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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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산군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손자이자 양녕대군의 아들이다. 세종 재위 기간 중 서산군에 봉해졌으나, 단오 석척희, 음주, 간통, 폭행 등의 문제로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중의대부까지 올랐으나, 사람을 죽여 고성현에 안치되기도 했다. 이후 금강산에 은신하다가 돌아와 사후 서산군으로 복권되었으며, 종1품 소덕대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으며, 후손들은 전주이씨서산군파 종중을 이루어 선대의 묘를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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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군 (왕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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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서산군 이혜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손자이자 양녕대군의 셋째 아들이다. 1435년(세종 17)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졌으나, 금지된 단오날에 석척희(石擲戲)를 벌여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으로 추방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종묘제를 마친 후 기생을 불러 술을 마시고, 한 기생을 두고 서로 싸우는 등 여러 물의를 일으켜 탄핵을 받았다. 사람을 때려 죽이거나 남의 첩을 빼앗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 다시 서산군에 봉작되었으나, 1444년 서산윤(西山尹)으로 변경되었다.[1] 이후 사람을 상하게 한 일로 황계령(黃溪令)으로 강등되었고,[2] 1447년(세종 29)에는 술주정을 하다 사람을 죽여 고성현(固城縣)에 안치되기도 했다.[1]
세종 사후 도망쳐 금강산에 은신했다가 돌아왔으며,[1] 별세 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현 미산면 백석리)에 묻혔다. 사후 복권되어 서산군에 봉작받고,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되었다.[1]
2. 1. 생애 초반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군 이종의 친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 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양녕대군의 10남 17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관례를 올리고 안산 김씨 판중추원사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 안산 김씨(安山金氏)와 결혼하였다. 1435년(세종 17) 4월 16일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 그의 형 순성군 이애를 군으로 책봉하는 것을 두고 일부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순성군 이개의 책봉에는 극렬 반대하면서도 이혜의 봉작에는 반발하지 않았다.
2. 2. 파직과 복직
1438년(세종 20) 5월 19일 금지된 단오날에 석척희(石擲戲)를 벌여 탄핵을 받고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왔으며, 이해 12월 3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1439년(세종 21) 1월 20일 종묘제를 서계(誓戒)한 후에 영돈녕부사 권홍(權弘)의 집에 모이어 기생 소지홍(小枝紅)과 김규월(金閨月) 등을 불러서 술 마시고,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과 한 기생 소지홍과 간통하고, 그 뒤 정효전과 서로 한 기생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가 탄핵당하였다.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을 상하게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 4월 2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가 1444년 7월 1일 종2품 중의대부(中義大夫) 서산윤(西山尹)으로 변경되었다.[1] 그 뒤 사람을 상하게 한 일로 황계령(黃溪令)으로 강등 되었다.[2]
2. 3. 생애 후반
1447년(세종 29)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하였다. 세종은 이혜의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固城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도 감사에게 밭과 집을 주고, 활과 살을 가지고 나가서 사냥하는 것과 바깥 사람과 서로 통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1] 세종의 붕어 직후 이혜는 몰래 도망쳤다. 양녕대군은 사람을 보내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1] 이혜는 금강산에 입산해 오랫동안 은신해있다가 되돌아왔다.[1]관직은 중의대부(종2품)에 이르렀고 별세하자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 (현 미산면 백석리)에 예장하였다.[1] 사후 복권되어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받고,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 | 1394년 - 1462년 |
어머니 | 수성부부인 김씨(隨城府夫人 金氏) |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한로의 딸 |
장인 | 김개(金漑) | 안산 김씨(安山金氏), 안산군(安山君), 1405년 - 1484년 |
부인 |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 | 안산 김씨(安山金氏), 1464년 6월 5일 사망[3][4] |
장남 | 학림군 이이(鶴林君 李頤) | |
며느리 | 안동 권씨 | 판서(判書) 권준(權蹲)의 딸 |
손자 | 도양부정 이환(兆陽副正 李環) | |
손녀 | 청주 한씨 한경기(韓景琦)의 처 | |
차남 | 취성군 이빈(鷲城君 李頻) | 묘소 -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 |
며느리 | 성주 이씨 | 군사(郡事) 이철근(李鐵根)의 딸 |
손자 | 계림군 이탄(鷄林君 李坦) | |
손녀 | 죽산 박씨 승의랑(承議郞) 박철정(朴鐵貞)의 처 | |
손녀 | 경주 김씨 박사(博士) 김양보(金良輔)의 처 | |
손녀 | 변지원(邊枝遠)의 처 | |
손녀 | 함열 남궁씨 참판(參判) 남궁숙(南宮淑)의 처 | |
외조부 | 김한로(金漢老) | 광산군(光山君), 1358년 - ?년 |
4. 울화병의 원인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32년 기사에 따르면, 서산군 이혜가 울화병을 얻게 된 원인은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당 기록에는 '혜(譿)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心火病)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5]'라고 적혀있다.
5. 묘소
6. 종중
전주 이씨 서산군 후손들로 이루어진 종중으로 선대의 묘를 관리하고 있다.[1]
참조
[1]
실록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 갑자년) 7월 1일(무신) 2번째기사
[2]
문서
왕족 중 종2품 이상은 군의 작위를 봉작했고, 령은 종5품에 해당되는 작위이다.
[3]
실록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6월 5일(정해) 4번째기사에는 양천현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문서
생전 양천 현부인(陽川縣夫人)으로 죽었으나 남편 서산군이 군으로 복권되면서 군부인으로 복권되었다.
[5]
실록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11일(병술)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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