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선 (불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선(禪, 불교)은 참선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승 불교의 한 종파이다. 중국에서 발전하여 한국, 일본,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었으며,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선은 말과 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 간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시하며,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를 포함한 다양한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다. 주요 사상으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 돈오(頓悟) 등이 있으며,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과 같은 다양한 수행 방식이 존재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선은 명상, 수행 등을 통해 정신적 안정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2. 역사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중국 양나라 때 보리달마가 전하였다.[2] 신라 중엽에 한국에 전래되어 구산문이 성립되었다. 초기 선종 역사는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2]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선종은 중국 문화와 사상에 맞춰 변용되었다. 초기 선종 역사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2] 선의 발전 과정에서 다른 불교 사상의 영향에 대한 이론은 매우 다양하며, 기록이나 역사보다는 추측에 의존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이 대승불교도교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전했다고 주장한다.[3][4]

선의 등장 이전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는 안사고(약 148~180년)와 그의 문하 등에 의해 이미 불교 명상이 행해졌다. 그들은 다양한 《선경》(Dhyāna sutras, 禪經)을 번역했는데, 이는 주로 1세기에서 4세기경 카슈미르(Kashmir)의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 계열의 유가행파(Yogacara) 명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 있는 초기 명상 경전들이었다.[5]

구마라집(334~413년)과 불타발타라는 명상 경전 번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수많은 경전 중에서도 《좌선삼매경(The Sutra on the Concentration of Sitting Meditation)》을 번역했다. 대부분 인도 설일체유부 유가행파 명상 교본의 중국어 번역은 중국 선의 명상 기법의 기초가 되었다.[7]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교, 도교, 그리고 중국 민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8] 스즈키 다이세쓰는 선을 "도교적 환경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불교"라고 묘사한다. 불교는 처음에 "도교의 변종"으로 여겨졌으며,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번역에서는 도교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 교리를 표현하는 "고의(ko-i, 곧 개념 일치)"라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신라 말기(7세기~9세기)에는 화엄종과 유식종 배경의 한국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새롭게 발전하는 선종 전통을 배우면서 선종이 점차 한국에 전래되었다.[15]

2. 1. 중국 선종의 기원과 발전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며, 중국 양나라 때 보리달마가 전하였다. 신라 중엽에 한국에 전래되어 구산문이 성립되었다. 초기 선종 역사는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유형의 선종이 나타났다 사라졌다.[2]

앤디 퍼거슨은 선종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 전설 시대: 보리달마부터 당나라 중엽 안사의 난까지. 육조 시대와 남북종 선의 분열이 있었다.
  • 고전 시대: 안사의 난 종식부터 송나라 시작까지. 마조 도일, 임제 의현 등 위대한 스승들이 활동하고 어록이 만들어졌다.
  • 문학 시대: 송나라 시대. 공안집이 편찬되고 문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는 이전 시대를 선종의 "황금기"로 이상화했다.


존 R. 맥레이는 선종 역사를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한다.

  • 원형 선: 남북조 시대수나라. 보리달마와 혜가와 관련이 있으며, 《입출양관사행론》이 주요 경전이다.
  • 초기 선: 당나라. 5조 홍인, 신수, 6조 혜능, 신회가 주요 인물이며, 북종, 남종, 규봉종이 주요 파벌이다.
  • 중기 선: 안사의 난부터 오대십국 시대까지. 마조 도일, 석두희견, 임제 의현, 설봉의존이 주요 인물이며, 홍주종과 호북 파벌이 있었다. 《조당집》이 중요한 경전이다.
  • 송나라 선: 대혜 종고와 홍지 정결이 주요 인물이며, 임제종조동종이 주요 파벌이다. 《벽암록》과 같은 고전적인 공안집이 편찬되었다.


송나라 이후에도 선종은 계속 발전했지만, 퍼거슨과 맥레이는 시대 구분을 제시하지 않았다. 맥레이는 명나라청나라 시기 선종이 불교 문화의 일부였으며, 19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 영향으로 현대화되었다고 언급한다.

2. 1. 1. 불교의 중국 전래와 초기 선종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선종은 중국 문화와 사상에 맞춰 변용되었다. 초기 선종 역사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2] 선의 발전 과정에서 다른 불교 사상의 영향에 대한 이론은 매우 다양하며, 기록이나 역사보다는 추측에 의존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이 대승불교도교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전했다고 주장한다.[3][4]

선의 등장 이전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는 안사고(약 148~180년)와 그의 문하 등에 의해 이미 불교 명상이 행해졌다. 그들은 다양한 《선경》(Dhyāna sutras, 禪經)을 번역했는데, 이는 주로 1세기에서 4세기경 카슈미르(Kashmir)의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 계열의 유가행파(Yogacara) 명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 있는 초기 명상 경전들이었다.[5] 《선경》에 나오는 다섯 가지 주요 명상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입출식(anapanasati)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 파티쿨라마나시카라(paṭikūlamanasikāra) 명상 (몸의 불순물에 대한 마음챙김)
  • 자비(loving-kindness) 자애(maitrī) 명상
  • 12연기(pratītyasamutpāda)에 대한 관찰
  • 부처의 32가지 특징에 대한 관찰[6]


구마라집(Kumārajīva)(334~413년)과 불타발타라(Buddhabhadra)는 명상 경전 번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수많은 경전 중에서도 《좌선삼매경(The Sutra on the Concentration of Sitting Meditation)》을 번역했다. 대부분 인도 설일체유부 유가행파 명상 교본의 중국어 번역은 중국 선의 명상 기법의 기초가 되었다.[7]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교, 도교, 그리고 중국 민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8] 스즈키 다이세쓰(D.T. Suzuki)는 선을 "도교적 환경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불교"라고 묘사한다. 불교는 처음에 "도교의 변종"으로 여겨졌으며,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번역에서는 도교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 교리를 표현하는 "고의(ko-i, 곧 개념 일치)"라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중국 최초의 불교 개종자들은 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새로 소개된 불교 명상 기법을 높이 평가했고, 이를 도교 명상과 결합했다. 승조와 도생과 같은 초기 중국 불교 대표자들은 노자와 장자의 도교 핵심 저서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특히 도교의 자연(Ziran) 개념은 초기 선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불가사의한 도와 불성을 동일시했고, 따라서 경전의 추상적인 "지혜"에 얽매이기보다는 도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불성을 강조했다.

중국 불교는 신선도가(Neo-Daoist) 개념도 수용했다. "체용(T'i-yung, 體用, 본체와 작용)"과 "이사(Li-shih, 理事, 이치와 사실, 또는 원리와 실천)"와 같은 개념은 처음 화엄종(Hua-yen) 불교에서 등장했고, 이는 이후 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중국 불교는 도교와 유교와 경쟁해야 했다. 새롭게 등장한 중국 불교에 대한 혼란의 한 가지 요점은 이원진리설이었다. 중국 사상은 이를 두 가지 '존재론적 진리'로 받아들였다. 즉, 현실은 상대적 수준과 절대적 수준의 두 가지 수준에 존재한다. 인도의 중관(Madhyamaka) 철학에서 두 진리는 두 가지 '인식론적 진리'이다. 즉,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다.

2. 1. 2. 동산법문과 남북종 분열

보리달마와 혜능을 포함한 육조(六祖) 시대이자, 북종과 남종 선의 전설적인 "분열"의 시대인 초기 선종(약 600~900년) (당나라(Tang dynasty) (618~907))에 선종은 처음으로 명확한 윤곽을 갖추었다. 주요 인물은 5조 홍인(Daman Hongren) (601~674), 그의 법통을 이은 신수(Yuquan Shenxiu) (606?~706), 6조 혜능(Huineng) (638~713) - 육조단경의 주인공 - 그리고 신회(Shenhui) (670~762)이다. 신휘의 선전은 혜능을 6조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주요 파벌은 북종, 남종, 규봉종이다.[2]

제4조사 도신(道信, 580~651)을 거치면서 선종은 독립된 종파로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혜가와 승찬, 그리고 제4조사 도신 사이의 연결고리는 매우 불분명하고 미약하다. 도신과 그의 계승자인 제5조사 홍인(弘忍, 601~674)에 이르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가르침의 양식이 등장했다. 맥레이에 따르면, "선종 수행의 특징이 된 갑작스럽고 직접적인 접근법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인 진술"은 동산(東山)선(East Mountain School)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를 유지하는 것"(守一不移, ''shou-i pu i'')이라는 방법인데, 여기서 "하나"는 부처의 본성과 동일시되는 마음의 본성(Svasaṃvedana)을 의미한다. 이 수행에서는 경험의 대상에서 인식하는 주체 자체로 주의를 돌린다. 맥레이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명상은 "사실상 모든 대승불교 종파의 방법"과 유사하지만, "준비 단계나 도덕적 전제 조건 또는 예비 운동이 없고", "단계나 등급이 없다. 하나로 집중하고,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모두 하나의 구분되지 않은 수행 속에서"라는 점에서 다르다. 샤프는 "마음"이라는 개념이 급진적인 돈오설(頓悟說) 지지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어떠한 대상화(對象化)도 피하기 위해 "무심(無心)"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많은 제자들이 상주하는 거처에 모였고, 극심한 금욕주의는 구식이 되었다. 도신과 홍인 시대는 홍인이 황매(黃梅)에 거주했던 곳 때문에 동산(東山)선(East Mountain Teaching)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용어는 홍인의 가장 중요한 계승자인 유권 신수(神秀, 606?~706)에 의해 사용되었다.[21] 이 무렵, 그 집단은 성숙한 불교 공동체로 성장하여 지배 세력의 주목을 받을 만큼 중요해졌다. 동산(東山) 공동체는 전문적인 명상 훈련 센터였다. 홍인은 평범한 명상 스승으로서, "연화경을 수행하는 사람들, 중관(中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또는 불교 계율(Vinaya)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교적 관심을 가진 제자들을 가르쳤다."[22] 이 종파는 "느슨한 수행"을 특징으로 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명상을 접근 가능하게 하려고 했다. 신수는 다양한 경전에서 발췌한 짧은 구절들을 사용하여 가르침을 정리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사용된다. 한 곳에 공동체를 설립한 것은 혜가와 그 추종자들의 방랑 생활과는 다른 변화였다.[22] 이는 고독한 수행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행동을 중시하는 중국 사회에 더 잘 맞았다.[23]

701년 신수는 측천무후에 의해 궁중으로 초청되었고, 황실의 존경을 받았다. 최초의 계보 문서는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동산(東山)에서 두 수도로의 이행은 선종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동산(東山)선(East Mountain Teaching)의 구성원들은 경전적 근거를 바꾸고, 《대승기신론》이 경전이 아니라 논서(sastra)임을 깨닫고, 《대승기신론》에 앞선 경전으로 《능가경》 스승의 계보를 조작했다.

2. 1. 3. 당나라 시대 선종의 황금기

초기 선종 역사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2] 당나라 후기는 전통적으로 선종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이러한 선종의 융성은 "당나라의 영토를 보라 — 그 전체가 선종의 영역이다"라는 말로 묘사된다.[31]

안사의 난(755~763)으로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선종의 상황도 변화하였다. 수도 지역의 선종이 지위를 잃어가는 동안, 군벌들이 장악한 변방 지역에서 다른 종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선종의 전신이다. 그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신회(Shenhui)의 설법의 영향으로 이들 모두 혜능(Huineng)에 뿌리를 두고 있다.[31]

이러한 종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조 도일(Mazu Daoyi)의 홍주종(洪州宗)이며, 대주 회해, 백장 회해, 황벽 희운, 임제 의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임제 의현은 5가지 종파 중 하나의 창시자로도 여겨진다.

홍주종은 학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충격 요법으로 고함, 때리기, 비이성적인 반박 등을 발전시켰다. 이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다른 일부는 대부분 일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선종 전통에서 선사들이 공식 의식 중에 권위의 상징이자 강의 중 책상을 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이다.

이러한 충격 요법은 제자들을 돕기 위해 비이성적이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선사들의 전통적이고 인기 있는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다.[13][32] 이러한 이미지의 일부는 "캇슈(katsu)"라는 큰 소리의 고함과 같은 후대의 잘못된 해석과 번역 오류 때문이었다. "캇슈(katsu)"는 "소리치다"를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캇슈를 외쳤다"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는 "소리를 질렀다"를 의미해야 한다.[33]

마조가 선정을 수행했지만, 그의 스승인 남악 회양에게 꾸중을 듣고, 앉아서 명상하는 것을 기와를 닦는 것에 비유하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포어에 따르면, 이 비판은 선정 자체가 아니라 "어떤 수행을 통해서든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지위로 낮추는 것"이다. 앉아서 하는 선정에 대한 비판은 당나라 사회에서 승려들의 변화된 역할과 지위를 반영하는데, 그들은 "경건한 일만 하고, 경전을 암송하고, 선정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하는 선정은 규봉 종미의 영향으로 선정과 통찰력의 균형을 시도했기 때문에 선 전통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홍주종은 급진적인 돈오(頓悟)로 비판받았다. 선종과 화엄종의 영향력 있는 스승이자 조사인 규봉 종미(780-841)는 홍주종의 가르침이 영적 수행과 도덕적 훈련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비이원론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종미는 부처의 본성과 일상생활에서의 기능이 동일한 현실의 다른 측면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845년에서 846년 사이에 당 무종은 중국에서 불교 사찰들을 박해했다. 이 박해는 수도의 선종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마조와 그의 제자들이 이끄는 선종은 살아남아 후대 당나라 선종을 이끌었다.[34]

2. 1. 4. 송나라 시대 선종의 문학적 발전

송나라 시대에 선종은 정부의 국가 통제 강화에 활용되었으며,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종파로 성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당나라 시대 선종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문학 작품들이 등장했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 중국 선불교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선종은 문헌에 기록되고, 신봉자들에 의해 실천되었으며, 중국 전체 인구에게 종교적 실체로 인식되는 개념적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송나라 이전의 선종 관련 사건들은 송나라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되었고,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선종 발전은 송나라 시대에 확립된 기준에 따라 평가되었다. 위대한 당나라 스승들(마조와 그의 제자들, 초산, 동산과 그들의 제자들, 임제)의 낭만적인 이미지는 송나라 저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송나라 문헌 내에서 기능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전역의 후대 인물들(예: 일본 임제종을 부흥시킨 백운 역각(1685~1769))은 보리달마, 육조 혜능, 마조도일 등을 언급할 때 송나라 선종의 개념적 틀을 사용했다.[35]

송나라 시대에는 선종의 '5가(五家)' 또는 다섯 종파가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종파나 학파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다양한 선종 계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종파로 인식되게 되었다.

선종의 5가는 다음과 같다.[2]

종파중심 인물계보
규앙종귀산영유(771–854), 양산혜적(813–890)마조도일
임제종임제의현(867년 사망)마조도일, 파격적인 선사로 자리매김
조동종동산양개(807–869), 조산본적(840–901)
운문종운문문언(949년 사망)설봉의존(822–908), 석두희천
법안종법안문의(885–958)설봉의존



임제종은 문인과 조정의 지원을 받아 선종 내에서 주도적인 종파가 되었다.[36] 송나라 이전에는 임제종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초기 역사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다.[36] 임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임제 사후 86년 후인 952년에 편찬된 『조당집』에 나타난다.[36] 그러나 『조당집』은 설봉의존 계보를 마조도일과 홍주종의 유산 상속자로 묘사한다.[36]

임제종의 진정한 창시자는 임제의 4대 법손인 수산(혹은 보영) 성념(926~993)으로 여겨진다. 관료 이존숙(988~1038)이 편찬한 『천성광등록』은 수산 성념의 지위를 확인하고, 임제를 마조도일의 주요 선조이자 상속자로 묘사하여 화엄 계보의 중요성을 대체한다.[36] 또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구호를 확립하여 "선은 다른 모든 불교 가르침과는 별개이며 우월하다"는 임제종의 주장을 뒷받침했다.[36]

송나라(960~1279) 시대에 귀양종, 법안종, 운문종은 점차 임제종에 흡수되었다. 송나라 선종은 대혜종고의 임제종이 지배하였고, 이는 다시 궁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36] 남송 시대에 오산 제도가 확립되면서 대혜종고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 관료 제도는 전국의 선찰에 들어왔고, 사찰 서열과 행정의 고도로 조직화된 시스템이 발전하였다.[36] 오산 제도는 송나라 정부가 모든 성에 설립한 국가 통제 사찰의 시스템이었다.[37]

고전 선사들의 가르침 방식과 말씀은 "만나서 나눈 대화"에 기록되었다.[13] 이러한 대화의 일부는 원우의 「벽암록」(1125), 무문의 「무문관」(1228)(둘 다 임제종 계열), 완송행수의 「종용록」(1223)(조동종 계열)과 같은 경전에 수록되었다.

이 경전들은 시와 산문 해설과 함께 고전적인 공안(公案) 사례가 되었고, 체계적인 공안 수행으로 발전하였다. 미우라와 사사키에 따르면, "공안 선이 결정적인 단계에 진입한 것은 원우의 계승자인 대혜종고(1089–1163)의 생애 동안이었다."[38] 공안 수행은 원우와 대혜종고가 속한 임제종에서 널리 행해졌지만, 조동종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기록된 대화와 공안집은 고독한 수행에서 스승과 제자 간의 상호 작용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깨달음의 본질은 스승과 제자 간의 상호 작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선정(禪定)이 가져올 수 있는 통찰이 있더라도, 그 검증은 항상 대인간적인 것이었다. 사실상 깨달음은 통찰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게 되었다.[39]

과거 스승과 제자의 만남의 의미에 대한 상호 질문은 제자들에게 역할 모델을 제공하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계보를 잇는 선조들의 깨달은 활동을 살펴보았다. 참여자의 역할을 맡고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39]

공안 수행은 문학적 수행으로,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잘 편집된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것은 "교육받은 문인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생겨났다.[40] 그러한 문학적 접근 방식에는 특정 의미를 사례에 고정하는 것과 같은 위험이 있었다.[40] 대혜종고는 심지어 제자들의 선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벽암록」의 목판을 불태웠다고 한다.[41]

조동종은 송나라 시대까지 살아남은 또 다른 종파였다. 그 주요 인물은 대혜종고의 동시대 인물인 홍지정각이었다. 조동종은 "묵조선(默照禪)" 또는 "좌선(坐禪)"을 강조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대혜종고에 의해 단순한 수동성으로,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것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비판받았다. 홍지정각은 그에 대한 반박으로 공안 연구의 강조에 대해 비판했다.[42]

2. 1. 5. 명, 청 시대 선종의 변화

원나라몽골 제국이 금나라와 남송을 정복한 후, 보르지긴 씨족의 지도자였던 쿠빌라이 칸이 세운 제국이었다. 중봉명본(1263~1323)의 가르침에서처럼 선종은 정토종과 혼합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원래의 계보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다른 선종 계보들이 108대 조사 지엄(Dhyānabhadra)이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43]

선종은 명나라(1368–1644) 시대에 부흥기를 맞았다. 한산덕청(憨山德清)과 같이 선종과 정토종(淨土宗) 양쪽 모두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하고 가르친 스승들이 있었다. 밀운원오(密雲圓悟)는 사후에 일본 황벽종(黃檗禪)의 초조(初祖)로 추앙받았다. 운기주홍(雲棲祩宏)과 의이지욱(蕅益智旭)도 그 시대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선종은 많은 사찰에서 정토종,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밀교(密教)와 같은 다른 불교 전통과 함께 가르쳐졌다. 이전 왕조의 불교와의 연속성 속에서 불교 스승들은 다양한 종파 간의 분파적 구분을 주장하는 대신 다양한 전통의 통합된 가르침을 가르쳤다.[44][45]

명나라가 멸망하자 여러 선종 스승들이 일본으로 피신하여 황벽종을 창시하였다.

청나라 초기, 미운 원우(1566–1642)의 "타고 외치는 수행법의 부흥"과, 미운 원우의 법통을 이은 폐인 통롱(1593–1662)이 저술한 『오등염통』(五燈衍統, "다섯 선종의 엄격한 전승")의 출판을 통해 선종이 "재창조"되었다. 이 책은 적절한 법맥 전승 없이 스스로 선승이라고 주장하는 승려들을 "계통 불명"(嗣法未詳, sifǎ wèixiáng)으로 분류하여 여러 저명한 조동종 승려들을 배제했다.

2. 2. 한국 선종의 전래와 발전

선종은 신라 중엽에 한국에 전래되어 구산문(九山門)이 성립되었다.[14] 신라 말기(7세기~9세기)에는 화엄종과 유식종 배경의 한국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새롭게 발전하는 선종 전통을 배우면서 점차 한국에 전래되었다.

2. 2. 1. 신라 말 선종의 유입

신라 말기(7세기~9세기)에 화엄종과 유식종 배경의 한국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새롭게 발전하는 선종 전통을 배우면서 선종이 점차 한국에 전래되었다.[15] 고려의 승려 지눌(1158~1210)은 선종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한국에 공안 수행을 도입하여 선종의 가장 중요한 발전과 확립을 이루었다. 지눌은 송광사를 새로운 선 수행의 중심지로 설립하였다.

2. 2. 2. 고려 시대 선종의 발전

고려 승려 지눌(1158~1210)은 선종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한국에 공안 수행을 도입하여 선종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지눌송광사를 새로운 선 수행의 중심지로 설립하였다.[1]

2. 2. 3. 조선 시대 선종의 억압과 계승

주어진 자료에는 조선시대 선종의 억압과 계승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2. 2. 4. 근현대 한국 선종의 변화

대만에서 명상하는 전통 선불교 대가 위취에(魏楚)


중국의 근대화는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수립으로 이어졌으나, 공산혁명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1949년 중국 본토에서 막을 내렸다.[47]

청나라 시대 수 세기 동안 쇠퇴했던 선종은 20세기 초 허운(虛雲)에 의해 다시 부흥되었다.[47] 성엄(聖嚴)과 선화(宣化)를 포함한 오늘날 많은 선 스승들이 허운의 계보를 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선종을 서구에 전파하여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꾸준히 성장하게 했다.[47]

불교 개혁가 태허(太虛)는 선종의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 불교를 전파했으며, 이는 백림사의 전 주지 경휘(淨慧)가 지지했다.[47]

1949년까지 관화사(觀華寺) 승려들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사찰이 건립되어 중국 불교가 전파되었다. 현재 관화사는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에 7개의 분원을 두고 있다.[47]

중국에서 참(禪)은 근대 초기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에 억압받았지만, 이후 중국 본토에서 다시 부흥하여 타이완, 홍콩, 화교 사회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하고 있다.[47]

1970년대 중국 경제 개혁 이후 중국 불교는 새롭게 부흥하고 있으며,[48][49] 백림사, 관화사와 같은 고대 불교 사찰들이 보수되었다.[48][49]

백림사는 1949년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폐허였다. 1988년, 경휘(淨慧)는 허베이성 불교협회를 맡아 사찰 재건을 시작하도록 설득되었다. 경휘는 허운(虛雲)의 제자이자 법맥 계승자[50]였지만, 태허(太虛)의 인본 불교도 받아들였다.

관화사는 1979년 70세 원주(圓拙) 노화상의 감독하에 6년간 복원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복원되었다.[48][49] 1983년 이 사찰은 중국 불교 지역 사찰(汉族地区全国重点寺院) 중 하나가 되었고, 36세 이란(毅然) 법사가 주지가 되었다.[48][49] 같은 해 원주 노화상은 이곳에 새로운 복건성 불교학원(福建佛学院)을 설립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48][49]

2. 3. 일본, 베트남 선종의 전래와 발전

선종은 12세기 영서(榮西)가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종(臨濟宗)을 전래하면서 일본에 린자이종(Rinzai)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6] 1215년, 영서의 동시대인이자 더 젊은 도겐(道元)은 중국으로 건너가 조동종(曹洞宗)의 스승 뤄징(如淨)의 제자가 되었다. 귀국 후 도겐(道元)은 일본에 조동종의 지파인 소토종(曹洞宗)을 창시했다.[13]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선종은 소토종, 린자이종, 오바쿠종(黄檗宗)이다. 이 중 소토종이 가장 크고 오바쿠종이 가장 작다. 린자이종은 사찰 소속에 따라 묘신사(妙心寺), 난젠사(南禪寺), 덴류사(天龍寺), 다이토쿠사(大德寺), 도후쿠사(東福寺) 등 여러 하위 종파로 나뉜다.

전통적인 베트남 기록에 따르면, 580년에 비니타루치(Tì-ni-đa-lưu-chi)라는 인도 승려가 중국 선종의 3대 조사인 승찬에게서 수학한 후 베트남으로 왔다. 이것이 선 불교의 최초 등장으로 여겨진다. 초기 선종 사찰에는 마조 도의의 가르침과 관련된 무언통(Vô Ngôn Thông, 無言通)의 사찰과 염불(念佛, nianfo) 염송 기법을 통합한 thảo đường (Caodong) 사찰이 있었다. 두 사찰 모두 중국 승려들이 창건했다.

3. 주요 사상과 수행법

선(참선)은 고요한 마음의 작용을 통해 깨달음이나 종교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며, 명상은 '마음을 평안하게 갖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둔다. 명상은 마음이 평화롭다는 전제 하에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것'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와 이심전심을 중시하는데, 이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이러한 수행법은 중국 양나라 때 달마 대사가 중국에 전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신라 중엽에 전해져 구산문이 성립되었다.[3][4]

선은 대승불교도교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3][4] 초기 중국 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자연 개념은 초기 선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도와 불성을 동일시하고, 일상생활에서 불성을 발견하는 것을 강조했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두 가지 주요 견해가 있었다. 8세기에 석숭혜능을 여섯 번째 선조로 내세우고, 돈오를 강조했다.[9] 육조단경에서는 돈오와 점오의 이분법을 조화시켰으며,[9] 규봉종밀 또한 돈오와 점오의 차이를 완화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만, 불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수행이 뒤따라야 한다.[67]

송나라 시대에는 선종의 '5가(五家)'가 인정받았는데, 그중 임제종대혜종고간화선을, 조동종굉지정각묵조선을 대표했다.[36]

선종의 5가는 다음과 같다.[2]

종파창시자특징
위앙종위산영우(771–854)와 양산혜기(813–890)마조도일의 법맥을 잇는다.
임제종임제의현(867년 사망)마조도일의 계보를 이으며,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충격 요법(고함, 때리기, 비이성적인 반박 등)을 사용했다.[13][32]
조동종동산량개(807–869)과 조산본적(840–901)
운문종운문문언(949년 사망)설봉의존(822–908)의 제자이며, 석두희천의 계보를 잇는다.
법안종법안문의(885–958)설봉의존의 손제자이다.


  • '''간화선(看話禪)'''은 공안(公案)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 '''묵조선(默照禪)'''은 침묵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좌선을 중시한다.


임제의현은 제자들을 돕기 위해 비이성적이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선사들의 전통을 따랐다. "캇슈(katsu)"는 "소리치다"를 의미한다.[33]

공안(公案)은 문자 그대로 "공개된 사례"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선(禪)이나 다른 불교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나 대화이다.

선종은 중국에서 성장하면서 삶의 모든 측면을 통한 수행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사찰에서는 노동과 겸손을 강조했고, 선 수행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까지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중국 선종 스승인 백장(720~814년)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70]

3. 1. 불립문자와 이심전심

선종에서 중요시하는 수행법은 참선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의 가르침을 얻는 것이다. 이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이러한 수행법은 중국 양나라 때 달마 대사가 중국에 전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신라 중엽에 전해져 구산문이 성립되었다.[3][4]

불교는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의 문화와 사상에 맞추어 변화하였다. 선의 발전 과정에는 다른 불교 사상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며, 기록보다는 추측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학자들은 선이 대승불교도교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3][4]

선의 등장 이전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는 안사고와 그의 제자들이 다양한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불교 명상을 실천했다. 이 경전들은 주로 1세기에서 4세기경 카슈미르의 설일체유부 계열 유가행파 명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초기 명상 경전이었다.[5] 《선경》에는 입출식(호흡 명상), 빠띠쿨라마나시까라 명상(몸의 불순물에 대한 명상), 자애 명상, 연기에 대한 관찰, 부처의 32상에 대한 관찰 등 다섯 가지 주요 명상 유형이 나온다.[6] 구마라집과 불타발타라도 명상 경전 번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이 번역한 인도 설일체유부 유가행파 명상 교본은 중국 선 명상 기법의 기초가 되었다.[7]

불교는 중국에 전해지면서 유교,[8] 도교,[8] 그리고 중국 민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8] 스즈키 다이세쓰의 말을 인용한 고다드의 설명에 따르면, 선은 "도교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불교"이다. 초기에 불교는 "도교의 변종"으로 여겨졌으며,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번역에서는 "고의(개념 일치)"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도교 용어로 불교 교리를 표현했다.

중국 최초의 불교 개종자들은 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불교 명상 기법을 높이 평가하고, 내단과 같은 도교 명상과 결합했다. 승조와 도생과 같은 초기 중국 불교 대표자들은 노자장자의 도교 핵심 저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도교의 자연 개념은 초기 선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불가사의한 불성을 어느 정도 동일시했고, 경전의 추상적인 "지혜"보다는 도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불성을 강조했다.

중국 불교는 현학의 개념도 수용했다. "체용(體用, 본체와 작용)"과 "이사(理事, 이치와 사실)"와 같은 개념은 처음 화엄종 불교에서 등장했고, 이후 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도교도들은 처음에 을 도교의 와 유사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중국 불교는 도교 및 유교와 경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혼란을 야기한 한 가지 요점은 이제였다. 중국 사상은 이를 두 가지 '존재론적 진리', 즉 현실이 상대적 수준과 절대적 수준의 두 가지 수준에 존재한다고 받아들였다. 도교도들은 처음에 공을 도교의 무와 유사한 것으로 오해했다. 인도의 중관 철학에서 두 진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인 두 가지 '인식론적 진리'이다. 대방광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국인들은 불성에 대한 가르침이 그 경전에 명시된 것처럼 최종적인 불교 가르침이며, 공과 두 진리 위에 본질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종 전통은 선종의 기원을 인도의 화엄경에 두는데, 가장 오래된 자료는 14세기에서 유래한다.[10] 석가모니불이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 법회를 열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꽃을 들어 돌리며 눈을 빛냈다. 여러 제자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려 했지만 아무도 옳지 않았다. 제자 중 한 명인 마하가섭은 꽃을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그러자 부처는 마하가섭의 통찰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1]

> 나는 참된 법안(法眼), 니르바나(涅槃)의 놀라운 마음, 형태 없는 것의 참된 모습, 말이나 글에 의존하지 않는 미묘한 법문(法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맡긴다.

보룹에 따르면 '심심전심(心心傳心)'의 강조는 일종의 밀교적 전승으로, "전통과 깨달은 마음이 직면하여 전해진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것은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꽃이 전해지는 것, 또는 한 정맥에서 다른 정맥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교외적 전승은 "자기 자신을 개인적으로 발견하는 것을 통해 가르침에 직접 접근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유형의 전승과 동일시는 빛나는 등불이나 거울을 발견하는 것으로 상징된다.

3. 2.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선종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두 가지 주요 견해가 있었다.

초기 선종에서는 "몸과 마음을 초월"한 후 "지식과 인식의 오염 없음"을 거쳐 자신의 참된 본성을 갑작스럽게 통찰하는 견성이 이루어지고, 이후 점진적으로 의도를 정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았다.[9]

8세기에 석숭은 선종의 역사를 사실상 재편했다. 그는 이른바 동산(북종선)을 이끈 유권 신수와 자신의 가르침 계보인 "남종선" 사이에 이분법을 만들었다.[9] 석숭은 혜능을 여섯 번째 선조로 내세우고, 당시 북종선의 주장이었던 점오와 대조적으로 돈오를 강조했다.[9] 석숭이 전파한 돈오에 따르면, 참된 본성에 대한 통찰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이 참된 본성에 대한 오해가 없게 된다.
육조단경에서는 돈오와 점오 사이의 이분법이 조화를 이룬다.[9] 석숭의 5대 후계자인 규봉종밀 또한 돈오와 점오의 차이를 완화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만, 불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수행이 뒤따라야 한다.[67]

이러한 점진적인 수행은 동산양개(도잔) 또한 인정했는데, 그는 깨달음의 다섯 계층을 설명했다.[67]

3. 3. 간화선과 묵조선

송나라 시대에는 선종의 '5가(五家)', 혹은 5개의 "종파"가 인정받았다. 이들은 다양한 선종 계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종파"로 이해되게 되었다. 그중 임제종대혜종고간화선을, 조동종굉지정각묵조선을 대표했다.[36]

선종의 5가는 다음과 같다.[2]

종파창시자특징
위앙종위산영우(771–854)와 양산혜기(813–890)마조도일의 법맥을 잇는다.
임제종임제의현(867년 사망)마조도일의 계보를 이으며,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충격 요법(고함, 때리기, 비이성적인 반박 등)을 사용했다.[13][32]
조동종동산량개(807–869)과 조산본적(840–901)
운문종운문문언(949년 사망)설봉의존(822–908)의 제자이며, 석두희천의 계보를 잇는다.
법안종법안문의(885–958)설봉의존의 손제자이다.


  • '''간화선(看話禪)'''은 공안(公案)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임제종대혜종고는 간화선을 통해 송나라 궁정, 고위 관료, 문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36] 그는 제자들의 선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벽암록」의 목판을 불태우기도 했다.[41]

  • '''묵조선(默照禪)'''은 침묵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좌선을 중시한다. 조동종굉지정각은 묵조선을 강조했다. 이는 대혜종고에 의해 단순한 수동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42]


임제의현은 제자들을 돕기 위해 비이성적이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선사들의 전통을 따랐다. "캇슈(katsu)"는 "소리치다"를 의미하며, "소리를 질렀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33]

송나라 초기에 공안(公案) 수행법이 유행했지만, 다른 이들은 “침묵의 깨달음”을 수행했다. 이는 임제종조동종의 수행 방식에 약간의 차이를 가져왔다.

공안(公案)은 문자 그대로 "공개된 사례"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선(禪)이나 다른 불교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나 대화이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초기 중국 선사들을 포함하는 일화이다. 이러한 일화들은 선 수행에서 학생의 진전을 시험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공안은 종종 역설적이거나 언어적으로 의미 없는 대화나 질문처럼 보이지만, 선 불교도들에게 공안은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사건"이다. 공안에 답하려면 개념적 사고를 놓아야 한다.

3. 4. 일상생활 속의 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 문화와 사상에 맞춰 변용되었다.[3][4] 불교는 처음에 "도교의 변종"으로 여겨졌으며,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번역에서는 도교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 교리를 표현하는 "고의(ko-i, 곧 개념 일치)"라는 방식이 사용되었다.[8] 중국 최초의 불교 개종자들은 도교 신자들이었다.[8] 그들은 새로 소개된 불교 명상 기법을 높이 평가했고,[8] 이를 도교 명상과 결합했다.[8] 특히 도교의 자연(Ziran) 개념은 초기 선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8] 그들은 불가사의한 도와 불성을 동일시했고, 경전의 추상적인 "지혜"에 얽매이기보다는 도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불성을 강조했다.[8]

선종은 중국에서 성장하면서 수행의 규율 또한 독특하게 발전하여 삶의 모든 측면을 통한 수행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사찰에서는 노동과 겸손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선 수행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까지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중국 선종 스승인 백장(720~814년)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70]

수즈키 다이세쓰(D.T. Suzuki) 학자는 선(禪) 수행의 목표는 언제나 영적 각성이었지만, 중국에서 수세기 동안 발전해 온 선종 전통을 특징짓는 부분은 인도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인도 불교에서는 탁발승의 전통이 우세했지만, 중국에서는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방장과 승려들이 모두 세속적인 일을 하는 사찰과 수련 시스템이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채소밭 가꾸기나 농사, 목수 일, 건축, 살림살이, 행정(또는 공동체 운영) 및 중의학 실천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선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은 일상생활의 요구와 잠재적인 좌절에 잘 견뎌야 했다.[70]

4. 현대 사회와 선

명상과 선(참선)은 목적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선은 고요한 마음 작용을 통해 깨달음이나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명상은 '마음을 평안하게 갖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명상은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를 전제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것'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청나라 시대 수 세기 동안 쇠퇴했던 선종은 20세기 초 허운(虛雲)에 의해 다시 부흥되었다. 허운은 20세기 중국 불교의 유명한 인물이며, 오늘날 많은 선 스승들이 성엄(聖嚴)과 선화(宣化)를 포함하여 허운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이들은 선종을 서구에 전파하여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꾸준히 성장하게 했다. 불교 개혁가 태허(太虛)는 선종의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는 백림사(柏林寺)의 전 주지 경휘(淨慧)에 의해 지지받았다.[47]

1949년까지 관화사(觀華寺)의 승려들과 같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사찰이 건립되어 중국 불교를 전파하였다. 현재 관화사는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에 7개의 분원을 두고 있다.[47]

1970년대 경제 개혁 이후 중국 불교는 새로운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48][49] 백림사와 관화사와 같은 고대 불교 사찰들이 보수되었다. 백림사는 1949년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폐허였으나,[50] 1988년 경휘(淨慧)가 허베이성 불교협회를 맡아 사찰 재건을 시작했다.[50] 경휘는 허운(虛雲)의 제자이자 법맥 계승자[50]이지만, 태허(太虛)의 인본주의 불교도 받아들였다.[50]

관화사는 1979년에 70세의 원주(圓拙) 노화상의 감독하에 6년간의 복원 프로그램을 거쳐 복원되었다. 1983년 이 사찰은 중국 불교 지역 사찰(汉族地区全国重点寺院) 중 하나가 되었고, 36세의 이란(毅然) 법사가 주지가 되었다. 같은 해 원주 노화상은 이곳에 새로운 복건성 불교학원(福建佛学院)을 설립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 혁명 기간 중 여러 중국 불교 스승들이 중국을 떠나 홍콩대만에 정착했다.

성엄(聖嚴) (1930~2009)은 대만에 본부를 둔 불교 단체인 법고산(法鼓山)의 창립자였다. 대만에서 성엄은 현대적이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세상에서 불교를 가르치려 했던 진보적인 불교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성엄은 30편이 넘는 선(禪) 관련 서적을 영어로 출판했다.[55][56][57]

위취에(惟覺) (1928~2016)는 중국 쓰촨성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출가했다. 1982년 그는 타이베이 현에 린취안사(林口寺)를 설립했고, 많은 강연과 7일간의 선(禪) 수행을 제공하며 선(禪) 수행에 대한 가르침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종단은 중타이산(中台山)으로 불린다.

1960년대에는 선(禪) 수행을 기반으로 한 두 가지 추가적인 전통이 등장했다.

증엄(證嚴) (1937년생)은 불교 비구니로, 1966년 5월 14일 대만 화롄시에서 자선 단체인 자제회(慈濟) 재단을 불교 윤리에 기반하여 설립했다.[58] 그녀는 인본주의 불교를 주창한 인순(印順) 스승의 영향을 받아 "불교와 모든 중생을 위해 일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 단체는 매일 소액을 기부하여 어려운 가정을 돌보는 30명의 주부들로 시작하여 "부유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다.[59]

성운(星雲) (1927~2023)은 1967년 대만에 본부를 둔 국제적인 중국 불교 신종교 운동인 불광산사(佛光山)을 설립했다. 이 종단은 인본주의 불교를 장려한다. 불광산은 국제불교진보협회라고도 불린다. 가오슝 다수구에 위치한 불광산의 본산은 대만에서 가장 큰 불교 사찰이다. 성운은 불광산이 선(禪)을 포함한 "중국 불교 팔종을 모두 아우르는 것"(八宗兼弘중국어)이라고 말했다. 불광산은 대만의 주요 불교 단체 중 가장 포괄적인 단체로, 사회 사업과 종교 활동 모두에 광범위하게 집중하고 있다.[60]

대만에서는 이 네 명의 스승을 대만 불교의 "사천왕(四天王)"으로, 각각의 단체인 법고산(法鼓山), 중타이산(中台山), 자제회(慈濟), 불광산사(佛光山)을 "사대산(四大山)"으로 부른다.[61][62]

선종은 일본 선종의 형태로 특히 인기를 얻었다. 서구가 선종을 불교의 독립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 시기를 정확히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일본 선승 소연 샤쿠(釋宗演)가 1893년 세계 종교 의회 기간 중 시카고를 방문한 사건은 서구에서 선종의 인지도를 높인 사건으로 종종 언급된다. 아시아 이민자의 후손을 제외하고 서구인들이 선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였다.

thumb의 만불성(萬佛城)은 선화(宣化)에 의해 설립되었다.]]

북미에서 서구인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전한 중국 스승은 선화(宣化)였다. 그는 196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선종과 다른 중국 불교 전통을 가르쳤다. 그는 이후 캘리포니아주 우키아 근처 237acre 부지에 수도원이자 수련 센터인 만불성(萬佛城)을 설립하여 법계불교협회(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와 법계불교대학(Dharma Realm Buddhist University)을 설립했다. 서구 추종자를 가진 또 다른 중국 선 스승은 조동종과 임제종 양쪽에서 수련받은 성엄(聖嚴)이다. 그는 1978년 미국 불교 협회(Buddhist Association of the United States)의 후원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이후 뉴욕 퀸즈에 CMC 선 명상 센터와 뉴욕 파인 부시에 법고산 수련 센터(Dharma Drum Retreat Center)를 설립했다.[64]

참조

[1] 백과사전 Chan Buddhism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9-01-17
[2] Harvcolnb Cleary, 2005 2005
[3] 서적 The Essence of Chan https://books.google[...] Shambala Publications
[4] 서적 China Root:Taoism, Ch'an, and Original Zen https://books.google[...] Shambala Publications
[5] 논문 Mindfulness of Breathing in the Dhyāna Sūtras https://ahandfulofle[...] 1992
[6] 웹사이트 A Study of the Meditation Methods in the DESM and Other Early Chinese Texts http://www.undv.org/[...] The Buddhist Academy of China 2013-05-08
[7] 웹사이트 Thich Hang Dat, A REAPPRAISAL OF KUMĀRAJĪVA'S ROLE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AN EXAMINATION OF KUMĀRAJĪVA'S TRANSLATION TEXT ON "THE ESSENTIAL EXPLANATION OF THE METHOD OF DHYANA" http://www.thichhang[...] 2015-05-18
[8] 학술지 Exploring Chinese folk religion: Popularity, diffuseness, and diversities https://journals.sag[...] 2021
[9] Harvcolnb McRae, 2003, p. 122 2003
[10] Harvcolnb Dumoulin, 2005a 2005
[11] Harvcolnb Dumoulin, 2005a, pp. 8–9, 68, 166–167, 169–172 2005
[12] 서적 The 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us History Proseworks
[13] Harvcolnb McRae, 2003 2003
[14] Harvcolnb Yampolski, 2003b, p. 6 2003
[15] 서적 A Dictionary of Chinese Buddhist Terms https://web.archive.[...] RoutledgeCurzon
[16] Harvcolnb Dumoulin, 2005a, pp. 85–90 2005
[17] 웹사이트 Tstuomu Kambe: Bodhidharma (around 440? - 528?). A collection of stories from Chinese literature http://www.purple.dt[...] 2015-11-06
[18] Harvcolnb McRae, 2003, p. 32 2003
[19] Harvcolnb McRae, 2003, p. 29 2003
[20] 서적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 The Vajrasamadhi-Sutra, a Buddhist Apocryph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1] Harvcolnb McRae, 2003, pp. 33–36 2003
[22] Harvcolnb McRae, 2003, p. 34 2003
[23] Harvcolnb Kasulis, 2003, pp. 25–26 2003
[24] Harvcolnb McRae, 2003, p. 48 2003
[25] Harvcolnb McRae, 2003, p. 49 2003
[26] 웹사이트 禅宗研究一百年 http://www.wuys.com/[...] 2013-09-16
[27] Harvcolnb Yampolski, 2003a, p. 9 2003
[28] 서적 Tibetan Zen
[29] 문서 Where Chan and Tantra Meet: Buddhist Syncretism in Dunhuang
[30] 리뷰 The Lost Tradition of Tibetan Zen https://tricycle.org[...]
[31] Harvcolnb Yampolski, 2003a, p. 11 2003
[32] Harvcolnb Heine, 2008 2008
[33] 학술지 Liberating Language in Linji and Wittgenstein http://www.thezensit[...]
[34] Harvcolnb Yampolski, 2003a, p. 15 2003
[35] Harvcolnb McRae, 2003, pp. 119–120 2003
[36] 논문 2003b
[37] 논문 2003b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2003a
[42] 논문 2005a
[43] 서적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44] 논문
[45] 논문 The Revival of Tiantai Buddhism in the Late Ming: On the Thought of Youxi Chuandeng (1554-1628) https://doi.org/10.7[...] Columbia University 2011
[46] 웹사이트 Buddhism and Buddhists in China - IX. Present-Day Buddhism (by Lewis Hodus) http://www.authorama[...]
[47] 웹사이트 Voice of Longquan, ''Guanghua Monastery'' http://www.longquanz[...]
[48] 웹사이트 RELIGION-CHINA: Buddhism Enjoys A Revival https://www.ipsnews.[...] 2010-11-30
[49] 웹사이트 Erica B. Mitchell (201), ''A Revival of Buddhism?'' http://www.chinainst[...]
[50] 웹사이트 Dharma http://www.jaysquare[...]
[51] 웹사이트 Modern Chan: A short biography of Chan Master Jinghui http://modernchan.bl[...] 2008-12-08
[52] 웹사이트 intro http://www.jaysquare[...]
[53] 웹사이트 Biography (at bottom of the page) http://www.danielodi[...]
[54] 웹사이트 zhaozhou-chan, ''Biography of Daniel Odier'' http://www.zhaozhou-[...] 2013-03-27
[55] 웹사이트 Chan Newsletter No. 106, February 1995 https://chancenter.o[...]
[56] 웹사이트 MindDharma1 https://chancenter.o[...] 2022-03-00
[57] 서적 Zen: Tradition and Transition Grove Press
[58] 웹사이트 The Origin of Tzu Chi: Work for Buddhism and for All Living Beings https://www.tzuchime[...] Tzu Chi Merit 2024-07-05
[59] 웹사이트 Biography of Dharma Master Cheng Yen https://web.archive.[...] 2016-09-15
[60] 학술지 Taiwan's Socially Engaged Buddhist Groups 2005-06-01
[61] 웹사이트 Come to Taiwan,Return with good memories https://web.archive.[...] Info.taiwan.net.tw 2012-02-15
[62] 학술지 Visualization of the Taiwaness Buddhism web based on social network analysis 2010-12-01
[63] 웹사이트 Buddhism in Indonesia, Past and Present Ven. Ditthisampanno http://www.buddhisma[...]
[64] 웹사이트 Who Is Master Sheng-yen https://web.archive.[...]
[65] 논문
[66] 논문
[67] 웹사이트 Tozan Ryokai's Verses on the Five Ranks https://www.awakenin[...]
[68] 논문
[69] 웹사이트 Fundamentals of Meditation http://www.chan1.org[...]
[70] 웹사이트 Digital Dictionary of Buddhism http://buddhism-dict[...] 2008-03-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