 있다.
  • '''호리 나오히로''' (堀直弘일본어, 1861년 ~ 1919년): 12대(마지막) 번주. 10대 번주 나오야스의 셋째 아들. 아버지 나오요시(11대)의 강제 은퇴로 1868년 번주가 되었다. 구게 사와 노부요시의 딸과 혼인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메이지 정부 하의 무라마쓰 지번사로 임명되어 1871년 폐번치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877년 성을 '오쿠다'(奥田)로 변경했다. 이후 화족의 작위인 자작을 받았다. 1919년 사망했다.

4. 영지

무라마쓰번은 한 체제 하의 다른 번들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에 기반한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여러 개의 분리된 영토로 구성되었다.[2][3]

막부 말기 무라마쓰번 영지
구니마을 수비고
에치고 국니가타현 간바라군104개 마을
에치고 국가모하라군140개 마을이 중 19개 마을은 제1차 니가타현, 78개 마을은 신바다번에 편입됨



메이지 유신 이후, 가모하라군 내에서 아래와 같이 총 55개 마을이 추가로 편입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추가된 영지 (가모하라군)
구 영지 구분마을 수
기쿠마번 영지29개 마을
아이즈번 영지6개 마을
구 신바다번 영지1개 마을
하타모토령1개 마을
쿠와나번 예소 관할 막부령18개 마을
합계55개 마을



영지 내에는 하나의 마을을 여러 영주가 분할하여 지배하는 상급 지역도 존재했기 때문에, 단순 마을 수의 합계는 실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5. 현대의 무라마쓰 번

과거 무라마쓰 성이 있던 자리는 현재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8년 5월 5일에는 마쓰시로 축제 순행 그림 두루마리 행렬 실행 위원회가 주최하여, 무라마쓰 번의 자료를 바탕으로 다이묘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렸다.[4]

참조

[1] 웹사이트 Echigo Province http://www.japanese-[...] 2013-04-08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4] 웹사이트 松城祭巡行絵巻行列 170年ぶり五泉・村松地区で http://mainichi.jp/a[...] 毎日新聞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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