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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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학은 1327년 경상도 삼기군에서 태어난 불교 승려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문이었다. 1344년 송광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원나라 유학을 거쳐 고려 말 나옹 혜근을 만나기도 했다.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왕십리 지명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었으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활동 공간이 넓지 않았으며, 1405년 금강산 금장암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학대사비가 세워졌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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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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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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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무학 왕사 |
이름 | 자초 |
거주지 | 고려 개경 조선 한성 |
출생일 | 1327년 10월 5일 (음력 9월 20일) |
입적일 | 1405년 10월 3일 (음력 9월 11일)(77세) |
종파 | 선종 |
2. 생애
무학(無學)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한 승려이다. 법명은 무학, 본명은 자초(自超)이며, "무식한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학은 풍수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개성에서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4세기 역사 기록에 따르면,[1] 이성계는 무학에게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무학은 늙은 농부가 소를 몰고 가며 "왕십리(往十里)", 즉 '십 리를 더 가라'고 한 말을 듣고, 북서쪽으로 가 북악산 남쪽, 현재 경복궁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왕십리역이라는 이름은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기록에는 무학이 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은 없다.[5] 무학은 조선 초기에 왕의 불교 신앙을 보좌하는 왕사의 역할을 주로 수행했으며, 개경 연복사 5층탑 중건에 기여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남아있다.[5]
2. 1. 생애 초기
변계량이 지은 무학대사비문에 의하면, 무학은 1327년 경상도 삼기군에서 박인일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 밖에 출가 이전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5]무학은 1344년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6]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 그 후 고려 말기의 저명한 승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3]
일설에 무학은 나옹 혜근을 이어 수좌승이 되었다고 하나,[7]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혜근은 말년에 회암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1397년에 이색이 지은 보제선자 사리석종비의 등에 의하면 무학은 회암사가 아닌 청계사의 주지를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무학이 혜근으로부터 수좌가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이야기 자체는 오직 무학의 주장에 근거해 변계량이 지은 무학대사비문에만 등장하는데, 무학대사비문에는 나옹 혜근에 관한 언급이 굉장히 높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반면 나옹 혜근의 비문에는 무학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정을 고려할 때, 무학의 주장은 그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5]
2. 2. 여말선초 시대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직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3][4]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무학이 조선의 천도에 영향을 끼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5]조선 초기에 기록상 확인되는 무학의 역할은 왕사로서 왕의 불교 신앙을 보좌하는 본래의 직무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고려의 도성 개경의 중앙에 연복사에는 고려 초기에 건축되었다가 허물어진 5층탑이 있었는데, 고려 말기에 거듭 실패하였던 5층탑의 중건은 외려 조선 건국 후 1392년에 들어 성공하기에 이른다. 태조실록에 중건 과정마다 선법을 강설한 것은 무학대사임이 확인되므로, 그 중건에는 무학의 역할이 상당하게 작용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5]
무학은 풍수지리에 대한 명성으로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오늘날의 서울)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14세기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1] 이성계는 무학에게 새로운 수도의 부지를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적합한 장소를 찾던 중, 무학은 늙은 농부가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농부는 북서쪽을 가리키며 그에게 왕십리(往十里)(往十里|십 리를 더 가라중국어)라고 말했는데, 깜짝 놀란 무학은 그가 들은 대로 북서쪽으로 가서 현재 경복궁이 있는 북악산 남쪽에 도착했다. 왕십리역은 이 기록에 따라 명명되었다.
2. 3. 생애 후반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8]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4] 태조는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9]그러나 무학의 활동은 불교 신자로서 불법과 풍수를 존중한 태조의 개인적인 후원 아래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숭유억불을 제창한 유교 국가 조선에서 무학의 활동 공간은 넓지 않았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무학에 대한 비난이 공공연하게 정치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태종 역시 왕으로서 그러한 비판에 참여하였다.[5]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년).[4] 사망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10]
3. 무학대사와 한양 천도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직후 무학은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3][4] 태조는 개국 직후부터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냈다. 그러나 조선 전기 기록에는 무학이 조선의 천도에 영향을 끼친 내용은 아래의 두 기사를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5]
조선 초기에 기록상 확인되는 무학의 역할은 왕사로서 왕의 불교 신앙을 보좌하는 본래의 직무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고려 도성 개경의 중앙에 있던 연복사 5층탑은 고려 초기에 건축되었다가 허물어졌는데, 고려 말기에 거듭 실패하였던 중건이 조선 건국 후 1392년에 성공하였다. 태조실록에 중건 과정마다 선법을 강설한 것은 무학대사임이 확인되므로, 그 중건에는 무학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5]
무학은 풍수지리에 능하여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오늘날의 서울)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4세기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1] 이성계는 무학에게 새로운 수도의 부지를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무학은 적합한 장소를 찾던 중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면서 북서쪽을 가리키며 "왕십리(往十里), 즉 '십 리를 더 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말대로 북서쪽으로 가서 현재 경복궁이 있는 북악산 남쪽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십리역은 이 설화에 따라 이름 붙여졌다.
3. 1. 왕십리 지명 유래 설화
무학은 여러 야사와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신빙성은 의심스럽다.[11][12]무학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왕십리라는 지명을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학이 왕십리에 이르러 이곳이 도읍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무학처럼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무학은 서쪽으로 십 리를 더 가서 경복궁 터를 정했고, 그래서 그곳을 왕십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382년 고려 말기 문신 이색이 쓴 여행기에 따르면, 오늘날의 동대문 일대에 해당하는 남경 동촌의 '왕심민사'에서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무학이 도읍지를 찾기 이전, 고려 말기부터 이미 '왕심'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5]
3. 2. 선바위 전설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13]4. 사후 평가 및 논란
무학은 여러 야사와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설화들의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왕십리 지명, 선바위, 이성계와의 만남 관련 설화 등이 전해지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1. 역사적 사실과 설화의 괴리
무학은 여러 야사와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설화들의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왕십리 지명 관련 설화: 무학이 왕십리에 이르러 도읍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한 노인이 "무학처럼 정도(正道)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소를 꾸짖는 것을 듣고 서쪽으로 십 리를 더 가 경복궁 터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1][12] 그러나 고려 말기 문신 이색의 여행기에 이미 '왕심'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므로, 무학이 도읍지를 찾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5]
- 선바위 관련 설화: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이 선바위를 성곽 안에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아 결국 선바위가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13]
- 이성계와의 만남 관련 설화: 일설에 무학은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대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 후기 기록인 '북로릉전지', '오산설림' 등에 근거한다.[4]
- '북로릉전지'(1748년)에는 조선 환조(이성계의 아버지)의 장지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이성계가 명당을 찾지 못해 애태우던 중, 두 승려의 대화를 듣고 함관령 밑에서 그들을 만나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전설이다.
- '오산설림'에는 이성계가 두 승려에게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여 첫째 혈(왕후의 조짐)과 둘째 혈(장상의 자리) 중 첫째 혈을 택했다는 전설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노승은 나옹, 젊은 승려는 무학이라고 전해진다.
- 무학의 해몽과 한양 천도에 대한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7] '오산설림', '설봉산 석왕사기' 등에 나오는 이성계와의 만남 설화도 조선 후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진위에 의문이 있다.[5]
5. 제자
- 기화 (1376년~1433년)
6. 대중문화
7. 관련 문화재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은 보물 제388호이다.[1]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이다.[2]
무학대사의 영정 하나가 신륵사 조사동에 봉안되어 있다.[3] 조사동은 지공(1363년 사망), 나옹 혜근(1320년경~1376년), 무학(1327년경~1405년) 세 명의 고승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사용된다.[3] 이 사당은 580년경에 창건된 사찰에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3]
참조
[1]
문서
Yoon 2008
[2]
서적
춘정집·속집 권1, 조선국 왕사 묘엄존자 탑명
[3]
백과사전
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 > 고려 후기의 문화 > 무학
https://ko.wikisourc[...]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조선전기의 사상 > 조선전기의 종교사상 > 자초
https://ko.wikisourc[...]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저널
무학 자초의 정치 활동에 대한 재검토 - 한양 천도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
https://www.kci.go.k[...]
2021-11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7]
서적
역사 속의 한국불교
역사비평사
2002
[8]
사료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계유 7월 19일 두 번째 기사
[9]
서적
우리겨레 문화유산. 3: 인천 경기도 강원도
삼성당
2009
[10]
웹사이트
회암사 무학대사비
http://gsm.nricp.go.[...]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
[11]
서적
김소월의 시 〈왕십리〉 분석
투멘
2010
[12]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3]
웹사이트
선바위
http://www.cha.go.kr[...]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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