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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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튼 국민당(BNP)은 1982년 존 타인달을 중심으로 창당된 영국의 극우 정당이다. 신나치즘과 나치 독일 향수를 드러내며 거리 행진과 집회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폭력 사태와 반파시스트 시위와의 충돌로 대중적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1999년 닉 그리핀이 당권을 장악한 후, 당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쇄신을 추진하고, 이슬람 혐오증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정책 변화를 시도했다. 2000년대 초반 지방 선거에서 의석을 확보하며 성장했지만, 당내 분열과 쇠퇴를 겪으며 2010년대 이후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BNP는 극우 정당으로 묘사되며, 파시스트적 또는 신파시스트적 이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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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국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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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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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BNP |
창립 | 1982년 4월 7일 |
해체 | 해당 없음 (현재 존속) |
분리 | 국민 전선 영국 운동 |
본부 | Wigton, Cumbria, 잉글랜드 |
신문 | Identity |
학생 조직 | 해당 없음 |
청소년 조직 | BNP Youth |
여성 조직 | 해당 없음 |
회원수 (2015년) | 500명 (감소) |
웹사이트 | 영국 국민당 공식 웹사이트 |
지도부 | |
의장 | 아담 워커 |
이념 및 정치적 성향 | |
이념 | 영국 파시즘 백인 민족주의 우익 포퓰리즘 민족 민족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강경한 유럽회의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우 |
국제 관계 | |
유럽 정당 | 유럽 국가 운동 연합 |
색상 | |
색상 | 빨강 하양 파랑 |
의석수 | |
하원 | 0석 |
유럽 의회 | 0석 |
지방 정부 | 2석 |
런던 의회 | 0석 |
경찰 및 범죄 커미셔너 | 0석 |
2. 역사
브리튼 국민당(BNP)은 1982년 존 타인달의 주도로 기존 국민전선에서 분리되어 창당되었다. 초기에는 신나치즘 성향을 보이며 거리 행진 등을 통해 활동했으나, 잦은 폭력 사태와 반파시즘 운동의 저항에 부딪혔다. 군소 정당으로 시작하여 주로 지방 의회에서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 후반, 당내 쇄신파의 요구로 1999년 닉 그리핀이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리핀은 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노동당 및 보수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노골적인 인종차별 대신 문화적 차이를 부각하고, 특히 이슬람 혐오를 주요 의제로 삼는 등 정책 변화를 시도하며 지역 사회 문제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쳤다.
2000년대 들어 이민 증가와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BNP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2002년부터 지방 선거에서 꾸준히 의석을 확보했으며, 2008년에는 런던 의회에도 진출했다. 200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그리핀과 앤드류 브론스가 당선되어 2석을 확보하며 창당 이래 최대의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 내부에서는 그리핀의 지도력과 재정 문제에 대한 불만이 지속되었고, 2008년과 2009년에는 당원 명부가 유출되는 사건도 발생했다.[14][15] 그리핀의 BBC '질문 시간' 출연은 큰 논란을 낳으며 당의 극단적 이미지를 다시 부각시켰다. 2010년 총선에서는 역대 최고 득표율(1.9%)을 기록했음에도 하원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같은 해 지방 선거에서는 오히려 의석수가 크게 감소했다.
이후 BNP는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2012년 지방 선거 참패에 이어 201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유럽 의회 의석을 모두 상실했다.[23]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2014년 7월 그리핀은 당수직에서 사임했고, 아담 워커가 당수 대행을 맡았으나[24] 그리핀은 같은 해 10월 당에서 제명되었다.[25]
2015년 총선에서는 득표율이 2010년 대비 99.7%나 감소하는 등 몰락을 거듭했고,[28] 당원 수도 급감했다.[26] 2016년에는 재정 문제로 영국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정당 등록이 일시 취소되기도 했다.[29] 2018년 마지막 남은 지방 의원이 불출마하면서 영국 내 모든 공직 대표성을 잃었으며,[33] 2019년 총선 이후 사실상 정치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34] BNP는 역사적으로 이민 배척, 사형 부활 등을 주장했으며,[133] 그리핀 당수는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으로 비판받기도 했다.[134]
2. 1. 존 틴달 지도부: 1982-1999
마치 전쟁터로 가는 군대처럼.인종과 국가를 위한 대의를 위해.
우리의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로, 전투로, 전투로 BNP!
전투로 BNP!
— 1982년 BNP 행진가
그러나 이러한 행진은 반파시스트 시위대와의 잦은 충돌과 폭력 사태로 이어져 다수의 체포자를 낳았고, 이는 BNP가 폭력적인 극우 단체라는 대중적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BNP는 점차 실내 집회를 선호하게 되었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 거리 행진은 계속되었다.
선거 참여는 초창기 20년 동안 "불규칙하고 간헐적"이었으며, 지속적인 실패를 겪었다. 자금과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BNP의 선거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내부 인식도 있었다. 1983년 영국 총선에서는 54명의 후보를 냈으나 5개 지역구에서만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펼쳤고, 첫 정당 방송 기회를 얻었음에도 평균 0.06%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다.[11] 1985년 국민대표법으로 선거 보증금이 500파운드로 인상되자 BNP는 선거 참여를 더욱 제한했다. 1987년 영국 총선에는 불참했고, 1992년 영국 총선에서는 13명의 후보만 출마시켰다.
그러나 1993년 밀월 보궐선거에서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었다. 런던 동부 밀월 지역에서 데렉 비컨 후보가 당선되어 첫 지방 의회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해당 지역 백인 주민들 사이에서 방글라데시계 이민자들이 사회 주택 배분 등에서 특혜를 받는다는 불만을 집중 공략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 의석은 지역 종교 단체와 반나치 연맹 등이 주도한 반(反)BNP 운동 끝에 1994년 영국 지방 선거에서 다시 잃게 되었다. 1997년 영국 총선에서는 55개 선거구에 출마하여 평균 1.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2]
1990년대 초반, BNP 행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준군사조직인 컴뱃 18(C18)이 결성되었다. C18은 1992년부터 무정부주의 서점, 모닝 스타 신문사 본부 등 좌파 목표물을 공격하는 폭력성을 드러냈다. 타인달은 C18이 당의 거리 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심지어 다른 BNP 회원들과 물리적 충돌까지 일으키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1993년 12월, 타인달은 C18을 금지 조직으로 선언하고, 이 조직이 국가 기관의 공작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까지 제기하며 관계를 단절했다. 그는 C18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1995년 11월 BNP 연례 집회에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운동가 윌리엄 루터 피어스를 초청 연사로 부르기도 했다.
한편, 1990년대 초반 당내에서는 선거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풀뿌리 조직을 통해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는 '현대화파(modernisers)'가 부상했다. 이들은 외르크 하이더의 오스트리아 자유당이나 장마리 르펜의 프랑스 국민전선 등 유럽 대륙 극우 정당들의 성공 사례에 주목했다. 이들 정당은 노골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 대신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반민주적 강령 대신 포퓰리즘적 수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지지층을 넓혔다고 보았다. 현대화파는 런던 이스트엔드, 그리고 영국 북부의 백인 노동 계층을 대상으로 한 지역 사회 운동을 촉구했다. 타인달은 이들의 일부 제안을 수용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대중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우리 자신의 이념적 미용 성형술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현대화파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다. BNP의 한 고위 간부였던 존 빈은 훗날 타인달에 대해 "BNP의 가장 큰 자산이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의 끈기, 굳건한 신뢰성, 그리고 리더십은 이 운동을 지속시켰지만, 1982년 창립 이후 거의 미미한 성장만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1997년 총선에서의 부진한 성적은 타인달 지도부에 대한 내부 반발을 키웠다. 결국 당내 쇄신파(현대화파)는 당 최초의 당수 선거를 요구했고, 1999년 10월 실시된 투표에서 닉 그리핀이 행정 개선, 재정 투명성 확보, 지역 지부 지원 강화를 약속하며 투표자 3분의 2의 지지를 얻어 타인달을 몰아내고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영국국민전선(NF)과 제3의 위치 계열 단체인 정치병사(Political Soldier)와 국제 제3의 길(International Third Position)에 참여했었다. 그리핀의 등장은 타인달 시대의 종언과 BNP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2. 2. 닉 그리핀 지도부: 1999-2014
1999년 닉 그리핀이 당수로 선출되면서 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핀 지도 하에 브리튼 국민당은 2008년 지방선거에서 50곳의 지방의회 의석을 확보하고, 200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2석을 획득하는 등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유럽 의회 의석은 2014년까지 유지되었다.그러나 그리핀의 지도력은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134] 2009년 10월 22일에는 BBC의 정치 토론 프로그램 '질문 시간'에 출연하여 이슬람교가 영국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가 다른 출연진과 시민 참가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했으며, 방송국 앞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135]
2010년 총선거에서 브리튼 국민당은 패배했고, 당내 일부 이탈자가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2011년 당 대표 선거에서는 앤드루 브론스를 단 9표 차이로 간신히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으나,[16] 당내 분열은 계속되었다. 2012년 10월, 브론스가 당을 떠나면서 그리핀은 브리튼 국민당 소속의 유일한 유럽 의회 의원으로 남게 되었다.[17]
2012년 영국 지방 선거에서 브리튼 국민당은 기존 의석을 모두 잃고 득표율이 급락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008년 24만 표 이상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 2012년에는 2만 6천 표 미만으로 득표수가 크게 줄었다. 같은 해 런던 시장 선거에서도 브리튼 국민당 후보는 1.3%의 득표율로 7위에 그치며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정치학자 매튜 구드윈은 이러한 결과를 두고 "브리튼 국민당의 선거 도전은 끝났다"고 평가하며 당의 몰락을 지적했다.[18] 2013년 지방 선거에서도 99명의 후보를 냈지만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기존 의석 중 2석만 간신히 지켰다.[19]
2013년 6월, 그리핀은 헝가리의 극우 정당 요빅(Jobbik) 당원들과 함께 시리아를 방문하여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 관계자들과 회담을 가지는 등 논란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20][21][22]
2014년 5월 유럽 의회 선거에서 그리핀 자신을 포함한 브리튼 국민당 후보 전원이 낙선하면서 유럽 의회 의석을 모두 상실했다. 브리튼 국민당은 이러한 패배의 원인을 영국 독립당(UKIP)에게 돌리며, 영국 독립당이 자신들의 정책과 슬로건을 도용했다고 비난했다.[23] 결국 2014년 7월, 그리핀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수직에서 사임했으며, 아담 워커가 권한 대행 의장으로 임명되었다.[24] 그러나 그리핀의 당내 영향력은 이후에도 문제시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의도적으로 위기 상황을 조작하여 당 내 불화를 야기하려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다.[25]
2. 3. 쇠퇴: 2014-현재
2014년 7월, 닉 그리핀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수직에서 사임했으며, 이후 당에서 제명되었다. 아담 워커가 당수 대행을 맡으며 당은 대행 체제로 개편되었다.2015년 영국 총선에서 영국 국민당은 8명의 후보를 내세웠으나, 총 1,667표를 얻는 데 그쳐 2010년 영국 총선 대비 득표율이 99.7% 감소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2016년 1월, 영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연간 등록비 미납을 이유로 영국 국민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으나, 한 달 뒤인 2월에 다시 등록되었다.
2019년 영국 총선에서는 단 한 명의 후보만 출마시켰고, 해당 후보는 선거구에서 최하위로 낙선했다. 2019년 이후 당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며, 공식 웹사이트나 트위터 계정에 간헐적으로 게시물이 올라오는 것 외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3. 이념적 지향
많은 학계의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영국 국민당(BNP)을 극우 정당[43][44][45][46][47][48][49] 또는 극우익 정당으로 묘사해왔다.[50][51][52][53] 정치학자 매슈 구드윈(Matthew Goodwin)은 극우를 "두 가지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요소로 정의되는 특정한 형태의 정치 이데올로기: 첫째,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민주 헌정 국가의 가치, 절차 및 제도를 거부하거나 훼손하기 때문에 '극단주의자'이며, 둘째, 그들은 기본적인 인간 평등의 원칙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익'이다"라고 정의했다.[54]
다양한 정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영국 국민당의 이데올로기를 파시스트적이라고 묘사했으며,[55][56][57][58][36][37] 다른 학자들은 신파시스트적이라고 보았다.[59][60][61] 역사학자 나이젤 콥시(Nigel Copsey)는 신파시스트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62] 콥시, 그레이엄 맥클린(Graham Macklin),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 등의 역사학자들과 앤드류 P. 데이비(Andrew P. Davey) 정치신학자를 포함한 학계 관찰자들은 닉 그리핀(Nick Griffin)의 개혁이 당의 파시스트적 뿌리를 숨기기 위한 미용적인 과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63][64][65][66][38] 콥시에 따르면, 그리핀 하에서 영국 국민당은 "현대 감각에 맞게 재조정된 파시즘—신파시즘의 한 형태"였다.[67] 맥클린은 그리핀의 '현대화'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당은 이전 파시스트 단체들과 이념적 연속성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탈파시스트" 정당으로 변신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68] 이는 파시스트 과거를 청산하고 탈파시스트로 평가받는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사회운동(National Alliance)과는 다른 점이다.[69]
반파시즘 활동가 제리 게이블(Gerry Gable)은 영국 국민당을 "나치 조직"이라고 언급했고,[70] 반나치 리그(Anti-Nazi League)는 영국 국민당을 "영국 나치당"으로 묘사하는 전단을 배포했다.[71] 콥시는 틴달(Tyndall) 하의 영국 국민당이 신나치로 묘사될 수 있지만, 원래 독일 나치즘을 "조잡하게 모방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72] 데이비는 영국 국민당을 "대중주의적 민족주의" 정당으로 규정했다.[73]
> [영국 국민당의] 현대적인 외관은... 피상적이다. 당의 핵심은 여전히 이념적으로 파시스트적이며, 이는 2010년 총선을 위한 영국 국민당의 선거 공약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공약은 혈연의 유대, 고향, 현대 문화의 타락, 민속 전통과 유산에 대한 향수, 교육과 사회에서의 더 엄격한 규율 강조 등 전통적인 파시스트 주제들을 되돌아갔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후보자들의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및 신나치 동조가 확인되었다.
— 정치신학자 앤드류 P. 데이비, 2011[74]
그리핀 자신도 저술에서 '현대화'의 상당 부분이 선거에서 유리한 정책 뒤에 영국 국민당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숨기려는 시도였음을 인정했다.[75] 국민전선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민당의 사적인 담론은 공적인 담론과 달랐으며,[76] 그리핀은 "물론 우리는 핵심 당원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인종 차이, 유전학, 시오니즘, 역사 수정주의 등을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들에게 온건하고 합리적인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77][78] 영국 국민당은 "파시스트"와 "나치"라는 딱지를 피하며 자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1992년 선거 공약에서는 "파시즘은 이탈리아 것이었고, 나치즘은 독일 것이었다. 우리는 영국인이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할 것이며, 외국인을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79] 2009년 그리핀은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극좌에서 나오는 중상"이며, "정치적 폭력"에 가담하고 "사람들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국가를 원하는 집단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라(Unite Against Fascism)와 같은 반파시즘 단체가 진정한 파시스트라고 주장했다.[39] 영국의 극우 세력들은 일반적으로 선거에 불리한 함의 때문에 "영국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영국 민족주의"를 사용하려 했다.[80]
그리핀 체제 하에서 당은 "영국"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토착주의적 주제를 점점 더 많이 활용했다.[81] 당의 자료에서는 주류 정당과 유사하게 영국과 영국인 개념에 호소하며,[82] 연합왕국 국기와 적색, 백색, 청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42] 로저 그리핀은 당 문헌에서 "영국"과 "잉글랜드" 용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된다고 지적했고,[83] 콥시는 영국 국민당의 영국 민족주의가 "앵글로 중심적"이라고 평가했다.[84] 틴달과 그리핀 지도부 하에서 당은 군국주의적 수사법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그리핀 하에서는 "제복 없는 전쟁", "국민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한 전쟁" 등을 언급했다.[85] 틴달은 영국 국민당을 혁명적 정당,[86] "점령지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군대"라고 묘사했다.[87]
그리핀 집권 후 BNP는 비백인에 대한 강제 추방 정책을 폐기하고, 대신 비백인에게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자발적 이주를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했다.[88][89]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biological racism)를 축소하는 대신, 서로 다른 인종 집단 간의 문화적 불일치를 강조했다.[88][89] 이러한 문화적 강조는 이슬람 혐오증(Islamophobia)을 전면에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2001년 9.11 테러(September 11 attacks) 이후 "반 이슬람 캠페인"을 시작했다.[90] BNP는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 정당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반백인 인종차별에 대한 조직적인 대응"이라고 내세웠다.[91]
주요 정책으로는 사형제 부활, 무기징역형 강화를 포함한 각종 형량 강화, 사회 치안 강화를 주장한다.[92] 또한 이민 배척, 교사의 체벌 용인 등을 주장한다.[92]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이민 제한책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33]
그 밖에 포퓰리즘 배격, 동성애 및 동성 결혼 반대를 강령으로 한다.[92] 다문화주의에 대해서는 영국 사회가 이슬람화나 이슬람주의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반대한다.[92] 당수인 그리핀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34]
4. 조직 및 구조
결성 당시, 영국국민당(BNP)은 내부 분쟁과 파벌주의로 어려움을 겪었던 국민전선(NF)의 위원회 기반 집단 지도 체제를 의도적으로 피했다.[7] 대신, 당은 "지도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매우 계층적인 구조로 설립되었으며, 중앙 의장이 당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졌다.[77][30] 당원들의 기층 조직은 거의 공식적인 권한을 갖지 못했고, 내부 민주주의가 부족했다.[77] 당 대표 선출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닉 그리핀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타인달(Tyndall)로부터 물려받은 이 지도 원칙을 유지했다.[7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년에 여러 차례 회의를 여는 자문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위원들은 그리핀 자신이 직접 선출했으며 그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79][108]
당의 지부와 지역 단체는 당 내에서 "단위(units)"로 불렸다.[79] 이들은 추종자 모집, 자금 조달, 선거 운동 등의 역할을 맡았다.[79] 타인달 시절, 당은 매우 간소한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정규 직원이 없었고 1980년대 대부분 동안 전화번호조차 없었다.[77][78] 대신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는 소수의 무보수 지역 조직자들에게 의존했다.[93] 초기 당원들은 기존 극우 운동 내부에서 모집되었기 때문에 선거 운동 경험과 기술이 부족했다.[89]
그리핀이 당권을 잡은 후, 그는 당 활동 관리를 돕기 위해 행정 및 문의 부서, 그룹 개발 부서, 법무 부서, 보안 부서, 홍보 부서 등 다양한 내부 부서를 신설하며 조직 전문화를 시도했다.[79] 그리핀은 당원 교육 및 훈련 강화, 인센티브 제공, 안정적인 수입원 확보, 파벌주의 및 반대 의견 극복을 통해 더욱 전문적인 당 조직을 구축하려 노력했다.[88] 그는 2001년 당원들을 위한 "연례 대학"을 설립하고 2007년 교육 및 훈련 부서를 신설했으며[90], 2008년과 2010년에는 고위 관리들을 위한 "여름 학교" 설립을 감독했다.[90] 당은 또한 정규직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하여 2001년 3명에서 2007년 13명으로 늘렸다.[93]
당원들의 헌신을 유지하고 장려하기 위해, 그리핀은 2007년 스웨덴의 국민민주당 사례를 따라 새로운 "투표 회원(voting member)" 제도를 도입했다.[90] 2년 동안 당원이었던 사람은 "투표 회원"이 될 자격을 얻고,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쳤다. 이 기간 동안 교육 및 훈련 세미나 참석, 일정량의 활동 참여, 당에 특정 금액 기부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90] 이를 완료하면 총회 및 연례 회의에서 특정 사안에 대해 투표하고, 정책 토론에 참여하며, 중간 및 고위직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 제도는 당의 고위직에 오르는 인물들이 당의 이념과 선거 전략에 대해 충분히 훈련받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90]
그리핀은 제휴 네트워크 및 조직 설립을 통해 BNP를 중심으로 더 폭넓은 사회 운동을 구축하고자 했다.[85] 많은 경우, 이러한 조직들은 대중에게 BNP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숨기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40] 그러나 이러한 제휴 단체 대부분은 자금 부족과 적은 회원 수로 어려움을 겪었다.[87] BNP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하위 그룹 및 조직을 설립했다:
- 자체 레코드 레이블인 그레이트 화이트 레코드(Great White Records)[87]
- 라디오 방송국[87]
- 노동 조합인 솔리대리티 - 영국 노동자 연합(Solidarity – The Union for British Workers)[87]
- 청년 단체인 영국 국민당 청년회(Young BNP), 이후 "중세 시대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럽을 구원한 우리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영국 국민당 십자군(BNP Crusaders)으로 개명[87]
- 농촌 지역 지지 확보를 위한 땅과 사람들(Land and People) 그룹[87][40]
- 여성 및 가족 모집을 위한 가족 서클(Family Circle)[87][40]
- 전직 군인을 위한 재향군인 그룹(Veterans Group) 및 영국 전직 군인 협회(Association of British ex-Servicemen)[87][40]
- 백인 영국인에 대한 차별에 맞선다는 명목의 이민자 인종차별 반대 가족(Families Against Immigrant Racism, FAIR)[87][122][137]
- 영국 내 반이슬람 힌두교 및 시크교 단체와의 관계 구축을 위한 인종 연락 위원회(Ethnic Liaison Committee)[87][135][41][116]
- 미국 내 지지 확보를 위한 영국 국민당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the British National Party)(AFBNP)[87][109]
- 영국 문화 및 정체성 홍보를 위한 북대서양 제도(Islands of the North Atlantic, IONA)[40]
- 대학생 대상 홍보를 위한 영국 학생 협회(British Students Association)[40]
-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한 보험 중개 회사 알비온 생명 보험(Albion Life Insurance) (2006년 9월 설립, 11월 운영 중단)[54][55]
- 영국 무슬림 협의회(Muslim Council of Britain)에 대항하고 "이슬람화"에 반대하기 위한 영국 기독교 협의회(Christian Council of Britain)(CCB)[41]
또한, 그리핀이 이끄는 BNP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블루 블랑 루주(Blue Blanc Rouge)'를 모델로 한 연례 행사인 빨강, 흰색, 파랑 축제(Red, White and Blue festival)를 개최했다.[87][88][109] 이 축제는 당 활동가들을 결집시키고 보다 가족 친화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였으나, 스티거(Stigger), 네메시스(Nemesis), 워로드(Warlord)와 같은 백인 우월주의 스킨헤드 밴드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87][88] 2001년 축제에는 약 1,000명의 당원이 참석했다.[87]
그리핀의 지도 아래 BNP는 주류 언론의 부정적인 묘사에 대응하여 자신들을 홍보하기 위해 대안 언론 활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95] 1995년에 개설된 자체 웹사이트[96]를 기반으로 인터넷 텔레비전 채널 'BNPtv'를 만들었으며[95], 명시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하여 당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홍보했다.[96] 상품 판매를 위한 온라인 마케팅 플랫폼 엑스칼리버(Excalibur)도 설립했다. BNP는 2003년 영국 정당 중 웹사이트 방문자 수가 가장 많다고 주장했고[96], 2011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많다고 주장했다.[96] 2007년 9월,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는 온라인 경쟁 정보 서비스인 Hitwise의 데이터를 인용하여 BNP 웹사이트 방문자 수가 영국 정당 웹사이트 중 가장 많다고 보도했다.[56]
5. 논란
브리튼 국민당(BNP)은 창당 이래 인종차별, 폭력 선동, 홀로코스트 부정 등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왔다. 당의 핵심 정책인 이민 반대는 외국인 혐오 캠페인으로 이어졌으며, 이민자와 소수 민족을 백인 영국인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했다. BNP의 선전물은 유색인종을 범죄의 원인이자 일자리, 주택, 복지를 빼앗는 사회경제적 위협으로 그렸고, 영국의 복지 혜택에서 백인 영국인을 우선해야 한다는 복지 쇼비니즘을 주장했다. 또한, 임박한 인종 전쟁과 백인 멸종 음모론을 퍼뜨리며 백인 영국인이 인종적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장했다. 2009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시 당수 닉 그리핀은 이를 "피 없는 인종 말살"이라고 표현했다.
초기 BNP는 존 틴달의 지도 아래 영국 내 유색 인종의 강제 추방, 즉 "본국 송환"을 주장했다. 1990년대 초에는 "우리의 최종 해결책: 본국 송환"이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핀이 당권을 잡은 후에는 유색 인종에게 영국을 떠나도록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자발적 본국 송환' 정책으로 공식 변경했지만, 여전히 비백인 이민의 즉각적인 중단과 불법 체류 이민자의 추방을 강력히 주장했다.
BNP 지도부와 고위 간부 다수는 인종 혐오 선동 및 폭력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다. 존 헤이건(John Hagan)은 BNP가 제도적 권력을 얻기 위해 극우 극단주의 폭력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90] 1997년 휴먼 라이츠 워치 보고서는 BNP가 스킨헤드 그룹에서 조직원을 모집하고 인종차별적 폭력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91] 닉 그리핀 자신도 과거에는 "탈근대적 우익 정당"이 아니라 "'백인의 권리를 옹호하라'는 슬로건을 잘 훈련된 발과 주먹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하고 규율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폭력의 필요성을 암시했다.[92] 당수인 그리핀은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으로도 비판을 받았다.[134]
주요 당원들의 유죄 판결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극단적인 성향 때문에 BNP는 영국 사회 전반으로부터 거센 비판과 배척을 받았다. 2011년 정치학자 콥시와 맥클린은 BNP를 "영국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당"으로 묘사했다. 보수당의 마이클 하워드는 BNP를 "정당으로 위장한 폭력배 집단"이자 영국 민주주의의 "오점"이라고 비판했고, 데이비드 캐머런은 "증오로 번성하는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조직"이라고 규정했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불쾌하고 극단적인 조직"으로,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는 "폭력배와 파시스트들의 정당"이라고 불렀다.
종교계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2004년 잉글랜드 국교회 총회는 BNP 지지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영국 전역의 기독교 단체들은 BNP의 배타성이 기독교의 포용성과 관용 정신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윈스턴 처칠의 가족은 BNP가 처칠의 이미지와 발언을 사용하는 것을 "모욕적이고 역겹다"고 비판했고,[99] 가수 베라 린 역시 자신의 노래가 담긴 CD를 BNP 웹사이트에서 판매하는 것을 비난했다.[100] 2009년 영국 왕립 레전은 그리핀에게 추모 양귀비 상징을 착용하지 말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101]
영국 경찰, 소방대 노동조합, 잉글랜드 국교회 등 여러 조직에서는 회원들의 BNP 가입을 금지했다.[102] 교도소 직원과 교사의 BNP 가입도 금지되었다.[103][104][105] 당원 명단이 유출된 후에는 명단에 오른 경찰관들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106] 당 가입 사실이 알려져 직장을 잃거나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주류 언론 역시 BNP에 대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민 문제에 대해 비슷한 강경 노선을 보이는 우익 타블로이드 신문조차 BNP를 비판했다. 예를 들어 2003년 ''데일리 메일''은 BNP를 "독성이 강한 광신자들"로, 2004년 ''더 선''은 "BNP: 끔찍하게 불쾌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반파시즘 단체인 희망이 아닌 증오 등은 BNP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학계에서도 BNP의 선거 성공 이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으며 비판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5. 1. BBC 출연 논란 (2009)
2009년 10월 22일, 당시 브리튼 국민당 당수였던 닉 그리핀은 BBC의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슬람교는 영국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함께 출연한 다른 패널들과 일반 시민 참가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출연을 계기로 BBC 건물 앞에서는 시민 단체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135]6. 역대 선거 결과
브리튼 국민당(BNP)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선거에 출마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포드와 매슈 구드윈의 연구에 따르면, 브리튼 국민당 지지는 주로 북부 및 미들랜드 지역의 쇠퇴하는 공업 도시에 거주하는 고령의 저학력 노동 계급 남성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과거 주요 극우 정당이었던 내셔널 프런트(National Front)가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던 것과 대조적이다.[66]
'''지방 선거'''
브리튼 국민당의 첫 선거 성공은 1993년 런던 타워햄리츠구 밀월(Millwall) 지역구 의회 선거에서 데릭 비컨(Derek Beackon)이 당선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다. 이후 2002년 지방 선거에서 3명의 후보가 번리 자치구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다시 지방 의회에 진출했다.[72] 2000년에는 헤리퍼드셔(Herefordshire)의 브롬야드 앤 윈슬로(Bromyard and Winslow) 교구 의원으로 존 헤이콕(John Haycock)이 선출되었으나, 6개월간 의회 회의에 불참하여 직위를 박탈당했다.
2009년 한때 당 소속 지방 의원은 55명에 달했으나,[72] 2013년 지방 선거 이후에는 잉글랜드에서 단 두 명의 자치구 의원만 남게 되었다.[73]
브리튼 국민당은 지방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속 의원들은 종종 의회 내에서 고립되었으며, 다른 주요 정당 의원들은 이들과 협력하는 것을 꺼렸다. 또한 브리튼 국민당 의원들이 모든 지역 주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데릭 비컨은 당선 후 밀월의 아시아계 주민들에게는 봉사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브리튼 국민당 의원들의 의회 회의 참석률이 낮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조사 결과 대체로 평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브리튼 국민당 의원이 당선된 지역에서는 인종적, 종교적 동기의 범죄가 증가했다는 증거가 있다. 1993년 비컨 당선 후 타워햄리츠 자치구에서 인종 차별 공격이 급증했으며, 일부 사건에는 당원들이 직접 연루되기도 했다. 당시 당의 전국 조직자였던 리처드 에드먼즈(Richard Edmonds)는 흑인 남성과 그의 백인 여자 친구를 공격한 혐의로 3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런던 의회'''
2008년 런던 의회 선거에서 브리튼 국민당의 리처드 바른브룩(Richard Barnbrook) 후보가 런던 전역 투표에서 5.3%를 득표하여 런던 의회(London Assembly) 의석을 획득했다.[74] 그러나 그는 2010년 8월 당의 징계를 받은 후 탈당하여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75]
'''웨일스 국민의회'''
2007년 웨일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브리튼 국민당은 총 20명의 후보를 내세웠고, 당시 당수였던 닉 그리핀(Nick Griffin)도 출마했다.[76] 의석을 얻지는 못했지만 총 42,197표(4.3%)를 득표했다. 2011년 선거에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목록에 총 27명의 후보를 내세웠으나, 득표율은 2.4%(22,610표)로 감소했다.[77]
'''스코틀랜드 의회'''
2007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브리튼 국민당은 32명의 후보를 내세워 공적 자금 지원과 선거 방송 자격을 얻었으나, 이는 비판을 받았다.[78] 당은 24,616표(1.2%)를 얻었지만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2011년 선거에서도 32명의 후보를 냈으나 득표율은 0.78%(15,580표)로 더 하락했다.[79]
'''북아일랜드 입법 의회'''
브리튼 국민당은 2011년 북아일랜드 입법 의회 선거에 처음으로 3개 선거구에 후보를 내세웠다. 총 1,252표(0.2%)를 얻었지만 의석은 얻지 못했다.[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