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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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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야마번은 1682년 혼다 도시나가에 의해 데와국 무라야마군에 1만 석 영지로 설립된 일본의 번이다. 도시나가는 요코스카 번의 번주 시절 가혹한 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무라야마 번에서는 백성을 긍휼히 여겼다고 전해진다. 1692년 도시나가 사망 후 양자 혼다 스케요시가 뒤를 이었으나, 1699년 이토이가와번으로 전봉되면서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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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번
기본 정보
번 이름무라야마번 (村山藩)
번의 소재지야마가타현 무라야마시
통칭/별칭신조번 (新庄藩)
폐번치현1871년
역사
이전 번도자와가 (戸沢家)
신조 입번도자와 마사자네 (戸沢正実)가 데와국 무라야마에 2만 석으로 입번
번 성립1622년
번청 소재지 변동무쓰국 시모헤이군 다노하타촌으로 이전 (1624년)
번 이름 변경다노하타번으로 개칭 (1624년)
번 위치 변경데와국 모가미군 신조로 이전 (1682년)
번 이름 변경신조번으로 개칭 (1682년)
역대 번주
도자와가초대: 도자와 마사자네 (戸沢正実) 1622년 ~ 1648년
2대: 도자와 마사모리 (戸沢正盛) 1648년 ~ 1664년
3대: 도자와 마사노부 (戸沢正信) 1664년 ~ 1681년

2. 번의 역사

덴나 2년(1682년), 요코스카 번의 혼다 도시나가는 아카시 번주 혼다 마사토시의 영지 몰수에 연좌되어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마사토시가 오쿠보 번주로 복귀하면서 도시나가도 무라야마 1만 석 영지를 받아 번주가 되었다.

겐로쿠 5년(1692년), 도시나가는 사망하고 양자인 혼다 스케요시가 뒤를 이었다. 겐로쿠 12년(1699년), 스케요시가 이토이가와 번으로 전봉되면서 무라야마 번은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짧은 존속 기간으로 인해 번청 소재지나 번 통치에 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2. 1. 성립 배경

덴나 2년(1682년), 요코스카 번 번주 혼다 도시나가는 아카시 번 번주 혼다 마사토시의 영지 몰수에 연좌되어 함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마사토시가 오쿠보 번주로 복귀함에 따라, 도시나가도 무라야마 1만 석 영지를 받아 번주가 되었다.

도시나가는 겐로쿠 5년(1692년)에 사망하였고, 양자 혼다 스케요시가 그 뒤를 이었다. 겐로쿠 12년(1699년), 스케요시가 이토이가와 번으로 전봉되면서 무라야마 번은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짧은 기간 존속했기 때문에 번청 소재지나 번 통치에 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2. 1. 1. 요코스카 번 시대

덴와 2년(1682년) 2월 22일, 도토미국요코스카번 5만 석의 번주였던 혼다 토시나가는 13개 조의 죄목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간세이 중수 제씨보』는 요코스카 번의 개역에 대해, 영내의 실정과 선년의 순견사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을 이유로 들고 있다.

순견사는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쇼군 취임 후 각지에 파견하여 다이묘의 통치와 군비를 조사하게 한 것으로, 쇼군 권력 강화와 지배 기구 정비에 실효성을 가지고 있었다. 에치고 소동에서 마츠다이라 미츠나가가 개역된 것도 순견사의 보고가 판단 근거가 되었다.

토시나가의 실정으로는 영민의 곤궁이 꼽힌다. 요코스카 번 영토의 아사바 지역(현재의 시즈오카현 후쿠로이시)에 건설된 전체 길이 14km에 달하는 아사바 대위제 건설이 그 배경에 있다. 엔포의 고조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토시나가는 야나기하라 토우나이를 봉행으로 하여 대위제 건설을 명했지만, 노역과 징세의 가혹함도 전해지고 있다.[1][2]

영지를 몰수당한 토시나가지만, 혼다 가문의 조상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혼다 야스시게 자손으로, 야스시게부터 토시나가까지 4대에 걸쳐 미카와 오카자키번 번주를 맡은 충근을 감안하여 데와국 무라야마 군 내에서 1만 석을 받고 다이묘로서 존속이 인정되었다.

2. 1. 2. 무라야마 번으로의 이동

덴나 2년(1682년), 요코스카 번의 번주였던 혼다 도시나가는 일족인 아카시번혼다 마사토시의 영지 몰수에 연좌되어 함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마사토시가 오쿠보번주로 복귀함에 따라, 도시나가도 데와국 무라야마군 내에서 1만 석을 받아 다이묘로 복귀했다. 이는 혼다 가문 조상의 충근을 감안한 조치였다.

도시나가는 요코스카 번주 시절 영내의 실정과 순견사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특히, 아사바 대위제 건설로 인한 가혹한 노역과 징세는 영민들의 곤궁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2]

겐로쿠 3년(1690년)경에 성립된 『토개구수기』에서는 도시나가가 무라야마 번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요코스카 번 시대에는 가혹한 정치를 행했지만, 무라야마 번으로 옮겨진 후에는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인물평이 기록되어 있다.

2. 2. 번의 통치와 폐지

덴나 2년(1682년), 요코스카 번 5만 석 영지의 번주였던 혼다 도시나가는 일족인 아카시번혼다 마사토시의 영지 몰수에 연좌되어 함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마사토시가 오쿠보번주로 복귀함에 따라, 도시나가도 무라야마 1만 석 영지를 받아 번주가 되었다. 도시나가는 겐로쿠 5년(1692년)에 사망하였고, 양자인 혼다 스케요시가 그 뒤를 이었다. 겐로쿠 12년(1699년), 스케요시가 이토이가와번으로 전봉되면서 무라야마 번은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짧은 시간 존속된 번이었기 때문에 번청 소재지나 번 통치에 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3. 역대 번주

무라야마 번을 통치한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
혼다 도시나가(本多利長)1682년 ~ 1692년
혼다 스케요시(本多助芳)1693년 ~ 1699년


  • 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 1만 석. (1682년 - 1699년)

혼다 도시나가도토미국 요코스카번 5만 석의 번주였으나, 여러 죄목으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국 무라야마 군 내에서 1만 석을 받아 다이묘로 존속하였다. 혼다 스케요시는 도시나가의 뒤를 이어 무라야마 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3. 1. 혼다 도시나가 (本多利長)

덴와 2년(1682년) 2월 22일, 도토미국 요코스카번 5만 석의 번주였던 혼다 도시나가는 13개 조의 죄목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간세이 중수 제씨보』는 요코스카 번의 개역에 대해, 영내의 실정과 순견사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을 이유로 든다.

도시나가의 실정으로는 영민의 곤궁이 꼽힌다. 요코스카 번 영토의 아사바 지역(현재의 시즈오카현 후쿠로이시)을 둘러싼, 전체 길이 14km에 달하는 아사바 대위제 건설이 그 배경에 있다. 아사바 지역에서는 1680년의 「엔포의 고조」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도시나가는 야나기하라 토우나이를 봉행으로 하여 대위제 건설을 명했다. 방재나 농정 면에서는 높은 평가도 있지만, 건설을 위한 노역이나 징세의 가혹함도 전해지고 있다.[1][2]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혼다 야스시게로부터 도시나가까지 4대에 걸쳐 미카와 오카자키번주를 맡았던 혼다 가문의 조상의 충근을 감안하여, 다시 데와국 무라야마 군 내에서 1만 석을 받아 다이묘로서 존속이 인정되었다.

1690년경에 성립된 『토개구수기』에서는 혼다 도시나가를 무라야마 번주로서 평가하고 있다. 도시나가는 학문을 뽐내고 용맹을 숭상하기만 하여 요코스카 번 시대에는 영민에게 가혹한 정치를 행했지만, 무라야마 번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백성에게도 애련한 마음을 보이게 되었다는 인물평을 하고 있다.

도시나가는 1692년 12월 16일에 58세로 사망했다.

3. 2. 혼다 스케요시 (本多助芳)

혼다 스케요시(本多助芳일본어)는 1693년부터 1699년까지 무라야마 번을 다스린 2대 번주였다. 후다이 다이묘 가문 출신으로, 1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4. 영지

덴나 2년(1682년), 요코스카 번 5만 석 영지의 번주였던 혼다 도시나가아카시번혼다 마사토시의 영지 몰수에 연좌되어 함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마사토시가 오쿠보번주로 복귀함에 따라, 도시나가도 무라야마군 내 1만 석 영지를 받아 번주가 되었다. 겐로쿠 5년(1692년) 도시나가가 사망하고 양자인 혼다 스케요시가 뒤를 이었으나, 겐로쿠 12년(1699년) 스케요시가 이토이가와번으로 전봉되면서 무라야마 번은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짧은 존속 기간으로 인해 번청 소재지나 번 통치에 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혼다 도시나가의 거소는 "무라야마"로 알려져 있지만, 지행지를 관리하는 진야와 1만 석의 지행지가 구체적으로 무라야마 군의 어디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모가미 가가 겐와 8년(1622년)에 개역된 이후, 무라야마 군은 막부령, 기하타령, 다이묘령으로 세분화되었고, 여러 다이묘의 영지 변경이 반복되면서 영주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 되었다.

4. 1. 영지 위치와 관련된 불분명성

덴나 2년(1682년) 혼다 도시나가가 무라야마 1만 석 영지를 받아 번주가 되었으나, 겐로쿠 12년(1699년) 혼다 스케요시이토이가와번으로 전봉되면서 무라야마 번은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짧은 존속 기간으로 인해 번청 소재지나 번 통치에 관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혼다 도시나가의 거소는 "무라야마"로 알려져 있지만, 지행지를 관리하는 진야가 어디에 설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무라야마 번주는 참근교대를 행하지 않았다. 『토개구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라야마 번에서는 지행지에 향역인만을 배치하고, 그 외의 번사는 에도에 거주했다고 한다.

1만 석의 지행지가 구체적으로 무라야마 군의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점이 있다. 겐로쿠 2년(1689년) 막부 대관 마쓰다이라 세이사부로의 기록에 따르면, 사가에령 5개 촌(다르마지, 다카야 촌, 니타 촌, 기타메 촌, 기타야마 촌), 나가사키령 5개 촌(기미타 촌, 고이즈미 촌, 시마 촌, 사라누마 촌, 야나기사와 촌), 야마가타령 스기시타 촌 및 야마가타의 총 5735석을 혼다 가에 인도했다. 이들 촌은 현재의 사가에시 남부에서 나카야마정·야마베정에 걸쳐 존재한다. 이 외에도 칠산령에서 4000석 이상이 인도되었다.

또한,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에서는 야마노베 촌이나 이마주쿠 촌에 대해서도 무라야마 번령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모가미 가가 겐와 8년(1622년)에 개역된 이후, 무라야마 군은 막부령, 기하타령, 다이묘령으로 세분화되었고, 여러 다이묘의 영지 변경이 반복되면서 영주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 되었다. 무라야마 번과 같은 시기에 무라야마 군 내에 번청을 둔 번으로는 야마가타번과 가미야마번이 있었지만, 무라야마 번 존속 기간 동안 야마가타 번은 오쿠다이라 가→홋타 가→에치젠 마쓰다이라 가, 가미야마 번은 토키 가→가네모리 가→후지이 마쓰다이라 가와 같이 번주 가문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4. 2. 무라야마 군의 복잡한 영지 상황

덴나 2년(1682년), 혼다 도시나가가 무라야마군 내에 1만 석을 받아 무라야마번을 세웠으나, 겐로쿠 12년(1699년) 혼다 스케요시이토이가와번으로 전봉되면서 17년 만에 폐지되었다. 무라야마 번이 존속했던 기간 동안 무라야마 군 내의 다른 번들(야마가타번, 가미야마번)은 번주가 빈번하게 교체되는 등, 영지 상황이 복잡했다.

1622년 모가미씨가 개역된 이후, 무라야마 군은 막부령, 기하타령, 다이묘령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여러 다이묘들의 영지 조정 장소가 되어 영주 변경이 반복되면서 영주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 되었다.

무라야마 번과 같은 시기에 무라야마 군 내에 번청을 둔 번으로는 야마가타 번과 가미야마 번이 있었는데, 무라야마 번 존속 기간(17년) 동안 야마가타 번은 오쿠다이라 가→홋타 가→에치젠 마쓰다이라 가, 가미야마 번은 토키 가→가네모리 가→후지이 마쓰다이라 가와 같이 번주 가문이 자주 교체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磐南平野の金字塔 第二章 大地の改良 https://www.suido-is[...] 一般社団法人 農業農村整備情報総合センター 2022-12-25
[2] 웹사이트 浅羽大囲堤の名残 http://www.pref.shiz[...] 静岡県中遠農林事務所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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