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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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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리눈테는 시칠리아 섬 남서부에 위치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이다. 기원전 628년 메가라 히블라이아의 식민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셀러리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셀리눈테는 카르타고의 침공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시칠리아 서부의 중요한 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여러 차례 재건과 파괴를 반복하다가 결국 멸망했다. 현재는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다양한 유적과 신전들이 남아 있으며, 쿠사 채석장과 같은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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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눈테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헤라 신전의 기둥이 재건되었지만 지붕은 대부분 누락됨.
셀리눈테의 헤라 신전 (신전 E)
일반 정보
다른 이름셀리누스
위치마리넬라 디 셀리눈테, 트라파니현, 시칠리아, 이탈리아
유형정착지
면적377 헥타르
건설 시기기원전 628년
폐허 시기기원전 250년경
시대고대 그리스 ~ 헬레니즘 시대
역사
점령 세력고대 그리스
카르타고
고고학
관리Soprintendenza BB.CC.AA. di Trapani
웹사이트Parco Archeologico di Selinunte (이탈리아어)

2. 역사

셀리눈테는 시칠리아 섬 남서 해안, 같은 이름의 작은 강 어귀에 위치하고 있으며, 힙사스 강(현대 벨리체 강)에서 서쪽으로 6.5km 떨어진 곳에 있던 중요한 고대 그리스 식민지 중 하나였다.

시칠리아 최서단에 위치했던 젤리눈테는 곧 시칠리아 서부의 페니키아인, 섬 서쪽과 북서쪽의 토착 시칠리아인들과 접촉했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인들과 갈등을 겪지 않았지만, 기원전 580년경부터 젤리눈테인들은 비그리스계 엘림족인 세제스타와 적대했다.[5] 당시 세제스타와의 경계는 마자루스 강으로, 젤리눈테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었다. 젤리눈테 영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둑까지 확장되었고, 강 어귀에 요새와 상업 중심지를 두었다.[7] 또한 할리쿠스 (현대 플라타니) 강까지 영토를 넓혀 그 어귀에 헤라클레아 미노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8]

대부분의 시칠리아 도시처럼 젤리눈테는 과두정치에서 참주 정치로 전환되었다. 기원전 510년경에는 페이타고라스라는 참주가 통치했으나, 스파르타 출신 에우리레온의 도움으로 전복되었다. 에우리레온은 잠시 도시를 통치했지만, 젤리눈테인들에 의해 곧 전복되고 처형되었다.[9]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의 원정 때 젤리눈테인들은 카르타고를 지원, 병력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지만, 히메라 전투에서 하밀카르가 패배한 후에 도착했다.[10]

기원전 466년, 젤리눈테인들은 시라쿠사인들이 트라시불루스 오브 시라쿠스를 몰아내는 것을 돕기 위해 다른 시칠리아 도시들과 협력했다.[11]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16년 아테네 원정 직전 젤리눈테를 육해상 군사력이 막강하고 신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로 묘사했다.[12] 디오도로스 역시 카르타고 침략 당시 젤리눈테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고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13] 젤리눈테 성벽은 약 100ha를 둘러쌌고, 기원전 5세기 인구는 14,000명에서 19,000명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09년, 한니발 마고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에 의해 젤리눈테는 파괴되었다. 이후 시라쿠사의 헤르모크라테스가 생존자들을 모아 도시 재건을 시도했으나, 결국 카르타고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거주가 허락되었다. 기원전 250년경, 제1차 포에니 전쟁 동안 카르타고는 방어 거점을 줄이기 위해 젤리눈테 주민들을 릴리바이온으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파괴했다.[27] 이후 젤리눈테는 재건되지 않았다.

2. 1. 건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셀리눈테는 그리스 본토 메가라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 도시 메가라 히블라이아에서 온 식민지에서 건설되었으며, 메가라 히블라이아가 건설된 지 약 100년 후에 팜밀루스라는 사람의 지도 하에 건설되었다.[2] 젤리눈테가 건설된 정확한 시기는 투키디데스가 메가라 히블라이아의 건설을 기준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원전 628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디오도로스는 22년 전인 기원전 650년으로, 히에로니무스는 기원전 654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투키디데스가 제시한 시기는 가장 신뢰할 만하며, 앞선 시기와는 일치하지 않는다.[3] 젤리눈테라는 이름은 그 지역에서 자란 야생 샐러리(σέλινον|셀리논grc)의 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4] 같은 이유로, 그들은 샐러리 잎을 주화의 상징으로 채택했다.

2. 2. 명칭의 유래

셀리눈테라는 이름은 그 지역에서 많이 자라던 야생 샐러리(σέλινον|셀리논grc)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4] 셀리눈테 사람들은 샐러리 잎을 주화의 상징으로 삼았다.[4]
젤리눈테에서 발행된 디드라크마 주화. 셀리논(celery) 잎이 새겨져 있으며, 기원전 515~470년경에 제작되었다.

2. 3. 페니키아 및 엘림인과의 관계

셀리눈테는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그리스 식민지였으며, 이로 인해 시칠리아 서부의 페니키아인, 섬 서쪽과 북서쪽에 살던 토착 시칠리아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인들과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580년경부터 셀리눈테인들은 자신들의 영토와 맞닿아 있는 비그리스계 엘림족인 세제스타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다.[5] 이후 로도스와 크니도스에서 온 이주민들이 리파라를 건설할 때 세제스타를 지원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세제스타와 셀리눈테 사이의 분쟁과 적대 행위는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도로스가 기원전 454년에 세제스타인들이 릴리베아인(오늘날의 마르살라)과 전쟁을 벌였다고 언급했을 때,[6] 이는 실제로는 셀리눈테인들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2. 4. 번영과 쇠퇴

셀리눈테는 시칠리아 섬 남서쪽 해안, 같은 이름의 작은 강 어귀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식민지 중 하나로, 힙사스 강(현대 벨리체 강)에서 서쪽으로 6.5km 떨어져 있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셀리눈테는 그리스 본토 메가라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 도시 메가라 히블라이아에서 온 식민지에서 건설되었으며, 메가라 히블라이아가 건설된 지 약 100년 후에 팜밀루스라는 사람의 지도 하에 건설되었다.[2] 젤리눈테 건설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기원전 628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디오도로스는 기원전 650년, 히에로니무스는 기원전 654년으로 추정한다. 투키디데스의 시기가 가장 신뢰할 만하다.[3] 젤리눈테라는 이름은 그 지역에서 자란 야생 샐러리(σέλινον|(selinon)grc)에서 유래했다.[4] 같은 이유로 샐러리 잎을 주화의 상징으로 채택했다.

젤리눈테는 시칠리아 최서단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시칠리아 서부의 페니키아인, 섬 서쪽과 북서쪽의 토착 시칠리아인들과 접촉했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인들과 갈등을 겪지 않았지만, 기원전 580년경부터 젤리눈테인들은 비그리스계 엘림족인 세제스타와 적대 행위를 벌였다.[5] 이후 로도스와 크니도스에서 온 이주민들이 리파라를 건설하고 세제스타를 지원하여 승리했다. 그러나 세제스타와 젤리눈테 사이의 분쟁은 자주 발생했으며, 디오도로스가 기원전 454년에 세제스타인들이 릴리베아인(현대 마르살라)과 전쟁을 벌였다고 말할 때,[6] 실제로는 젤리눈테인들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세제스타와의 경계였던 마자루스 강은 젤리눈테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었다. 젤리눈테 영토는 곧 강둑까지 확장되었고, 강 어귀에 요새와 상업 중심지가 있었다.[7] 젤리눈테 영토는 할리쿠스 (현대 플라타니) 강까지 확장되었으며, 그 어귀에 헤라클레아 미노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8] 젤리눈테는 이미 막강한 권력과 번영을 이루었지만, 그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시칠리아 도시처럼 젤리눈테는 과두정치에서 참주 정치로 전환되었으며, 기원전 510년경에는 스파르타 출신 도리에우스의 동료인 에우리레온의 도움으로 전복된 페이타고라스라는 폭군의 지배를 받았다. 에우리레온은 잠시 도시를 통치했지만, 젤리눈테인들에 의해 곧 전복되고 처형되었다.[9] 젤리눈테인들은 하밀카르의 대규모 원정(기원전 480년) 때 카르타고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카르타고 군대에 병력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지만, 히메라 전투에서 하밀카르가 패배한 후에 도착했다.[10]

젤리눈테인들은 기원전 466년에 시라쿠사인들이 트라시불루스 오브 시라쿠스를 몰아내는 것을 돕기 위해 다른 시칠리아 도시들과 협력했다.[11]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16년 아테네 원정 직전에 젤리눈테를 육상과 해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신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로 묘사했다.[12] 디오도로스 역시 카르타고 침략 당시 젤리눈테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고,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13] 젤리눈테 성벽은 약 100ha의 면적을 둘러싸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도시 인구는 14,000명에서 19,000명으로 추정된다.

2. 5. 카르타고와의 관계

셀리눈테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지였으며, 이 때문에 시칠리아 서부의 페니키아인들과 섬의 서쪽과 북서쪽에 있던 토착 시칠리아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인들과 갈등을 겪지 않았지만, 기원전 580년경부터 젤리눈테인들은 비그리스계 엘림족인 세제스타와 영토 문제로 분쟁을 벌였다.[5] 이후 로도스크니도스에서 온 이주민들이 리파리를 건설하고 세제스타를 지원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세제스타인과 젤리눈테인 사이의 분쟁과 적대 행위는 자주 발생했으며, 디오도로스가 기원전 454년에 세제스타인들이 마르살라(릴리바이움)와 전쟁을 벌였다고 언급한 것은[6] 실제로는 젤리눈테인들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세제스타와의 경계를 이루었던 마자루스 강은 젤리눈테에서 서쪽으로 불과 25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젤리눈테의 영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둑까지 확장되었고, 강 어귀에 요새와 상업 중심지를 건설했다.[7] 젤리눈테의 영토는 동쪽으로 할리쿠스 (현대 플라타니 강)까지 확장되었으며, 그 어귀에 헤라클레아 미노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8]

기원전 510년경, 젤리눈테는 페이타고라스라는 참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스파르타 출신 에우리레온의 도움으로 전복되었다. 에우리레온은 잠시 도시를 통치했지만, 젤리눈테인들에 의해 곧 전복되고 처형되었다.[9] 젤리눈테인들은 하밀카르의 대규모 원정(기원전 480년) 동안 카르타고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카르타고 군대에 병력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지만, 이는 하밀카르가 히메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도착했다.[10]

기원전 466년, 젤리눈테인들은 시라쿠사인들이 트라시불루스를 몰아내는 것을 돕기 위해 다른 시칠리아 도시들과 협력했다.[11]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16년 아테네 원정 직전에 젤리눈테를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로 묘사했다.[12] 디오도로스 역시 카르타고의 침략 당시 젤리눈테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고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13] 젤리눈테의 성벽은 약 100ha의 면적을 둘러싸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이 도시의 인구는 14,000명에서 19,000명으로 추정된다.

셀리눈테 전투

아테네 군의 패배 이후, 세게스타인들은 셀리눈테에 국경 지대를 양보했지만, 셀리눈테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적대시하여 세게스타인들이 카르타고의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카르타고는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세게스타인들을 지원했고, 그들은 전투에서 셀리눈테인들을 격파했다.[17] 기원전 409년 봄, 카르타고는 한니발 마고가 이끄는 10만 명(고대 기록 기준)의 대군을 파견했다. 군대는 릴리바이움에 상륙하여 셀리눈테로 진격했다. 도시 주민들은 저항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시라쿠사, 아크라가스(현대 아그리젠토), 젤라가 약속한 군대는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젤리눈테인들은 홀로 싸웠고, 성벽이 뚫린 후에도 개별 가옥을 계속 방어했다. 그러나 열흘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고 대부분의 수비수가 죽임을 당했다. 셀리눈테 시민 16,000명이 사망했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600명이 아크라가스로 탈출했다.[18][19] 그 후, 상당수의 생존자와 도망자들이 시라쿠사의 헤르모크라테스에 의해 모여 도시 성벽 안에 정착했다.[20]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니발은 도시 성벽을 파괴했지만, 생존한 주민들이 돌아와 카르타고의 조공국으로서 점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상당수의 셀리눈테 시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는 기원전 405년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와 카르타고인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확인되었다.[19]

2. 6. 시켈리아 원정과 몰락

셀리누스는 시켈리아 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 도시로, 시켈리아 서부의 페니키아인 및 북서부의 선주민과 접촉하였다. 기원전 580년경, 선주민인 엘리미인의 도시 세제스타와 영토 문제로 분쟁을 겪었으며,[50] 이후에도 셀리누스와 세게스타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기원전 416년, 셀리누스와 세게스타 간의 분쟁이 재발하면서 아테네의 대규모 시켈리아 원정이 일어났다. 셀리누스는 시라쿠사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스스로 세게스타를 봉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게스타는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했다.[59] 아테네는 세게스타 구원을 위한 신속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세게스타와의 분쟁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한편, 아테네의 원정군은 기원전 415년에 시켈리아에 도착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장군 중 한 명인 니키아스는 아테네 군을 셀리누스로 향하게 하여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시키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지만,[60]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고 아테네 군은 시라쿠사로 향했다. 그 결과, 이후의 전개에서 셀리누스가 맡은 역할은 작았다. 그러나 셀리누스는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냈다고 하며,[61] 기원전 413년 봄에는 시라쿠사에서 아테네와 싸우는 스파르타길리포스 지원을 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고대 리비아에서 셀리누스로 향하고 있었지만, 폭풍으로 아프리카 근처로 떠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62]

셀리누스 포위전

아테네 원정군의 패배 이후, 셀리누스는 세게스타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분쟁 지역은 셀리누스의 영토가 되었으나, 셀리누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게스타에 대한 적대 행위를 계속했다. 이에 세게스타는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410년, 카르타고는 한니발 마고에게 소규모 군대를 주어 시켈리아로 보내 세게스타를 지원하고 셀리누스를 격파했다.[63] 이후 카르타고, 세게스타, 셀리누스, 시라쿠사 간의 협상이 있었지만, 세게스타와 셀리누스의 화해는 실패했다. 기원전 409년 봄, 카르타고는 한니발 마고가 이끄는 대군(고대 기록에는 12만 명, 현재 추정으로는 3만~4만 명)을 시켈리아에 보냈다. 카르타고 군은 모티아 근처(후의 릴리바이온)에 상륙하여 셀리누스로 진격했다. 셀리누스 주민들은 이러한 대군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고, 저항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성벽은 여러 곳에서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시라쿠사, 아크라가스(현재의 아그리젠토), 젤라(현재의 젤라)가 약속한 원군도 준비되지 않아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셀리누스 시민들은 성벽이 돌파된 후에도 각자의 집을 지키며 싸웠으나, 압도적인 카르타고 군에 저항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10일간의 공성전 끝에 셀리누스는 함락되었고, 방어군은 거의 전사했다. 자료에 따르면, 16,000명의 셀리누스 시민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600명만이 엠페디온의 지휘 아래 아크라가스로 탈출했다.[64][65] 이후, 많은 생존자와 도망자들이 시라쿠사에서 추방된 헤르모크라테스 휘하에 모여 셀리누스의 아크로폴리스 성벽을 수리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카르타고 영토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66] 기원전 406년, 한니발 마고는 셀리누스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카르타고의 속령이 된다는 조건으로 셀리누스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405년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 1세 사이에 체결된 강화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65]

2. 7. 파괴와 재건의 무산

기원전 409년, 한니발 마고가 이끄는 10만 명의 카르타고 군대가 릴리바이온(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하여 셀리눈테로 진격하면서 셀리눈테는 파괴되었다. 셀리눈테 주민들은 이러한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고, 제대로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도시의 요새는 낡았고, 시라쿠사, 아크라가스(현재의 아그리젠토), 젤라에서 약속한 지원군도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셀리눈테인들은 홀로 카르타고 군대에 맞서 싸웠고, 성벽이 무너진 후에도 각자의 집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적군의 수에 밀려 열흘 만에 도시는 함락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살해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6,000명의 셀리눈테 시민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600명만이 엠페디온의 지휘 아래 아크라가스로 탈출했다.[18][19]

이후 시라쿠사의 헤르모크라테스가 생존자들과 탈출자들을 모아 도시 성벽 안에 재정착시켰다.[20]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니발은 도시 성벽을 파괴했지만, 생존 주민들이 돌아와 카르타고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거주하는 것을 허락했다. 상당수의 셀리눈테 시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는 기원전 405년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 1세와 카르타고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확인되었다.[19]

셀리눈테인들은 기원전 397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디오니시우스를 지원했지만, 기원전 383년 평화 조약으로 도시와 영토는 다시 카르타고에 넘어갔다.[22] 디오니시우스는 죽기 직전 셀리눈테를 다시 정복했지만,[23]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의 지배로 돌아갔다. 기원전 383년 조약에서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의 동쪽 경계로 정해진 할리쿠스 강(현재의 플라타니 강)은 일시적인 중단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경계선 역할을 계속했으며, 기원전 314년 아가토클레스와의 조약에서 다시 국경으로 확정되었다.[24] 이 조약은 셀리눈테, 헤라클레아, 히메라가 이전처럼 카르타고의 속국임을 명시했다. 기원전 276년, 피로스가 시칠리아로 원정했을 때, 셀리눈테인들은 헤라클레아 점령 후 자발적으로 피로스에게 합류했다.[25]

제1차 포에니 전쟁 동안 셀리눈테는 다시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놓였고, 그 영토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군사 작전의 무대가 되었다.[26]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전인 기원전 250년경, 카르타고는 방어 거점을 줄이기 위해 셀리눈테의 모든 주민을 릴리바이온으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파괴했다.[27] 이후 셀리눈테는 재건되지 않았다.

3. 고고학 유적

셀리눈테는 서쪽의 모디오네 강(고대 셀리누스 강)과 동쪽의 코토네 강 사이의 두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다와 인접해 있다. 도시의 남쪽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북쪽 내륙에는 주거지와 묘지가 있었다. 도시의 동쪽과 서쪽 강 건너편에도 중요한 유적들이 발견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마리넬라 디 셀리눈테와 신전 E


측면에서 바라본 신전 E


고대 도시 평면도


셀리눈테는 시켈리아(시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 도시 중 하나였으며,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메가라 힙라에아를 모도시로 하여 건설되었다.[47] 셀리누스는 야생 셀러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셀리논(σέλινον|(selinon)grc)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49] 동전에는 셀러리 잎이 새겨져 있다.

셀리누스는 시켈리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 도시였으며, 페니키아인 및 엘리미인과 접촉했다. 기원전 580년경, 세제스타와 영토 문제로 다투었으나,[50] 그 후에도 대립 관계에 있었다. 기원전 454년에는 세게스타와 릴바욘(현재의 마르살라)이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셀리누스와의 전쟁으로 보인다.[51]

셀리누스는 기원전 510년경 페이타고라스가 독재 정치를 했으나, 에우리레온에게 추방되었다.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의 시켈리아 원정 때 셀리누스는 카르타고를 지원했다.[55] 기원전 466년에는 다른 그리스 도시와 협력하여 참주 트라시불로스를 추방했다.[56] 기원전 416년 시켈리아 원정 직전 셀리누스는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였다.[57] 성벽으로 둘러싸인 셀리누스의 면적은 약 100헥타르이며, 기원전 5세기 인구는 14,000에서 19,000명으로 추정된다.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셀리눈테의 아크로폴리스


셀리눈테 유적은 동서쪽에 고지가 있고 그 사이의 안부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으며, 도시 자체도 해발 48미터로 주변보다 높다.

현대 고고학 공원 지역은 약 270헥타르이며,[31]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나뉜다.

  • 중앙의 아크로폴리스와 신전 및 성벽
  • 서부 가겔라 언덕의 모로포로스의 성역
  • 북부 마누차 언덕과 고대 주거지
  • 동쪽 언덕과 신전
  • 묘지

3. 1. 아크로폴리스

셀리눈테의 아크로폴리스는 남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이 있는 석회암 대지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신전과 도시 방어 시설, 주거 시설들이 복합적으로 위치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도로


셀리누스의 아크로폴리스: 앞쪽은 신전 A, B 및 O의 후부. 뒤쪽은 신전 C의 열주.


아크로폴리스 입구에는 16세기 바르바리 해적을 막기 위해 건설된 폴룩스 탑이 있는데, 이는 고대 탑이나 등대 잔해 위에 세워졌다. 히포다모스의 도시 계획은 기원전 4세기(포에니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직각으로 교차하는 두 개의 주요 도로(폭 9m)를 중심으로 구획되어 있다. 남북 도로는 425m, 동서 도로는 338m이며, 32m마다 너비 5m의 작은 도로와 교차한다.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여러 도리아 양식 사원의 유적이 있다. 식민지 초기에는 여러 제단과 작은 성소가 건설되었고, 약 50년 후 더 크고 영구적인 사원으로 교체되었다. 사원 O 앞에는 기원전 409년 정복 이후의 포에니 희생 지역이 있는데, 재가 담긴 항아리와 카르타고식 "어뢰" 유형의 암포라가 보관된 건조 석조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원 A에서 동쪽으로 34m 떨어진 곳에는 기념비적인 입구 유적이 있다. T자형 평면도의 전주 형태를 띠고 있으며, 13 x 5.6m 직사각형에 5 x 12개의 기둥이 있는 주랑과 또 다른 직사각형 6.78 x 7.25m로 구성되어 있다.

동서 도로 건너편, 사원 C 남쪽에는 기원전 580년에서 570년에 지어진 길이 17.65m, 폭 5.5m의 신사가 있다. 이 신사는 고대 그리스의 ''메가론''의 원시 형태로, 아마도 헌납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전실이 없어 동쪽 끝 입구는 바로 내실로 이어졌고, 뒤쪽에는 사각형 아디톤이 있었다. 나중 시대에 세 번째 공간이 추가되었다. 이 신사는 아마도 데메테르 테스모포로스에게 헌정되었을 것이다.[33]

사원 C와 D 사이에는 5세기 AD의 비잔틴 마을 유적이 있다. 재활용된 돌로 지어진 이 마을의 일부 집들은 사원 C의 기둥이 무너져 짓눌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셀리눈테 사원의 붕괴를 일으킨 지진이 중세 시대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북쪽으로 가면, 아크로폴리스는 도시의 두 구역(하나는 서쪽, 다른 하나는 주요 남북 거리의 동쪽)으로 나뉜다. 이 구역들은 기원전 409년 이후 헤르모크라테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집들은 소박하며, 재활용된 재료로 지어졌다. 일부는 새겨진 십자가가 있어 기독교 건물로 개조되었거나 기독교인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더 북쪽, 주요 거주 지역 전에는 아크로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한 웅장한 요새가 있다. 요새는 여러 개의 아치형 통로가 있는 긴 갤러리(원래 덮여 있음)와 평행하며, 그 뒤에는 다리로 건너는 깊은 방어용 도랑이 있다. 서쪽, 북쪽, 동쪽에 세 개의 반원형 탑이 있다. 북쪽 탑 바깥쪽 주변에는 동서 참호 입구가 있으며, 양쪽 벽에 통로가 있다. 요새의 작은 부분만 오래된 도시에 속하며, 대부분은 헤르모크라테스의 재건과 4, 3세기의 연속적인 수리에서 비롯된다. 건축 요소가 재활용된 사실은 일부 사원이 이미 기원전 409년에 버려졌음을 보여준다.

2020년부터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아고라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그 면적은 33,000m2로 로마의 포폴로 광장의 두 배가 넘는다.[39]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아고라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공공 건물과 주거 구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전 발굴에서는 아고라에서 단 하나의 고고학적 특징, 즉 아마도 창립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의 빈 무덤만이 발견되었다.

3. 1. 1. 신전 O와 A



'''사원 O'''와 '''사원 A'''는 바위 받침대와 기원전 490년에서 460년 사이에 건설된 제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두 신전은 동쪽 언덕의 사원 E와 유사한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주랑은 16.2 x 40.2m였으며 6 x 14개의 기둥(높이 6.23m)이 있었다. 내부에는 안티스의 전실, 내실에 아디톤, 그리고 내실과 분리된 후면실이 있었다. 내실은 전실보다 한 계단 높았고, 아디톤은 다시 한 계단 높았다.

사원 A 평면도 (Koldewey, 1899)


사원 A: 타니트 상징의 모자이크


사원 A의 전실과 내실 사이의 벽에는 두 개의 나선형 계단이 위의 갤러리(또는 바닥)로 이어졌다. 사원 A의 전실에는 페니키아 여신 타니트, 카두세우스, 태양, 왕관, 황소 머리의 상징적인 그림이 있는 모자이크 포장재가 있어, 포에니 시대에 종교적 또는 가정적 공간으로 재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32] 사원 O는 포세이돈 또는 아테나에게 헌정되었을 것이고, 사원 A는 디오스쿠리 또는 아폴론에게 헌정되었을 것이다.[2]

3. 1. 2. 신전 B

신전 B 평면도 (맨 위 왼쪽)와 사각형 제단 (Koldewey, 1899)


헬레니즘 시대의 신전 B는 작고(8.4 x 4.6m) 상태가 좋지 않다. 9개의 계단이 있는 계단으로 접근하는 4개의 기둥을 가진 전주 포르티코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뒤를 전실과 내실이 따른다. 1824년에는 다색 석고의 뚜렷한 흔적이 여전히 보였다.[34] 아마도 기원전 250년경, 셀리누스가 완전히 버려지기 얼마 전에 건설되었으며, 기원전 409년 파괴 이후 도시의 미미한 부활을 증명하는 유일한 종교 건물이다.

그 목적은 불분명하다. 과거에는 셀리눈테 늪의 은인인 엠페도클레스의 영웅신전으로 여겨졌지만, 건물의 시기를 고려하면 이 이론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오늘날에는 아마도 강력하게 헬레니화된 포에니 컬트, 아마도 데메테르 또는 아스클레피오스-에슈문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3. 1. 3. 신전 C

신전 C


신전 C 평면도


'''사원 C'''는 셀리눈테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550년경에 건설되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북쪽 측면의 기둥 14개와 엔타블러처 일부가 재건되었다. 이 신전은 24 x 63.7m 크기의 주랑을 가지고 있으며, 6 x 17개의 기둥(높이 8.62m)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는 8개의 계단을 통해 접근하며, 두 번째 열의 기둥과 전실이 있는 포르티코가 있다. 그 뒤에는 내실과 아디톤이 길고 좁은 하나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동쪽 언덕에 있는 사원 F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평면도이다.

사원 C는 도리아 양식 사원의 표준적인 패턴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요소들을 보여준다. 기둥은 웅크리고 거대하며(일부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짐), 엔타시스가 없고, 플루트의 수에 변화가 있다. 또한 기둥 사이 공간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모서리 기둥은 다른 기둥보다 직경이 더 크다.

사원 C에서 발견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이 유물들은 모두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원 C는 기록 보관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수백 개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비문 증거에 따르면 아폴론[35] 또는 헤라클레스[36]에게 헌정되었다.

영국 건축가 사무엘 앤젤과 윌리엄 해리스는 시칠리아 여행 중 셀리누스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여 사원 C에서 조각된 메토프를 발견했다. 지역 부르봉 관료들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이들은 작업을 계속하여 발견물을 영국으로 가져가 대영 박물관에 보관하려 했다. 그러나 앤젤과 해리스의 선적물은 부르봉 당국의 강요로 팔레르모로 옮겨졌고, 현재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37]

사원 C의 동쪽에는 직사각형의 웅장한 제단(길이 20.4m x 폭 8m)이 있으며, 기초와 일부 계단이 남아 있다.

3. 1. 4. 신전 D

신전 D 평면도


기원전 540년에 건설된 '''신전 D'''는 서쪽 면이 남북 방향의 대로와 직접 마주하고 있다. 주랑은 6 × 13개의 기둥(각각 높이 7.51m)으로 24m × 56m이다. 안티스에 전실이 있고, 길쭉한 내실이 아디톤에서 끝난다. 사원 C보다 더 표준화되어 있지만(기둥은 약간 기울어져 있고, 더 가늘며, 엔타시스가 있고, 포르티코는 디스틸 안티스에 의해 지지됨), 기둥 사이 공간의 길이와 기둥의 직경, 기둥당 플루트 수의 변화와 같은 일부 원시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사원 C와 마찬가지로, 주랑과 내실의 포장재에는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개의 원형 및 사각형 구멍이 있다. 사원 D는 비문 증거에 따르면 아테나에게 헌정되었거나[35] 아프로디테에게 헌정되었을 것이다.[38] 대형 외부 제단은 사원의 축에 맞춰져 있지 않고, 남서쪽 모서리 근처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데, 이는 이전 사원이 다른 축으로 같은 부지를 차지했음을 시사한다.

3. 1. 5. 신전 Y

황소 위에 유로파: 신전 Y의 메토페


사원 D의 동쪽에는 작은 제단이 있는데, 이는 고대 신전의 지하실 앞에 있는 작은 제단인 '''사원 Y''' ('''작은 메토페 사원'''으로도 불림)에 해당한다. 발견된 메토프는 높이가 84cm이며 기원전 5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옆모습의 웅크린 스핑크스, 델포이 삼위일체 (레토, 아폴론, 아르테미스)의 뻣뻣한 정면 모습, 유로파의 강간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두 개의 메토페는 기원전 560년경으로 추정되며, 헤르모크라테스의 벽을 건설할 때 재활용되었다. 이 메토페들은 데메테르코레 (또는 헬리오스셀레네? 아폴론?)의 4두 마차와, 세 명의 여성(곡식 이삭을 들고 있는)이 있는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을 보여준다 (데메테르, 코레, 헤카테? 모이라?). 이 유물들은 안토니노 살리나스 지역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2. 동쪽 언덕

동쪽 언덕에는 세 개의 신전이 신성 구역안에 남북으로 나란히 서 있다. 사원 E와 사원 F는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같은 신성 구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성 구역은 셀리누스의 모도시인 메가라의 아크로폴리스 서쪽 경사면과 매우 유사하여, 세 사원의 종교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 '''사원 E'''는 기원전 460-450년에 지어졌으며, 아나스틸로시스를 통해 재건되었다. 헤라에게 헌정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프로디테 신전이라는 주장도 있다.
  • '''사원 F'''는 기원전 550년에서 540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아테나 또는 디오니소스에게 헌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원 G'''는 기원전 530년부터 409년까지 건설되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폴론에게 헌정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제우스 신전이라는 주장도 있다.


코토네 강 입구 언덕 기슭에는 동쪽 항구가 있었는데, 내부 폭이 600미터 이상이었으며, 아크로폴리스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항구는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에 확장되어 부두(남북 방향)와 저장 공간이 보강되었다. 셀리누스의 두 항구 중 '''서쪽 항구'''는 셀리누스-모디오네 강에 있었으며 주요 항구였다. 현재 두 항구는 모두 매립되었다.

성벽 밖의 넓은 단층에는 무역, 상업 및 항만 활동을 위한 구역이 있었다.

현대 마리넬라 마을 북쪽에는 부파 묘지가 있다.

3. 2. 1. 신전 E


  • -|]]|thumb|right|250px|신전 E (헤라 신전)]]
  • -|]]|thumb|300px|신전 E 내부]]


'''신전 E'''(en)는 셀리눈테 동쪽 언덕에 있는 세 신전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기원전 460-450년경에 건설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A와 신전 O와 평면이 매우 유사하다. 현재 모습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원재료를 사용하여 복원한 아나스틸로시스의 결과이다.

주 기둥은 6 x 15 열(높이 10.19미터)로 25.33 x 67.82 미터 크기이며, 원래 덮여 있던 스투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신전 각 방의 높이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10개 계단을 오르면 동쪽 입구가 나오고, 인 안티스 형식의 프로나오스를 지나 6개 계단을 더 오르면 나오스에 이른다. 나오스 뒤 아디톤까지는 6개 계단이 더 있으며, 아디톤 뒤에는 벽으로 막힌 인 안티스 형식의 오피스토도모스(보물 창고)가 있다.

나오스 벽 상단 도리아식 프리즈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메토프가 있다. 얼굴과 여성의 노출된 피부는 고급 파리아 대리석(en)으로, 나머지 부분은 현지 석재로 만들어졌다.

다음 네 개의 메토프가 보존되어 있다.

아폴론다프네로 추정되는 작은 파편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근 신전 E 내부 및 지하 발굴 결과, 이전에 두 개의 성소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기원전 510년에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봉헌 비문에 따르면 신전 E는 헤라에게 바쳐졌지만,[40][41] 일부 학자들은 구조적 유사성을 근거로 아프로디테 신전이라고 추정한다.

3. 2. 2. 신전 F

동쪽 언덕: 앞은 신전 F, 뒤는 복원된 신전 E


신전 F의 평면도


'''사원 F'''는 가장 오래되고 작은 신전으로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540년 사이에 사원 C를 모델로 지어졌다. 세 개의 신전 중 가장 심하게 약탈당했다. 페리스타일은 24.43 x 61.83 미터, 6 x 14개의 원주 배치(높이 9.11 미터)이며, 원주 사이의 공간에 석조 차단물(높이 4.7 미터)이 있고, 거기에 벽기둥과 대륜을 갖춘 가짜 문이 그려져 있다. 실제 입구는 동쪽 끝에 있다. 이 차단물의 목적은 불분명하며, 그리스 신전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헌납물을 보호하고 특정 의식(디오니소스의 밀의 등)을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안쪽에는 원주의 두 번째 열이 있는 포르티코, 프로나오스, 나오스, 아디톤이 좁은 단일 구조 안에 있다(고대 형식).

동쪽에서는 후기 고대 형식의 메토프(기원전 500년)가 1823년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아테나 또는 디오니소스가 두 거인을 물리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이 메토프는 안토니오 살리나스 지역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들은 신전 F를 아테나[2][86] 또는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3. 2. 3. 신전 G

G. 크루피의 초기 사진 속 신전 G (1925년 이전)


신전 G 평면도


신전 G : "lu fusu di la vecchia"


'''사원 G'''는 셀리눈테에서 가장 큰 신전(길이 113.34미터, 너비 54.05미터, 높이 약 30미터)이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도 가장 큰 사원 중 하나였다.[43] 기원전 530년부터 409년까지 건설되었지만, 동쪽 면은 아르카익, 서쪽 면은 고전적 건축 양식이 나타나는 등 긴 건설 기간으로 인해 완공되지 못했다. 일부 기둥에는 홈이 없고, 10킬로미터 떨어진 쿠사 동굴에는 같은 크기의 기둥 드럼이 여전히 추출 중인 상태로 남아있다.

거대한 폐허 더미에서는 8 x 17 열(높이 16.27미터, 직경 3.41미터)의 주위 기둥을 알아볼 수 있는데, 1832년에 재건된 기둥은 하나뿐이며 시칠리아어로 “lu fusu di la vecchia”(늙은 여자의 물레)라고 불린다. 내부는 4개의 기둥이 있는 프로스타일 프로나오스, 필라스터로 끝나는 두 개의 깊은 안타 벽, 그리고 큰 나오스로 이어지는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오스는 매우 컸으며 세 개의 통로로 나뉘어 있었고, 가운데 통로는 아마도 열려 있었을 것이다(''히파이트로스''). 두 줄의 가느다란 기둥(갤러리)을 지지하는 두 번째 줄의 기둥과 지붕 공간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측면 계단이 있었다. 중앙 통로 뒤에는 나오스 벽과 분리되어 완전히 안에 포함된 아디톤이 있었다. 아디톤 내부에서는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 거인의 토르소와 “셀리누스의 대형 테이블”이라고 알려진 매우 중요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뒤쪽에는 나오스에서 접근할 수 없는 안테에 있는 오피스토도모스가 있었다. 폐허 중에는 다채로운 스투코의 흔적을 보여주는 일부 완성된 기둥과 측면에 말굽 모양의 홈이 있는 엔타블러처 블록이 특히 흥미롭다. 이 홈에 로프를 통과시켜 블록을 제자리로 들어 올렸다. 사원 G는 아마도 도시의 보물 창고 역할을 했을 것이며, 비문에 따르면 아폴론에게 헌정되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제우스에게 헌정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3. 3. 만누차 언덕

마누자 언덕에는 도시의 주요 주거 지역이 있었으며, 현대 도로는 거대한 사다리꼴 형태의 지역 경계를 따라 이어진다. 이 지역 전체는 히포다모스식 계획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아크로폴리스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북-남 방향으로 190 x 32미터 크기의 길쭉한 인술라를 가지고 있었고, 원래는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몇 차례의 선상 발굴을 통해 셀리누스(기원전 7세기) 건국 초기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도시의 후기 확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9년 셀리누스가 파괴된 후, 이 도시 지역에는 다시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 헤르모크라테스에 의해 돌아온 피난민들은 더 방어하기 쉬운 아크로폴리스에만 정착했다. 1985년에는 언덕에서 응회암 구조물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기원전 5세기의 공공 건물로 추정된다.[31] 주거 지역 너머 북쪽에는 마누자와 갈레라-바글리아초에 있는 더 오래된(7-6세기) 두 개의 네크로폴리스가 있다.

3. 4. 가제라 언덕과 말로포로스 성역

아크로폴리스에서 서쪽 언덕으로 흐르는 모디네 강을 건너는 길이 있다.

말로포로스 신전 평면도 (Koldewey, 1899)


말로포로스의 메가론


헤카테 신전


긴 수로


가제라 언덕에는 풍요의 여신 말로포로스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매우 오래된 셀리눈테 신전의 유적이 있으며, 1874년과 1915년 사이에 지속적으로 발굴되었다.[88] 이 유적은 다양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기원전 6세기에 언덕 비탈에 세워졌으며, 마니칼룽가 묘지로 가기 전에 장례 행렬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이 장소에 건물이 전혀 없었고, 제단에서 숭배 행위를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나중에 신전과 높은 울타리 벽(''테메노스'')이 세워지면서 신전으로 바뀌었다. 이 신전은 사각형의 울타리(60 x 50미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동쪽 면에서는 짧은 계단과 원형 구조물이 있는 안티스 형식의 사각형 프로필레아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기원전 5세기에 건축). 울타리 밖에서는 프로필레아가 순례자들을 위한 좌석이 있는 긴 주랑(''스토아'')의 유적과 양쪽에 접해 있었으며, 순례자들은 다양한 제단과 봉납물을 남겨두었다. 울타리 안쪽에는 중앙에 큰 제단(길이 16.3m, 폭 3.15m)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희생된 동물의 뼈와 기타 부품의 재로 된 더미가 있었다. 제단은 남서쪽으로 연장되었으며, 초기 아르카익 제단의 유적이 북서쪽 끝 근처에서 보이고, 제단의 신전 쪽에 사각형 구덩이가 있다. 제단과 신전 사이에는 바위에 새겨진 수로가 있는데, 북쪽에서 전체 지역을 통과하여 근처 샘에서 신전으로 물을 운반했다. 수로 바로 옆에는 데메테르 신전 자체가 ''메가론'' 형태(길이 20.4m, 폭 9.52m)로, 크레피도마나 기둥이 없지만, 전실, 나오스, 그리고 뒷면에 틈새가 있는 아디톤이 갖춰져 있다. 전실 북쪽에는 사각형의 부속실이 부착되어 있다. 메가론은 기초 수준에서만 인식할 수 있는 이전 단계가 있었다. 신전 남쪽에는 사각형 구조물과 기능이 불분명한 직사각형 구조물이 있다. 신전 북쪽에는 테메노스의 안팎으로 열리는 두 개의 방이 있는 후기 시대의 또 다른 구조물이 울타리의 보조 입구를 형성한다. 울타리의 남쪽 벽은 언덕 측면의 침하에 대응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보강되었다.

프로필레아 남쪽에는 울타리 벽에 부착된 또 다른 울타리가 있었는데, 이는 헤카테에게 헌정되었다. 이 울타리는 사각형 형태였으며, 동쪽 모퉁이에는 입구 근처에 신사가 있었고, 남쪽 모퉁이에는 용도가 불확실한 작은 사각형 포장 공간이 있었다.

북쪽 15미터 지점에는 제우스 메일리키오스(꿀 같은 제우스)와 파시크라테이아(페르세포네)에게 헌정된 또 다른 사각형 울타리(17m x 17m)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남아 있지만, 기원전 4세기 말에 건설된 다양한 구조물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울타리는 다양한 유형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벽(헬레니즘 시대 주랑의 일부), 울타리 뒤편에 있는 소형 안티스 형식의 전실 신전(길이 5.22m, 폭 3.02m)에 도릭 기둥이 있지만, 이오니아 양식의 엔타블러처와 울타리 중앙에 있는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밖으로, 서쪽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얕은 새김으로 만든 신성한 쌍(남성 및 여성 얼굴)의 이미지가 얹어진 작은 석비를 많이 봉헌했다. 이와 함께 재와 봉헌물의 잔해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지하 신에 대한 그리스 숭배와 푸니 종교 간의 수렴의 증거였다.

말로포로스 신전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모두 팔레르모 박물관에 보관) 신화적 장면을 묘사한 조각 부조, 기원전 7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테라코타 봉헌 조각상 약 12,000개, 데메테르와 아마도 타닛을 묘사한 큰 흉상 모양의 향로, 많은 양의 코린트 도자기(후기 원형 코린트 및 초기 코린트), 울타리 입구에서 발견된 하데스에 의한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묘사한 저부조 등이 있다. XP라는 모노그램이 새겨진 램프를 포함한 기독교 유물은 서기 3세기와 5세기 사이에 신전 지역에 기독교 종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가제라 언덕의 경사면을 조금 더 올라가면 말로포로스 신전이 물을 얻는 샘이 있다. 그 아래 50미터 지점에는 한때 신전으로 여겨졌던 건물(소위 "신전 M")이 있는데, 실제로는 기념비적인 분수이다. 그것은 사각형 모양(길이 26.8m x 폭 10.85m x 높이 8m)이며, 정방형 블록으로 건설되었고, 물 저장소, 기둥이 있는 주랑으로 보호된 폐쇄된 수조 및 앞면에 큰 포장 구역이 있는 4계단 접근 계단을 포함했다. 건물은 도릭 양식이며, 그곳에서 발견된 건축 테라코타에 의해 주로 기원전 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조노마키아가 새겨진 메토프 조각은 근처에서 발견되었지만, 작은 매끄러운 메토프가 있는 건물에 속하지 않는다.

말로포로스 신전에서 북동쪽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메가론이 최근 발굴되었다.

3. 5. 네크로폴리스

셀리누스 주변에는 여러 묘지가 확인된다.

  • '''부파''' (기원전 7세기 말과 6세기): 동쪽 언덕 북쪽에 있다. 이 유적에는 테라코타, 꽃병, 동물의 유해(아마도 희생물)가 있는 삼각형의 제물 도랑(25 x 18 x 32미터)이 있다.[31]
  • '''갈레라 발리아초''' (기원전 6세기): 만누차 언덕 북동쪽에 있다. 이곳의 응회암에 파인 무덤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부장품이 있다. 1882년에는 셀리누스의 에페보스라고 불리는 조각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카스텔베트라노 시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1]
  • '''피피오 브레시아나와 마니칼룽가 템포네 네로''' (기원전 6세기~5세기): 가제라 언덕 서쪽에 있으며, 셀리누스 묘지 중 가장 광범위하다. 도시 중심부와 거리가 있어 도시의 묘지인지 교외 지역의 묘지인지는 불분명하다. 매장 흔적 외에도, 화장의 증거인 암포라와 피토스가 있다. 석관은 테라코타 또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덮인 방도 있다.[31]

3. 6. 쿠사 채석장

쿠사 채석장: 사원 G의 두 개의 기둥 블록이 기반암에 여전히 붙어 있다.


'''쿠사 채석장'''(Cave di Cusait)은 셀리눈테에서 13km 떨어진 캄포벨로 디 마차라 근처에 있는 석회암 둔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셀리눈테의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재료를 공급한 석재 채석장이었다. 채석장의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는 기원전 409년에 도시가 공격받으면서 작업이 갑자기 중단된 것이다. 채석공, 석공 및 기타 작업자들이 갑자기 떠나면서 오늘날에는 첫 번째 깊은 원형 절단에서 운송을 기다리는 완성된 북에 이르기까지 채석 과정의 모든 단계를 재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다. 기둥 북과 함께, 일부 주두와 사각형 블록을 채석하기 위한 사각형 절개도 있으며, 모두 셀리눈테의 사원을 위한 것이다. 이미 채취된 북 중 일부는 운송 준비가 된 채로 발견되었고, 다른 일부는 이미 셀리눈테로 가는 길에 도로에서 버려졌다. 쿠사 채석장의 서쪽 지역, 즉 원래 버려진 상태로 있는 곳에서도 사원 G에 사용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둥이 발견된다.

4. 주화

셀리누스의 동전은 수가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초기의 동전은 앞면에 단순히 파슬리 잎의 그림만을 새겨 넣었다. 조금 더 늦은 시기의 동전은 제단에서 희생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아래에 수탉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이 유형의 주제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언급한 이야기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데, 셀리누스인들은 인근 강의 늪지 특성으로 인해 역병에 시달렸지만, 엠페도클레스가 제안한 배수 작업을 통해 치료되었다고 한다.[89] 일부 동전에 서 있는 인물은 강의 신 셀리누스인데, 그는 도시의 건강에 기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런던 위생 열대 의학 대학원의 문장은 조각가이자 메달리스트인 앨런 가드너 와이언이 디자인한, 기원전 466년에 주조된 셀리누스의 동전을 기반으로 한다. 문장은 건강과 관련된 두 명의 그리스 신, 즉 예언, 음악, 의학의 신인 아폴론과 사냥과 순결의 여신이자 출산 중인 여성의 위안자인 그의 여동생 아르테미스를 말 수레에 탄 모습으로 보여준다. 아르테미스가 마차를 몰고 있고, 위대한 궁수인 그녀의 오빠가 화살을 쏘고 있다. 열대 지역에서의 학교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풍성한 대추야자가 추가되었지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의 어머니 레토가 델로스 섬에서 그들을 낳았을 때, 기적적으로 야자수가 솟아올라 출산 중인 그녀에게 그늘을 제공했다. 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는 고대 그리스 의학의 신이었으며, 뱀이 감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뱀은 환자의 영향을 받은 부위를 핥게 하는 이 치유 숭배에 사용되었다. 중요한 점은 아스클레피오스의 딸들이 히기에이아(건강의 여신)와 파나케이아(모든 질병의 치유자)였다는 것이다. 뱀이 감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의료 전문가의 상징으로 알려짐)가 학교의 의학적 관심을 강조하기 위해 문장의 기저에 놓였다. 문장은 1990년에 러셀 소웰 디자인 어소시에이츠에 의해 재설계되었으며, 현재 학교 로고 내에 보존되어 있다.

5. 예술 및 기타 발견

셀리눈테에서 발견된 조형 예술은 매우 중요하며, 그 대부분은 안토니오 살리나스 지역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셀리눈테 대(大) 탁자'''는 1871년 G신전의 아디톤에서 발견되었다. 이 탁자에는 셀리눈테에서 행해지던 숭배 의식 목록이 담겨 있어, 셀리눈테의 여러 신전에서 어떤 숭배가 이루어졌는지 파악하는 근거가 된다. 탁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셀리눈테인들은 제우스, 포보스, 헤라클레스, 아폴론, 포세이돈, 틴다리다이, 아테나, 데메테르, 파시크라테이아와 다른 신들 덕분에 승리했지만, 특히 제우스 덕분이다. 평화가 회복된 후에는 신들의 이름을 새긴 금으로 된 작품을 만들어 제우스를 맨 위에 놓고 아폴론 신전에 안치하며, 이에 16탈렌트의 금을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11]

셀리눈테의 에페보스는 엄격한 양식으로 제작된, 술을 바치는 에페보스의 청동 조각상으로, 기원전 470년에 제작되었으며, 그리스 서부의 특징을 보여준다. 시라쿠사의 숫양 외에 그리스 시칠리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대규모 청동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카스텔베트라노에 보관되어 있다.[11] 폰테 갈레라 지역에서 1882년, 두 어린 소년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점토 사르코파거스에 놓여 위험한 시기에 숨겨졌을 가능성이 높다.[11]

묘지에서는 다수의 원-코린토스, 코린토스, 로도스 및 아티카 흑색 도기 꽃병이 출토되었지만, 셀리눈테는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특한 지역 도자기는 출토되지 않았다.[11]

말로포로스 성소에서는 테라코타 조상, 도자기, 향로 흉상, 제단,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강탈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조, 그리고 기독교 램프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부는 전시되어 있다.[11]

5. 1. 메토프

셀리눈테의 대표적인 예술로는 메토프가 있으며, 그 중 다수는 팔레르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각 신전에서 발견된 메토프는 다음과 같다.

  • C 신전:

  • E 신전:

  • F 신전:

  • Y 신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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