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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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인종, 명종 시대를 거치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493년에 태어나 1564년에 사망했으며, 본관은 임천이다. 151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사헌부지평, 대사간, 형조판서,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58년 영의정이 되어 임꺽정의 난을 평정하고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사후에는 성안(成安)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묘역과 신도비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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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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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상진 |
원어명 | 尙震 |
출생일 | 1493년 6월 5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공주목 임천군 (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564년 2월 23일 |
본관 | 목천(木川) |
별명 | 자 기부(起夫), 호 송현(松峴), 향일당(嚮日堂), 범허재(泛虛齋) |
시호 | 성안(成安) |
종교 | 유교(성리학) |
정치 | |
정당 | 무소속 |
군주 | 명종 이환 |
직책 | 조선국 영의정(朝鮮國 領議政) |
임기 | 1558년 ~ 1563년 |
경력 | 문관 겸 정치인 |
학력 | |
학력 | 1519년(중종 14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전주 이씨 부인(全州 李氏 夫人) |
자녀 | 슬하 4남 4녀 |
부모 | 아버지 상보(尙甫), 어머니 연안 김씨 부인(延安 金氏 夫人) |
친인척 | 외조부 김휘(金徽), 장인 이효지(李孝智), 처증조부 효령대군(孝寧大君), 자형 성몽정(成夢井), 사돈 심통원(沈通源) |
2. 생애
상진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큰 누나인 성몽정(成夢井)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침착하여 어른스러웠으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558년(명종 13) 영의정에 올라 5년간 국정을 총괄했으며, 1562년(명종 17) 70세로 은퇴하려 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64년(명종 19) 윤 2월 24일 72세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세상을 떠났다.[3]
2. 1. 가계와 성장
증조부 상영부(尙英孚)는 호군(護軍)을 역임하였고, 충청도 임천(林川)에서 살았는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였다. 일찍이 채권(債卷)을 불태우며 "나의 후손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 후 음덕을 쌓아 경사(慶事)가 이어지면서 할아버지 상효충(尙孝忠)은 수군 우후(水軍虞侯)를, 아버지 상보(尙甫)는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을 지냈다. 상보(尙甫)는 연안 김도(金濤)의 후손인 박사(博士) 김휘(金徽)의 딸과 혼인하였다. 1493년(성종 24년) 음력 6월 5일, 상진은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통해 태어났다.상진은 5세에 어머니를, 8세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큰 누나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천성이 온후(渾厚)하고 침착하여 어른스러웠으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말과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2. 2. 관직 생활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곧이어 봉교(奉敎)·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진되었다.[3]1528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이어 장령·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제시하였다.[3]
1534년(중종 2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고, 1535년(중종 30) 6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1536년(중종 31)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3]
1537년(중종 32)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재임명되었다가, 10월 형조 참판으로 제수되었으며 중종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3]
1538년(중종 33) 7월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고, 1539년(중종 34) 6월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9월에는 대사헌이 되었다가 10월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3]
1541년(중종 36) 중종의 특명으로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3]
1543년(중종 38)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7월에는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조선의 국방을 총괄하였다.[3]
1544년(중종 39)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2월에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4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체직되었다. 5월에 형조 판서로 옮겼고, 12월에 중종이 죽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3]
1545년(인종 1) 1월 인종이 즉위하자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하였다 하여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같은 해(명종 즉위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3]
1546년(명종 1) 명종이 즉위하여 이기(李芑)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이기의 천거와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2월 원종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9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확립에 힘썼는데, 특히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하였다.[3]
1548년(명종 3) 6월에 지의금부사로 임명되고, 7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이 되었다.[3]
1549년(명종 4) 1월에 이기·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 판서가 되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올라서 이기·심연원(沈連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폈고,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3]
1551년(명종 6) 8월에 좌의정에 올랐다. 정승이 되어서는 심통원과 사돈을 맺고 척리(戚里)들과 체결하였다. 1557년(명종 12)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3]
1558년(명종 13) 영의정이 되어 5년 동안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영의정에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시켰으며 좌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3]
1561년(명종 16) 가을에 임천(林川)의 선영(先塋)에 성묘를 하러 갈 때 왕이 상진의 손자 부솔(副率) 상시손(尙蓍孫)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그를 호위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으며, 또 어사의(御蓑衣)를 내려주었으니, 이는 근세의 훈구(勳舊)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상진이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명종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뜻입니다." 하였다.[3]
1562년(명종 17)에 나이 70세로 예(禮)에 따라 치사(致仕)하겠다고 하자, 허락되지 않고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잔치를 여는 날 문정왕후, 인성왕후(仁聖王后), 명종,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다 주육(酒肉)을 보내 왔으므로, 상진이 사전(謝箋)을 올리자 명종이 비답하기를,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듯이 나는 노덕을 귀하게 여깁니다. 12년 동안 재상으로 있는 일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어찌 노성(老成)한 사람을 물러가게 하겠습니까?" 하였다.[3]
1564년(명종 19) 윤 2월 24일 향년 72세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졸하였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조시(朝市)를 걷고 육선(肉饍)을 물려 애도를 표하였다. 5월 19일로 경기도 과천 동쪽 상초리(霜草里) 곤좌 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상문고등학교(尙文高等學校) 안에 있다.[3]
2. 3. 주요 활동
1546년(명종 1) 명종이 즉위하고 이기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이기의 천거와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원종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9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 확립에 힘썼는데, 특히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하였다.[3]1548년(명종 3) 6월 지의금부사, 7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이 되었다.[3]
1549년(명종 4) 1월 이기·윤원형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9월 우의정에 올라 이기·심연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하였다.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폈고,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3]
1551년(명종 6) 8월 좌의정에 올랐다.[3] 정승이 되어서는 심통원과 사돈을 맺고 척리(戚里)들과 관계를 맺었다. 1557년(명종 12)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3]
1558년(명종 13) 영의정이 되어 5년 동안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영의정 재임 중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였으며, 좌의정 이준경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3]
1561년(명종 16) 가을 임천(林川)의 선영(先塋)에 성묘를 하러 갈 때 왕이 상진의 손자 부솔(副率) 상시손(尙蓍孫)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그를 호위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으며, 또 어사의(御蓑衣)를 내려주었다. 이는 근세의 훈구(勳舊)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3] 상진이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명종이 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뜻입니다." 하였다.[3]
3. 평가
상진은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침착하고 위엄 있는 풍채를 지녔다. 얼굴빛은 부드럽고 기운은 온화했으며,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모나거나 남과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불쾌하게 해도 다투지 않았다.[4]
행동은 여유가 있어 급한 상황에서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느리고 무딘 듯했지만, 내면으로는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모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몸가짐에 있어 형식적인 법도를 중시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기질을 바로잡고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벽에 "경망함은 진중함으로, 급박함은 느긋함으로, 편협함은 너그러움으로, 조급함은 침착함으로, 사나움은 온화함으로, 거칠고 경솔함은 세밀함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썼다.[4]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상효충(尙孝忠) | 우후(虞侯) |
아버지 | 상보(尙甫) | 찰방(察訪) |
외할아버지 | 김휘(金徽) | |
어머니 | 연안 김씨 | |
매부 | 성몽정(成夢井) | |
장인 | 이효지(李孝智) | 개산부수(介山副守), 효령대군의 증손자 |
장모 | 창녕 성씨 | 성담년(成聃年)의 딸 |
부인 | 전주 이씨 | 정경부인 |
장남 | 상붕남(尙鵬南) | 선무랑(宣務郞) |
며느리 | 전주 이씨 | 절도사(節度使) 이형순(李亨順)의 딸 |
손녀 | 상덕복(尙德福) | 1530년 ~ ? |
손자 | 상시손(尙蓍孫) | 1537년 ~ 1599년 |
손자 며느리 | 청송 심씨 | 좌의정 심통원의 딸 |
손자 며느리 | 고성 이씨 | 이경(李磬)의 딸 |
손녀 | 상덕록(尙德祿) | 1538년 ~ ? |
측실 | 훈련도정(訓鍊都正) 김윤종(金胤宗)의 딸 | |
서자 | 상존성(尙存省) |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 |
며느리 | 군수(郡守) 김빈(金鑌)의 딸 |
5. 관련 문화재
- 성안공 상진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 성안상공신도비 : 상진의 신도비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362cm, 비신 높이 220cm, 너비 106cm, 두께 36cm이다. 성안은 조선 중기의 재상 상진의 시호로, 이 비는 1566년(명종 21)에 세워졌다. 화강암제 장대석 기단과 네모받침돌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을 얹은 다음, 그 위에 화강암제 첨석(檐石)을 얹었다. 받침돌 4면에는 방형 구획 속에 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은 손자 상시손(尙蓍孫)의 부탁으로 좌찬성 홍섬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던 여성군(礪城君) 송인이 썼으며, “成安公神道碑銘”이란 두전(頭篆)은 둘째 사위 예문관검열 이제신이 썼다. 비문에는 중종, 인종, 명종대에 활약한 상진의 행적과 충후(忠厚)하고 전중(典重)한 그의 품성과 행위에 대해 적혀 있다.[1]
참조
[1]
서적
명종실록
1558-05-29
[2]
서적
간이집
[3]
웹사이트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8월 23일 무인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51-08-23
[4]
서적
국조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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