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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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으로, 삼국 시대에는 백제 영토였으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에 속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20명의 독립 유공자를 포함한 88명의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대봉산과 가학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을 가지며, 완도 미라리 상록수림과 완도 맹선리 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여객선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소안 항일 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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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섬 정보 | |
이름 | 소안도항일운동 |
![]() | |
나라 | 대한민국 |
면적 | 약 23.22km2 |
최고점 | 가학산(駕鶴山) |
높이 | 359m |
주요 섬 | 소안도 |
군도 | 소안군도 |
인구 | 2,532 |
인구 기준일 | 2016년 6월 30일 |
위치 | 남해 |
행정 구역 이름 (도) | 도 |
행정 구역 (도) | 전라남도 |
행정 구역 이름 (군) | 군 |
행정 구역 (군) | 완도군 |
2. 역사
소안도는 삼국 시대에 백제의 영토였으며, 완도는 동음현, 오차현, 새금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소안도는 완도, 노화도, 보길도와 함께 새금현에 속했다. 후삼국 시대에는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소안도도 그 영역에 포함되었다.[3]
914년 후고구려(태봉)의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면서 소안도는 후고구려의 관리 하에 놓였고,[3]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고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 소안도는 영암군에 속했으며, 이 상태는 1018년(고려 현종)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3]
조선 시대에도 소안도는 계속 영암군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 2월 3일, 완도군이 설치되면서 소안도, 횡간도, 자개도(당사도), 구도가 완도군에 편입되었다.[3]
16세기 중반 김해 김씨, 동복 오씨가 월항(月項)에 처음 정착했고,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은 섬을 '달목도(達木島)'라 불렀다. 1866년 청산진 설치 이후 청산진에서 군무와 행정을 담당하다가, 1896년 완도군 설치와 함께 완도군 소속이 되었다.[3]
조선 정조 때 가혹한 세금 징수로 주민들의 삶이 어려워져, 1864년 소안도 주민 전체가 상부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에 상부에서는 비자(榧子)에 별장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다.[3]
1914년 3월 1일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당시 소안도는 17개 행정리로 구성되었고, 비동리가 소재지였다.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송내호, 김경천 선생이 설립한 '소안사립학교'가 항일 독립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고(故) 송내호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했고,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故) 정남국 선생이 배출되었다.[3]
2. 1. 삼국 시대 및 고려 시대
백제 영지였던 완도는 동음현(冬音縣), 오차현(烏次縣), 새금현(塞琴縣) 등 3개의 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소안도는 완도, 노화도, 보길도와 함께 ‘새금현’에 속해 있었다. 후삼국 시대에는 892년 견훤이 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세웠는데, 호남 땅이 그 영지가 되면서 소안도도 그 권역에 들어갔다.[3]914년 후고구려(태봉)의 왕건이 백홍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를 공략하여 그 이남 지역을 점령하였고, 소안도도 그 아래에서 관리되었다.[3]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소안도는 자연스럽게 고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완도의 모든 섬이 장흥부, 탐진현, 영암군, 해남현 등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각기 영속되었다. 소안도는 군외의 일부 도서와 노화, 보길과 함께 이 중 영암군에 속해 있었는데, 그 역사가 1018년(고려 현종) 이래 조선 시대까지 계속되었다.[3]
2.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소안도는 영암군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 2월 3일 나주부 관할의 완도군이 설치되면서, 영암군에 속했던 현재의 면 행정 구역인 소안도, 횡간도, 자개도(당사도), 구도가 합쳐져 완도군의 19개 면 중 하나로 완도군에 편입되었다.[3]16세기 중반 김해 김씨, 동복 오씨가 월항(月項)에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는데, 임진왜란을 피해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섬 이름을 '달목도(達木島)'라 불렀다. 1866년 청산진 설치 이후에는 군무와 행정을 청산진에서 담당하다가 1896년 완도군 설치와 함께 완도군 소속이 되었다.[3]
조선 정조 때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져, 1864년에 모든 소안도 주민이 상부에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이에 상부에서는 비자(榧子)에 별장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하였다.[3]
2. 3. 일제 강점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당시 소안도는 17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었으며, 비동리가 소재지였다.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곳으로, 그 배경에는 송내호, 김경천 선생이 연 ‘소안사립학교’가 있었다. 이곳은 항일 독립 운동 본거지로서 고(故) 송내호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활동했으며,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고(故) 정남국 선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3]3. 자연 환경
소안도는 대봉산(해발 337.6m)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와 가학산(해발 359m)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이 두 지역은 소안면사무소가 있는 해발고도 5m 미만의 낮은 지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섬 내부 지형은 대부분 경사가 급하고, 암석 산지가 바다와 만나는 곳은 대부분 해식애와 같은 가파른 절벽이나 파식대와 같은 암석 해안을 이룬다. 만 안쪽은 간석지보다는 자갈 해안이 대부분이다. 북쪽 해안 일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여 월항염전이 있다.
1월 평균 기온은 2.5°C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5°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285mm, 연 강설량은 1.5mm이다.[4]
3. 1. 천연기념물

'''완도 미라리 상록수림'''(莞島 美羅里 常綠樹林)은 천연기념물 제339호로,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미라리 472번지에 위치한다. 면적은 16000m2이다. 소안도의 해안가를 따라 길이 400m로 길게 펼쳐져 있다. 상록수림을 구성하는 식물들로는 모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밤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후박나무, 보리밥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 해송 등 24종 776그루가 있다.[6]

'''완도 맹선리 상록수림'''(莞島 孟仙里 常綠樹林)은 천연기념물 제340호로,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맹선리 370-1번지에 위치한다. 소안도 해안가 언덕 위에 있으며 길이 약 300m, 폭 약 35m, 면적 8506m2에 이르는 숲이다. 숲을 구성하는 나무 종류로는 모밀잣밤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사스레피나무, 송악, 보리밥나무 등 총 20종 250여 그루로 방풍림 구실을 하고 있다.[7]
4. 교통
소안도로 가는 배편은 완도 화흥포항에서 1시간가량 걸리는 여객선이 하루에 12회 왕복 운항하고 있다.[5]
5. 항일 운동의 섬 소안도
소안도 소안 항구에 들어서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표지석이 가장 먼저 보인다. 소안도는 독립 유공자 20명을 포함하여 88명의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항일 운동의 섬으로, 이 표지석은 섬의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다. 1909년 동학군 이준하 선생 등 6명이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에 잠입하여 시설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4명을 살해한 사건은 소안도 독립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8] 1920년대에는 소안도 주민 2,000여 명 중 800명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감시와 통제를 받기도 했다.[8]
소안도가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13년 송내호 등이 설립한 사립 중화학원(소안학교 전신)이 있었다. 이 학교는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후, 소안 면민들의 성금을 기반으로 사립 소안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길러냈다.
5. 1. 소안 항일 운동 기념탑
1990년 6월 5일 건립된 항일 운동 기념탑은 비자리의 갯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이 기념탑은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소안 면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8m, 폭 4m이다. 검은 돌과 하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하얀 돌은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세 갈래로 솟아 오른 탑 모양은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한다.참조
[1]
웹사이트
전라남도의 섬
http://islands.jeonn[...]
2016-06-30
[2]
웹인용
2012년도 지적통계연보 발간(지적기획과1)
http://www.mltm.go.k[...]
2012-04-16
[3]
웹사이트
전라남도의 섬
http://islands.jeonn[...]
[4]
웹사이트
소안도
http://encykorea.aks[...]
[5]
웹사이트
완도문화관광 여객선 정보
http://www.wando.go.[...]
[6]
웹사이트
천연기념물 제339호
http://www.cha.go.kr[...]
[7]
웹사이트
천연기념물 제340호
http://www.cha.go.kr[...]
[8]
뉴스
태극기 1,500개가 매일 휘날리는 섬 ... 소안도
http://travel.chosun[...]
조선일보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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