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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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우는 조선의 문신으로, 태종의 서녀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대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종 때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었고, 호조 판서,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단종 때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조 즉위 후 평안도 도체찰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에 있으며,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의 성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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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 (조선)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박종우 |
출생 | 1846년 11월 24일 |
사망 | 1916년 12월 24일 (향년 70세) |
본관 | 반남 박씨 |
자 | 성오(聖旿) |
호 | 송헌(松軒) |
관력 | |
직업 | 조선 말기의 문신 |
주요 관직 | 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지경연사 의정부찬정 판돈녕부사 |
가족 관계 | |
부 | 박제승(朴齊昇) |
모 | 정부인 안동 김씨 |
기타 | |
서훈 | 정헌대부 |
2. 생애
박종우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왕족의 인척이었다. 그는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던 아버지 박신과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419년(세종 1년) 태종의 서녀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고 운성군에 봉해졌다. 1420년(세종 2년) 자헌대부에 임명되었다.
1426년(세종 8) 2월 선위사(宣慰使)로 황주(黃州)에 파견되었으며, 12월에는 명나라에 사은사 겸 진하사(謝恩使兼進賀使)로 임명되어 연경을 방문했다가 1427년(세종 9) 3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호조판서, 중추원지사 등을 역임했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박종우는 운봉 박씨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박지의(朴之誼)이고 아버지는 찬성을 지낸 박신(朴信)이다.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며, 박종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박신은 정몽주의 제자였으나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이조판서와 찬성을 역임했다. 박신의 고조부 박중화(朴仲華)는 박혁거세의 40대손으로, 운봉 박씨의 시조가 된다.박종우는 집안이 대대로 부유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419년(세종 1년) 1월 태종의 서녀이자 정의궁주(貞懿宮主) 소생인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고,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졌다. 1420년(세종 2년) 자헌대부에 임명되었다.
1423년(세종 5년) 4월 명나라에 사은사신의 정사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고, 그해 8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정헌대부 삼군장수에 임명되었다.
2. 2. 관직 생활과 계유정난
1444년(세종 26) 7월 광덕대부에 임명되고 호조판서를 겸직하였다. 1445년(세종 27) 3월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통진(通津)으로 물러났다가 왕명으로 기복(起復)의 명을 받고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부임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3월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해 6월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하여 좌찬성과 이조 판사를 겸하였다. 1449년(세종 31) 8월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가 되어 변경의 방비를 계칙(戒飭)하기에 힘썼다.1450년(세종 32년) 2월 의정부 좌찬성이 되고 그해 7월 성록대부(成祿大夫)가 되었다. 1451년(문종 1) 1월 운성위(雲城尉)로 개봉되었다가 그해 8월 의금부제조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의금부 제조 운성위로 재직 중 한명회, 정인지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가담, 그해 3월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일파를 숙청한 뒤 추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운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당대에도 그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균, 성종비 정현왕후의 남동생 윤사로, 학역재 정인지 등과 더불어 당대 한양의 4대 부자(四富)로 유명하였다. 1455년(세조 1년) 평안도도체찰사로 발령되었다가 곧 정1품 수록대부로 승진했다.
2. 3. 세조 즉위 이후
1453년 (단종 원년) 의금부 제조 운성위로 재직 중 한명회, 정인지 등과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가담, 그해 3월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일파를 숙청한 뒤 추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운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균, 성종비 정현왕후의 남동생 윤사로, 학역재 정인지 등과 더불어 당대 한양의 4대 부자로도 유명하였다. 1455년(세조 1년) 평안도도체찰사로 발령되었다가 곧 정1품 수록대부로 승진했다.2. 4. 사후
그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남면 반정리(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산 55번지) 산 북동쪽에 정혜옹주와 함께 안장되었다. 묘소 아래에는 후처 결성장씨의 묘소가 바로 아래에 조성되었고, 그 아래에는 비석이 없는 묘 1기가 있다. 묘비는 1476년 3월 어모장군 박계손이 세웠다. 묘소 서북쪽에는 장모 의빈권씨의 묘소가 있다. 후대에 그의 묘소 아래에 민통선 내 주한미군사격장이 조성되어 접근이 제한된다.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마수리 성렬사(成烈祠)에 제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박지의(朴之誼) | |
할머니 | 주씨(周氏) | 주사옹(周思雍)의 딸 |
아버지 | 박신(朴信) | 1362년 ~ 1444년 |
어머니 | 조씨(趙氏) | |
형 | 박종지 | |
동생 | 박종귀 | |
부인 | 정혜옹주 | 조선 태종의 서녀 |
부인 | 결성장씨 | 후처 |
3. 1.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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