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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에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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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쿠에쓰 전쟁은 1868년 메이지 신정부군이 나가오카 번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벌인 전투이다.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신정부군은 호쿠리쿠도를 따라 진군하여 에치고 지역을 평정하려 했고, 나가오카 번은 서양식 무기를 갖추고 신정부군에 저항했다. 오지야 담판 결렬 후, 나가오카 번은 신정부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나가오카 성을 탈환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여 에치고 지역을 잃었다. 이 전쟁은 혼슈 일본해 연안에서의 마지막 저항을 종식시키고, 보신 전쟁의 주요 전장을 아이즈 전투로 옮겨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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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에쓰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보신 전쟁
시기1868년 6월 21일 (천보력 게이오 4년 5월 2일)
장소에치고국
결과신정부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신정부군 (호쿠리쿠도 선봉 총독부)
교전국 1 소속조슈번
사쓰마번
교전국 2오우에쓰 열번 동맹 (구 막부군)
교전국 2 소속나가오카번
아이즈번
요네자와번
구와나번
지휘관 및 지도자
신정부군 지휘관메이지 천황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에하라 잇세이
구로다 기요타카
막부군 지휘관도쿠가와 요시노부
마키노 다다쿠니
가와이 쓰구노스케
병력 규모
신정부군30,000명
막부군1,985명
사상자 규모
신정부군사망자 1,040명
막부군사망자 1,180명
관련 이미지
우타가와 구니테루 2세가 그린 호쿠에쓰 전쟁의 우키요에 판화
2대 우타가와 구니테루가 그린 우키요에 판화. 그림 제목은 "에치고 국 우에스기 가게카쓰 가독 다툼 전투"이지만, 당시 정부를 배려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가게토라의 가독 다툼 (오타테의 난)을 묘사한 것임. 니가타현립도서관 소장

2. 배경

1868년 사쓰마번, 조슈번 등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신정부 군대는 교토 근교에서 벌어진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쪽 정벌군을 조직하여 도카이도, 도산도, 호쿠리쿠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이 중 일본해 연안을 따라 호쿠리쿠도로 진군한 신정부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구로다 기요타카가 지휘를 맡았다. 신정부군은 옛 에도 막부 세력을 평정하고 아이즈번을 토벌하기 위해, 에치고 국의 나가오카 번과 가까운 오지야(현재 니가타현 오지야시)를 점령하고 주둔하였다.

한편, 나가오카 번은 대정봉환 이후에도 여전히 도쿠가와 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번주 마키노 다다쿠니와 번의 실권자인 가로 겸 군사총독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비 증강에 힘썼다. 이들은 프로이센 상인인 에드워드와 헨리 형제를 군사 고문으로 초빙하고, 당시 일본에 희귀했던 개틀링 포 2문과 프랑스제 신형 소총 2,000정 등 최신 서양식 무기를 독자적으로 구입하였다.[10][2]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신정부군에 대한 공순(恭順, 순순히 따름)을 주장하는 세력을 누르고, 번의 여론을 무장 중립으로 통일시키는 데 주력했다.[11] 그는 신정부군과 옛 막부군 사이의 조정을 제안하며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선의 일환으로, 아이즈번에서 사가와 간베를 사자로 보내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요청했을 때도 이를 거절하였다. 나가오카 번은 신정부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독자적인 입지를 유지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3. 오지야 담판

1868년 음력 5월 2일(양력 6월 21일), 나가오카 번의 군사총독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신정부군의 군감 이와무라 다카토시 (도사 번 출신)와 오지야의 지켄사(慈見寺)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오와리 번의 중개로 이루어졌다. 가와이는 신정부군에게 나가오카 번에 대한 침공 중지와 아이즈 번의 사면을 요구하며 평화적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신정부 측 대표인 이와무라는 나가오카 번의 독자적인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가와이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의 탄원을 일축했다. 결국 양측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담판은 결렬되었다.

협상 결렬 후 이틀 뒤인 5월 4일(양력 6월 23일), 결국 나가오카 번은 오에쓰 열번 동맹에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시바타 번 등 다른 에치고 국의 다섯 번들도 뒤이어 동맹에 가담했다. 이로써 나가오카 번과 신정부군 사이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오지야 담판이 결렬된 후, 나가오카 번은 셋타야(摂田屋, 현 나가오카시)의 고후쿠 사(光福寺)에 본진을 두고 먼저 신정부군이 점령하고 있던 에노키 고개(榎峠, 나가오카시-오지야시 경계)를 공격하여 탈환했다. 이에 신정부군은 에노키 고개를 되찾기 위해 아사히 산(현 오지야시) 확보를 시도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키야마 나오하치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개시했으나, 아사히 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던 다쓰미 나오후미가 이끄는 구와나번 및 나가오카 번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도키야마는 전사했다. 신정부군은 나가오카 번의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피해를 입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신정부군은 음력 5월 19일, 요이타번의 어용 상인에게서 배를 지원받아 시나노강을 건너 나가오카 성을 기습 공격했다. 당시 나가오카 번을 비롯한 동맹군의 주력 부대는 에노키 고개 등 외곽 방어에 집중하고 있어 성 안은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가오카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고, 나가오카 번 병력은 도치오(栃尾)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신정부군 역시 추격할 여력이 부족했기에, 나가오카 번은 가모(加茂)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이후 이마마치(今町, 현 미쓰케시)를 탈환하여 신정부군과 다시 대치했다.

핫쵸오키 등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음력 7월 24일(9월 10일) 동맹군은 나가오카 성을 극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한번 함락되었던 성을 다시 빼앗은 것은 군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신정부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나가오카 번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번의 군사 지휘관이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다리에 총상을 입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불과 닷새 후인 음력 7월 29일(9월 15일), 전열을 정비한 신정부군은 총공세를 재개하여 나가오카 성을 다시 점령했다. 같은 날, 아이즈 번과 요네자와번 병력이 지키고 있던 니가타 역시 신정부군 상륙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4] 니가타 함락은 동맹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이로써 에치고 국 전역은 신정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맹군의 잔존 부대는 도치오, 야소리 고개(八十里越) 등을 거쳐 아이즈 번 영지로 퇴각했다.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아이즈로 피신하던 중, 다리 부상이 악화되어 파상풍이 발병했고, 결국 음력 8월 16일(10월 1일) 아이즈 시오자와(塩沢, 현 후쿠시마현 다다미마치)에서 사망했다. 이후 보신 전쟁의 주 전장은 도호쿠 지방으로 옮겨가 아이즈 전쟁, 아키타 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호쿠에쓰 전쟁은 보신 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당시 양측 군대의 부상자를 치료했던 영국인 의사 윌리엄 윌리스는 본국 공사관에 보낸 보고서에서 나가오카에서 신정부군 병원이 습격당하고, 아이즈 병사들이 퇴각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소문과 함께 신정부군 역시 약탈 행위를 했다는 소문을 기록하며, 전투가 와카마쓰(아이즈 번의 중심지)에 가까워질수록 참상이 심화되었다고 보고했다.[9]

4. 1. 나가오카 번의 저항과 서양식 무기

나가오카 번은 대정봉환 이후에도 도쿠가와 가를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번주 마키노 다다쿠니와 특히 번의 가로(家老)이자 군사총독이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번의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가와이는 프로이센 상인인 스넬 형제(에드워드 슈넬과 헨리 슈넬)를 군사 고문으로 초빙하고, 이들을 통해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최신 서양식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10][2]

주요 도입 무기로는 개틀링 포 2문(당시 일본 전체에 단 1정만 있었다고도 알려짐)과 프랑스제 신형 소총 2,000정 등이 있었으며, 이 외에도 암스트롱포, 엔필드 소총, 스나이더 소총, 샤프스 소총 등 다양한 신식 화기를 구입했다.[10][2] 이러한 무기들은 해로를 통해 나가오카로 운반되었으며[2], 이를 통해 나가오카 번은 에치고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처음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번 내의 공순론(신정부에 복종하자는 주장)을 누르고 '무장 중립' 노선을 추구했다.[11] 아이즈번이 사자 사가와 간베를 보내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요청했을 때도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1868년 사쓰마번조슈번 중심의 신정부군이 도바 후시미 전투 승리 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에치고의 오지야까지 점령하자[2], 나가오카 번은 결국 5월 4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입하여 신정부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나가오카 번이 도입한 서양식 무기, 특히 개틀링 포는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신정부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4. 2.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역할

1868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신정부군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쪽으로 진군했다. 일본해 연안을 따라 진격한 호쿠리쿠 방면 신정부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구로다 기요타카가 지휘했으며, 옛 에도 막부 세력을 평정하고 아이즈 번을 정벌하기 위해 에치고 국의 오지야(현 니가타현 오지야시)에 주둔했다.

당시 에치고 국 나가오카 번의 다이묘 마키노 다다쿠니는 대정봉환 이후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했으며, 에도 성 함락 후에도 신정부에 복종하지 않았다. 번의 가로 상석 겸 군사총독이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의 주도 아래, 나가오카 번은 스넬 형제와 같은 외국 상인들로부터 개틀링 건 2정, 프랑스제 소총 2,000정, 암스트롱포, 엔필드 소총, 스나이더 소총, 샤프스 소총 등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2] 또한 프로이센 출신 에드워드 슈넬과 헨리 슈넬 형제를 군사 고문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아이즈 번은 사가와 간베에를 사자로 보내 나가오카 번에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요청했지만,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나가오카 번 내부에서는 공순(恭順, 신정부에 복종)과 항전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으나, 가와이는 공순파를 누르고 신정부군과의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음력 5월 2일(양력 6월 21일),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오지야의 지켄사에서 신정부군 군감 이와무라 다카토시와 회담했다. 가와이는 나가오카 침공 중지와 아이즈 번의 사면을 탄원했으나, 이와무라는 이를 일축하며 담판은 결렬되었다.

결국 나가오카 번은 음력 5월 4일(양력 6월 23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신정부군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이후 시바타 번을 포함한 에치고의 다른 5개 번도 동맹에 합류했다. 신정부군은 동맹의 주요 거점인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을 공격하기 위한 보급로 확보를 위해 니가타 항구 점령을 목표로 삼았으며, 나가오카 번의 동맹 가입으로 인해 양측의 무력 충돌, 즉 호쿠에쓰 전쟁이 시작되었다.

4. 3. 신정부군의 전략과 승리 요인

오우에쓰 열번 동맹 측은 니가타 항에서 무기와 탄약을 조달했기 때문에, 이곳을 제압하는 것은 신정부군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과제였다. 니가타를 점령하면 쇼나이(庄内) 방면과 아가노 강을 통한 아이즈 방면으로의 진격로를 확보하고, 동시에 동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니가타 항은 아이즈 번, 요네자와번 병사 등 구막부 측 군대가 방어를 맡고 있었다.

오지야 담판 결렬 후, 나가오카 번은 슈넬 형제와 같은 외국인 군사 고문을 통해 개틀링 건 2정, 프랑스제 소총 2,000정 등 신무기를 도입하며 강력한 저항을 준비했다. 실제로 나가오카 번은 아사히 산 전투 등 초기 교전에서 신정부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신정부군은 과감한 전략을 구사했다. 음력 5월 19일, 요이타번의 어용 상인에게서 배를 지원받아 시나노강을 건너, 주력 부대가 나가오카 성을 비운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불과 반나절 만에 나가오카 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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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맹군은 음력 7월 24일(9월 10일) 핫쵸오키 해전 끝에 나가오카 성을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군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나가오카 번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지휘관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중상을 입었다.

신정부군은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음력 5월 24일 테라도마키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이는 이후 상륙 작전의 발판이 되었다. 야마다 아키요시가 지휘하는 신정부 함대는 군함과 수송선을 동원하여 음력 7월 25일(9월 11일), 신발다번 영지인 다이후하마(현 니가타시 기타구)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때마침 신발다번이 신정부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하면서 상륙은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호쿠에쓰 전쟁에서 사쓰마번 전사자의 무덤(니가타현 조에쓰시 킨타니야마)


구로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상륙 부대는 요네자와, 아이즈 등 동맹군을 격파하고 음력 7월 29일(9월 15일) 마침내 전략적 요충지인 니가타를 점령했다.[4] 같은 날, 신정부군은 육상에서도 총공세를 펼쳐 나가오카 성을 다시 함락시켰다. 니가타와 나가오카 성의 함락은 호쿠에쓰 전선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미카이치번[5], 미네야마번[6], 구로카와번[7] 등이 잇따라 신정부에 항복하면서 동맹 전선은 급격히 붕괴되었다. 동맹군의 잔존 부대는 아이즈 방면으로 퇴각했으며, 부상당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퇴각 도중 음력 8월 16일(10월 1일)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음력 8월 중순경 에치고 전 지역이 신정부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호쿠에쓰 전쟁은 신정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신정부군의 승리 요인으로는 니가타 항 점령을 통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 및 보급로 차단, 해군력을 활용한 제해권 장악과 성공적인 상륙 작전, 그리고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동원한 동시 다발적인 공세 등을 꼽을 수 있다.

5. 결과 및 영향

호쿠에쓰 전투는 혼슈 일본해 연안 지역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저항의 중심지였던 아이즈 번은 고립되었으며, 보신 전쟁의 주요 전장은 아이즈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아이즈 전투가 벌어졌다.

신정부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니가타항을 점령함으로써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무기 및 병력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으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나가오카 번은 이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번의 군사 지휘관이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이즈로 후퇴하던 중 음력 8월 16일(10월 1일)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전쟁 과정에서 신발다번, 미카이치번, 미네야마번, 쿠로카와번 등 에치고 국의 여러 번들이 신정부에 항복하거나 순응하였다. 음력 8월 중순에는 에치고 전역이 신정부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호쿠에쓰 전쟁은 보신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편, 전쟁 중 양측 모두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영국인 의사 윌리엄 윌리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나가오카에서 신정부군이 설치한 병원이 아이즈 번 병력에게 공격받아 부상병과 의사들이 살해당했으며, 후퇴하는 아이즈 병사들이 여성 강간, 가택 침입, 절도, 저항자 살해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아이즈 지역에서는 신정부군 역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증언도 기록되어 있어, 전투가 와카마쓰에 가까워질수록 양측의 잔혹 행위가 심화되었음을 시사한다.[9]

참조

[1] 웹사이트 新潟県立図書館「越後佐渡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越後国上杉景勝家督争合戦』 http://www.pref-lib.[...]
[2] 문서 육군성 대일기 기록
[3] 웹사이트 新潟県小千谷市役所 報道資料3 平成24年2月16日 http://www.city.ojiy[...] 2012-02-16
[4] 서적 戊辰役戦史 시사통신사 1988
[5] 웹사이트 복고기 제13책, 복고외기 에치고구 전기 제4 https://dl.ndl.go.jp[...] 내외서적 1930-06-27
[6] 웹사이트 복고기 제13책, 복고외기 에치고구 전기 제6 https://dl.ndl.go.jp[...] 내외서적 1930-06-27
[7] 웹사이트 복고기 제14책, 복고외기 에치고구 전기 제7 https://dl.ndl.go.jp[...] 내외서적 1930-08-10
[8] 웹사이트 복고기 제14책, 복고외기 에치고구 전기 제7 https://dl.ndl.go.jp[...] 내외서적 1930-08-10
[9] 서적 英国公使館員の維新戦争見聞記 교창서방 1974-08-31
[10] 문서 나가오카 번의 화기 구입 및 미니에 총
[11] 문서 야스다 료조(柳蔵)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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