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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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흥왕릉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 묻힌 곳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선도산 남쪽 능선 말단부에 위치한다. 지름 20m, 높이 5.8m의 타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2011년까지 '신라진흥왕릉'으로 불리다가 '경주 진흥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진흥왕은 화랑도, 국사 편찬, 불교 장려, 영토 확장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으며,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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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주 진흥왕릉 |
로마자 표기 | Gyeongju Jinheungwangneung |
영문 표기 | Royal Tomb of King Jinheung |
별칭 | 능지(陵址) |
상세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
좌표 | 35°49′44″N 129°11′0″E |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사적 제177호 |
지정일 | 1969년 8월 27일 |
시대 | 신라 |
크기 | |
면적 | 50,148m² |
2. 위치 및 구조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1]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1]
당초 제정된 문화재 명칭은 '''신라 진흥왕릉'''이었으나, 2011년 '''경주 진흥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진흥왕 (재위 540∼576)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1]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1]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1]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 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1]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김삼백종)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3. 명칭
4. 역사적 평가
신라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록상 법흥왕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하므로 서악동 무덤들 중 위에서 두 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1]
5. 현지 안내문
지름 20m, 높이 5.8m인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진흥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에 한산주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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