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시게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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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임팔 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기후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할힌골 전투에서는 보병 제16연대장으로서 유일하게 승리한 지휘관이었으며, 임팔 작전에서는 제31사단 보병단장으로 참전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코히마 점령을 지휘했다. 그는 부상병을 챙기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일본군의 양심'으로 불리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종전 후에는 버마의 포로 수용소에서 부하들을 보호하고, 1947년 귀국 후에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6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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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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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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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출생일 | 1892년 1월 4일 |
출생지 | 기후현 아쓰미 군 기타지마 촌 (현재 기후시) |
사망일 | 1965년 8월 30일 |
사망지 | 도쿄도 세타가야구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1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중장 |
지휘 부대 | 제31사단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할힌골 전투 임팔 작전 |
기타 이력 | |
제대 후 활동 | '도기 소매점 기후야' 점주 |
학력 | 일본 육군사관학교 |
수상 | |
업적 | |
주요 전투 | 내몽골 캠페인 만리장성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1944년 버마 전역 샹샤크 전투 코히마 전투 |
2. 생애
연도 | 날짜 | 내용 |
---|---|---|
1892년 | 1월 4일 | 기후현 출생 |
1906년 | 4월 | 기후 중학교 입학 |
1911년 | 2월 11일 | 일본육군사관학교 합격 |
3월 | 기후 중학교 졸업 | |
12월 1일 | 사관후보생 (보병 제16연대 부속, 니가타현 시바타시) | |
1912년 | 12월 1일 |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 (26기) |
1914년 | 12월 25일 | 육군사관학교 졸업 (737명 중 230위),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16연대 부속) |
1918년 | 7월 25일 | 육군 보병 중위 임관 |
9월 | 텐진 주둔군 파견 (보병 제16연대 제4중대 부속) | |
1919년 | 8월 | 귀국 |
1920년 | 3월 | 시베리아 출병 종군 |
10월 | 육군대학교 수험 위해 귀국 | |
1921년 | 12월 14일 | 육군대학교 입학 (36기) |
1924년 | 3월 15일 | 육군 보병 대위 임관 |
11월 29일 | 육군대학교 졸업 (64명 중 29위) | |
12월 1일 | 보병 제16연대 제7중대장 | |
1925년 | 12월 1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지나반원 |
1927년 | 8월 | 참모본부 부속 베이징 주재 지나 연구원 (일시 상하이 주재) |
1929년 | 8월 1일 | 참모본부 부원 |
1930년 | 3월 6일 | 육군 보병 소좌 임관 |
5월 | 하얼빈 특무기관원 | |
1933년 | 3월 15일 | 히로사키 보병 제31연대 보병 제2대대장 (열하 작전 종군) |
1934년 | 4월 5일 | 귀국 |
4월 12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암호반원 | |
4월 29일 | 훈3등 금치훈장 수훈 | |
8월 1일 | 육군 보병 중좌 임관 | |
12월 1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암호반장 겸 육군대학교·육군통신학교 교관 | |
12월 22일 | 훈4등 욱일장 수훈 [6] | |
1936년 | 8월 1일 | 참모본부 부속 광동 주재무관 |
1937년 | 8월 2일 | 타이완군 고급참모 겸 참모본부 부속 홍콩 주재무관 |
1938년 | 2월 14일 | 육군 보병 대좌 임관 |
4월 | 타이완군 고급참모 (타이페이 주재) | |
9월 19일 | 제21군 제3과장 겸 광동 특무기관장 | |
1939년 | 3월 7일 | 보병 제16연대장 (만주·목단강 주둔) |
8월 | 노몬한 사건 종군 (9월 15일 휴전) | |
1940년 | 10월 28일 | 귀국 |
12월 2일 | 육군 소장 임관, 제13군 부속 겸 상하이 특무기관장 | |
1942년 | 3월 10일 | 훈2등 수보장 수훈 |
8월 17일 | 제13사단 제26여단장 (의창 주재) | |
1943년 | 3월 25일 | 제31사단 제31보병단장 (임팔 작전 종군) |
1944년 | 6월 27일 | 육군 중장 임관 |
7월 13일 | 제31사단장 대리 (7월 3일 임팔 작전 중지 명령) | |
8월 30일 | 제54사단장 | |
10월 12일 | 훈1등 수보장 수훈 | |
1945년 | 8월 15일 | 종전 (21일 종전 칙령 수령) |
1947년 | 6월 | 수용소 생활 후 귀국 |
1965년 | 8월 30일 | 사망 (향년 73세) |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1892년 1월 4일 기후현에서 태어났다.[2] 기후현립 기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로 입교하여 737명 중 230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1년 12월에는 니가타현 시바타시에 주둔하고 있던 제16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3] 육사 졸업 성적으로는 육군대학교 입학에 필요한 연대장 추천을 받기 어려웠으나, 두 번째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대학교 36기를 64명 중 29등으로 졸업했다.2. 2. 만주 및 중국에서의 활동
육군 참모본부 중국과 등을 거쳐 하얼빈 특무기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만주의 불안정화를 꾀하고 일본군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하던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의 공작 활동에 관여했다. 미야자키의 아내 아키코는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류탸오후 사건일본어) 발생 며칠 후, 미야자키의 관사를 방문했던 아마카스가 돌아가는 길에 위장 작전을 위해 수류탄을 터뜨리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만리장성 전투(열하 작전, 熱河作戦|열하 작전일본어) 중에는 보병 제31연대 제2대대장으로 전출되어 참전했다. 유하구(劉河口)와 신개령(新開嶺)에서 5월 10일 밤부터 이틀 연속으로 야간 기습 공격을 성공시켜 제8사단(사단장 니시 요시카즈)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이 공로로 금치훈장 3등급을 수훈했다.
부대가 일본 본토로 귀환한 후에는 중좌로 진급하여 참모본부 중국과 암호반장을 맡았다. 당시 2·26 사건을 정점으로 격화되던 육군 내부의 파벌 항쟁이나 군 간부들의 정치 개입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광동 특무기관장, 일본 타이완군 참모, 제21군 참모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대좌 계급으로 만주에 주둔하던 보병 제16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이 전투에서의 공적과 이후 국경 설정 과정에서의 기여로 욱일장 4등급 금광(金光)을 수훈했다.[1][3][4][2]
2. 2. 1. 할힌골 전투
육군 대좌 계급으로 만주에 주둔하던 보병 제16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된 미야자키는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가 발발하자 제2사단 가타야마 부대에 배속되어 전투 말기에 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1][3]그는 충분한 준비 끝에 도로토 호(ドロト湖일본어) 997고지에 대한 야간 공격을 성공시켜 소련군 부대를 격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 날 이어진 100대가 넘는 소련군 전차의 대규모 반격을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막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휴전이 결정되자, 미야자키는 기지를 발휘하여 병사 중 석공(石工) 경험자를 모아 점령 중이던 최전선을 따라 10여 개의 비석을 몰래 매설하도록 했다. 이 비석에는 점령 날짜와 부대명이 새겨져 있었다.
사건 이후 진행된 국경 설정 협상에서는 대부분 소련과 몽골 측이 주장하는 경계선이 국경으로 합의되었으나, 제16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남부 지역만큼은 미야자키가 설치한 비석을 근거로 만주국과 일본 측에 유리하게 경계가 설정되었다. 이는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 중 거의 유일하게 거둔 성공적인 결과로 평가받는다. 이 공로로 미야자키는 욱일장 4등급 금광(金光)을 수훈했다.[4][2]
2. 3. 태평양 전쟁
상하이 특무기관장을 거쳐 제13사단 제26여단장이 되었다. 당시 제13사단은 중국 충칭 침공 작전의 주력으로 여겨졌으나, 남부 전선 상황이 악화되면서 미야자키는 여단 소속 제58보병연대와 함께 버마로 파견되어 사토 고토쿠 소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의 보병단장(제26여단장 겸임)에 임명되었다.[2][3][1]1944년, 미야자키는 일본군 제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이 주도한 임팔 작전에 참전했다. 이 작전은 보급을 무시한 무모한 계획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미야자키는 제58연대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험준한 산악 지대를 돌파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코히마 점령을 지휘했다.[2][1] 그러나 영국군의 거센 반격과 보급 두절, 그리고 사단장 사토 고토쿠의 군 명령 불복종 및 독단적 퇴각 결정으로 인해 미야자키 부대는 극심한 위기에 처했다. 그는 퇴각하는 사단 주력을 엄호하라는 명령과 함께, 이후 군 사령부로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진지 사수 명령을 받기도 했으나, 교묘한 지연 전술을 펼치며 부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3]
특히 퇴각 과정에서 미야자키는 "부상병을 전장에 버려두고 가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직접 부상병의 들것을 메고 자신의 식량을 나누어 주는 등 인간적인 지휘관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다른 부대의 전사자 시신을 매장하고 부상병을 수용하며, 일본군 시체가 길게 늘어서 '백골가도(白骨街道)'라 불릴 정도로 참혹했던 퇴각로를 헤쳐나갔다.[2][3] 이러한 행동은 그가 유능한 지휘관일 뿐 아니라 부하를 아끼는 인격자이자 이성적인 군인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양보다 질, 질보다 화합"을 모토로 삼았으며, 항상 "공격 시에는 선두에, 후퇴 시에는 후위에" 서서 부대를 지휘하며 큰 피해 속에서도 통제를 유지하려 애썼다.
임팔 작전 이후 제54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된 미야자키는 1945년 4월, 이라와디강 하류 지역에서 방어전을 지휘했다.[3] 그러나 상급 부대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 대장이 예고 없이 사령부를 버리고 도주하면서 지휘 체계가 붕괴되었고, 미야자키 사단은 적진 한가운데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섬멸 위기에 처하자 중장비를 포기하고 페구 산맥의 대나무 숲으로 후퇴했으나, 보급과 연락마저 끊겨 전 부대원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한 상황에 놓였다. 1945년 7월 하순, 부대를 분산시켜 적진 돌파(싯탄 작전)를 시도했으나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목표 지점인 싯탄 강 동쪽 강둑에 도착한 병력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야자키는 남은 병력으로 싯탄 강변에서 끈질기게 방어전을 이어가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미야자키는 버마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 포로 생활 중에도 부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직접 영국군에 강력히 항의하며 부하들을 보호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2] 그는 1947년 5월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1948년 1월 31일 공직 추방 예비 지정을 받았다.[5]
2. 3. 1. 임팔 작전
1944년, 일본군 제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이 주도한 임팔 작전은 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작전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의 희생을 초래했다. 당시 소장이었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원래 제13사단 제26여단장이었으나, 남부 전선 상황 악화로 여단 소속 제58보병연대와 함께 버마 전선으로 파견되어 사토 고토쿠 소장이 이끄는 제31사단 보병단장(제26여단장 겸임)으로 이 작전에 참전했다.[2][3][1]임팔 작전에서 미야자키는 자신이 지휘하던 3개 연대 중 제58연대만을 이끌고, 산포병 1개 대대를 포함한 약 3,000명의 병력으로 임팔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코히마 점령 임무를 맡았다.[2][1] 미야자키 부대는 호말린을 출발하여 험준한 민타미 산맥을 넘어 진격했다. 도중 상샤크(Sangshak)에서 영국령 인도군 제50공수여단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격파하고 영국군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1] 반나절의 짧은 휴식 후, 미야자키는 코히마와 임팔을 잇는 도로상의 토헤마(Tohema) 지점으로 진출하여 북상했다. 영국군은 코히마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미야자키 부대의 예상보다 빠른 진격 속도에 당황하여 코히마 중심부에서 남서쪽 언덕의 영국 고등판무관 관저가 있는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로써 코히마 전투가 시작되었다.[1] 제58연대가 코히마를 점령하면서 디마푸르와 임팔을 연결하는 주요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미야자키는 영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고등판무관 관저 주변 고지 점령을 시도했으나, 테니스 코트 전투(Battle of the Tennis Court) 등에서 영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1] 이후 영국군이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코히마 탈환 작전을 개시하자, 미야자키 부대는 제31사단의 다른 부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대는 큰 손실을 입어 병력이 초기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소장은 보급 부족 등을 이유로 군 사령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독단적으로 사단 전체의 퇴각을 결정했다. 퇴각하는 사단 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미야자키에게는 현 위치 사수라는 어려운 명령이 내려졌다.[1]
군 사령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임팔 점령 시까지 임팔 도로를 사수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이미 모든 포병 화력을 상실하고 병력이 600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미야자키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교묘한 지연 전술을 구사했다.[3] 그는 병사들에게 "한 부대가 영국군과 교전하는 동안 다른 부대는 후방의 임팔 도로에 계속해서 진지를 구축하며 남쪽으로 점차 이동한다. 이 도로에서 한 달을 버틴다면 세계 신기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미야자키 부대는 17일간 끈질기게 버텼으나, 결국 카롱(Karong)에서 영국군 전차 부대에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임팔로 향하는 보급로는 다시 영국군에게 넘어갔다.[3]
도로 동쪽 산악 지대에서 영국군에게 포위된 미야자키 부대는 마침내 군 사령부로부터 퇴각 명령을 받았다. 미야자키는 "부상병을 전장에 버려두고 가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퇴각 과정에서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직접 부상병의 들것을 메고, 식량을 원하는 병사에게는 자신의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퇴각로에서 다른 부대의 전사자 시신을 발견하면 매장해주고, 부상병은 수용하여 함께 후퇴했다.[2][3] 이처럼 미야자키는 일본군 시체가 길게 늘어서 '백골가도(白骨街道)'라 불릴 정도로 참혹했던 퇴각로에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다.
미야자키는 "양보다 질, 질보다 화합"을 부대의 모토로 삼았으며, 항상 "공격 시에는 선두에, 후퇴 시에는 후위에" 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야자키의 뛰어난 지휘와 인격적인 리더십 덕분에 끝까지 통제를 유지하며 퇴각을 완료할 수 있었다. 임팔 작전에서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유능한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부하를 아끼는 인격자이자 이성적인 군인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2. 3. 2. 버마 전역
임팔 작전 이후 제54사단 사단장이 된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1945년 4월 이라와디강 하류 부근에서 방어전을 전개했다.[3] 그러나 상급 부대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 대장이 갑자기 사령부를 버리고 도주하면서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이로 인해 미야자키 사단은 적진 한가운데에 완전히 고립되었다.섬멸 위기에 처하자 미야자키는 중장비를 포기하고 페구 산맥(바고 산맥)의 대나무 숲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보급과 연락이 두절되면서 제54사단은 전 부대원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한 상황에 놓였다. 결국 1945년 7월 하순, 부대를 분산시켜 적진 돌파(싯탄 작전)를 시도했으나,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목표 지점인 싯탄 강 동쪽 강둑에 도착한 병력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야자키는 남은 병력으로 싯탄 강변에서 끈질기게 방어전을 이어가던 중 주에진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미야자키는 버마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 포로 생활 중에도 부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직접 영국군에 강력히 항의하며 부하들을 보호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2] 미야자키는 1947년 5월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1948년 1월 31일 공직 추방 예비 지정을 받았다.[5]
2. 4. 종전 후
버마의 수용소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지낼 당시, 미야자키는 부하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판단될 때마다 영국군에게 항의하며 부하들을 보호하려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 신세가 되었음에도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5월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귀국 후에는 자신의 군 경력을 내세우거나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다와라 선 시모키타자와 역 근처 상점가에서 '기후옥'(기후야)이라는 이름의 도자기 소매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958년에는 잡지 마루에 「보병 제16연대 분전수」(또는 「제16보병연대와의 싸움」)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기고했다.
임종 직전, 병문안을 온 옛 부하이자 제54사단 참모였던 무라타 미노루(중좌)는 미야자키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敵中突破で分離した部隊を間違いなく掌握したか?|적중 돌파에서 분리된 부대를 확실히 장악했는가?일본어"라고 여러 차례 헛소리를 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페구 산맥 탈출 과정에서 많은 부하를 잃은 것에 대한 깊은 심적 부담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평가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임팔 작전 등에서 보여준 뛰어난 지휘와 이성적인 행동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군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실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야전형 지휘관이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임팔 작전 당시 '일본군의 양심'이라 불릴 만한 그의 행동은 작전을 실패로 이끈 무다구치 렌야 사령관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참전 병사들 사이에서도 미야자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고 전해진다.
3. 1. 긍정적 평가
1944년 일본군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 중장이 주도한 임팔 작전은 보급을 무시한 무모한 작전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소장이었던 미야자키는 일본군 제31사단 보병단장으로 참전하여, 험준한 산악지대를 스스로 맡아 선두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요충지 코히마 점령을 지휘했다. 코히마는 임팔의 보급로였기에 영국군의 치열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제31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지원과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되었다.이때 제31사단장 사토 코토쿠 소장은 군 명령에 항명하며 독단적으로 퇴각을 결정하고, 미야자키에게는 사단 주력이 퇴각하는 동안 엄호를 위해 현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 미야자키는 이 어려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지체 전술을 구사하며 수 주간의 지구전을 벌였고, 이후 새로운 명령에 따라 성공적으로 퇴각을 완수했다. 이 퇴각 과정에서의 행동으로 미야자키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인격자, 이성적인 군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미야자키는 부상병을 전장에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직접 부상병의 들것을 메거나 자신의 식량을 나눠주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또한 다른 부대의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발견하면 시신은 매장하고 부상자는 수습하여 함께 퇴각했다. 그는 일본군 병사들의 시체가 길처럼 널려 지옥도와 같았던, 이른바 '백골가도'(白骨街道)를 이러한 방식으로 퇴각했는데, 이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합리성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윤리관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임팔 작전 당시 너무 많은 일본군 시체 때문에 전염병을 우려한 영국군이 시신을 화장 처리하여 그 뼈가 산더미처럼 쌓인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러한 경력, 특히 임팔 작전에서의 뛰어난 지휘와 이성적 행동 덕분에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육군사관학교나 육군대학교에서의 성적은 평범했지만, 실제 전선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야전형 지휘관이었다. 이는 실전이 탁상공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참전한 전투마다 제한된 권한과 병력으로 싸웠으며, 동료 지휘관들에 비해 특별히 유리한 조건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을 세운 것은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능력과 인품 덕분이었다. 미야자키는 어떤 궁지에 몰려도 약한 소리를 하거나 불합리한 명령을 내린 상관을 비난하지 않았다.
임팔 작전 당시 '일본군의 양심'으로 불린 미야자키의 행동은,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하여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무다구치 렌야 사령관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회자된다. 이 작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무다구치의 이름만 들어도 분노했지만, 미야자키의 이름이 나오면 그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4. 연보
wikitext
연도 | 날짜 | 내용 |
---|---|---|
1892년 | 1월 4일 | 현재의 기후시에서 출생 |
1906년 | 4월 | 기후 중학교 입학 |
1911년 | 2월 11일 | 육군사관학교 합격 |
3월 | 기후 중학교 졸업 | |
12월 1일 | 사관후보생 임명 (보병 제16연대 부속, 니가타현 신발다) | |
1912년 | 12월 1일 | 육군사관학교 입학 (26기) |
1914년 | 12월 25일 | 육군사관학교 졸업 (737명 중 230위),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16연대 부속) |
1918년 | 7월 25일 | 육군 보병 중위 임관 |
9월 | 텐진 주둔군 파견 (보병 제16연대 제4중대 부속) | |
1919년 | 8월 | 귀국 |
1920년 | 3월 | 시베리아 출병 종군 |
10월 | 육군대학교 수험을 위해 중도 귀국 | |
1921년 | 12월 14일 | 육군대학교 입학 (36기) |
1924년 | 3월 15일 | 육군 보병 대위 임관 |
11월 29일 | 육군대학교 졸업 (64명 중 29위) | |
12월 1일 | 보병 제16연대 제7중대장 | |
1925년 | 12월 1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지나반원 |
1927년 | 8월 | 참모본부 부속 베이징 주재 지나 연구원 (일시 상하이 주재) |
1929년 | 8월 1일 | 참모본부 부원 |
1930년 | 3월 6일 | 육군 보병 소좌 임관 |
5월 | 하얼빈 특무기관원 | |
1933년 | 3월 15일 | 히로사키 보병 제31연대 보병 제2대대장 (열하 종군) |
1934년 | 4월 5일 | 귀국 |
4월 12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암호반원 | |
4월 29일 | 훈3등 금치훈장 수훈 | |
8월 1일 | 육군 보병 중좌 임관 | |
12월 1일 | 참모본부 제2부 지나과 암호반장 겸 육군대학교·육군통신학교 교관 | |
12월 22일 | 공훈 포상: 훈4등 욱일장 수훈, 특훈갑에 의한 특상 수상 보도[6] | |
1936년 | 8월 1일 | 참모본부 부속 광동 주재무관 |
1937년 | 8월 2일 | 타이완군 고급참모 겸 참모본부 부속 홍콩 주재무관 (홍콩 주재) |
1938년 | 2월 14일 | 육군 보병 대좌 임관 |
4월 | 타이완군 고급참모 (타이페이 주재) | |
9월 19일 | 제21군 (광동 파병군) 제3과장 겸 광동 특무기관장 | |
1939년 | 3월 7일 | 보병 제16연대장 (만주·목단강 주둔) |
8월 | 노몬한 사건 종군 (9월 15일 휴전 협정) | |
1940년 | 10월 28일 | 귀국 |
12월 2일 | 육군 소장 임관, 제13군 부속 겸 상하이 특무기관장 | |
1942년 | 3월 10일 | 훈2등 수보장 수훈 |
8월 17일 | 제13사단 제26여단장 (의창 주재) | |
1943년 | 3월 25일 | 제31사단 제31보병단장 (임팔 작전 종군) |
1944년 | 6월 27일 | 육군 중장 임관 |
7월 13일 | 제31사단장 대리 (7월 3일 임팔 작전 중지 명령) | |
8월 30일 | 제54사단장 | |
10월 12일 | 훈1등 수보장 수훈 | |
1945년 | 8월 15일 | 종전 (21일 종전 칙령 수령) |
1947년 | 6월 | 수용소 생활을 거쳐 귀국 |
1965년 | 8월 30일 | 사망 (향년 73세) |
참조
[1]
웹사이트
宮崎繁三郎~ノモンハン、インパールを戦い抜いた 部下思いの野戦指揮官 WEB歴史街道
https://shuchi.php.c[...]
2021-12-07
[2]
웹사이트
不敗の名将・宮崎繁三郎 ~ノモンハン事件からインパール作戦まで唯一敗けなかった男|人間力・仕事力を高
https://www.chichi.c[...]
2021-12-07
[3]
웹사이트
退却では最後尾を・陸軍中将 宮崎繁三郎 - サバゲーアーカイブ
https://sabage-archi[...]
2021-12-07
[4]
간행물
The 8th Division Shining Line Award
Tokyo Asahi Shimbun
1934-11-22
[5]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949-01-31
[6]
서적
第八師團に輝く行賞
東京朝日新聞社
193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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