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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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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는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순수비의 터이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555년 북한산을 순행한 후 세금을 면제하고 사형수를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비는 오랫동안 잊혀져 무학대사의 왕심비 또는 몰자비로 알려지다가, 19세기 초 김정희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비는 승가사 뒤 비봉에 위치했으며, 비석 받침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는 복제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 등 다른 진흥왕 순수비와 함께 신라의 영토 확장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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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북한산 비봉
북한산 비봉
기본 정보
이름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영문 이름Site of Bukhan Mountain Monument of King Jinheung's Inspection
유형사적
지정 번호228
지정일1972년 7월 24일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 3
시대신라
문화재청 ID13,02280000,11

2. 역사적 배경

신라진흥왕 때 삼국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551년(재위 12년),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 10여 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 553년(재위 14년)에는 백제가 차지하던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555년(재위 16년) 10월,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고, 11월에는 돌아오는 길에 여러 고을에 1년간 세금 면제와 특별사면을 베풀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비는 승가사 뒤쪽, 해발 556m의 비봉(碑峰) 꼭대기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위 꼭대기를 파내어 비석 받침(碑座)을 만들고, 남쪽으로 뻗은 평평한 부분에 3층 단(段)을 만들어 비를 세웠다.

건립 후 오랫동안 잊혀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졌으나, 19세기 초 김정희가 비면을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 다른 진흥왕순수비도 있다. 1972년 8월 25일 비 이전 사실을 기록한 모조비를 세웠다가, 2006년 10월 19일 철거하고 복제비를 설치했다.

2. 1.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신라 진흥왕 때 삼국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한반도의 핵심 지역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551년,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10여 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광주 지방을 치소(治所)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현재의 서울 지역을 북방 경영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2. 2. 신주의 설치와 북방 경영

신라진흥왕백제와 손잡고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10여 개의 군을 설치하였고, 553년(진흥왕 14년)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광주 지방을 그 치소(治所)로 삼으면서부터 신라는 현재의 서울 지역을 북방 경영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 3. 북한산 순행과 순수비 건립

신라 진흥왕은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 지역을 공격하여 10여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까지 진출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광주 지역을 치소(治所)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현재의 서울 지역을 북방 경영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555년 10월에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고, 11월에는 돌아오는 길에 여러 고을에 1년간 세금 면제와 특별사면을 베풀었다.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비는 승가사 뒤쪽, 해발 556m의 비봉(碑峰) 꼭대기에 큰 바위를 파내어 만든 비석 받침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위 남쪽의 평평한 부분에 3층의 단을 만들어 비석 받침을 조성하였다.

1단은 가로 약 106.1cm, 세로 약 51.5cm, 높이 약 6.1cm이며, 2단은 폭 18.2cm, 높이 약 4.8cm의 면을 둘렀고, 3단은 다시 폭 18.2cm의 면을 둘렀다. 3단은 앞면을 제외한 세 방향이 떨어져 나가 형태를 알기 어렵다. 비석 받침 중앙에는 폭 71.5cm, 두께 16.6cm 정도의 장방형 홈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웠다. 과거 비신은 동남쪽으로 70°쯤 기울어진 채 꽂혀 있었다.

순수비는 건립 후 오랫동안 잊혀져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 오다가, 19세기 초 김정희가 비면을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임이 밝혀졌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비 외에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이 있다. 1972년 8월 25일에는 비 이전 사실을 기록한 모조비를 세웠다가, 2006년 10월 19일에 철거하고 원래 비석과 유사한 복제비를 새로 설치했다.

3. 순수비의 발견과 보존

555년 진흥왕북한산을 순행하며 강역을 확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 순수비는, 승가사 뒤쪽 해발 556m의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 산봉우리의 이름인 비봉(碑峰)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순수비는 큰 바위 꼭대기를 파내어 비석 받침을 만들었는데, 바위 남쪽의 평평한 부분을 3층의 단으로 만들어 비를 세웠다.

비석 받침 중앙에는 장방형 홈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과거에는 비신이 동남쪽으로 70°쯤 기울어져 있었다.

순수비는 건립 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져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또는 글자가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 19세기김정희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끼로 뒤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하면서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북한산비 외에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이 진흥왕 순수비에 해당한다.

3. 1. 비의 이전과 복제비 설치

1972년 8월 25일 순수비 이전 직후, 비를 이전했다는 사실을 적어놓은 모조비를 원래 순수비가 있던 자리에 세웠다. 2006년 10월 19일에는 이 모조비를 철거하고 원래 비석과 유사하게 만든 복제비를 새로 설치했다.

4. 순수비의 구조와 형태

순수비는 승가사(僧伽寺) 뒤쪽, 해발 556m의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 산봉우리의 이름인 비봉(碑峰)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순수비는 큰 바위 꼭대기를 파내어 비석 받침(碑座)을 만들었는데, 바위 남쪽으로 뻗은 비교적 평평한 부분을 택하여 3층의 단(段)을 쌓아 만들었다.

1단은 바위 표면을 깎아 가로 약 106.1cm, 세로 약 51.5cm, 높이 약 6.1cm로 만들었다. 2단은 1단 둘레에 폭 18.2cm, 높이 약 4.8cm의 면을 둘렀고, 3단은 다시 그 둘레에 폭 18.2cm의 면을 둘렀다. 그러나 3단은 앞면을 제외한 세 방향이 떨어져 나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각 단 모두 바위가 부식되고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넓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다. 비석 받침 중앙에는 폭 71.5cm, 두께 16.6cm 정도 되는 장방형 홈을 파서 비신(碑身)을 깊숙이 세웠다. 과거 비신은 이곳에 동남쪽으로 70°쯤 기울어진 방향으로 꽂혀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순수비는 건립 후 오랫동안 잊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왕심비(枉尋碑) 또는 글자가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졌다. 19세기김정희(金正喜)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끼 낀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 외에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 등이 있다. 1972년 8월 25일 비 이전 사실을 적은 모조비를 세웠다가 2006년 10월 19일 철거하고 원래 비석과 유사하게 만든 복제비를 새로 설치했다.

5. 진흥왕 순수비의 종류

진흥왕북한산을 순행하고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비를 세웠다. 이 외에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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