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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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포는 발해군 남피현 출신의 인물로, 위나라와 서진 시대에 걸쳐 활약했다. 젊은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사마씨 정권에서 중용되었으며, 동흥 전투, 제갈탄의 난 등에서 공을 세웠다. 서진 건국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으나 모반 혐의를 받아 면직되기도 했다. 이후 사도로 임명되어 농업 진흥에 기여했으며, 27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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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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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 (동음이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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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석포는 발해군 남피현 출신으로 학문과 도량이 넓었으며, 뛰어난 외모와 행동으로 이름이 높았다.[2] 젊은 시절 여러 직책을 거치며 재능을 인정받아 사마사에게 중용되었고, 동흥 전투와 제갈탄의 난 등에서 공을 세워 서진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사마염이 즉위한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으나, 모함을 받아 면직되었다가 다시 사도로 복귀하여 농업 정책 발전에 기여했다. 272년에 사망했으며, 간소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2]
시기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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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초기 | 발해군 남피현 출신으로, 학문과 도량이 넓고 뛰어난 외모로 이름이 높았다.[2] |
젊은 시절 | 전농사마, 곽현신의 마부, 업 시장에서 철을 파는 일 등을 했다. 조원유, 사마의, 許允 (曹魏)|허윤 (조위)중국어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2] |
위나라 | 사마사의 중호군사마, 업의 전농중랑장, 동래태수, 낭야태수, 서주자사, 굉농사마 등을 역임했다.[2] |
252년 | 동흥 전투에서 군사를 온전히 보전하여 퇴각했다.[2] |
257년 | 제갈탄의 난에 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2] |
259년 | 진동장군, 동광후, 가절, 양주도독 등에 임명되었다.[2] |
260년 | 조모를 알현하고 사마소에게 그를 칭찬했다. 정동대장군,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2] |
265년 | 사마소가 죽자 통곡했고, 조환에게 선양을 권했다.[2] |
서진 건국 이후 | 대사마, 악릉군공에 봉해졌으나, 정봉의 이간책과 왕침(王琛)의 무고로 모반 혐의를 받았다. 양호의 변호로 면직되었으나, 사마준의 도움으로 복귀했다.[2] |
사망 | 272년 사망, 사도에 임명되어 농업 정책에 기여했다. 간소한 장례를 유언했다.[2] |
2. 1. 초기 생애와 출세
발해군 남피현 출신으로 학문이 있고 도량이 넓으면서 외모와 행동도 뛰어나, 당시 사람들로부터 그와 같은 미남은 없다는 칭송을 받았다.[2] 현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전농사마가 되었다.[2] 12, 13살 때쯤에는 등애와 함께 곽현신의 마부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곽현신은 등애와 석포가 재상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2]업의 시장에서 철을 팔다가 조원유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이름이 알려졌으며, 청룡 연간인 233년에 사마의를 만나 발탁되었다.[2] 許允 (曹魏)|허윤 (조위)중국어에게 관직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화가 있다.[2]
2. 2. 사마씨 정권 하에서의 활약
사마사의 중호군사마가 되었다. 사마의는 석포의 용모는 좋지만 행실이 나쁘다고 평가했으나, 사마사는 석포의 재능을 이야기하며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업의 전농중랑장으로 옮겨진 후 당시의 이익을 모두 조사해 열거하고 상소하여 칭송받았다. 동래태수, 낭야태수 등을 역임하며 좋은 통치를 했고, 이어서 서주자사, 굉농사마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2]252년, 동흥 전투에서 사마사가 오나라에 패했을 때, 홀로 군사를 잃지 않고 퇴각하여 분무장군, 가절, 감청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2]
257년, 제갈탄의 난 때 감군으로 참전하여 사마소를 따라 출정했다. 6월에 도착해 주태와 함께 외부 침입에 대비했으며, 8월에 주이가 공격했다가 주태에게 패한 후에는 강을 건너 반달 모양의 보루를 쌓고 대항하자 석포는 주태와 함께 공격해 주이군을 격파했다. 주이는 이에 무장한 거마를 동원해 오목성을 공격하자 다시 한번 주태와 석포가 그를 공격해 결국 주이는 퇴각시켰으며, 주이의 패배에 분노한 손침은 주이를 참수했다.[2] 이후 제갈탄이 농성하자 왕기와 함께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사마소는 좋지 않은 선택이라며 거절했다.
수춘을 평정하면서 진동장군에 임명되고 동광후, 가절에 봉해졌다. 259년에 형주를 분할해 2명의 도독을 두도록 하면서 석포는 양주도독으로 봉해졌다. 위 조정에 입조해 조모에게 인사를 올리고 하루 종일 이야기 한 후에는 사마소에게 조모를 뛰어난 군주라 평했다. 정동대장군이 되었다가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2]
260년 11월, 오나라의 소신이라는 자가 항복을 하겠다고 청하자 사마소가 거짓 항복인 것을 알고 석포에게 겉으로는 영접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미리 대비를 하도록 했다.[2]
2. 3. 서진 건국과 그 이후
사마염이 즉위해 서진이 건국되자 대사마가 되면서 악릉군공에 봉해졌으며, 시중을 더해 깃털 붙은 덮개가 달린 수레를 타게 되었다.[2] 268년에 석포는 오랫동안 회남 지방에 있으면서 위엄과 은혜를 베풀었다. 마침 오나라에서 침공하려고 하자 보루를 쌓고 하수를 막아 방비했다.[2]그러나 정봉의 이간책과 감군 왕침(王琛)이 "큰 돌이 말을 밟아 뭉게다"라는 당시 유행하던 동요를 핑계로 무고하여 석포는 모반 혐의로 중앙에 소환되었다.[2] 양호가 진 무제에게 석포는 그렇지 않다고 변호했지만 면직되었다.[2] 사마준이 손삭을 통해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해 석포를 습격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석포는 군사권을 내놓고 도정에 가서 대죄했다.[2] 사마염이 이 소식을 듣고 의심이 풀어져 낙릉공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가게 했다.[2]
이후 사도에 임명된 석포는 농업, 양잠업 등에서 상벌 제도를 도입하도록 상주했다.[2] 27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2]
3. 가족 관계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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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石越) |
석통(石乔) |
석월(石统) |
석준(石浚) |
석준(石儁) |
석숭(石崇) |
막내 아들 석숭은 재산가로, 왕제(왕혼의 아들)·왕개(왕숙의 아들)와 사치 경쟁을 벌인 일화가 있지만, 사마륜이 실권을 잡은 시대에 손수에게 미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석교도 석숭에 연좌되었고, 손자 석초는 팔왕의 난 말기의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
4. 평가
사마의는 석포의 용모는 칭찬했지만, 행실을 문제 삼았다.[2] 사마사는 석포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2] 조원유는 석포를 삼공, 사보에 오를 인물이라고 칭찬했다.[2] 석포는 지위에 있어 충실했다고 일컬어진다.[2]
참조
[1]
서적
晋書』巻3, 武帝紀 泰始九年二月癸巳条
[2]
서적
진서 권33 석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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