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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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과 서인 분파에서 시작되어, 조선 숙종 대에 송시열을 비판하며 형성된 정치 세력이다. 윤증, 남구만, 박세채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에 대한 노론과의 대립을 통해 소론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경종을 지지하며 노론과 대립했으나, 영조 즉위 후 몰락하고 탕평책 하에서 일부 세력이 존속했다. 소론은 강화학파로 학문적 전통을 이어갔으며, 사도세자 처형 이후 시파와 벽파로 분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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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은 조선 후기 서인에서 분화되어 숙종, 경종 시대 소론과의 정쟁을 거쳐 영조, 정조 시대 탕평책 속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붕당으로, 청나라에 대한 입장 차이, 서인 내부 갈등,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 등이 형성 원인이며 사도세자 죽음 관련 시파, 벽파 분열과 북학파를 내포하기도 했다. - 조선의 붕당 - 경신환국
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때 서인이 유악 사건과 삼복의 변을 계기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며 조선 정계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조선의 붕당 - 개화파
개화파는 187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 초 조선에서 서양 문물 수용을 지지하며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했던 개혁 세력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나 임오군란 이후 분열되어 친일 행위로 국권 침탈에 가담하거나 애국계몽운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 1910년 폐지 -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황제 즉위와 함께 선포한 황제 국가로,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고 자주적인 국가를 지향했으나, 일본의 영향력 강화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멸망했으며,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 1910년 폐지 - 한성부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를 관할하며 행정, 사법, 재정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으며, 1895년 지방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소론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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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글 | 소론파 |
한자 | 少論派 |
로마자 표기 | Soronpa |
다른 로마자 표기 | Soronp'a |
창당 | 1680년(경신환국) |
해산 | 1721년(신임옥사) |
분당 전 | 산당, 한당 |
후계 정당 | 완론 → 탕평당에 흡수 및 시파로 계승 준론 → 이인좌의 난으로 전멸 |
종교 | 유교(성리학) |
주요 인물 | |
영수 | 약천 남구만 명재 윤증 남계 박세채 명곡 최석정 운곡 이광좌 조현명 송인명 이시수 이병모 |
2. 형성 과정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서인 분파의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1]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인조로 교체된 후,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두 분파로 나뉘었다. 김류가 이끈 훈서(勳西, 공서(功西)라고도 함)는 반정에 적극 참여한 세력이었고, 김상헌이 이끈 청서(淸西)는 반정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었다. 훈서는 후에 노서(老西)로, 청서는 소서(少西)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 후기에 이르러 훈서(노서)는 원두표 계열의 원(元)파와 김자점 계열의 낙(洛)파로 나뉘었다. 청서(소서) 역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괴산군과 회덕군 출신 사림(士林) 중 권력에 영향받지 않은 선비의 청렴을 중시한 산(山)파와, 권력자의 요구에 부응하려 했던 한(漢, 한성, 현재 서울)파로 나뉘었다. 소론은 산파에서 분파된 운동으로, 송시열이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겨났다.
소론이 산파에서 분파된 직접적인 원인은 1682년 한태동이 1680년 남인을 탄압한 김익훈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관련된 논쟁이었다. 이 상소에 반대한 송시열은 노론(老論)의 영수가 되었고,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을 중심으로 상소를 지지한 세력은 소론(少論)이 되었다.[1]
2. 1. 서인의 분열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서인 분파의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1]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1]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인조로 교체된 후,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두 분파로 나뉘었다. 김류가 이끈 훈서(勳西, 공서(功西)라고도 함)는 반정에 적극 참여한 세력이었고, 김상헌이 이끈 청서(淸西)는 반정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었다. 훈서는 후에 노서(老西)로, 청서는 소서(少西)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 후기에 이르러 훈서(노서)는 원두표 계열의 원(元)파와 김자점 계열의 낙(洛)파로 나뉘었다. 청서(소서) 역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괴산군과 회덕군 출신 사림(士林) 중 권력에 영향받지 않은 선비의 청렴을 중시한 산(山)파와, 권력자의 요구에 부응하려 했던 한(漢, 한성, 현재 서울)파로 나뉘었다. 소론은 산파에서 분파된 운동으로, 송시열이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겨났다.
소론이 산파에서 분파된 직접적인 원인은 1682년 한태동이 1680년 남인(南人)을 탄압한 김익훈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관련된 논쟁이었다. 이 상소에 반대한 송시열은 노론(老論)의 영수가 되었고,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을 중심으로 상소를 지지한 세력은 소론(少論)이 되었다.[1]
2. 2. 회니시비와 소론의 등장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서인의 분파가 시작되었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1669년 윤선거의 죽음으로 시작된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은,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으면서 심화되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기유의서》를 통해 자신의 교조적인 태도를 비판한 것을 이유로 앙금을 드러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이 대립했다. 소론은 1682년 한태동이 1680년 남인을 탄압한 김익훈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송시열이 이 상소에 반대하면서 윤증을 중심으로 상소를 지지한 세력이었다.[1]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2. 3. 경신환국과 노론, 소론의 분립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서인 분파의 단초가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1] 그리고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1]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원래 서인이었으나, 1680년 남인의 전횡을 막고자 숙종이 남인을 대량으로 추방한 경신환국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소론의 수장은 윤증이었으나, 그는 1714년에 사망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인조로 교체된 후,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두 분파로 나뉘었다. 김류가 이끈 훈서(勳西, 공서(功西)라고도 함)는 반정에 적극 참여한 세력이었고, 김상헌이 이끈 청서(淸西)는 반정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었다. 훈서는 후에 노서(老西)로, 청서는 소서(少西)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 후기에 이르러 훈서(노서)는 원두표 계열의 원(元)파와 김자점 계열의 낙(洛)파로 나뉘었다. 청서(소서) 역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괴산군과 회덕군 출신 사림(士林) 중 권력에 영향받지 않은 선비의 청렴을 중시한 산(山)파와, 권력자의 요구에 부응하려 했던 한(漢, 한성, 현재 서울)파로 나뉘었다. 소론은 산파에서 분파된 운동으로, 송시열이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겨났다.
소론이 산파에서 분파된 직접적인 원인은 1682년 한태동이 1680년 남인을 탄압한 김익훈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관련된 논쟁이었다.
3. 정치 활동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분파의 단초를 보였던 서인은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694년 갑술환국의 결과로 소론 세력이 권력을 얻었다. 1694년 이후 정치 지형은 주로 노론과 소론의 정치 세력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론은 사도세자의 처형으로 인해 시파(時派)와 벽파(壁派)로 분열되었다.
3. 1. 왕위 계승 문제와 대립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분파의 단초를 보였던 서인은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694년 갑술환국의 결과로 소론 세력이 권력을 얻었다. 1694년 이후 정치 지형은 주로 노론과 소론의 정치 세력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론은 사도세자의 처형으로 인해 시파(時派)와 벽파(壁派)로 분열되었다.
3. 2. 영조 즉위와 소론의 몰락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서인의 분파가 시작되었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나타났다.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은 '회니시비' 논쟁으로 송시열과 불화를 일으켰고, 남구만, 박세채 등이 이 분파의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었다.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입장을 문제 삼았다.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통해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를 비판한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가속화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여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심화되었다.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소론이 득세했지만,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1694년 갑술환국의 결과로 소론 세력이 권력을 얻었으며, 이후 정치 지형은 주로 노론과 소론에 의해 결정되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경기도와 충청도 백성들의 지지도 받았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소론은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계승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소론은 사도세자의 처형을 두고 세자의 죽음에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처형에 동의하는 벽파(僻派)로 분열되었다.
3. 3. 탕평책과 이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서인의 분파는 이미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1694년 갑술환국의 결과로 소론 세력이 권력을 얻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사도세자의 처형으로 인해 소론은 세자의 죽음에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처형에 동의한 벽파(壁派)로 분열되었다.
4. 학문적 경향과 계승
5. 주요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소론(少論)
http://encykorea.aks[...]
[2]
인물
심의겸
[3]
인물
김효원
[4]
그룹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5]
그룹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6]
그룹
광해군 폐위 반대
[7]
그룹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8]
그룹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9]
그룹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10]
그룹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11]
그룹
인조반정 주도세력
[12]
그룹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13]
인물
원두표
[14]
인물
김자점
[15]
인물
김집
[16]
인물
김육
[17]
그룹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18]
그룹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19]
인물
송시열
[20]
인물
윤증
[21]
그룹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22]
그룹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23]
그룹
척신정치 반대
[24]
그룹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25]
그룹
천주교 박해 주장
[26]
그룹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27]
그룹
천주교 박해 반대
[28]
그룹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29]
그룹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30]
그룹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을 전멸시키고 정권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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