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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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브라질 출신의 유엔 외교관으로, 1969년부터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다양한 분쟁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캄보디아,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동티모르 등에서 유엔 특별 대표 및 행정관으로 활동하며 난민 구호, 지뢰 제거, 평화 유지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2003년에는 이라크 유엔 특별 대표로 임명되었으나, 바그다드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는 여러 상과 기념 사업을 통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그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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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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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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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Sérgio Vieira de Mello |
출생일 | 1948년 3월 15일 |
출생지 | 히우지우자네이루, 브라질 |
사망일 | 2003년 8월 19일 |
사망 장소 | 바그다드, 이라크 |
사망 원인 | 카날 호텔 폭탄 테러로 사망 |
배우자 | 애니 페르소나즈 (1973년 결혼, 1986년 9월 이혼) |
동반자 | 카롤리나 라리에라 (2001년–2003년) |
자녀 | 2명 |
모교 | 히우지우자네이루 연방대학교 파리 대학교 (소르본 대학교) 파리 제1대학교 (팡테옹-소르본) |
유엔 경력 | |
직책 | 제3대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
임기 시작 | 2002년 9월 12일 |
임기 종료 | 2003년 8월 19일 |
이전 | 메리 로빈슨 |
이후 | 베르트랑 람차란 (직무 대행) |
직책 1 | 동티모르 유엔 과도 행정 기구 특별 대표 |
임기 시작 1 | 1999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1 | 2002년 5월 20일 |
이전 1 | 조제 아빌리우 오소리우 소아레스 (동티모르 주지사) |
이후 1 | 샤나나 구스망 (동티모르의 대통령) |
훈장 | |
훈장 | 나일강 훈장 (1973년)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48년 3월 1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외교관 아르날두 비에이라 지 멜루와 그의 아내 질다 도스 산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는 성인이 된 후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누나 소니아를 두었다.[3] 그의 가족은 아버지 아르날두의 외교 근무지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노바, 밀라노, 베이루트 및 로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4]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69년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방글라데시에서, 1972년 제1차 수단 내전 종식 후 수단에서, 1974년 터키 침공 이후 키프로스에서 활동하며 난민 구호에 힘썼다.[9][10] 초기에는 주로 난민에게 식량, 쉼터 등을 제공하는 작전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모잠비크, 페루 등에서 UNHCR 대표를 역임하고, 캄보디아 특별 특사로 크메르 루주와 회담을 가진 최초이자 유일한 유엔 대표였다.[15]
1965년, 그는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잦은 파업으로 인해 유럽에서 교육을 계속 받기로 결정했다.[5]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에게 철학을 배웠다.[5] 그는 1968년 5월 혁명에 참여했다가 경찰 곤봉에 맞아 오른쪽 눈 위에 영구적인 상처를 입었다.[5] 그는 프랑스 좌파 저널 ''Combat''에 혁명을 지지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는 당시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브라질로 돌아가는 것을 위험하게 만들었다.[7]
1969년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제네바로 이주하여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에서 편집자로 일했다.[8]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MA) 학위와 철학 박사(PhD) 학위를 통신 교육으로 취득했다.[12] 1974년에 제출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현대 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었다.[13] 1985년에는 ''Civitas Maxima: 초국가성의 개념의 기원, 기초 및 철학적, 정치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14]
비에이라 지 멜루는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구어체 아랍어와 테툼어도 할 수 있었다.
3. 유엔 경력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유엔 레바논 임시군의 선임 정치 고문을 역임했다. 1990년대에는 캄보디아에서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했고, 유고슬라비아 난민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15] 1996년에는 난민 고등 판무관보, 1998년에는 인도주의 업무 및 긴급 구호 조정 담당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1999년에는 코소보 특별 특사로 임명되었다.[16]
2000년대에는 홍콩의 탱카족 문제 해결에 기여했고, 2000년 피지 쿠데타 당시 인질 협상에 참여했다.[17]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동티모르의 유엔 과도 행정관으로 활동하며 동티모르의 독립을 이끌었다.[15] 2002년에는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에 임명되었고, 2003년 5월에는 이라크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로 임명되어 활동했다.[15]
그의 유엔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기간 직책 기관 위치 1969–1971 프랑스 편집자 유엔 난민 기구(UNHCR) 제네바, 스위스 1971–1972 프로젝트 담당관 UNHCR 다카, 동파키스탄 1972–1973 프로그램 담당관 UNHCR 주바, 수단 1974–1975 프로그램 담당관 UNHCR 니코시아, 키프로스 1975–1977 부대표 및 대표 UNHCR 마푸투, 모잠비크 1978–1980 대표 UNHCR 리마, 페루 1980–1981 인사부 경력 개발 및 훈련 부서장 UNHCR 제네바, 스위스 1981–1983 선임 정치 담당관 유엔 레바논 임시군(UNIFIL), 평화 유지 활동국(DPKO) 레바논 1983–1985 UNHCR 인사부 부국장 UNHCR 제네바, 스위스 1986–1988 비서실장 겸 집행위원회 서기 UNHCR 제네바, 스위스 1988–1990 아시아 국장 UNHCR 제네바, 스위스 1990–1991 대외 담당 국장 UNHCR 제네바, 스위스 1991–1993 캄보디아 귀환 및 재정착 작전 국장, 유엔 캄보디아 잠정 행정 기구(UNTAC) 특별 특사 UNHCR, UNTAC, DPKO 프놈펜, 캄보디아 1993–1994 정치 담당 국장 유엔 보호군(UNPROFOR), DPK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1994–1996 운영 및 계획 국장 UNHCR 제네바, 스위스 1996년 10월–12월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대한 사무총장 특별 특사 유엔 1996–1998 난민 고등 판무관보 UNHCR 제네바, 스위스 1998–2002 유엔 인도주의 업무 담당 사무차장 유엔 뉴욕, 미국 1999년 6월–7월 코소보 주재 사무총장 특별 대표 유엔 1999–2002 동티모르 주재 유엔 동티모르 잠정 행정 기구(UNTAET) 과도 행정관 겸 사무총장 특별 대표 UNTAET, DPKO, 유엔 딜리, 동티모르 2002–2003 인권 고등 판무관 유엔 제네바, 스위스 2003년 5월–8월 이라크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유엔
3. 1. 초기 경력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48년 3월 1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외교관 아버지 아르나우두 비에이라 지 멜루와 어머니 질다 두스 산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는 성인이 된 후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누나 소니아를 두었다.[3]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외교 근무지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노바, 밀라노, 베이루트, 로마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4]
1965년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잦은 파업으로 수업이 중단되자 유럽에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5]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에게서 철학을 배웠다.[5] 파리 국제 대학촌의 학생 숙소인 메종 드 아르장틴에 있는 아파트에 거주했다.[6] 1968년 5월 혁명에 참여했다가 경찰봉에 맞아 오른쪽 눈 위에 영구적인 상처를 입었다.[5] 또한 프랑스 좌파 저널 ''Combat''에 혁명 지지 편지를 썼는데, 이는 당시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브라질로 돌아가는 것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다.[7] 1969년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제네바로 이주하여 가족 친구와 함께 지내며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에서 편집자로 첫 직장을 얻었다.[8]
UNHCR에서 근무하며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방글라데시에서 활동했고, 1972년 제1차 수단 내전을 종식시킨 아디스아바바 협정 이후 수단에서, 1974년 터키 침공 이후 키프로스에서 활동했다.[9][10] 초기 임무는 난민에게 식량, 쉼터 등 원조를 제공하는 작전 활동이었다. 짐바브웨 (당시 로디지아)에서 백인 통치와 내전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을 돕기 위해 모잠비크에 배치되어 사무소 부국장을 맡았다. 상사의 부재로 사실상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11]
경력 초기 소르본 대학교에서 통신 교육으로 문학 석사(MA)와 철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다.[12] 1974년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현대 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었다.[13] 1985년에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서 가장 높은 학위인 두 번째 "국가" 박사 학위를 제출했는데, 제목은 ''Civitas Maxima: 초국가성의 개념의 기원, 기초 및 철학적, 정치적 의미''였다.[14]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구어체 아랍어와 테툼어도 할 수 있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이후 발생한 내전 동안 3년 동안 모잠비크에서 UNHCR 작전을 담당했고, 페루에서 3년을 더 보냈다. 캄보디아 UNHCR 특별 특사로 활동하며 크메르 루주와 회담을 가진 최초이자 유일한 유엔 대표였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유엔 레바논 임시군의 선임 정치 고문을 역임했다. 1985년에는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르헨티나 사무소 소장으로 근무했다.[15]
1990년대에는 캄보디아에서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했고,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다. 중앙 아프리카의 난민 문제를 처리한 후 1996년에 난민 고등 판무관보가 되었고, 2년 후 인도주의 업무 및 긴급 구호 조정 담당 사무차장이 되었다. 2001년 1월까지 다른 직책과 동시에 이 직책을 맡았다. 1999년 유엔이 세르비아 자치주를 장악한 후 코소보에서 유엔 특별 특사였다.[16]
탱카족의 문제를 홍콩에서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중반, 피지의 피지 총리와 피지 의회 의원들이 2000년 피지 쿠데타 동안 납치되어 인질로 잡힌 상황에 대한 협상 해결을 찾도록 돕기 위해 돈 매키넌, 영연방 사무총장과 함께 피지를 방문했다.[17]
2002년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이 되기 전, 1999년 12월부터 2002년 5월까지 동티모르의 유엔 과도 행정관으로 활동하며 이전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였던 동티모르의 독립을 이끌었다. 코소보 특별 대표로도 2개월간 활동했으며, 유엔 본부에서 인도주의 작전을 조정했다.
2003년 5월 유엔 사무총장의 이라크 특별 대표로 임명되었으며, 이 임명은 처음 4개월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 기자 제임스 트라우브는 저서 ''가장 좋은 의도''에서 비에이라 지 멜루가 코피 아난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의 압력을 받기 전 세 번이나 임명을 거절했다고 썼다. 사만다 파워는 저서 ''세르지우: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투쟁''에서 비에이라 지 멜루가 2003년 3월 부시와 만나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인권 상황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는 미국에게 논란이 되는 문제였다고 썼다. 2003년 6월, 비에이라 지 멜루는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가 재건되기 전 검사하는 팀의 일원이었다.[18]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간 | 직책 | 기관 | 위치 |
---|---|---|---|
1969–1971 | 프랑스 편집자 | 유엔 난민 기구(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71–1972 | 프로젝트 담당관 | UNHCR | 다카, 동파키스탄 |
1972–1973 | 프로그램 담당관 | UNHCR | 주바, 수단 |
1974–1975 | 프로그램 담당관 | UNHCR | 니코시아, 키프로스 |
1975–1977 | 부대표 및 대표 | UNHCR | 마푸투, 모잠비크 |
1978–1980 | 대표 | UNHCR | 리마, 페루 |
1980–1981 | 인사부 경력 개발 및 훈련 부서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81–1983 | 선임 정치 담당관 | 유엔 레바논 임시군(UNIFIL), 평화 유지 활동국(DPKO) | 레바논 |
1983–1985 | UNHCR 인사부 부국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86–1988 | 비서실장 겸 집행위원회 서기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88–1990 | 아시아 국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0–1991 | 대외 담당 국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1–1993 | 캄보디아 귀환 및 재정착 작전 국장, 유엔 캄보디아 잠정 행정 기구(UNTAC) 특별 특사 | UNHCR, UNTAC, DPKO | 프놈펜, 캄보디아 |
1993–1994 | 정치 담당 국장 | 유엔 보호군(UNPROFOR), DPKO |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1994–1996 | 운영 및 계획 국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6년 10월–12월 |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대한 사무총장 특별 특사 | 유엔 | |
1996–1998 | 난민 고등 판무관보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8–2002 | 유엔 인도주의 업무 담당 사무차장 | 유엔 | 뉴욕, 미국 |
1999년 6월–7월 | 코소보 주재 사무총장 특별 대표 | 유엔 | |
1999–2002 | 동티모르 주재 유엔 동티모르 잠정 행정 기구(UNTAET) 과도 행정관 겸 사무총장 특별 대표 | UNTAET, DPKO, 유엔 | 딜리, 동티모르 |
2002–2003 | 인권 고등 판무관 | 유엔 | 제네바, 스위스 |
2003년 5월–8월 | 이라크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 유엔 |
3. 2. 1990년대 활동
그는 199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지뢰 제거에 참여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다.[16] 중앙 아프리카의 난민 문제를 처리한 후, 1996년에 난민 고등 판무관보가 되었고, 2년 후 인도주의 업무 및 긴급 구호 조정 담당 사무차장이 되었다.[16] 그는 2001년 1월까지 다른 직책과 동시에 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99년 유엔이 세르비아 자치주를 장악한 후 코소보에서 유엔 특별 특사였다.[16]그의 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간 | 직책 | 기관 | 근무지 |
---|---|---|---|
1991–1993 | 캄보디아 귀환 및 재정착 작전 국장, 유엔 캄보디아 잠정 행정 기구(UNTAC) 평화 유지 활동국(DPKO) 특사, 유엔 난민 기구(UNHCR) 고등 판무관 오가타 사다코의 특별 특사 | 프놈펜, 캄보디아 | |
1993–1994 | 정치 담당 국장 | 유엔 보호군(UNPROFOR), DPKO |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1994–1996 | 운영 및 계획 국장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6년 10월–12월 |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대한 사무총장 특별 특사 | ||
1996–1998 | 난민 고등 판무관보 | 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8–2002 | 인도주의 업무 담당 사무차장 | 유엔 | 뉴욕, 미국 |
1999년 6월–7월 | 코소보 주재 사무총장 특별 대표 |
3. 3. 2000년대 활동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9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지뢰 제거에 참여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다.[15] 중앙 아프리카의 난민 문제를 처리한 후, 1996년에 난민 고등 판무관보가 되었고, 2년 후 인도주의 업무 및 긴급 구호 조정 담당 사무차장이 되었다.[15] 그는 2001년 1월까지 다른 직책과 동시에 이 직책을 맡았다. 1999년 유엔이 세르비아 자치주를 장악한 후 코소보에서 유엔 특별 특사였다.[16]비에이라 지 멜루는 탱카족의 문제를 홍콩에서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중반, 돈 매키넌 영연방 사무총장과 함께 피지를 방문하여, 2000년 피지 쿠데타로 피지 총리와 피지 의회 의원들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 대한 협상 해결을 모색했다.[17]
2002년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이 되기 전, 1999년 12월부터 2002년 5월까지 동티모르의 유엔 과도 행정관으로 활동하며, 이전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에서 독립을 이끌었다.[15] 그는 또한 2개월 동안 코소보 특별 대표였으며 유엔 본부에서 인도주의적 작전을 조정했다.
2003년 5월,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사무총장의 이라크 특별 대표로 임명되었으며, 이 임명은 처음 4개월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다.[15]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기자 제임스 트라우브는 저서 ''가장 좋은 의도''에서 코피 아난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의 압력을 받기 전 세 번이나 임명을 거절했다고 썼다. 사만다 파워는 저서 ''세르지우: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투쟁''에서 비에이라 지 멜루가 2003년 3월 부시와 만나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인권 상황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는 미국에게 논란이 되는 문제였다고 썼다. 2003년 6월, 비에이라 지 멜루는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가 재건되기 전에 검사하는 팀의 일원이었다.[18]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기간 | 직책 | 기관 | 위치 |
---|---|---|---|
1996년 10월–12월 |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대한 사무총장 특별 특사 | 유엔 | |
1996–1998 | 난민 고등 판무관보 | 유엔 난민 기구(UNHCR) | 제네바, 스위스 |
1998–2002 | 인도주의 업무 담당 사무차장 | 유엔 | 뉴욕, 미국 |
1999년 6월–7월 | 코소보 주재 사무총장 특별 대표 | 유엔 | |
1999–2002 | 동티모르 주재 유엔 동티모르 잠정 행정 기구(UNTAET) 과도 행정관 겸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 유엔 | 딜리, 동티모르 |
2002–2003 | 인권 고등 판무관 | 유엔 | 제네바, 스위스 |
2003년 5월–8월 | 이라크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 유엔 |
4. 사망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특별 대표로 이라크에서 활동하던 중 운하 호텔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19] 알 카에다 테러 조직의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는 이 폭탄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20] 알 카에다 측 성명에 따르면, 동티모르가 독립 국가가 되도록 도운 비에이라 지 멜루의 행위는 이슬람 칼리프 국가로부터 영토를 빼앗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21]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평화를 효과적으로 증진했다는 명성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널리 이어졌다. 그는 34년 동안 살았던 고향 리우데자네이루에 묻히기를 원했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국제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브라질에서 스위스 제네바의 왕들의 묘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22] 그는 두 아들 아드리앙과 로랑을 남겼다.[23]
5. 개인사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48년 3월 1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외교관 아르날두 비에이라 지 멜루와 그의 아내 질다 도스 산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5] 성인이 된 후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누나 소니아가 있었다.[3] 가족은 아버지 아르날두의 외교 근무지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노바, 밀라노, 베이루트, 로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4]
1965년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잦은 파업으로 수업이 중단되자 유럽에서 교육을 계속 받기로 결정했다.[5] 파리 대학교에서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에게서 철학을 배웠다.[5] 그는 1968년 5월 혁명에 참여했다가 경찰봉에 맞아 오른쪽 눈 위에 영구적인 기형을 입기도 했다.[5] 또한 프랑스 좌파 저널 ''Combat''에 혁명을 지지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는 당시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브라질로 돌아가는 것을 위험하게 만들었다.[7] 1969년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제네바로 이주하여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에서 편집자로 일했다.[8]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MA) 학위와 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12] 1974년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현대 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었다.[13] 1985년에는 ''Civitas Maxima: 초국가성의 개념의 기원, 기초 및 철학적, 정치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14]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구어체 아랍어와 테툼어도 할 줄 알았다.
1973년, 제네바의 UNHCR 본부에서 일하던 프랑스인 애니 페르소나즈와 결혼하여 두 아들 로랑과 아드리엔을 낳았다.[19] 이들은 프랑스 토농레뱅에서 살다가, 몇 년 후 제네바 국경 근처의 마송지에 정착했다.[24] 결혼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세르지우가 사망하기 전에 별거했으며, 2003년 1월 9일에 이혼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25]
2001년부터 동티모르에서 유엔 임무의 일반 서비스 지원 직원으로 일하던 카롤리나 라리에라|카롤리나 라리에라pt와 관계를 맺었다. 세르지우와 카롤리나는 그의 사망 때까지 이어진 관계를 유지했다.[26][27][28][29] 일부일처제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서 유효한 이들의 시민 결합은, 10년이 넘는 소송 과정을 거쳐 라리에라가 그의 아내, 상속인 및 유산을 상대로 승소한 결과였다.[25]
유엔은 세르지우와 카롤리나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카롤리나는 자신이 운하 호텔 폭탄 테러 생존자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 그녀의 의견이 공격 관련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30] 그의 사망 후, 그녀는 유엔의 추모 행사에는 초대받지 못한 반면, 전 부인 애니는 유엔으로부터 세르지우의 미망인으로 인정받았다.
애니는 여전히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그의 두 아들, 가까운 친구 및 동료들과 함께 그의 이름과 기억을 기리기 위해 스위스 자선 단체인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을 공동 설립했다.[31]
6. 수상 및 기념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망 후 여러 상과 명예를 받았다.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브라질 최고 훈장인 히우 브랑쿠 훈장,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페드루 에르네스투 메달을 받았다. 이스트웨스트 연구소의 '올해의 정치가상', 유엔 인권상,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평화상도 수상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폴란드 상'이 제정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센터와 재단이 설립되어 활동 중이다. 유엔 총회는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여 그를 포함한 인도주의 활동가들을 기리고 있다. 유엔 인간 정주 계획의 일부인 유엔 주거 권리 프로그램은 그가 설립했다. 이탈리아 볼로냐에는 그를 기념하는 광장이 있다.
그의 삶은 2020년 바그네르 모라 주연의 전기 영화 ''세르지우''로 제작되었다.
6. 1. 수상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망 후 여러 상과 명예를 받았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으며, 유족과 두 아들에게 제네바에서 수여되었다. 브라질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히우 브랑쿠 훈장과 2003년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여된 페드루 에르네스투 메달도 받았다.[32] 2004년 4월에는 이스트웨스트 연구소에서 사후 "올해의 정치가상"을 수상했다. 2003년 유엔 인권상,[32] 2004년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평화상을 수상했다.2003년 비야 데시우스 협회의 주도로 인권, 민주주의, 관용 증진을 위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폴란드 상"이 제정되었고, 2004년에 첫 시상식이 열렸다.[33]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의 어머니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와, 전 유엔 외교관이자 하버드 출신 전문가인 세르지우의 배우자 캐롤리나 라리에라가 설립했으며, 브라질과 동티모르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지지자들과 협력하고 있다.[34]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국제 관계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교 네트워크와 미래의 세계 대사들을 통해 활동한다. 멘토와 제자를 동원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기술, 기업가 정신, 네트워크 활용에 중점을 둔다. 하버드 및 MIT의 엔지니어 및 교육 전문가를 참여시켜 지역 사회와 학교에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브라질과 해외에서 세르지우의 이름을 딴 100개 이상의 학교 및 기관 네트워크를 지원하며, 교육 도구와 현물 자료를 제공한다. 그의 아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를 기리기 위한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 상을 운영하며, 이 상은 국제 인권 영화 포럼 기간 동안 매년 제네바에서 수여된다. 상금은 5000CHF이다.[35]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은 그의 기억을 기리고, 그의 이상을 추구하며, 미완의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의 두 아들과 별거한 아내의 주도로, 일부 친구 및 동료들과 함께 제네바에 설립되었다.[36] 2008년에는 코피 아난이 첫 번째 연례 강연을 했다.
200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스웨덴이 후원한 유엔의 긴급 구호 조정 강화에 관한 결의안 A/63/L.49를 채택했다.[37] 이 결의안은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 (WHD)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가족은 8월 19일을 모든 인도주의 인력에 대한 헌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2008년 4월 초,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이사회는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는 총회 결의안 초안을 준비했다. 프랑스, 스위스, 일본, 브라질은 이 결의안 초안에 공동 후원하기로 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인간 정주 계획의 일부인 유엔 주거 권리 프로그램을 설립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서식지 의제에 대한 약속 이행을 위해 국가 및 기타 이해 관계자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8]

사후, 이탈리아 도시 볼로냐는 현대적인 나빌레 구역에 위치한 광장(''피아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에게 헌정했다.
6. 2. 기념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망 후 여러 상과 명예를 받았다. 그중 최고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로, 그의 유족과 두 아들에게 제네바에서 수여되었다. 그는 또한 브라질 정부가 자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히우 브랑쿠 훈장과 2003년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페드루 에르네스투 메달을 받았다.[32] 2004년 4월에는 이스트웨스트 연구소로부터 사후 "올해의 정치가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유엔 인권상을, 2004년에는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평화상을 수상했다.'''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그의 어머니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와, 전 유엔 외교관이자 하버드 출신 전문가인 세르지우의 배우자 캐롤리나 라리에라에 의해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센터는 브라질과 그가 설립에 기여한 동티모르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지지자들과 협력하고 있다.[34]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국제 관계를 전문으로 하는 전국적인 대학교 네트워크와 미래의 세계 대사들을 통해 활동한다. 특히, 멘토와 제자를 동원하고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평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기술, 기업가 정신, 네트워크 활용에 중점을 둔다. 하버드 및 MIT의 엔지니어 및 교육 전문가를 참여시켜 지역 사회와 학교에 권한을 부여한다. 센터는 전문가들을 빈곤층과 소외된 청소년과 연결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낸다. 국제관계 전문가 전국협회(ANAPRI)는 이 분야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를 동원하고 있다.
센터는 브라질과 해외에서 세르지우의 이름을 딴 100개 이상의 학교 및 기관 네트워크를 참여시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교육 도구와 현물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아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를 기리기 위한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 상을 운영하며, 이 상은 국제 인권 영화 포럼 기간 동안 매년 제네바에서 수여된다. 상금은 5000CHF이다.[35]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은 그의 기억을 기리고, 그의 이상을 추구하며, 미완의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의 두 아들과 별거한 아내의 주도로, 일부 친구 및 동료들과 함께 제네바에 설립되었다.[36] 2008년에는 코피 아난이 첫 번째 연례 강연을 시작했고, 2009년에는 오가타 사다코, 2010년에는 베르나르 쿠슈네, 2011년에는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2012년에는 코르넬리오 솜마루가가 뒤를 이었다. 강연은 제네바의 국제 개발 연구 대학원에서 열린다.
200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스웨덴이 후원한 유엔의 긴급 구호 조정 강화에 관한 결의안 A/63/L.49를 채택하여 역사를 만들었다.[37] 이 결의안은 다른 중요한 인도적 결정 외에도,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WHD)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의안은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헌신적으로 사망한 모든 인도주의 및 유엔 관련 인력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인정을 부여하며, 모든 회원국, 유엔 기구, 기타 국제 기구 및 비정부 기구에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매년 기념할 것을 촉구한다. 이 획기적인 결의안을 배경으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가족은 8월 19일을 모든 인도주의 인력에 대한 적절한 헌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2008년 4월 초,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이사회는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는 총회 결의안 초안을 준비했다. 프랑스, 스위스, 일본, 브라질은 이 결의안 초안에 접촉하여 공동 후원하기로 동의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인간 정주 계획의 일부인 유엔 주거 권리 프로그램을 설립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서식지 의제에 대한 약속 이행을 위해 국가 및 기타 이해 관계자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8]
그의 사후, 이탈리아 도시 볼로냐는 현대적인 나빌레 구역에 위치한 광장(''피아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에게 헌정했다.
비야 데시우스 협회의 주도로 2003년에 인권, 민주주의, 관용을 증진하기 위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폴란드 상"이 제정되었으며, 2004년에 첫 번째 시상식이 열렸다.[33]
7. 유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망 후 여러 상과 명예를 받았다. 그중 최고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로, 그의 유족과 두 아들에게 제네바에서 수여되었다. 그는 또한 브라질 정부가 자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히우 브랑쿠 훈장과 2003년 그의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여되는 최고 훈장인 페드루 에르네스투 메달을 받았다. 2004년 4월,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이스트웨스트 연구소로부터 사후에 "올해의 정치가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유엔 인권상[32]을, 2004년에는 팍스 크리스티 인터내셔널 평화상을 수상했다.
비야 데시우스 협회의 주도로 2003년에 인권, 민주주의, 관용을 증진하기 위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폴란드 상"이 제정되었으며, 2004년에 첫 번째 시상식이 열렸다.[33]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그의 어머니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와, 전 유엔 외교관이자 하버드 출신 전문가인 세르지우의 배우자 캐롤리나 라리에라에 의해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브라질과 그가 설립에 기여한 동티모르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지지자들과 협력하고 있다.[34]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국제 관계를 전문으로 하는 전국적인 대학교 네트워크와 미래의 세계 대사들을 통해 활동한다. 특히, 멘토와 제자를 동원하고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평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기술, 기업가 정신, 네트워크 활용에 중점을 둔다. 하버드 및 MIT의 엔지니어 및 교육 전문가를 참여시켜 지역 사회와 학교에 권한을 부여한다. 센터는 전문가들을 빈곤층과 소외된 청소년과 연결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낸다. 국제관계 전문가 전국협회(ANAPRI)는 이 분야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를 동원하고 있다.
센터는 브라질과 해외에서 세르지우의 이름을 딴 100개 이상의 학교 및 기관 네트워크를 참여시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교육 도구와 현물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아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를 기리기 위한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 상을 운영하며, 이 상은 국제 인권 영화 포럼 기간 동안 매년 제네바에서 수여된다. 상금은 5000CHF이다.[35]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은 그의 기억을 기리고, 그의 이상을 추구하며, 미완의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의 두 아들과 별거한 아내의 주도로, 일부 친구 및 동료들과 함께 제네바에 설립되었다.[36] 2008년에는 코피 아난이 첫 번째 연례 강연을 시작했고, 2009년에는 오가타 사다코, 2010년에는 베르나르 쿠슈네, 2011년에는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2012년에는 코르넬리오 솜마루가가 뒤를 이었다. 강연은 제네바의 국제 개발 연구 대학원에서 열린다.
200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스웨덴이 후원한 유엔의 긴급 구호 조정 강화에 관한 결의안 A/63/L.49를 채택하여 역사를 만들었다.[37] 이 결의안은 다른 중요한 인도적 결정 외에도,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 (WHD)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의안은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헌신적으로 사망한 모든 인도주의 및 유엔 관련 인력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인정을 부여하며, 모든 회원국, 유엔 기구, 기타 국제 기구 및 비정부 기구에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매년 기념할 것을 촉구한다. 이 획기적인 결의안을 배경으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가족은 8월 19일을 모든 인도주의 인력에 대한 적절한 헌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2008년 4월 초,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이사회는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는 총회 결의안 초안을 준비했다. 프랑스, 스위스, 일본, 브라질은 이 결의안 초안에 접촉하여 공동 후원하기로 동의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인간 정주 계획의 일부인 유엔 주거 권리 프로그램을 설립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서식지 의제에 대한 약속 이행을 위해 국가 및 기타 이해 관계자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8]
그의 사후, 이탈리아 도시 볼로냐는 현대적인 나빌레 구역에 위치한 광장(''피아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에게 헌정했다.
비에이라 지 멜루의 삶은 2020년 전기 영화 ''세르지우''의 주제였으며, 바그네르 모라가 주인공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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