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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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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는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의 지휘 아래 남아메리카 해안의 수로학적 탐사를 목표로 1831년부터 1836년까지 진행되었다. 이 탐사는 군사 및 상업적 목적의 해도 제작을 위해 해안의 수심과 항해 경로를 측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찰스 다윈이 박물학자로 참여하여 지질학적 관찰과 생물 표본 수집을 수행했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생물 종의 다양성을 연구하며 진화론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획득한 화석 연구를 통해 당시 멸종된 동물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탐사 결과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출판과 리처드 오언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연구 발표로 이어져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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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
탐험 정보
목표남아메리카 해안 조사
리더로버트 피츠로이
시작일1831년 12월 27일
종료일1836년 10월 2일
HMS 비글
성과다윈의 진화론으로 이어진 연구
비글호 항해
비글호 항해 경로
사건 개요
설명찰스 다윈을 태우고 간 과학 연구 임무

2. 탐사 준비

로버트 피츠로이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해군성은 킹 사령관에게 남아메리카 해안에 대한 정확한 수로 측량을 지시했다. 이전 남아메리카 탐사에는 필립 파커 킹의 지휘 아래 HMS 어드벤처와 HMS 비글이 참여했다. 탐사 중 비글호의 선장인 프링글 스토크스가 자살했고, 배의 지휘는 조지 그래프턴 4세 공작의 조카인 젊은 귀족 로버트 피츠로이에게 넘어갔다. 1830년 10월 14일 비글호가 데번포트 조선소로 돌아온 후, 킹 선장은 은퇴했다.[6]

27세의 피츠로이는 남아메리카 탐사를 계속하기 위한 두 번째 원정을 지휘하려 했지만, 해군 본부가 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푸에고인들을 어떻게 돌려보낼지 걱정했다. 그는 소규모 상선을 이용하려 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해군 본부에 연락이 닿아 HMS 샹티클리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배의 상태가 좋지 않아 비글호가 대신 투입되었다. 1831년 6월 27일, 피츠로이는 항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존 클레멘츠 위컴과 바솔로뮤 제임스 설리번이 부관으로 임명되었다.[7]

해군 본부 수로학자인 프랜시스 보퍼트는 탐사를 계속하기 위해 항해를 활용할 방법을 결정하도록 초청되었고, 피츠로이와 함께 세계 일주를 계속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비글호는 1831년 7월 4일 피츠로이 선장의 지휘 아래 취역되었다.[7]

피츠로이는 윌리엄 스노우 해리스가 발명한 피뢰침을 시험한 최초의 배 중 하나인 비글호에 심피에소미터 5개 등 다양한 장비를 갖추었다.[9] 그는 또한 어거스터스 얼을 예술가 겸 도안가로 고용하여 탐사 기록을 담당하게 했다.[9] 이전 항해에서 영국으로 온 푸에고인 3명은 선교사 리처드 매튜스와 함께 비글호를 타고 푸에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7][10]

2. 1. 탐사 목적

이 탐사의 주요 목적은 이전 탐사의 연장으로서 남아메리카 해안의 수로학적 탐사였다. 이를 통해 군용 또는 상업적 용도로 항로와 수심을 보여주는 해도를 작성하고, 배에서 보이는 언덕의 그림과 높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탐사의 출발점으로 표시된 리오데자네이루의 경도를 정확히 표시할 예정이었다.[2]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가 열리면서 해양 국가들은 식민지 개척과 급속한 산업화 경쟁에 돌입했다. 물자 공급과 증대되는 상업 활동의 물류 시스템은 해상 항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필요로 했지만, 기존의 해도는 불완전하고 부정확했다. 스페인계 아메리카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의 무역 독점이 종식되었고, 영국은 1825년 아르헨티나와의 상업 조약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남아메리카 동해안의 해상 및 상업적 중요성이 커졌다. 해군성은 킹 사령관에게 "리우데라플라타강 남쪽 입구에서 칠로에까지, 그리고 티에라델푸에고를 돌아 남아메리카 반도의 남쪽 해안"에 대한 정확한 수로 측량을 지시했다. 다윈은 자신의 항해에 대해 "탐험의 목적은 1826년부터 1830년까지 킹 선장이 시작한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측량을 완료하고, 칠레, 페루 및 태평양의 일부 섬의 해안을 측량하고, 세계를 횡단하는 일련의 크로노미터 측정을 수행하는 것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 탐험은 또한 분쟁 지역을 방문하는 외교적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해군성 각서는 자세한 지침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초기 측량에서 리오데자네이루의 경도에 대한 이견을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자오선 거리의 기준점이 되기 때문에 필수적이었다. 정확한 해상 크로노미터는 경도를 결정하는 데 필요하며, 1800년 이후에야 경제적으로 가능해졌다. ''비글''호는 보정을 위해 22개의 크로노미터를 탑재했다. 배는 크로노미터의 4일간의 평가를 위해 지정된 지점에서 정차하고 천문 항법을 통해 이를 확인해야 했다. 프라야와 페르난두 데 노로냐에서 관측을 수행하여 윌리엄 피츠윌리엄 오웬과 헨리 포스터의 이전 측량과 비교하여 보정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알뱅 루신의 측량에서 부정확하게 표시된 아브롤료스 군도 암초의 범위를 측량한 다음,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동하여 빌레가뇽 섬의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했다.[2]

측량의 실제 작업은 라플라타 강 남쪽에서 시작되어 보급을 위해 몬테비데오를 왕복하는 것이었다. 티에라델푸에고 측량 및 포클랜드 제도의 항구 접근로를 포함한 우선 순위에 대한 세부 사항이 제공되었다. 그 다음 서해안을 시간과 자원이 허용하는 한 북쪽으로 측량해야 했다. 그런 다음 사령관은 자신의 서쪽 항로를 결정할 것이었다. 계절이 허락한다면 갈라파고스 제도를 측량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비글''호는 타히티의 퐁트 베누스로 이동한 다음 포트 잭슨, 호주로 이동하여 크로노미터를 확인할 알려진 지점을 확인할 예정이었다.[3]

정교한 그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차트와 계획에는 바다에서 본 지형에 대한 메모와 단순한 경관이 포함되어야 했으며, 산의 측정된 높이를 표시해야 했다. 조수와 기상학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기록도 필요했다. 추가 제안은 태평양의 원형 산호 환초에 대한 지질학적 측량으로, 단면도와 조류의 흐름을 포함하여 그러한 산호초의 형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4]

2. 2. HMS 비글호



피츠로이는 HMS 비글호를 광범위하게 개조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Beagle''은 즉시 광범위한 재건 및 개조를 위해 도크로 옮겨졌다. 새로운 갑판이 필요했기 때문에 피츠로이는 상부 갑판을 뒤쪽으로 약 20.32cm, 앞으로 약 30.48cm 더 높게 올렸다.[9] ''체로키''급 브리그 슬루프는 조종이 어렵고 침몰하기 쉽다는 평판을 가진 "관 브리그"였다.[8] 갑판이 선창에 물이 덜 고이도록 하여 물이 더 빨리 배수되도록 함으로써, 갑판을 높이 올린 것은 ''Beagle''의 조종성을 향상시키고 배가 지나치게 무거워져 전복될 위험을 줄였다. 선체에 추가로 외피를 덮어 약 7톤의 용적과 아마도 15톤의 배수량을 더했다.[6]

이 배는 윌리엄 스노우 해리스가 발명한 피뢰기를 테스트한 최초의 배 중 하나였다. 피츠로이는 알렉산더 에디가 특허를 낸 ''심피에소미터'' 5개를 구했는데, 이 기기는 수은이 없는 기압계의 일종으로, 해군 본부에서 요구하는 정확한 판독값을 제공했기 때문에 피츠로이가 선호했다.[9]

''Beagle''은 장교와 승무원 외에도 공식적인 직책이 없는 승객인 여러 임시직을 태웠다. 피츠로이는 선실에 보관된 22개의 해양 크로노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수학 기구 제작자를 고용했고, 개인 자격으로 어거스터스 얼이라는 예술가 겸 제도사를 고용했다.[9]

2. 3. 승무원 및 동승자



로버트 피츠로이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아메리카 탐사를 계속하기 위한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를 지휘하게 되었다. 해군 본부의 지원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푸에고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소형 상선을 이용하려 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해군 본부에 연락이 닿아 결국 비글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7] 그는 항해 지휘관으로서 존 클레멘츠 위컴과 바솔로뮤 제임스 설리번을 부관으로 임명했다.[7]

피츠로이는 탐사 중 지질학적 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질학 지식을 갖춘 박물학자를 동반하고자 했다. 그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제1권을 찰스 다윈에게 주며 지질학적 특징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도록 부탁했다.[42]

1840년의 다윈, 항해 이후 그의 ''여행기 및 소견'' 출판 이후


찰스 다윈케임브리지 대학교존 스티븐스 헨슬로 교수의 추천으로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동승하게 되었다. 다윈은 애덤 세지윅과의 지질학 현장 학습을 통해 지질학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헨슬로는 다윈이 자연사에서 주목할 만한 모든 것을 수집, 관찰 및 기록하는 데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22] 다윈은 자비로 여행하는 손님이었지만, 자신의 수집품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피츠로이와 프랜시스 보퍼트로부터 표본 할당 권리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12]

피츠로이는 윌리엄 스노우 해리스가 발명한 피뢰침을 테스트한 최초의 배 중 하나인 비글호에 심피에소미터 5개 등 다양한 장비를 갖추었다.[9] 그는 또한 어거스터스 얼을 예술가 겸 도안가로 고용하여 탐사 기록을 담당하게 했다.[9] 이전 항해에서 영국으로 온 푸에고인 3명은 선교사 리처드 매튜스와 함께 비글호를 타고 푸에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7][10]

3. 탐사 경로 및 주요 발견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는 1831년 12월 27일 플리머스를 출발하여 남아메리카 해안을 중심으로 측량 임무를 수행하고, 세계 일주를 거쳐 1836년 10월 2일 팔머스에 귀환한 여정이다. 이 항해 동안 찰스 다윈은 탐사 경로를 따라 다양한 지질학적 특징, 화석, 생물들을 관찰하고 수집하여, 훗날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발견들을 했다.

항해 초반, 비글호는 마데이라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에 잠시 들렀으나, 콜레라 발생으로 인해 상륙하지 못했다. 이후 카보베르데 제도의 상투에 상륙하여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하고, 지질학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55][56][57]

남아메리카에서는 해안을 따라 측량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다윈은 내륙으로 긴 여정을 떠나 가우초들과 함께 파타고니아를 탐험하고, 푼타알타에서 거대한 멸종 포유류의 화석을 발견했다.[75] 특히, ''메가테리움''과 아르마딜로 화석은 다윈의 진화론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81][83] 정치적 변화 속에서 몬테비데오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항해하며 외교적 역할도 수행하였다.[72]

티에라델푸에고에서는 원주민 야간을 만나 그들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문명화된 푸에기안들과 비교하며 큰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87] 이후 포클랜드 제도에서 종과 서식지의 관계를 연구하고, 파타고니아로 돌아와 스쿠너를 구입하여 '어드벤처'로 개명했다.[88] 산타 크루즈 강 탐험에서는 라이엘의 이론에 따라 점진적으로 상승한 해안이었다는 자신의 해석에 대해 논의했다.[103] 칠로에 제도에서는 검은 갈탄과 화석화된 나무 조각을 발견했다.[107] 콘셉시온 지진을 직접 겪고, 지진으로 인한 지형 변화를 관찰하며 라이엘의 지질학 이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109][110]

갈라파고스 제도에서는 섬마다 다른 갈라파고스 거북과 웃음거미의 변이를 관찰하고, 다양한 동식물 표본을 수집했다.[119][48][118] 특히, 섬마다 다른 다윈 핀치는 다윈의 진화론에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태평양을 횡단하며 타히티와 뉴질랜드를 거쳐 호주에 도착한 다윈은 오리너구리와 같은 독특한 유대류를 관찰하고, 원주민 문화를 접했다.[128][129]

귀환길에는 코코스 제도에서 산호초 형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하고, 모리셔스, 희망봉,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섬 등을 거치며 지질학적, 생물학적 관찰을 계속했다.[129][135][143][144][155] 마지막으로 브라질 바이아를 재방문하여 경도 측정값을 재확인하고, 1836년 10월 2일 팔머스에 도착하여 항해를 마쳤다.[143][157][158]

3. 1. 대서양 제도

마데이라에 잠시 들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후, 비글호는 1월 6일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격리되는 바람에 산타 크루스에 상륙하지는 못했다.[51]

1월 10일, 다윈은 배 뒤에 매달아 사용하는 플랑크톤 네트를 고안하여 시험했는데, 이는 1816년 존 보건 톰슨 이후 두 번째 사용 기록이었다. 다음 날, 그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수집하고 "자연의 단계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생물체 중 많은 것들이 그 형태와 풍부한 색상 면에서 매우 훌륭하다"라고 기록했다.[51]

6일 후, 카보베르데 제도의 화산섬인 상투의 프라이아에 상륙했다. 다윈은 이곳을 ''여행기''의 묘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삼았다.[52] 그는 황량하고 불모의 화산섬이라는 첫인상을 받았지만, 마을 방문 후 "열대 식물의 영광을 처음으로 보았"고 "영광스러운 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피츠로이는 콰일 섬에 천문대를 설치하여 섬의 정확한 위치를 결정했고, 다윈은 조수 웅덩이에서 생생한 열대 산호를 발견하고 콰일 섬의 지질을 조사하며 수많은 바다 동물을 수집했다.[53][54]

다윈은 콰일 섬을 세인트 자고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고, 층서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는 검은 화산암층 사이에 부서진 산호와 조개 껍질로 형성된 단단한 흰색 암석 층을 묘사했으며, 세인트 자고의 검은 절벽에서도 해수면 위 약 12.19m 높이에 유사한 흰색 층이 수평으로 뻗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조개 껍질이 "오늘날의 것들과 같다"고 판단하고, 지질학적으로 최근에 용암류가 바다 밑의 이 껍질 모래를 덮었고, 그 후 지층이 서서히 현재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추측했다. 이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에서 제시된 지구 지각의 점진적인 상승과 하강에 대한 논문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다윈은 "다우비니 박사는 세라피스 신전의 현재 상태를 언급하면서 건물을 균열 없이 땅 표면을 올리는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 나는 세인트 자고에서 어떤 장소에서는 집을 손상시키지 않고 마을을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언급하며 라이엘을 지지했다.[55] 그는 헨슬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질학은 매우 흥미로웠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안이 융기된 몇 가지 사실이 있으며... 이는 라이엘 씨에게 흥미로울 것입니다."라고 썼다.[56] 다윈은 섬에 있는 동안 지질학에 관한 책을 쓸 영감을 받았고,[57] 훗날 "라이엘이 결코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여전히 그의 눈을 통해 부분적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다.[58]

벤자민 바이노 등과 함께 리베이라 그란데와 세인트 도밍고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피츠로이는 자성 측정을 위해 체류 기간을 23일로 연장했다.[63] 다윈은 헨슬로우에게 "색깔을 바꾸는 가장 놀라운 능력을 가진 여러 문어 표본"을 수집했다고 알렸는데,[56] 헨슬로우는 "그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신선한 관찰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64]

3. 2. 남아메리카

남아메리카es에서 ''비글''호는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측량 작업을 수행하여 정밀한 측정과 재검토를 가능하게 했다. 다윈은 현지에서 여행 동반자와 함께 내륙으로 긴 여정을 떠났고, ''비글''호가 우편물과 신문을 받는 항구로 돌아올 때 미리 약속된 대로 돌아왔다. 다윈의 노트, 일지, 그리고 수집품들은 해군성 우편 서비스를 통해 영국으로 보내졌다.[2]

폭풍우 때문에 페르난두 데 노로냐에 하루만 머물렀고, 피츠로이는 바이아 데 토도스 산토스(만 성)로 이동하여 크로노미터를 평가하고 물을 보충했다. 그들은 대륙에 도착하여 2월 28일에 항구에 도착했다. 다윈은 바이아의 웅장한 광경에 감격했고, 다음 날 열대 숲에서 혼자 산책하며 "기쁨에 도취"되었다.[51] 그는 노예 제도의 광경을 불쾌하게 여겼고, 피츠로이가 노예 주인의 방문을 묘사하며 이를 옹호했을 때, 노예들이 주인이 자유를 원하는지 묻자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다윈은 그러한 상황에서의 대답은 가치가 없다고 제안했다. 그의 말을 의심받아 격분한 피츠로이는 화를 내며 다윈을 그의 일행에서 쫓아냈다. 장교들은 그러한 폭발을 "뜨거운 커피"라고 별명을 붙였고, 몇 시간 안에 피츠로이는 사과하며 다윈에게 남아달라고 요청했다.[60]

''비글''호는 4월 4일 리우데자네이루 항구로 이동했다. 리우의 빌레가뇽 섬에서 필요한 관측은 경선 거리에서 바이아에서 리우까지 루생의 결과와 비교하여 의 경도 불일치를 보여주었다.[2] 4월 24일, 다윈은 배로 돌아왔고, 다음 날 그를 보타포구 별장으로 데려가는 보트가 물에 잠기면서 그의 책, 서류, 장비가 약간 손상되었다. 그는 여동생에게 비글호 항해기를 보냈고, 배가 바이아로 가는 동안 얼과 함께 별장에 머물기로 결정했다.[71] 승무원 8명이 리우 근처 마카쿠 강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커터에서 메추라기 사냥을 갔다. 5월 2일에 돌아온 후, 일부는 열병에 걸렸다. 배는 5월 10일에 출발했고, 항해 중에 선원이 사망했고, 선실과 어린 사관후보생이 바이아에서 사망했다. 배는 6월 3일에 리우로 돌아왔다. 그의 측정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피츠로이는 루생에게 수정을 보냈다.[71] 별장에서, 다윈은 헨슬로우에게 자신의 수집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첫 번째 편지를 썼다. 그는 "우리가 몬테비데오에 도착할 때까지 상자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 배 안에서 목수와 나 모두에게 포장하는 것은 너무 큰 시간 낭비이다"라고 말했다.[56] 그는 6월 26일에 배로 돌아왔고, 그들은 7월 5일에 출항했다.[71]

정치적 변화 속에서, ''비글''은 외교적 역할을 했다.[72] 7월 26일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을 때, HMS ''Druid''는 "작전을 위해 치워라"고 신호를 보냈고, 영국 재산이 성장하는 불안으로 라바예하가 폐위된 후 압수되었다. 그들은 크로노미터를 위해 관측을 했고, 7월 31일에 총독을 만나 지도를 얻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항해했지만, 경비함의 경고 사격을 받았다. 피츠로이는 즉시 불만을 제기하고 떠났고, 추가 도발에 대해 함포 사격을 위협했다. 8월 4일에 돌아왔을 때, 피츠로이는 ''Druid''의 선장에게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떠났다고 알렸다. 8월 5일, 마을 관리와 영국 영사는 피츠로이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다윈과 배에서 온 50명의 무장한 남자들과 함께 그는 요새에 도착했고, 다음 날 대치 상태를 남기고 철수했다. 다윈은 흥분을 즐겼고,[72] ''Druid''는 8월 15일에 정부로부터 긴 사과와 경비함 선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73]

8월 22일, 삼보롬본 만에서 수심 측정을 한 후, ''비글''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산 안토니오 곶에서 해안 측량 작업을 시작했다.[74]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남부에 위치한 바히아 블랑카에서 다윈은 가우초들과 함께 내륙의 파타고니아로 들어갔다. 그는 그들이 "타조"(레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볼라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구운 아르마딜로를 먹었다. 9월 22일, 피츠로이와 함께 그는 "만 주변을 매우 즐겁게 항해"했고, 배에서 정도 떨어진 곳에서 푼타 알타에서 잠시 멈췄다. 푼타 근처의 낮은 절벽에서 다윈은 수많은 조개 껍질과 거대한 멸종된 포유류의 화석화된 이빨과 뼈를 포함하는 역암을 발견했다.[75] 껍질과 아르마딜로 화석이 있는 흙층 근처의 지층에서 그는 격변이 아닌 조용한 조수 퇴적을 암시했다.[76] 다윈은 며칠 동안 수많은 화석을 수집했다.[78]

둘째 날 대부분은 다윈이 부드러운 암석에 박혀 있는 큰 두개골을 발굴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에게는 코뿔소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80] 10월 8일, 그는 현장으로 돌아가 턱뼈와 이빨을 발견했고, 이를 보리 드 생뱅상의 ''Dictionnaire classique''를 사용하여 식별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점과 큰 두개골을 ''메가테리움'' 화석, 또는 아마도 ''메갈로닉스'' 화석이라고 집으로 편지를 써서 묘사했고, 유럽에서 유일한 표본이 마드리드 왕실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고 흥분하며 언급했다.[81] 같은 층에서 그는 다각형 판으로 된 뼈 갑옷의 큰 표면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이들이 이 지역에서 흔한 작은 생물과 같은 거대한 아르마딜로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르주 퀴비에의 마드리드 표본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설명과 우드바인 패리시가 수집한 화석에 대한 최근 신문 보도를 통해 다윈은 뼈 갑옷이 그 화석을 ''메가테리움''으로 식별한다고 생각했다.[83] 피츠로이와 함께 다윈은 10월 19일, 만 건너편 떨어진 몬테 에르모소로 가서 푼타 알타의 거대한 빈치류 포유류와 대조되는 작은 설치류의 수많은 화석을 발견했다.[84]

그들은 몬테비데오로 돌아갔고, 11월 2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다시 방문하여 이제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경비선을 지나갔다. 신문에 보도된 ''메가테리움''의 발견자(우드바인 패리시의 대리인)에게 질문한 결과, 다윈은 그것이 자신의 화석 발견과 같은 지층에서 나왔다고 결론지었다.[85] 그는 또한 "이전 거인들에게 속한다고 확신하는" "일부 거대한 뼈 조각"을 "구입"했다. 11월 14일부터 몬테비데오에서 그는 모든 화석을 포함하여 자신의 표본을 포장하고 이 화물을 ''듀크 오브 요크'' 팔머스 우편 소포로 보냈다.[82]

집에서 온 우편물에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제2권의 사본이 포함되어 있었고,[43] 이는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서로 다른 종의 공유된 조상이나 점진적인 지질 변화에 일치하는 전반적인 진전이 없었다. 대신, 종들이 신비하게 나타나 "창조의 중심"에 밀접하게 적응하고, 환경이 불리하게 변하면 멸종되는 계속되는 순환이었다.[86]

티에라델푸에고 원주민, 콘래드 마르텐스 그림


1832년 12월 18일, 그들은 티에라델푸에고에 도착했고, 다윈은 선교사로 데려온 세 명의 푸에기안(York Minster, 푸에기아 바스켓, 제미 버튼)의 "문명화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야간 원주민의 조야한 야만성에 놀랐다. 그는 원주민 푸에기안과의 첫 만남을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본 가장 흥미롭고 특이한 광경이었다.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야생 동물과 가축의 차이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더 큰 발전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묘사했다. 반면, 그는 제미에 대해 "그가 같은 인종이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여기서 처음 만난 비참하고 타락한 야만인과 같은 특성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많은 훌륭한 자질이 아직도 나에게 놀랍다."라고 말했다.[87]

1833년 1월 23일, "버튼스 랜드" 섬에서 그들은 오두막, 정원, 가구, 도자기를 갖춘 선교 기지를 세웠다. 9일 후에 돌아왔을 때, 소유물은 원주민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똑같이 분배되었다. 매튜스는 포기하고 배로 돌아갔고, 세 명의 문명화된 푸에기안은 선교 사업을 계속했다. '비글' 호는 포클랜드 제도로 향했고, 영국이 돌아온 직후에 도착했다. 다윈은 종과 서식지의 관계를 연구했고, 웨일스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고대 화석을 발견했다. 피츠로이는 측량을 돕기 위해 스쿠너를 구입했고, 그들은 파타고니아로 돌아와 새로운 구리 바닥을 장착하고 이름을 '어드벤처'로 바꿨다. 심스 코빙턴은 다윈의 표본 보존을 도왔고, 그의 수집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피츠로이의 동의를 얻어 코빙턴을 연봉 30파운드에 전임 하인으로 고용했다.[88]

두 척의 배는 아르헨티나의 리오 네그로로 항해했고, 1833년 8월 8일 다윈은 가우초들과 함께 또 다른 내륙 여행을 떠났다. 8월 12일, 그는 당시 징벌 원정을 이끌며 원주민 "인디언"에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펼치고 있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장군을 만났고, 그로부터 여권을 받았다. 그들이 팜파스를 건너면서, 가우초와 인디언들은 다윈에게 희귀하고 더 작은 종의 레아에 대해 이야기했다.[89] 바히아 블랑카에서 사흘을 보낸 후, 그는 ''비글''호를 기다리는 데 지쳐 8월 21일 푼타 알타를 다시 방문하여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지역의 지질학을 검토하면서 뼈가 조개껍질보다 더 오래되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뼈를 찾는 데 매우 성공했고, 9월 1일에는 뼈가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거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다.[91]

그는 다시 출발하여 10월 1일 카르카라냐 강의 절벽을 탐사하던 중 "엄청난 이빨"을 발견했고, 그 후 파라나 강의 절벽에서 수집하기에는 너무 무르지만 이빨 조각으로 매머드로 확인된 "두 개의 거대한 뼈 덩어리"를 보았다.[92] 질병으로 인해 산타페에서 지체되었고, 바위에 박힌 거대한 아르마딜로의 화석 케이스를 본 후, 그는 같은 암석층에서 말의 이빨을 발견하고 당황했는데, 말은 유럽인의 이주와 함께 대륙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94] 그들은 파라나 강을 따라 강선을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내려갔지만, 로사스에 동맹한 반군이 도시를 봉쇄하면서 혁명에 휘말렸다. 여권이 도움이 되었고, 코빙턴과 함께 그는 피난민을 태운 배를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몬테비데오에서 ''비글''호에 합류했다.[94]

측량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다윈은 우루과이의 반다 오리엔탈에서 "전속력" 여행을 떠나 우루과이 강을 보고, 메르세데스 근처의 미스터 킨의 농장을 방문하기 위해 리오 네그로 강으로 향했다. 11월 25일, 그는 "보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뼈가 메가테리움의 뼈로 밝혀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부서진 조각 몇 개만 추출할 수 있었다. 다음 날, 그는 근처의 집을 방문하여 "발견되었을 때 매우 완벽했을 메가테리움의 머리"를 약 2 실링에 샀지만, 그 이후로 이빨이 부서지고 아래턱이 없어졌다. 미스터 킨은 두개골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강으로 운송하도록 준비했다.[96] 라스 피에드라스에서, 한 성직자는 그에게 "특이한 무기"라고 스케치한 곤봉 모양의 꼬리를 포함한 화석을 보여주었다.[97] 그의 노트에는 강의 절벽 둑이 해저층에 의해 중단된 두 개의 층을 드러냈고, 이는 육지가 상승하고 하강했음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98]

''비글'' 항해에서 수집된 새에 대한 존 굴드의 설명에 1841년 출판된 다윈 레아의 삽화


몬테비데오로 돌아온 다윈은 오거스터스 얼이 건강 문제로 떠나야 한 후 ''비글''호에 탑승한 대체 예술가인 콘래드 마르텐스를 소개받았다. 그들은 남쪽으로 항해하여 12월 23일 포트 데저트에 정박했고, 다음 날 다윈은 과나코를 쏘아 크리스마스 식사를 제공했다. 새해 초, 마르텐스는 레아를 쏘았고, 그들은 다윈이 이것이 수수께끼의 작은 레아임을 깨닫고 그 유해를 보존하기 전에 그것을 즐겨 먹었다.[89] 1834년 1월 9일, 남쪽으로 더 내려가 포트 세인트 줄리안에 도착했고, 항구 근처 절벽에서 지역 지질을 탐사하면서 다윈은 "어떤 큰 동물, 제 생각에는 매머드의" 척추와 뒷다리 조각의 화석을 발견했다.[99] 1월 26일, 그들은 마젤란 해협에 들어섰고, 세인트 그레고리 만에서 키가 가 넘는 반문명화된 파타고니아 "거인"을 만났는데,[100] 다윈은 그들을 "훌륭한 실용적인 박물학자"로 묘사했다. 한 사람이 그에게 작은 레아가 남쪽에서는 유일한 종이고, 더 큰 레아는 북쪽에 머물며, 이 종은 리오 네그로 주변에서 만난다고 말했다.[100]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추가 조사를 마친 후, 그들은 1834년 3월 5일 선교사들을 방문하기 위해 돌아왔지만,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그러자 카누가 접근했고, 그들은 원주민 중 한 명이 제미 버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소지품을 잃고 원주민의 방식에 정착하여 아내를 맞이했다. 다윈은 "그렇게 완전하고 슬픈 변화"를 본 적이 없었다. 제미는 배에 올라 식기류를 제대로 사용하여 식사를 하고, 예전처럼 영어를 말한 다음,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수달 가죽과 화살촉을 선물하고 카누로 돌아가 아내와 합류했다.[100] 다윈은 첫 번째 방문에 대해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같은 세상에 놓인 동료 생물이라고 믿기 어렵다. .... 이것은 일반적인 추측의 대상이다; 덜 재능 있는 동물들이 삶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사람들에게 관해서 얼마나 더 합리적으로 물어볼 수 있을까"라고 썼지만,[100] 제미는 기꺼이 문명에 적응한 다음 자신의 원시적인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것은 어색한 질문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인종이 "공통 기준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이며, 형질 전환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종의 높은 계보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2권에서 표현된 편협한 견해와 충돌했다.[100]

이 무렵 다윈은 그의 노트에 포함된 일련의 에세이 중 첫 번째인 ''나의 지질학 노트를 읽고 반성''을 썼다.[96] 그는 반복적으로 육지가 상승하는 가능한 원인과 파타고니아의 생명체의 역사를 명명된 종의 순서로 추측했다.[101]

그들은 3월 16일 포클랜드 제도에 돌아왔는데, 가우초와 인디언들이 베르넷 정착지의 고위 구성원들을 도살한 사건 직후였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윈은 켈프에 의존하는 엄청난 수의 유기체를 기록했다.[95] 그는 헨슬로우로부터 화석의 첫 번째 발송물이 캠브리지에 도착했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종과 ''메가테리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문가인 윌리엄 클리프트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윌리엄 버클랜드와 클리프트가 영국 과학의 핵심 앞에서 전시하여 다윈의 명성을 얻었다는 소식을 받았다.[102]

이제 ''비글''호는 남부 파타고니아로 항해했고, 4월 19일에는 피츠로이와 다윈을 포함한 탐험대가 보트를 타고 산타 크루즈 강을 최대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출발했으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보트를 상류로 끌었다. 강은 일련의 융기를 뚫고 지나가고, 조개껍질과 자갈로 덮인 넓은 평원을 형성하는 고원을 통과했다. 다윈은 피츠로이와 함께 이러한 테라스가 라이엘의 이론에 따라 점진적으로 상승한 해안이었다는 자신의 해석에 대해 논의했다. 몇몇 작은 레아들이 멀리서 보였지만 잡기에는 너무나 포착하기 어려웠다.[89] 탐험대는 안데스 산맥에 접근했지만 되돌아와야 했다.

다윈은 ''파타고니아의 고도''에 대한 그의 에세이에서 자신의 추측을 요약했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라이엘의 아이디어에 도전했다. 다윈은 ''비글''호 장교들의 측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측정을 활용하여 평원이 연속적인 움직임이 아닌 넓은 지역에서 작용하는 힘에 의해 일련의 단계로 상승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정상적인 과정이 갑자기 가속화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대홍수를 배제하는 증거를 찾은 라이엘을 지지했다. 그가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조개껍질이 여전히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그 과정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인간 역사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103]

3. 3. 남아메리카 서해안

세로 라 캄파나(다윈이 1834년 8월 17일에 오른 산)


비글호와 ''어드벤처''호는 마젤란 해협을 측량한 후, 1834년 6월 28일 습하고 울창한 숲이 우거진 칠로에 제도에 도착하여 6개월 동안 해안과 남쪽 섬들을 측량했다.[104][105][106] 칠로에에서 다윈은 검은 갈탄과 화석화된 나무 조각을 발견했다.[107]

콘셉시온 지진 후 (HMS ''비글''호의 존 클레멘츠 위컴 중위 그림)


1835년 2월 8일 발디비아 항구에 도착한 다윈은 12일 후 심각한 지진을 겪었고, 항구 마을이 크게 파괴된 것을 목격했다. 3월 4일 콘셉시온에 도착했을 때, 같은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대성당도 폐허가 된 것을 확인했다. 다윈은 지진의 공포를 기록했고, 피츠로이는 홍합 조개 층이 만조선 위로 약 약 2.74m 솟아올랐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이는 라이엘이 주장한 것처럼 대륙이 바다에서 점차 솟아오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09][110]

1835년 3월 11일 발파라이소로 돌아온 다윈은 안데스 산맥으로 가서 3월 21일 약 3962.40m 지점의 대륙 분계선에서 화석 조개 껍질을 발견했다. 멘도사로 가는 길에 화석화된 나무 숲을 발견했는데, 이는 나무들이 과거 해변에 있었고, 모래 속에 묻혔다가 암석으로 굳어지고 산과 함께 약 2133.60m까지 솟아올랐음을 보여주었다.[111][112]

3. 4. 갈라파고스 제도

다윈은 새롭게 형성된 화산섬을 관찰하기를 기대하며, 비글호가 해안 측량을 위해 체계적으로 이동하는 동안 육지에 갈 기회를 잡았다. 그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검은색 바위 화산 용암이 부서져 있는 것과 철공소처럼 생긴 굴뚝과 같은 화산 원뿔을 포함한 지질학적 특징을 상세히 기록했다.[116] 그는 활화산을 보지 못하고, 지각 융기를 보여주는 지층을 찾지 못해 실망했지만, 장교 중 한 명이 섬 중 하나에서 바다 위로 높이 솟아 있는 부서진 굴 껍데기를 발견했다.[117]

풍부한 거대한 갈라파고스 거북은 그에게 거의 대홍수 이전처럼 보였고, 큰 검은 바다 이구아나는 "가장 혐오스럽고, 어색한 도마뱀"으로 그들의 서식지에 적합해 보였는데, 그는 누군가가 그들을 "어둠의 악마"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116] 다윈은 헨슬로에게서 종의 지리적 분포, 특히 대양 섬과 인근 대륙에서 관련된 종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 배웠고, 꽃이 핀 식물을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열 종밖에 되지 않는 얇은 관목 덤불이 널리 퍼져 있고 곤충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들은 놀랍게도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첫 번째 현장 노트에서 그는 웃음거미가 대륙에서 본 것과 유사하다고 기록했다.[48][118]

다윈이 잡은 다양한 갈라파고스 웃음거미는 칠레의 웃음거미와 유사했지만, 섬마다 달랐다.


비글호는 찰스 섬으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적도 공화국을 위해 갈라파고스를 관리하는 영국인 니콜라스 로슨을 만났다. 로슨은 다윈에게 거북은 섬마다 껍질 모양이 다르며, 거북을 보고 "어떤 섬에서 왔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119] 다윈은 나중에 이 말을 기억했지만, 당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웃음거미를 발견하고, 그것이 채텀 섬 표본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후, 웃음거미가 어디에서 잡혔는지 주의 깊게 기록했다.[48][118] 그는 모든 동물, 식물, 곤충 및 파충류를 부지런히 수집했으며, 이를 통해 "이 군도의 조직화된 생물이 어떤 지역 또는 '창조의 중심'에 부착되어야 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20]

앨버말 섬에서는 최근에 활동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연기를 보았다. 그는 타구스 만 근처에 상륙하여 비글 분화구를 탐험하고, 처음으로 갈라파고스 육지 이구아나를 보았다.[121] 물웅덩이는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작은 새들의 떼를 끌어들였고, 다윈은 다윈 핀치에 대한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122] 그는 세 번째 종의 웃음거미를 잡았다.[118]

애빙던, 타워, 빈들로의 북부 섬을 지나 다윈은 제임스 섬에 9일 동안 상륙하여 모든 종류의 표본을 부지런히 수집했다.[123]

비글호가 타히티로 출항하기 전, 다윈은 자신의 노트를 작성하면서 찰스, 앨버말, 제임스 및 채텀 섬에서 잡은 모든 웃음거미가 섬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48]

3. 5. 태평양 횡단 및 오세아니아

타히티에 도착한 다윈은 무성한 식물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원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토착 문화가 선교사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비난을 반박했다.[125]

1835년 12월 19일, 뉴질랜드에 도착한 다윈은 문신을 한 마오리족을 타히티인보다 낮은 수준의 야만인으로 보았다. 그는 그들과 그들의 집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선교사들이 사람들의 성격을 개선하고, 영국식 농업 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보았다. 다윈과 피츠로이는 일부 선교사들이 부당하게 잘못 묘사되었다는 데 동의했다.[126]

1836년 1월 12일, 호주에 도착한 다윈은 시드니의 활기찬 모습에 감탄했다. 내륙에서 그는 원주민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에 대해 슬퍼했다. 그는 큰 양 농장에서 사냥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유대류인 포토루를 잡았다. 오리너구리를 보고 그 부리가 부드럽다는 것을 알았으며, 원주민들이 오리너구리가 알을 낳는다는 이야기는 소수의 유럽인들만 믿었다.[128][129]

3. 6. 귀환길

코코스(킬링) 제도에서 다윈은 산호 환초를 지질학적으로 조사하여 자신의 산호초 형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했다. 모리셔스에서는 프랑스 식민지의 번영과 문명화에 대한 감상을 남겼고, 화산과 산호초를 조사했다.[129][135]

희망봉에서는 과학자 존 허셜을 만나 지질학적 관찰과 남아프리카의 동물상을 연구했다.[143] 세인트헬레나에서는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을 방문하고 섬의 지질학적 특징을 연구하며 섬 생물지리학에 관심을 보였다.[143][144] 어센션 섬에서는 화산섬의 지형과 생태를 관찰했다.[155]

브라질 바이아를 다시 방문하여 경도 측정값을 재확인하고, 페르남부쿠 해안을 탐사했다.[143][157] 1836년 10월 2일, 다윈은 팔머스에 도착하여 귀향하였고, 탐사 결과를 정리하기 시작했다.[158]

4. 탐사의 과학적 성과 및 영향

다윈은 팜파스를 여행하며 가우초와 원주민들로부터 희귀한 작은 종의 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89] 마르텐스가 쏜 레아를 먹던 중, 다윈은 이것이 그 작은 레아임을 깨닫고 유해를 보존했다.[89] 포트 세인트 줄리안에서는 지역 지질을 탐사하던 중 "어떤 큰 동물, 제 생각에는 매머드의" 척추와 뒷다리 조각 화석을 발견했다.[99][95]

티에라델푸에고에서 추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다윈은 제미 버튼이 원주민의 생활 방식에 완전히 적응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믿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제미 버튼의 사례를 통해 인종 간의 유사성과 문명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는 찰스 라이엘의 견해와는 다른 관점이었다.[87]

포클랜드 제도에서는 켈프 숲에 의존하는 다양한 유기체를 기록했다. 또한, 헨슬로로부터 화석 발송물이 윌리엄 클리프트 등 전문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95][102]

산타 크루즈 강 탐사에서 다윈은 피츠로이와 함께 라이엘의 이론에 따른 지형 상승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조개껍질과 자갈로 덮인 평원을 관찰하며, 라이엘의 점진적인 상승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았다. 또한, 내륙에서 발견된 조개껍질의 색깔을 통해 지층 상승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인간 역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03]

4. 1. 찰스 다윈의 진화론 발전

다윈은 신사 자연 철학자의 기대에 부응했고, 훌륭한 자연학자 훈련을 받았다. 에든버러에서 2학년 때 지질학을 공부했을 때 다윈은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1831년 부활절부터 8월까지 애덤 세지윅과 함께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의 지질학 현장 답사를 통해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48] 항해 중 다윈은 다른 생물의 표본을 전문가들이 검사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수집하면서 작은 무척추동물을 연구했는데, 이는 ''비글''호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이루어졌다.[48] 그가 꼼꼼하게 정리한 동물학 노트의 절반 이상이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다. 이 노트는 또한 그가 현미경으로 표본을 해부하면서 그들의 복잡한 내부 해부학에 대해 발견한 내용과 자극에 대한 반응에 대한 작은 실험에 대한 면밀한 추론적 해석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육상 관찰에는 그가 본 생물의 행동, 분포 및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가능한 이유에 대한 강렬하고 분석적인 의견이 포함되었다. 그는 자연사에 관한 배의 훌륭한 도서관을 잘 활용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49]

지질학은 탐험에서 다윈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그는 두 분야 모두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유지했지만, 지질학에 대한 그의 노트는 동물학 노트보다 거의 4배나 컸다. 항해 중 그는 누이에게 "지질학만큼 좋은 것은 없다. 첫 사냥이나 첫날 사냥의 즐거움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혀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석 뼈의 훌륭한 무리를 발견하는 것에 비할 수 없다"고 썼다. 그에게 지질학을 연구하는 것은 추론을 활용하고 이론을 세울 기회를 제공했다.[47]

1832년 12월 18일, 그들은 티에라델푸에고에 도착했고, 다윈은 선교사로 데려온 세 명의 푸에기안(York Minster, 푸에기아 바스켓, 제미 버튼)의 "문명화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야간 원주민의 조야한 야만성에 놀랐다. 그는 원주민 푸에기안과의 첫 만남을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본 가장 흥미롭고 특이한 광경이었다.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야생 동물과 가축의 차이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더 큰 발전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묘사했다. 그들은 마치 마탄의 사수에 나오는 "무대 위의 악마의 모습"과 같았다. 반면, 그는 제미에 대해 "그가 같은 인종이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여기서 처음 만난 비참하고 타락한 야만인과 같은 특성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많은 훌륭한 자질이 아직도 나에게 놀랍다."라고 말했다. (40년 후, 그는 인간이 "더 낮은 형태"에서 진화했듯이, 문명 사회가 더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인상을 ''인간의 유래''에서 회상했다. 그는 '비글' 호에 탑승한 푸에기안이 "기질과 대부분의 정신 능력에서 우리와 얼마나 유사했는지"를 회상했다.[87])

심스 코빙턴은 다윈의 표본 보존을 도왔고, 그의 수집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피츠로이의 동의를 얻어 코빙턴을 연봉 30파운드에 전임 하인으로 고용했다.[88] 그들이 팜파스를 건너면서, 가우초와 인디언들은 다윈에게 희귀하고 더 작은 종의 레아에 대해 이야기했다.[89] 새해 초, 마르텐스는 레아를 쏘았고, 그들은 다윈이 이것이 수수께끼의 작은 레아임을 깨닫고 그 유해를 보존하기 전에 그것을 즐겨 먹었다.[89]

1835년 2월 8일 발디비아 항구에 도착한 지 12일 후, 다윈은 해안에 있었는데 심각한 지진을 겪었고 항구 마을이 심하게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북쪽으로 콘셉시온으로 항해하여 3월 4일에 도착하여 같은 지진이 반복적인 충격과 쓰나미로 도시를 파괴했으며 심지어 대성당도 폐허가 된 것을 발견했다. 다윈은 죽음과 파괴의 공포를 기록했고, 피츠로이는 홍합 조개 층이 이제 만조선 위에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확인하여 땅이 약 약 2.74m 정도 솟아오른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했으며, 한 달 후에 이를 확인했다. 그들은 실제로 라이엘이 언급했듯이 대륙이 바다에서 점차적으로 솟아오르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쓰고 있었는데, 산호 환초가 멸종된 화산이 솟아오르는 가장자리에 있다는 라이엘의 아이디어가 화산이 점차 가라앉아 섬 주변의 산호초가 해수면 가까이에서 계속 자체적으로 건설되어 화산이 아래로 사라지면서 환초가 된다는 것보다 덜 말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그들이 그러한 섬에 도달했을 때 검토할 이론이었다.[111][112]

영국 해군성의 갈라파고스 제도 해도, 1836년 측량


다윈은 새롭게 형성된 화산섬을 볼 것을 간절히 기대하며, 비글호가 해안 측량을 위해 체계적으로 이동하는 동안 육지에 갈 기회를 잡았다. 그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검은색 바위 화산 용암이 부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철공소처럼 생긴 굴뚝과 같은 화산 원뿔을 포함한 지질학적 특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는 산업 스태퍼드셔의 철공소를 연상시켰다.[116] 풍부한 거대한 갈라파고스 거북은 그에게 거의 대홍수 이전처럼 보였고, 큰 검은 바다 이구아나는 "가장 혐오스럽고, 어색한 도마뱀"으로 그들의 서식지에 적합해 보였는데, 그는 누군가가 그들을 "어둠의 악마"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116] 다윈은 헨슬로에게서 종의 지리적 분포, 특히 대양 섬과 인근 대륙에서 관련된 종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 배웠고, 꽃이 핀 식물을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열 종밖에 되지 않는 얇은 관목 덤불이 널리 퍼져 있고 곤충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들은 놀랍게도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첫 번째 현장 노트에서 그는 웃음거미가 대륙에서 본 것과 유사하다고 기록했다.[48][118]

찰스 섬에서 거북은 섬마다 껍질 모양이 다르다고 하며, 다윈은 로슨이 거북을 보고 "어떤 섬에서 왔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기록했다.[119] 다윈은 나중에 이것을 기억했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웃음거미를 발견했고, "다행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채텀 섬 표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는 웃음거미가 어디에서 잡혔는지 주의 깊게 기록했다.[48][118] 그는 모든 동물, 식물, 곤충 및 파충류를 부지런히 수집했으며, "미래 비교를 통해 이 군도의 조직화된 생물이 어떤 지역 또는 '창조의 중심'에 부착되어야 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20] 이 단계에서 그의 생각은 종의 변이를 거부하는 라이엘의 생각을 반영했다.[150]

다윈은 자신의 노트를 작성했고, 놀랍게도 찰스, 앨버말, 제임스 및 채텀 섬에서 잡은 모든 웃음거미가 섬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48] 그는 "이 새는 칠레의 Thenca(B. Ayres의 Callandra)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다른 섬에서 변종이나 별개의 종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나는 여러 섬에서 4개의 표본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2~3개의 변종으로 밝혀질 것이다.— 각 변종은 자체 섬에서 일정하다...."라고 썼다.[124]

4. 2.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발표

찰스 다윈은 수집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배에 있던 참고 도서로 최선을 다했다. 어떤 표본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밝혀내고, 새로운 종을 정의하고 명명하는 것은 인정받는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165]

4. 3. 탐사 결과의 출판

다윈은 1826년 형 에라스무스와 함께 포스 만 해안을 탐사하면서 자연사 노트를 작성하고, 1827년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와 함께 해양 무척추동물을 연구하면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배운 전문성을 탐사 기록에 활용했다.[47] 항해 중에는 작은 무척추동물을 연구하고, 다른 생물 표본은 전문가에게 맡겨 영국으로 돌아온 후 분석했다.[48] 동물학 노트의 절반 이상은 해양 무척추동물에 대한 것이며, 현미경 해부와 실험을 통한 면밀한 해석이 기록되어 있다. 육상 관찰에는 생물의 행동, 분포,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적 의견이 포함되었다.[49]

지질학은 다윈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지질학 노트는 동물학 노트의 거의 4배에 달했다. 그는 지질학 연구를 통해 추론과 이론을 세울 기회를 얻었다.[47] 1834년 8월 14일에는 안데스 산맥을 탐험하며 세로 라 캄파나 정상에서 시간을 보냈다.[108]

칠로에 제도에서는 검은 갈탄과 화석화된 나무 조각을 발견했다.[107]

1835년 2월 20일, 다윈은 심각한 지진을 겪었고, 콘셉시온에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파괴를 목격했다. 그는 땅이 약 약 2.74m 솟아오른 것을 확인하며, 라이엘이 주장한 것처럼 대륙이 점차 솟아오르는 과정을 경험했다고 기록했다.[110] 안데스 산맥에서는 화석 조개 껍질과 화석화된 나무 숲을 발견했는데, 이는 지층 변화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111] 그는 산호 환초가 솟아오르는 화산 가장자리에 있다는 라이엘의 주장에 의문을 품고, 화산이 가라앉으면서 산호초가 형성된다는 이론을 구상했다.[112]

1836년 10월 2일, 영국 팔머스(Falmouth)에 도착한[158] 다윈은 가족과 재회하고,[160] 케임브리지에서 헨슬로에게 수집품 정리를 부탁했다.[161] 런던의 사회 기관에서 활동하며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표본을 연구하고,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과학 기득권"의 일부가 되었다.[162] 1837년 1월 4일, 런던 지질학회에서 칠레와 남아메리카 대륙의 융기를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162]

다윈은 자신의 일기를 피츠로이의 기록과 함께 출판하기로 했으나, 친척들의 권유로 별도 출판을 결정했다. 1837년 8월, ''저널 및 비고''(현재 ''비글호 항해기'')를 완성했고, 1839년 8월에 피츠로이의 기록과 함께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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