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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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건창은 1852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시인이다. 1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암행어사, 승지 등을 역임하며 민생 구휼에 힘썼으며, 외세 침탈에 저항했다. 갑오경장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척양척왜를 주장하다가 1898년 사망했다. 주요 저서로는 《당의통략》, 《명미당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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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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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건창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 개화 사상가로, 강화학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강화도 출신으로, 조부 이시원에게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외세의 침탈과 부패한 정치 현실에 맞서 싸우며 여러 차례 유배를 겪었다.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들으며 민생 구휼에 힘썼고, 외국인의 토지 매입을 금지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갑오경장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후에는 을미사변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을미의병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 침략 세력에 협조하지 않아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1898년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송파구 송파1동 송파초등학교 옆 근린공원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영세불망비[21]가 세워져 있다. 강화도 사기리에도 수의사 영세불망비[22]가 있고, 경기도 하남시(감북로 39번지)에도 불망비가 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행정복지센터 맞은편 주택가 안쪽에도 영세불망비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확인이 필요하다.
- 영재 이건창 묘역 (인천시 기념물 29호)
- 영재 이건창 생가 (明美堂, 인천시 기념물 30호)
찾아가는 길은 "강화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에서 간선버스 #1, #2, #3, #4, #41번을 타고 "이건창생가"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이건창 생가는 버스 정류장 바로 인근에 있다.
2. 1. 가계와 출생
이건창은 전 개성부 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한 충정공(忠貞公) 사기 이시원의 손자이며, 증 이조참판 이상학(李象學)의 아들이다. 강화도 출신으로, 조부가 개성부유수로 재직할 때 유수부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살아왔다. 이건창의 부계(父系)는 조선 영조대왕 때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로 낙향하여 지식인 학자 가문(육진팔광)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 후손들은 전통적으로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발전시켰는데, 이건창은 강화학파의 계승자이기도 하다.(→강화학파 육대계승)조부 충정공 사기 이시원으로부터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성장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조부의 영향을 받았다. 김택영, 황현, 강위[24]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부정과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 지기(知己)와 옛 친구([http://dic.daum.net/search.do?q=知舊&dic=hanja 知舊]),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히 처벌하였으며, 의례적인 가식 없이 소신대로 표현하여 당시 부패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신망을 얻어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2. 2. 초기 활동과 과거 급제
조부 충정공(忠貞公)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에게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에 정통하였으며, 고종 3년(1866)[5]에 15세로 최연소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너무 일찍 등과하였기 때문에 고종 7년(1870) 19세가 되어서야 승정원 주서(注書, 정7품)에 임명되었다. 고종 11년(1874, 23세) 동지사[25](冬至使: 외교사절)의 서장관(書狀官: 기록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파견, 그곳의 문장가 黃珏|황각중국어, 張家驤|장가양중국어, 徐郙|서보중국어 등과 교류하며 이름을 떨쳤다.2. 3. 암행어사 활동과 민생 구휼
고종 14년(1877, 26세)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하다 모함을 받아 관서지방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었으나, 1년 후 풀려났다. 고종 17년(1880, 29세)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 당한 농민들을 구휼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종 30년(1893, 42세) 함흥부 난민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20]로 파견되어 함경도 관찰사의 죄상을 밝혀내 파면시켰다. 고종은 지방관을 보낼 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이건창은 공사 집행에 있어 강직하고 당당한 자세를 보였다.
2. 3. 1. 암행어사 시절 작품
1877년(고종 14년) 26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다가 모함을 받아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후 풀려났다. 1880년(고종 17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 당한 농민들을 구휼하며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의 활동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이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은 당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충청우도 태안군 안흥에서 수군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
- 모진 흉년에 관리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 경기도 암행 중에 환곡[6]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이 작품들은 기층민(빈곤층)의 애환을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나왔기에 그 표현이 절실하고 사상이 온화하면서도 강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 4. 외세 침탈에 대한 저항
당시 조선에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이고 있었다. 이건창은 이러한 행위가 점차 커져 소유권 보호를 명목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국법을 마련해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7]당시 조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북양군 출신 북양대신 리훙장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샤오이([https://zh.wikipedia.org/zh-tw/%E5%94%90%E7%BB%8D%E4%BB%AA 唐紹儀]→후에(1912년)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는 이 상소 내용을 알고 "조약상에 청국인과의 가옥 및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는데 왜 금지하려 하는가?"라고 항의했다. 이에 이건창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하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반박했다. 당샤오이는 리훙장의 항의를 빌미로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건창은 포기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에게 다른 죄목을 적용해 가중처벌했다. 이를 알아차린 백성들은 외국인과의 매매를 꺼리게 되었고, 청국인들도 매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7]
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king&mclass=07&year=1895&num=&kingname=%EA%B3%A0%EC%A2%85&month=8&day=20&kingname=%EA%B3%A0%EC%A2%85 일성록],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3208020_001&mTree=0&inResult=0&indextype=1 고종실록]) 이후, 이건창은 왕비 시해의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일제의 겁박으로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친일파 김홍집 내각을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음력 9월 5일에는 '청토복소'([http://dic.daum.net/search.do?q=請討復疏&dic=hanja 請討復疏][8])라는 상소문([http://dic.daum.net/search.do?q=上疏文&dic=hanja 上疏文])을 올렸으나 고종은 읽어보지도 못하고 반송되었다. 음력 9월 13일에 다시 올렸으나 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건창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이 하나로 합해졌고, 을미의병도 일어났다.[7]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에 타협하지 않고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했다. 고종 33년 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오히려 일제 침략 세력에 협조하지 않아 전라도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강화도에 내려가 한성과 발길을 끊고 지내다 1898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2. 5. 갑오경장 반대와 은퇴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갑오경장에 반대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로 낙향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발생하자, 홍승헌, 정원용과 함께 궐문에 나아가 상소문(청토복소)을 올렸다. 당색의 제한 때문에 정치 이념을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체험하고는 붕당 정치사인 《당의통략》을 집필하였다.이건창은 정원하, 홍승헌, 이건승, 이건방 등과 함께 정제두의 유풍을 흠모하여 강화도로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현실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건창과 교유한 아우 이건승, 재종제 이건방도 갑오정국(친일 김홍집 내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2. 5. 1. 상소문 : 〈청토복소 (請討復疏)〉
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7]이 일어나고 달이 바뀌어도 상복을 입는 사람이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이건창은 홍승헌(洪承憲),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문 앞에 엎드려 폐비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일제의 겁박으로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한심했고, 이보다 더 큰 변고는 조국의 멸망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9월 5일 <청토복소(請討復疏)[8]>라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은 읽어보지도 못한 채 반송되었다. 음력 9월 13일 다시 올렸으나 역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건창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이 하나로 합해졌고 을미의병도 일어났다. 이건창은 청나라 양무운동을 이끌었던 리훙장이 개국을 도모할 때 이미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2. 6. 만년과 죽음
1891년(고종 28년)에 승정원 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상소 사건으로 전라도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고종 30년) 함흥부의 난민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20]로 파견되어 함경도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이후 고종은 지방관을 보낼 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그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7]이 발생하고 나서 시간이 흘러도 상복을 입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이건창은 홍승헌(洪承憲)·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 아래에 엎드려 폐비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잡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일제 침략 세력의 겁박으로 인해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친일파 김홍집 내각은 그에게 한심한 존재였고, 이보다 더한 변고는 조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했다. 음력 9월 5일 <청토복소>[8]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은 읽어보지도 못한 채 반송되었다. 음력 9월 13일 다시 올렸으나 역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이건창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은 하나로 합해졌고 의병들도 일어났다.(→을미의병) 그는 청나라 양무운동을 이끌었던 리훙장(李鴻章)이 개국을 도모할 때 이미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고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1896년(고종 33년) 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새로운 관제에 따라 각 부의 협판(차관급)·특진관(비서관)·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결국 이건창은 일제 침략 세력(친일파 김홍집 내각)에 협조하지 않아 오히려 전라도 고군산도(군산시)로 세 번째 유배형에 처해졌다.(특지로 2개월 뒤 풀려났다) 그 뒤 향리인 강화도에 내려가 한성과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인 대한제국 광무 2년(1898) 4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2. 7. 사후 평가 및 기념 사업
이건창의 시문은 동생 이건승이 저자 사후에 집안에 보관된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 정리하고 교정한 다음 김택영에게 검수를 부탁하여 정고본을 만들었다.[23] 그 후 영남의 선비 하겸진, 이엽, 안진우, 문박, 윤재현과 호남의 선비 황원, 이병호, 안종학 등이 저자의 유고를 보존해야 한다며 출판 비용을 모금하고, 김택영에게 교정을 부탁하여 1917년 12월에 김택영이 중국 남통시의 한묵림서국에서 20권 8책의 연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이 초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위창古3648-文62-13[11]),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348),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468)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78년 《명미당집 (明美堂集)》과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합본하여 아세아문화사에서 《이건창전집 (李建昌全集)》 상하 2책을 간행하였고, 1984년 명미당전집 편찬위원회가 《명미당전집 (明美堂集)》 2책을 선문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본서의 초벌 원고는 1917년 중국 남통시 한묵림서국에서 연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다.(출처:한국고전번역원)
2. 8. 학맥 계승
동생 경재 이건승은 을사늑약(1905년)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뒤 강화도 사기리에 남아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술국치(1910년)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건창이 굳게 지켜낸 강화학파의 정신과 민족자주이념은 재종제 난곡 이건방의 제자 위당 정인보, 서여 민영규 등에게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현대 한국학의 뿌리가 되었다.2. 9. 명미당
명미당(明美堂)은 이건창의 생가 당호(堂號)이며, 조부 충정공(忠貞公) 사기 이시원이 병인양요 때 순국하면서 남긴,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3. 주요 저작
이건창의 주요 저작으로는 《명미당고》 12권, 《당의통략》 2권, 《남천기》, 《유독수기》 1권, 《미제록》 1권이 있다.
3. 1. 《명미당집 (明美堂集)》
공은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저서 《당의통략》은 당파와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붕당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공의 문필은 송대의 대가인 왕안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하곡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의 학문 태도를 교훈받고 실천하였다. 구한말의 문학가인 창강 김택영은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 중 아홉 명을 선정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칭했는데, 공을 그 마지막 사람으로 꼽았다. 이를 통해 공이 당대의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몇 안 되는 대문장가 중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순국한 조부 충정공 사기 이시원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고》 12권, 《당의통략》 2권 외에 《남천기》, 《유독수기》 1권, 《미제록》 1권이 있다.
3. 2. 《당의통략 (黨議通略)》
이건창은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당파와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붕당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1]《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부 사기 이시원이 지은 《국조문헌(國朝文獻)》에서 당쟁에 관련된 내용만을 발췌한 것이다.[4] 이 책은 조선 선조~영조 대에 이르는 각 왕대별로 주요 사건을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선조 8년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난 것에서 시작하여, 영조 31년까지의 약 180년간을 대상으로 당쟁의 흐름을 기술하고, 말미에 <원론(原論)>을 부기하였다.[4]
본문 내용에서는 숙종조의 분량이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 시기가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에도 원인이 있지만, 노소분열이 전개된 이 시기 소론의 정치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5] <원론>에서는 중국 역대의 붕당사를 간략히 언급한 다음에, 붕당의 원인으로 도학(道學)의 과중(過重), 명의(名義)의 과엄(過嚴), 문사(文詞)의 과번(過繁), 형옥(刑獄)의 과밀(過密), 대각(臺閣)의 과준(過峻), 관직(官職)의 과청(過淸), 벌열(閥閱)의 과성(過盛), 승평(昇平)의 과구(過久) 등 8가지를 들었으며,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실용(實用)에 힘쓰는 것이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는 한 방법임을 강조하였다.[5]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각 당색(黨色)에 따라 여러 가지 당론사가 출현하였는데, 본 책은 저자의 가계상 소론의 입장에서 쓴 것으로, 남인의 입장에서 쓴 《동소만록(桐巢漫錄, 남하정)》이나 노론의 입장에서 쓴《아아록(我我錄, 남기제)》 등과는 서술 체제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6] 특히 노소분당(老少分黨)의 원인에 대해서 소론인 명재 윤증의 입장을 지지하고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크게 비판한 점, 경종 1년부터 경종 2년까지 일어났던 정치적 분쟁, 즉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 문제 때문에 발생한 신임사화(辛壬獄事)에 있어서 노론 측의 잘못을 부각시킨 점 등은 특히 그러하다.[6]
본 책은 소론의 입장이 개입되어 있지만 다른 당론서에 비해서는 연대기별로 주요한 사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조선 후기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7]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융희 4년에 설치된 조선 광문회(최남선)에서 신활자본으로 간행했다.[8] 이를 토대로 1972년 을유문화사에서 영인본을 간행했으며, 여강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시대 당쟁사 자료집》에도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8] 2책 필사본 28.5×17.6cm.[8]
4. 작품 세계
이건창은 1877년(고종 14년) 암행어사로 충청우도에 파견되었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다가 모함을 받아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었으나 1년 후 풀려났다. 고종의 격려에 힘입어 1880년(고종 17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다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감면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기층민(빈곤층)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조국의 부강을 염원하는 작가의 사상이 담겨 있어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1884년(고종 21년)에는 부모상을 연이어 당해 6년간 상을 치렀고, 1890년(고종 27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4. 0. 1. 대표작
- 전가추석(1878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에 목격한 추석 농가의 참상을 묘사): 탐관오리의 횡포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6]
- 녹수작(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대한 가슴 아픔과 죄인에 대한 연민.
- 도망(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삶의 허무함.
이건창은 암행어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충청우도 태안군 안흥에서 수군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암행 중 환곡[6]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기층민(빈곤층)의 애환을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작가의 사상을 담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5. 가계
이건창은 전 개성부 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한 충정공(忠貞公)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의 손자이며, 증(贈) 이조참판 이상학(李象學)의 아들이다. 강화도 출신으로, 조부가 개성부유수로 재직할 때 유수부(留守府)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살아왔다. 이건창의 부계(父系)는 조선 영조대왕 때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로 낙향하여 지식인 학자 가문(육진팔광)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전통적으로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발전시켰는데, 이건창은 강화학파의 계승자이기도 하다(강화학파 육대계승).
조부 충정공 사기 이시원으로부터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참조
[1]
인물
이시원
1866
[2]
문서
정치역사 연대기
[3]
문서
충청우도 암행어사
1879
[4]
용어
어사또
[5]
사건
병인양요
1866
[6]
용어
환곡
[7]
문서
고종실록
1895-08-20
[8]
문서
請討復疏
[9]
용어
편차
[10]
용어
산삭
[11]
용어
일제식 문서분류 표기법
[12]
직책
지제교
[13]
지역
호서와 호남
[14]
직책
경적·사서 강론 관직
[15]
문서
請討 및 復疏
[16]
연호
융희 원년
1907
[17]
문서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
1878-04-14
[18]
인물
김택영
[19]
사건
함흥민란
1892
[20]
직책
안핵사
[21]
유적
송파동 영세불망비
1883
[22]
유적
강화도 사기리 영세불망비
1885
[23]
용어
정고본
[24]
인물
강위
[25]
직책
동지사 및 서장관
[26]
용어
교수
[27]
용어
서계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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