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역사 (1985년 ~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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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역사 (1985년 ~ 1991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취임한 1985년부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통해 소련을 개혁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공산주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 침체, 사회적 불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소련은 붕괴되었으며, 동유럽 민주화, 냉전 종식, 세계 질서 재편 등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 붕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르바초프의 역할, 서방의 역할 등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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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근대사 - 소련의 역사
소련은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로, 러시아 혁명 이후 수립되어 초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공화국들의 독립 선언으로 해체되었다. - 러시아의 근대사 - 소련의 역사 (1917년 ~ 1927년)
소련의 역사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하여 소비에트 정부 수립, 러시아 내전, 신경제정책 도입, 레닌 사망과 스탈린의 권력 장악을 거쳐 소련이 성립된 시기를 다룬다. - 소련의 역사 - 굴라크
굴라크는 소련의 교정노동수용소 주임국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약자로, 1920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정치범 등을 수용하여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환경으로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소련의 강제 노역 시스템을 지칭한다. - 소련의 역사 - 중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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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역사 (1985년 ~ 199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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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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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소비에트 연방 |
시작 | 1982년 |
종료 | 1991년 |
이전 시대 | 소련의 역사 (1964–1982) |
포함 | 냉전 1989년 혁명 |
이후 시대 | 러시아의 역사 (1991–현재) |
지도자 |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미하일 고르바초프 |
주요 사건 | |
군사/정치적 사건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카자흐 시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
정치적 변화 | 1989년 폴란드 입법 선거 1989년 중소 정상회담 범유럽 피크닉 베를린 장벽 붕괴 체코슬로바키아 벨벳 혁명 미국-소련 몰타 회담 루마니아 혁명 주권 선언 퍼레이드 법률 전쟁 |
1991년 붕괴 관련 사건 | 걸프 전쟁 라트비아: 바리케이드 리투아니아: 피의 일요일 아제르바이잔 바쿠: 검은 1월 4월 9일 트빌리시 비극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 우크라이나 독립 벨라베자 협정 알마아타 의정서 소련 붕괴 |
2. 소련 붕괴의 배경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82년 무렵, 소련 경제의 침체는 명백해졌다. 1970년대 내내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수입해 온 사실이 이를 방증했는데, 시스템이 너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도 불가능해 보였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잠식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와 고르바초프 시대를 구분하는 과도기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훨씬 더 가까웠지만, 1983년 이른 시기부터 개혁의 조짐이 나타났다.[3]
브레즈네프는 1982년 11월 10일에 사망했다. 2일간의 권력 투쟁 끝에 유리 안드로포프가 새로운 총서기가 되었다. 그는 KGB와의 연계를 통해, 그리고 국방비 삭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군부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잡았다. 비교하자면, 그의 경쟁자 중 일부인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높은 군사 예산을 지속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68세의 안드로포프는 역대 최연장으로 총서기에 임명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당과 국가 관료 체제 전반에 걸쳐 철저한 숙청을 시작했는데, 이는 중앙위원회의 평균 연령이 69세였다는 사실로 인해 쉬운 결정이었다. 그는 소련 장관의 5분의 1 이상, 지역 당 제1서기의 5분의 1 이상, 중앙위원회 기구 내 부서장 3분의 1 이상을 교체했다. 그 결과, 그는 늙어가는 지도부를 더 젊고 활력 넘치는 행정가로 교체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가 최고 지도부를 재편하는 능력은 그의 나이와 건강 악화, 그리고 그의 경쟁자이자 브레즈네프의 오랜 동맹이었으며 과거 중앙위원회에서 인사 문제를 감독했던 체르넨코의 영향력에 의해 제약되었다.[4]
브레즈네프에서 안드로포프로의 권력 이양은 소련 역사상 한 명도 투옥되거나 살해되거나 강제로 해임되지 않은 채 완전히 평화롭게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였다.
안드로포프의 국내 정책은 소련 사회에 규율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및 경제 개혁을 피하고, 대신 정치에서 약간의 솔직함을 장려하고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1960년대 중반에 시작했던 것과 유사한 온건한 경제 실험을 추진했다. 이러한 경제 실험과 함께 안드로포프는 정부와 당의 고위층까지 이르는 반부패 운동을 시작했다. 여러 저택과 호화로운 차량을 소유했던 브레즈네프와 달리 그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1983년 초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굴라시 공산주의에 관심을 표명했으며, 소련 경제의 엄청난 규모 때문에 엄격한 하향식 계획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1982년은 실질 GDP 성장률이 거의 0%에 가까워지면서 국가 경제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기에, 변화가 시급했다.
안드로포프는 일련의 외교 정책 위기에 직면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절망적인 상황, 폴란드에서의 반란 위협, 중국과의 증대되는 적대감, 중동에서의 전쟁 위협, 에티오피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문제 등이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제2차 냉전"과 그가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한 것을 되돌리려는 구체적인 공격이었다. 레이건은 미국의 경제력과 소련의 경제적 약점을 이용하여 냉전에 대한 막대한 지출을 확대하고, 모스크바가 부족한 첨단 기술을 강조했다.[5] 주요 대응책은 군사 예산을 국가 예산의 70%까지 증액하고,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남예멘, PLO, 쿠바, 북한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탱크와 장갑 수송차, 수백 대의 전투기, 대공 시스템, 포병 시스템, 그리고 소련이 동맹국에게 주요 공급업체였던 온갖 종류의 첨단 장비가 포함되었다. 안드로포프의 주요 목표는 공개적인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다.[6][7][8]
외교 정책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분쟁은 안드로포프가 침략이 실수였다고 느끼면서 협상을 통한 철수 방안을 탐색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안드로포프의 통치는 또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특징지어졌다. 소련 외교관 율리 퀴친스키와 함께 한 유명한 "숲 속 산책" 동안, 미국 외교관 폴 니츠는 양측의 유럽 핵 미사일 감축을 위한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정치국에 의해 결국 무시되었다.[9] 퀴친스키는 나중에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타협에 관심이 없었으며, 대신 서방의 평화 운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굴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계산했다고 썼다.[10] 1983년 3월 8일,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칭했다. 같은 달 3월 23일, 레이건은 전략 방위 구상을 발표했다. 레이건은 이 탄도 미사일 방어 연구 프로그램이 "ABM 조약에 따른 우리의 의무와 일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이러한 주장을 일축하며 "이제 그들[워싱턴]이 핵전쟁을 일으킬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을 멈춰야 한다. ...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미친 짓이다"라고 말했다.[11]
1983년 8월, 안드로포프는 소련이 우주 기반 무기에 대한 모든 작업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유럽에서의 중거리 핵무기에 대한 소련-미국 군비 통제 회담은 1983년 11월에 소련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해 말까지 소련은 모든 군비 통제 협상을 중단했다.[12]
소련 전투기가 민간 여객기인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하여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 여객기에는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는 1983년 9월 1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는 정규 노선에서 소련 상공을 벗어났다. 소련 시스템은 민간 여객기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격추는 의문 없이 명령을 따르는 문제였다.[13] 사고를 인정하는 대신, 소련 언론은 서방의 도발에 대처하는 용감한 결정을 선언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멜트다운에 대한 낮은 신뢰도 설명과 함께, 이 사건은 홍보 위기에 대처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선전 시스템은 이미 소련의 헌신적인 친구들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두 위기 모두 기술적, 조직적 실패와 인간의 실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악화되었다.[14]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특히 1983년 3월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른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공식 통신사 타스(TASS)는 레이건이 "대결과 호전적이고 정신 나간 반공주의만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은 또한 레이건이 서유럽에 중거리 핵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앙골라 인민 공화국, 니카라과 등에서 미국은 레이건 독트린 하에 이들 국가의 반공주의 저항 운동에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소련이 지원하는 정부를 훼손하기 시작했다.[15]
레이건 대통령의 서유럽에 중거리 퍼싱 II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한 결정은 프랑스와 서독과 같은 국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으며, 때로는 한 번에 100만 명에 달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미국이 소련보다 더 공격적인 국가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미국이 짧은 육상 국경과 달리 두 개의 대양으로 적군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독일 및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광범위한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억이 여전히 강했고 많은 독일인들은 그 분쟁의 종말에 소련군이 저지른 파괴와 대량 강간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간의 전쟁이 반드시 핵무기의 사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레이건 행정부의 발언에 의해 뒷받침되었다.[16]
안드로포프의 건강은 1983년 긴장된 여름과 가을 동안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는 그해 11월 1917년 혁명 기념 행사에 불참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1984년 2월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소련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견하고 육성한 것이었다. 1978년부터 고르바초프는 2년 만에 크렘린 권력 구조를 거쳐 정치국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그의 인선 책임은 미래의 서기장 출마에 필요한 인맥을 만들고 특혜를 분배할 수 있게 했다. 이 시점에서 서방 전문가들은 안드로포프가 고르바초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의 투병 기간 동안 서기장의 대리인 역할을 했지만, 고르바초프의 후원자가 1984년 초에 사망했을 때 그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17]
73세의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심한 폐기종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안드로포프의 뒤를 잇는 후임자로 지명되었을 때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체르넨코의 짧은 재임 기간에도 몇 가지 중요한 정책 변화가 있었다. 안드로포프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던 인적 쇄신과 부패 조사 활동이 종결되었다. 체르넨코는 소비재 및 서비스,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소련 공산당(CPSU)의 경제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줄이고 여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소련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탄압 또한 증가했다. 1983년 2월, 소련 대표단은 소련 정신의학의 정치적 남용에 대한 지속적인 항의를 이유로 세계 정신의학 기구에서 탈퇴했다. 이 정책은 6월에 라디오 모스크바의 방송인 블라디미르 단체프가 영어 방송을 진행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침략자"라고 지칭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이 발언을 철회하기를 거부한 후 몇 달 동안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다. 비공식 전문직 노동자 연합의 지도자인 발레리 센데로프는 교육 및 전문 분야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발언한 혐의로 그 해 초에 7년 형을 선고받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체르넨코는 서방과의 새로운 ''데탕트''를 촉구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동서 관계의 균열을 좁히는 데 거의 진전이 없었다.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1984년 9월,[19] 소련은 또한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막았다.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의 전투 역시 격화되었지만, 1984년 늦가을에 미국과 소련은 1985년 초에 군비 통제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2. 1. 경제 침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개혁 개방을 시작하였으나, 이는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26]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군사비 지출을 GDP의 7%까지 증가시켰고, 이에 맞서 소련도 군사비 지출을 GDP의 27%까지 늘리면서 민간 상품 생산을 1980년 수준으로 동결하여 경제 침체를 심화시켰다.[26] 미국은 무자헤딘 군벌을 지원하여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붕괴에 기여했고,[27] 중국 인민해방군과 함께 파키스탄을 지원하여 소련에 대항했다.[28] 결국 소련은 1988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철수해야 했다.[29]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의 유럽 천연 가스 판매를 방해하고 유가를 낮게 유지하여 소련의 외화 자본을 고갈시키는 "장기적 전략 공세"를 펼쳤다.[30]
고르바초프의 ''우스코레니예''(경제 개발 가속화)와 ''페레스트로이카''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제는 암시장, 인플레이션, 공급 부족에 시달렸다.[32] 초강대국 지위 유지 비용은 소련 경제에 과도한 부담이었고, 정보 기술 기반 산업화는 소련을 서방 기술과 신용에 의존하게 만들었다.[32]
2. 2. 사회적 불만
1980년대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2. 3.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영향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장기화는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1980년대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1985년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을 개혁, 개방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공산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3. 고르바초프의 개혁
굳을 대로 굳어 있던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혼합경제의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1988년 5월에 제정된 협동조합법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신경제정책 이후 처음으로 서비스, 제조업, 대외 무역 분야에서 사기업의 소유를 허용했다. 이 조항에 따라 협동조합 식당, 상점, 제조업체가 소련의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글라스노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여 통제가 훨씬 덜 이루어지게 했다. 수천 명의 정치범과 많은 반체제 인사들도 석방되었다. 소련 사회 과학은 이전에 금지되었던 많은 주제에 대해 탐구하고 출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론 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포함했다. 당시 시작된 여러 여론 조사 기관 중 가장 유명한 전연방 여론 조사 센터(VCIOM)가 개설되었다. 국가 기록 보관소가 더 접근하기 쉬워졌고, 소득 격차, 범죄, 자살, 낙태, 유아 사망률과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한 연구 및 출판을 위해 비밀로 유지되었던 일부 사회 통계가 공개되었다. 최초의 젠더 연구 센터는 새로 설립된 인구 사회 경제 연구소 내에 개설되었다.
1987년 1월, 고르바초프는 다수 후보 선거와 같은 민주적 요소를 소련의 정치 과정에 주입하는 민주화를 요구했다. 1988년 6월, 소련 공산당 제19차 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정부 기구에 대한 당의 통제를 줄이기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시작했다.[34][35] 1988년 12월 1일, 최고 소비에트는 소련 헌법을 개정하여 소련의 새로운 최고 입법 기관인 소련 인민대표대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36]
새로운 인민대표대회 선거는 1989년 3월과 4월에 걸쳐 소련 전역에서 치러졌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엘리트가 그에게 불만을 품으면 언제든지 사임해야 할 수도 있었다. 공산당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과 소비에트(평의회)로부터 독립적이며, 법을 직접 위반하는 경우에만 탄핵될 수 있는 새로운 직책인 소련 대통령으로 권력을 통합하려 했다.[37] 1990년 3월 15일, 고르바초프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헌법의 제6조가 변경되어 소련 공산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박탈했다.[38]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소련 사회에 다양한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초래했다. 당초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결함을 없애기 위해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혼합경제의 급작스러운 유입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21]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인해 공산당은 언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언론은 소련 정부가 은폐해 온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39] 열악한 주거 환경,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 공해, 낙후된 공장, 부패 등의 문제와 더불어, 요시프 스탈린 시대의 범죄, 아돌프 히틀러와의 조약, 대숙청 등이 폭로되면서 소련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훼손되었다.[3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처리 부실 또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소련 체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공산당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려 소련의 정체성과 통합을 위협했다. 동유럽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 노동조합의 부상과 함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대체한 시나트라 독트린의 영향으로 1989년 혁명이 일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었다.
소련 내에서도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분출하며, 억눌렸던 민족 간 긴장이 다시 나타났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갈등은 숨가이트 학살로 이어졌다. 발트 3국에서는 발트의 길과 노래 혁명과 같은 대규모 평화 시위가 독립 운동을 강화했다.
경제적으로도 '페레스트로이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유지하면서 분권화를 시도했으나, 이는 오히려 새로운 생산 병목 현상을 야기했다. 1990년 소비재 가치는 약 4,590억 루블(2조 1,000억 달러)이었지만,[40] 정부는 경제 통제력을 상실했고, 비수익 기업 증가와 세입 감소로 인해 경제난은 심화되었다.
3. 1.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혼합경제의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1988년 5월에 제정된 협동조합법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신경제정책 이후 처음으로 서비스, 제조업, 대외 무역 분야에서 사기업의 소유를 허용했다. 이 조항에 따라 협동조합 식당, 상점, 제조업체가 소련의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글라스노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여 통제가 훨씬 덜 이루어지게 했다. 수천 명의 정치범과 많은 반체제 인사들도 석방되었다. 소련 사회 과학은 이전에 금지되었던 많은 주제에 대해 탐구하고 출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론 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포함했다. 당시 시작된 여러 여론 조사 기관 중 가장 유명한 전연방 여론 조사 센터(VCIOM)가 개설되었다. 국가 기록 보관소가 더 접근하기 쉬워졌고, 소득 격차, 범죄, 자살, 낙태, 유아 사망률과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한 연구 및 출판을 위해 비밀로 유지되었던 일부 사회 통계가 공개되었다. 최초의 젠더 연구 센터는 새로 설립된 인구 사회 경제 연구소 내에 개설되었다.
1987년 1월, 고르바초프는 다수 후보 선거와 같은 민주적 요소를 소련의 정치 과정에 주입하는 민주화를 요구했다. 1988년 6월, 소련 공산당 제19차 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정부 기구에 대한 당의 통제를 줄이기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시작했다.[34][35] 1988년 12월 1일, 최고 소비에트는 소련 헌법을 개정하여 소련의 새로운 최고 입법 기관인 소련 인민대표대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36]
새로운 인민대표대회 선거는 1989년 3월과 4월에 걸쳐 소련 전역에서 치러졌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엘리트가 그에게 불만을 품으면 언제든지 사임해야 할 수도 있었다. 공산당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과 소비에트(평의회)로부터 독립적이며, 법을 직접 위반하는 경우에만 탄핵될 수 있는 새로운 직책인 소련 대통령으로 권력을 통합하려 했다.[37] 1990년 3월 15일, 고르바초프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헌법의 제6조가 변경되어 소련 공산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박탈했다.[38]
3. 2. 개혁의 의도치 않은 결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소련 사회에 다양한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초래했다. 당초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결함을 없애기 위해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혼합경제의 급작스러운 유입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21]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인해 공산당은 언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언론은 소련 정부가 은폐해 온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39] 열악한 주거 환경,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 공해, 낙후된 공장, 부패 등의 문제와 더불어, 요시프 스탈린 시대의 범죄, 아돌프 히틀러와의 조약, 대숙청 등이 폭로되면서 소련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훼손되었다.[3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처리 부실 또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소련 체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공산당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려 소련의 정체성과 통합을 위협했다. 동유럽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 노동조합의 부상과 함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대체한 시나트라 독트린의 영향으로 1989년 혁명이 일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었다.
소련 내에서도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분출하며, 억눌렸던 민족 간 긴장이 다시 나타났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갈등은 숨가이트 학살로 이어졌다. 발트 3국에서는 발트의 길과 노래 혁명과 같은 대규모 평화 시위가 독립 운동을 강화했다.
경제적으로도 '페레스트로이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유지하면서 분권화를 시도했으나, 이는 오히려 새로운 생산 병목 현상을 야기했다. 1990년 소비재 가치는 약 4,590억 루블(2조 1,000억 달러)이었지만,[40] 정부는 경제 통제력을 상실했고, 비수익 기업 증가와 세입 감소로 인해 경제난은 심화되었다.
4. 소련의 해체 과정
굳을 대로 굳어 있던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소련의 해체는 사회 붕괴에 해당하는 체계적인 해체 과정으로, 이는 경제, 사회 구조, 정치 구조에서 발생했다. 이로 인해 1991년 12월 26일 소련 연방 정부("연방 중앙")가 폐지되고, 소련 공화국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소련 정부의 약화로 인해 해체를 초래했으며, 1990년 1월 19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41][42] 이 과정은 많은 소련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주권 국가로 인정받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중앙위원회 정보부 부국장 안드레이 그라체프는 몰락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고르바초프는 실제로 국민들의 공포를 없앰으로써 소련의 저항에 일종의 마지막 타격을 가했습니다. 이 나라는 스탈린 시대부터 두려움에 의해 구조로서, 정부 구조로서 통치되고 유지되었습니다."[43]
4. 1. 공화국들의 독립 선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하였고,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4. 2. 8월 쿠데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4. 3. 벨라베자 조약과 독립 국가 연합(CIS) 창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뒤떨어지기 시작했다.[41][42] 갑작스러운 혼합경제의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했다. 이러한 소련의 해체는 사회 붕괴에 해당하는 체계적인 해체 과정으로, 경제, 사회 구조, 정치 구조에서 발생했으며, 1991년 12월 26일 소련 연방 정부 폐지와 함께 소련 공화국들이 독립하게 되었다.[41][42]중앙위원회 정보부 부국장 안드레이 그라체프는 "고르바초프는 실제로 국민들의 공포를 없앰으로써 소련의 저항에 일종의 마지막 타격을 가했습니다. 이 나라는 스탈린 시대부터 두려움에 의해 구조로서, 정부 구조로서 통치되고 유지되었습니다."라고 소련 몰락의 결말을 요약했다.[43]
5. 소련 붕괴의 영향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5. 1. 냉전 종식과 세계 질서 재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소련의 개혁과 개방을 추진했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혼합경제의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등을 돌렸다.결국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군산복합체를 해산했다. 그는 소련의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 동구권을 비롯한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5. 2. 동유럽 민주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5. 3. 러시아의 등장과 개혁
1980년대에 들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는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하였고,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옐친의 충격 프로그램이 시행되어, 보조금이 삭감되고, 가격 통제가 폐지되었으며, 루블화는 태환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옐친의 측근과 기업가들이 국유 재산을 장악하며 재벌이 되었고, 시장 경제의 새로운 법적 구조가 확립되기 전에 기존 제도는 버려졌다.
시장 경제학자들은 러시아의 행정 명령 시스템 해체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GDP와 생활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믿었으나, 러시아는 1992년 자유 시장 지지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인구의 25%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했으며, 기대 수명이 감소했고, 출산율이 낮았으며, GDP가 절반으로 줄었다. 경제적 불평등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90년대에 일련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이는 옐친의 공산주의 경쟁자인 겐나디 쥬가노프가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뻔하게 만들었다. 21세기 초 이후, 러시아 경제는 주요 투자와 사업 개발, 그리고 천연 자원 가격 상승으로 인해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5. 4. 한반도에 미친 영향
소련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 개방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1년 붕괴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건국 70년 만에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소련의 붕괴는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가속화했고, 한반도 정세와 남북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6. 소련 붕괴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45]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45] 사실 이 개혁 개방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절충적 개혁 개방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혼합경제라는 호랑이를 한순간에 불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혼합경제의 갑작스러운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리스 N. 미로노프에 따르면, 2020년까지 러시아 학자들은 붕괴를 설명하려는 300권이 넘는 책, 3,000편의 논문, 20편의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1985년~1991년의 단기적인 관점에서 인물, 외부 요인 및 정책 실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장기적인 경제, 정치, 문화 및 사회 구조를 살펴본다.[45]
- 마이클 콕스. "역사에서 배우는가? 소련 붕괴에서 '새로운' 냉전까지." ''냉전사'' 14.4 (2014): 461–485.
- 앤서니 칼라시니코프. "상반된 해석: 소련 붕괴의 원인." ''별자리'' 3.1 (2011) 75–86. https://journals.library.ualberta.ca/constellations/index.php/constellations/article/download/16289/13076 온라인
- 데이비드 R. 마플스. "소련 붕괴 재검토." ''캐나다 슬라브 논문'' 53.2–4 (2011): 461–473.
- 보리스 N. 미로노프. "역사학에서 소련의 해체: 붕괴인가 용해인가." (2021) DOI:10.21638/11701/SPBU02.2021.108 https://dspace.spbu.ru/bitstream/11701/27904/1/132-147.pdf 러시아어로 온라인
- B. N. 미로노프. "토착화에서 주권화로: 어떻게 소련의 해체가 준비되었는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헤럴드'' 92.1 (2022): S33-S48.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134/S1019331622070085 온라인
6. 1. 붕괴 원인에 대한 다양한 관점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는 혼합경제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취임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취임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개방은 공산주의 체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그리고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한 동시에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이로써 노동자와 농민,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건국 70년 만에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는 당시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소련 붕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 마이클 콕스는 "역사에서 배우는가? 소련 붕괴에서 '새로운' 냉전까지."에서 냉전사를 다루었다.
- 앤서니 칼라시니코프는 "상반된 해석: 소련 붕괴의 원인."에서 소련 붕괴의 원인을 분석했다.
- 데이비드 R. 마플스는 "소련 붕괴 재검토."에서 소련 붕괴를 다시 검토했다.
- 보리스 N. 미로노프는 "역사학에서 소련의 해체: 붕괴인가 용해인가."에서 소련 해체를 붕괴 또는 용해의 관점에서 분석했고, "토착화에서 주권화로: 어떻게 소련의 해체가 준비되었는가."에서 소련 해체 과정을 다루었다.
6. 2. 고르바초프의 역할에 대한 평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면서 소련을 개혁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공산주의의 유지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혼합경제의 유입은 공산주의 체제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하였다.고르바초프는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소련군, 소련 군산복합체를 해산하였으나, 소련의 붕괴는 막지 못했다.
6. 3. 서방의 역할에 대한 논쟁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가 1980년대에 들어 혼합경제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을 개혁 개방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공산주의 체제를 흔들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길 원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군 등을 해산했으나, 소련의 붕괴는 막지 못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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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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