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성 (사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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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고야성(사가현)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축조된 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이 축성을 담당했으며, 오사카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전쟁 후 성은 해체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일부 석벽이 복원되었으며, 주변에는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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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 (사가현)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나고야성 |
별칭 | 나고야 어여관 (Nagoya Ogoyado) |
유형 | 제곽식 평산성 |
천수각 구조 | 망루형 5중 7층 (비현존) |
건설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건설 시작 연도 | 덴쇼 19년 (1591년) |
개조 여부 | 없음 |
통치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폐성 연도 | 게이초 3년 (1598년) |
유적 | 석벽, 해자, 우물 |
문화재 지정 | 국가 특별 사적 |
위치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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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건설 | 1591년 |
주요 사건 | 임진왜란의 거점 |
폐성 |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
위치 정보 | |
소재지 |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 |
2. 역사
나고야성은 히가시마쓰우라 반도의 해발 약 90m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 마쓰라토의 교역 거점 중 하나였다. 중세 시대에는 마쓰라토의 일원인 하타 씨 계열의 나고야 씨가 가키소에 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아 1591년 새로운 성을 축성하도록 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이 성 축성을 담당하여 1592년 음력 3월에 완공했다. 당시 오사카성 다음가는 규모로,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을 배치하고, 혼마루 북서쪽에 5중 7계의 천수를 축성했다.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출발하여 나고야성에 도착, 임진왜란을 지휘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전군은 조선에서 철수했고, 나고야성도 그 역할을 마쳤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가라쓰성을 축성하면서 나고야 성을 해체하고 그 자재를 사용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는 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1926년 11월 4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55년 8월 22일에는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란》의 촬영지로 사용되었으며, 2006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 명성 (87번)으로 선정되었다.
메이지 시대 무렵의 고지도에는 나고야의 지명이 "나고야 성" 등으로 표기되었으나, 다이쇼 시대부터는 "나고야"로 바뀌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지인 名古屋|나고야일본어와 소리가 같았기 때문에 축성 장소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와리에 나고야 성을 축성하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변경되었다.
2. 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성 축성을 담당하여 1592년 음력 3월에 완공했다. 당시 성곽으로는 오사카성 다음가는 규모였다.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야마자토 구루와 등을 배치하고, 혼마루 북서쪽에 5중 7계의 천수를 축성했다. 성곽 주변에는 각 다이묘의 숙소가 배치되었다. 호화로운 성으로, 성터에서는 금박을 입힌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다.히데요시는 음력 3월 교토 시에서 출발하여 그 달 안에 나고야성에 도착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으며, 히데요시는 1년 2개월 동안 나고야성에 머물면서 조선 침략을 지휘했다.[2]
1597년 음력 2월, 히데요시는 강화 조건에 불복하여 다시 14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침략했다. 나고야성은 이때에도 보급 거점 역할을 했다.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전군은 조선에서 철수했고, 나고야성도 그 역할을 마쳤다.
2. 1. 1. 임진왜란 (1592-1598)
1587년(덴쇼 1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에서 시마즈 요시히사를 항복시켰고,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다테 마사무네를 복속시키고 호조 우지나오를 항복시켰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간토로 옮겨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 과정에서 이미 조선에 복속과 명나라 정벌 협력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쓰시마국의 소 요시토시 등이 여러 차례 교섭을 했지만, 조선 측은 거절 의사를 바꾸지 않았다.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이 이끄는 제1진이 조선반도로 출병(5월 12일)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여러 부대는 이키섬, 쓰시마섬을 거쳐 조선으로 건너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주라쿠다이를 5월 7일에 출발하여 6월 5일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후 이곳이 본영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바다를 건너간 여러 장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다과회를 즐기기도 했다. 임진왜란에서는 최종적으로 20만 명 이상의 병사가 나고야에서 조선으로 건너갔다.
조선반도에서 전선이 교착되자, 1593년 4월에는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다시 1597년 2월부터 14만 명을 조선반도로 상륙시켰다.
정유재란에서도 나고야는 보급·연락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8년 9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했기 때문에 전군이 철수했고, 나고야성도 그 역할을 마쳤다. 출병 기간 동안 히데요시가 이 성에 머문 기간은 총 1년 2개월이었다.[2]
2. 2. 에도 시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가라쓰성을 축성하면서 나고야 성을 해체하고 그 자재를 사용했다.[3][5] 시마바라의 난 이후,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6] 일국일성령에 따라 파각되었다는 설, 에도 막부가 명나라나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파괴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다테 마사무네에게 오테몬(정문)이 주어져 센다이성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2. 3. 메이지 시대 이후
1926년(다이쇼 15년) 11월 4일, "나고야성터 및 진터(나고야조 아토나라비니 진아토)"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4] 1955년(쇼와 30년) 8월 22일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1985년(쇼와 60년)에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란》의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 일본 100 명성 (87번)으로 선정되었으며, 2007년(헤이세이 19년) 6월부터 전국 규모의 일본 100명성 스탬프 랠리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시대 무렵의 고지도에는 나고야의 지명이 "나고야 성", "나고야 우라", "나고야 촌"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공식 공문서에서는 나고야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다이쇼 시대부터는 "나고야"로 바뀌었다. 원래 지명인 나고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지인 名古屋|나고야일본어와 소리가 같았기 때문에 축성 장소로 선택되었다. 처음에는 나고야 성이라고 하면 먼저 완성된 히젠 나고야 성을 가리켰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성이 파괴되었고, 성 자체는 없어졌으며, 빠르게 에도 쇼군이 직접 오와리에 소리가 같은 나고야 성을 축성하게 되면서, 점차 오와리 나고야 성은 나고야 성으로 매우 유명해졌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반발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적 경위와 지명은 계속 익숙한 나고야라는 표기를 사용했고,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고야 성이 두 개가 혼재되어 사용되었으며, 도쿠가와 가문이 축성한 오와리 나고야 성의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면서, 현 지역 사람들에 의해 나고야라는 지명의 계승이 지켜졌다. 한편, 히데요시가 있던 시절의 고향인 나고야는 인구도 적은 마을이었지만, 메이지의 폐번치현에 의해 현명인 나고야 현이나 아이치 현청 소재지인 나고야 시를 설치하고, 나고야라고 하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지명도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급성장한 거대 도시가 되어 유명해진 나고야 성에 대한 배려, 더 나아가 육군성의 소관이 된 후 궁내성의 소관이 되어 나고야 이궁으로 대지진 피해 후에도 궁내청에 의해 국비를 들여 문화재로 영구 보존이 결정되어 복원되는[7](후에는 구 국보 제1호로 설정됨) 등, 천하인의 성보다 더 높은 천황 소유의 성이 된 것에 대한 배려 등, 그러한 것을 계기로 의식의 변화가 있었고,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시대도 바뀌면서, 고집의 소멸과, 같은 명칭의 혼동과 오해를 피하고 편리성을 중시함으로써, 다이쇼 시대부터는 원래 나고야의 지명으로 고쳐서(돌려서), 현재의 명칭으로 모두 일제히 통일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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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은 히가시마쓰우라 반도의 해발 약 90m 언덕에 위치한 평산성이었다.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야마자토 구루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혼마루 북서쪽에 5층 7계의 천수가 있었다. 성터에서는 금박을 입힌 기와가 출토되어, 당시 성의 화려함을 짐작하게 한다.[2] 성곽 주변에는 각 다이묘의 숙소(진야)가 배치되었다.[4]
- 본환은 동서 56칸, 남북 61칸, 총 높이 32칸 1척 5촌이었다.
- 건의 모서리에 천수대가 있으며, 높이 15칸. 바다에서 연못까지 12칸 1척, 연못에서 3의 환까지 14칸 3척 5촌. 3의 환에서 본환까지 5칸 3척 5촌이었다. 연못의 길이는 163칸이며, 폭은 11칸에서 31칸까지 있었다.[10]
- 2노마루는 동서 45칸, 남북 59칸. 굴립주의 나가야 터가 발굴되었지만, 이것은 축성 당시의 오두막이었다고 추정된다.
- 유격 구루와는 동서 26칸, 남북 24칸. 문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 탄정 구루와는 길이 95칸, 가로 45칸 또는 30칸.
- 미즈노테 구루와는 15칸 사방. 본환 등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이 구루와에 모았다고 전해지며, 물 관련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 산리 구루와는 동서 180칸, 남북 50칸 가로 20칸 사방. 다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 성의 둘레는 15정, 성으로의 입구는 5곳(오테몬, 니시노몬, 기타노몬, 후나테몬, 산리 통용문)이었다.[10]
- 3노마루는 동서 34칸, 남북 62칸.
- 이 외에, 허리 구루와·소 구루와 등 11개의 구루와가 있었다.[10]
완성 후에도 여러 번 개축을 반복했으며, 본환 서쪽은 축성 후에 석벽 부분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매립하여 증축된 것이 판명되어 옛 석벽도 발굴 전시되고 있다. 3의 환 야구대 북쪽에서는 축성 후에 개조를 받아 문이 설치되었고, 그 후 다시 철거된 것이 발굴 조사로 판명되었다.
본환 오테, 오테구치, 히가시데마루 주변도 구조와 야구, 성문에 큰 차이가 보이며, 남겨진 「히젠 나고야성도 병풍」의 두 폭 모두 현상과 다른 부분이 확인되고 있다.
『마쓰우라 고사기』에는 「제 대명 진바의 일」로서 102명의 무장의 진소 소재지가 그려져 있지만, 현재 나고야성 주변에는 118곳의 진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중 65곳에 유구가 남아있다. 특별사적으로 지정된 진터는 다음의 23곳이다.
진터 이름 |
---|
이코마 치카마사 진터 |
우에스기 가게카쓰 진터 |
가타기리 가쓰모토 진터 |
가토 기요마사 진터 |
가토 요시아키 진터 |
기노시타 도시후사 진터 |
기노시타 노부토시 진터 |
기무라 시게타카 진터 |
구키 요시타카 진터 |
구로다 나가마사 진터 |
고니시 유키나가 진터 |
시마즈 요시히로 진터 |
다테 마사무네 진터 |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터 |
도쿠가와 이에야스 별진 |
도요토미 히데야스 진터 |
나베시마 나오시게 진터 |
하세가와 히데카즈 진터 |
후쿠시마 마사노리 진터 |
후루타 오리베 진터 |
호리 히데하루 진터 |
마에다 도시이에 진터 |
모리 히데모토 진터 |
4. 명칭
사적 명칭은 "나고야성 터 및 진 터"이다.[4] 찐세이정 교육위원회는 "'''히젠 나고야 군사 도시 유적'''"이라는 명칭을 제창하기도 했다.[6] 원래 "나고야"라는 지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지인 나고야와 발음이 같아 선택되었다.
5. 주변 시설
- 가라쓰성
- 나고야성 박물관
6. 교통
JR 규슈 가라쓰역에서 하차한 후, 쇼와 버스[고코센(呼子線)] 나고야성 박물관입구(名護屋城博物館入口)에서 내려 도보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7. 복원 계획
1956년에 진제이정에서 나고야성 천수각 복원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가현 교육위원회를 통해 신청한 복원 허가는 기각되었다. 당시 국(国)은 천수각의 존재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당시 시청 직원에 따르면, "국이나 현의 공무원이 '역사적인 배경도 있어 어렵다'고 말했다. 그 시대, 조선 침략을 내세운 거점을 활성화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마을에는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다수 제기되었다"고 증언하여, 조선 민족에 대한 배려가 배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4]
이후 1976년부터 수십 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가노 미쓰노부의 "--"을 바탕으로 니시 가즈오 가나가와 대학 명예 교수의 감수 하에 천수와 혼마루의 설계도가 작성되고 CG로 복원되었다. 2015년부터는 "버추얼 나고야성" 서비스가 시작되어, 태블릿 PC 등을 통해 재현된 CG를 보면서 성터를 탐방할 수 있게 되었다.[15]
참조
[1]
서적
Danjūrō no kabuki annai
PHP Shinsho
2008
[2]
서적
【決定版】図説 よみがえる名城 漆黒の要塞 豊臣の城
Gakushu Kenkyusha
2008
[3]
서적
『城』(九州沖縄 8)
Mainichi Newspapers Co., Ltd.
1996
[4]
서적
【決定版】図説 よみがえる名城 漆黒の要塞 豊臣の城
학습연구사
2008
[5]
서적
『城』(九州沖縄 8)
毎日新聞社
1996
[6]
서적
城を復元する
학습연구사
2006
[7]
간행물
名古屋離宮の誕生
https://www.jstage.j[...]
[8]
서적
秀吉の野望と誤算
文英堂
2000
[9]
서적
『浅野文庫所蔵 諸国古城之図』
http://www.library.c[...]
新人物往来社
1981
[10]
문서
『松浦古事記』巻之下([[小瀬甫菴]]道喜撰)・六 名護屋御陣所の事
http://tamatorijisi.[...]
[11]
서적
秀吉の野望と誤算
文英堂
2000
[12]
서적
同書
[13]
문서
『萩藩閥閲録』・『太閤記』
[14]
뉴스
名護屋城跡、認知度に課題 魅力発信へ模索続く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20-09-13
[15]
뉴스
専用アプリで肥前名護屋城に“バーチャル登城”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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