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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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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코토 칼리파국은 19세기 초 우스만 단 포디오의 풀라니 지하드를 통해 건국된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이다. 하우사 왕국에 대한 지하드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1809년 소코토를 수도로 삼았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19세기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지만,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침략으로 쇠퇴하여 1903년 영국에 의해 멸망했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유산은 오늘날 나이지리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이 이를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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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
지도 정보
소코토 칼리파국 지도
아흐마두 루파이 술탄 통치 당시의 소코토 칼리파국
기본 정보
다른 이름Daular Khalifar Sakkwato
Dawlatu'l-Khilāfah fī Bilād as-Sūdān
건국 시기1804년 2월 21일
멸망 시기1903년 7월 29일
설립 계기풀라니 전쟁
주요 사건타브킨 콰토: 1804년 6월 21일
알칼라와의 몰락: 1808년 10월 3일
압드 알살람의 반란: 1817년 9월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 선포: 1897년 1월 1일
수도구두 (1804년)
소코토 (1804년–1850년, 1851년–1902년)
비르닌 콘니 (1850년)
부르미 ( 바조가 근처) (1903년)
공용어아랍어 (공식)
하우사어
풀라어
종교수니파 이슬람
통화디르함
디나르
마리아 테레사 탈러
카우리
면적2,200,000 제곱킬로미터
이전 국가카노 술탄국
카치나 술탄국
고비르 술탄국
자자우 술탄국
보르누 제국
다마가람 술탄국
주쿤 왕국
케비 술탄국
누페 왕국
덴디 왕국
아가데스 술탄국
투아레그 과두정
잠파라 술탄국
야우리 술탄국
이후 국가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
독일령 카메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마이우르노 술탄국
정치
정치 체제칼리파국
국가 원수칼리파
아미르 알무미닌
초대 국가 원수우스만 단 포디오
초대 국가 원수 임기1804년–1817년
마지막 국가 원수무함마두 아타히루
마지막 국가 원수 임기1902년–1903년
초대 총리압둘라히 단 포디오
초대 총리 임기1804년–1817년
마지막 총리무함마두 알 부카리
마지막 총리 임기1886년–1903년
입법부슈라
역사적 배경
주요 사건우스만 단 포디오의 지하드 개시 (1804년 2월 4일)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멸망 (1903년)
기타
현대의 영향현대 나이지리아에서 큰 유산으로 남아있음

2. 역사

소코토 제국이라는 명칭은 제국의 수도였던 소코토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이 명칭이 나이지리아 독립 후인 1964년 나이지리아 역사학계에서 학술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주로 '''풀라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외에도 '''소코토 칼리프국''' 또는 '''소코토 술탄국'''이라고도 불린다.

소코토 제국은 이슬람 세력권에 속했으며, 지배하에서 수많은 이들이 기존 전통 신앙에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요받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성립 이전 하우사 여러 왕국 시대부터 이슬람이 전파되었던 하우사 지역에서는 이슬람 이전의 전통 의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국의 건국자인 우스만과 그의 후계자들은 수피 교단인 카디리예 소속이었다.

2. 1. 배경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주요 세력은 보르누 제국이었으나,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1759년에는 중요한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로인 빌마 오아시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제국에 속했던 도시들은 점차 자치권을 확보하며 1780년대에는 여러 독립 국가로 분립되었다.[14]

1625년 서아프리카 지도. 오른쪽에 하우사 여러 왕국이 표시되어 있다.


한편, 1591년 모로코송가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하우사족이 세운 여러 술탄국들이 그 공백을 메우며 성장했다. 이들 중 현재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고비르, 케비, 잠파라 술탄국이 특히 중요했다.[14][15] 이 하우사 여러 왕국들은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노예를 확보하기 위한 습격을 자주 감행했다. 이러한 잦은 전쟁은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켰고, 왕국들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큰 부담을 주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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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 강과 차드 호 사이 지역에는 주로 하우사족과 함께, 서쪽 세네갈 강 유역을 기원으로 하는 풀라니족(풀베족) 및 투아레그족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풀라니족은 15세기경부터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18세기경에는 서아프리카 사헬 지대 거의 전역에 분포하게 되었다.[14][16]

하우사 지역에는 14세기 후반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15세기 중반에는 아랍인들이 정착하기도 했지만, 이슬람은 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고 민간에서는 토착 신앙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15]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우사 왕국 전역에서 이슬람 설교 활동이 활발해졌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인 타리카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마그레브 지역에서 온 말리키 학자들은 카노와 같은 술탄국의 궁정에 초청되어 이슬람 전통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했다. 이 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이지리아에 말리키 법학을 가져온 무함마드 알-마길리이다.[14]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코토 칼리파국의 건국자인 우스만 단 포디오가 등장했다. 그는 1754년 하우사 왕국 중 하나인 고비르에서 풀라니족 무슬림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생 압둘라히와 함께 이슬람 교육을 받았으며, 지브릴 우마르라는 스승 밑에서 수학하며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컸던 카디리예 타리카에 입문했다. 지브릴 우마르는 하지와 이집트 체류 경험을 통해 서아프리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최신 이슬람 학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774년경부터 설교자로 활동을 시작한 우스만은 당시 고비르의 통치자들이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무슬림 노예화와 과도한 세금 징수를 자행한다고 비판하며 민중의 큰 지지를 얻었다. 초기 고비르 왕 바와는 우스만에게 무슬림 공동체 형성과 남성의 터번, 여성의 히잡 착용을 허용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우스만은 고비르와 잠파라 국경 지대인 데겔(Degel)에 공동체를 세웠다. 그러나 우스만의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바와와 그의 후계자들은 터번과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등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1804년 2월, 바와의 뒤를 이은 나파타(Nafata)의 후계자인 윤파(Yunfa)는 우스만에게 국외 추방령을 내렸다. 데겔에서 추방된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북서쪽의 구두(Gudu)로 거점을 옮겼다. 이 추방은 신도들 사이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에 비유하여 히즈라로 여겨졌다.[14][15][16]

2. 2. 풀라니 지하드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니제르 강과 차드 호 사이 지역은 보르누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점차 그 힘이 약해졌다. 1591년 송가이 제국이 모로코에 의해 멸망한 후, 여러 하우사 왕국들이 그 공백을 메우며 등장했다. 이 중 고비르, 케비, 잠파라 등이 주요 세력이었다.[14][15] 이들 하우사 왕국들은 서로 잦은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노예 약탈을 위한 습격이 빈번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민심이 불안정했다.[16] 이 지역에는 주로 풀라니족, 하우사족, 투아레그족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14][16]

이 지역 주민 상당수는 오래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특히 지배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토착 신앙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15]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우사 왕국 전역에서 이슬람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슬람 학습 공동체(타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14] 마그레브 지역의 말리키파 학자들이 초청되어 이슬람 전통의 준수를 강조했다. 이 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이지리아에 말리키 법학을 가져온 무함마드 알-마길리이다.

이슬람 학자이자 도시화된 풀라니족 출신인 우스만 단 포디오는 하우사 왕국 중 하나인 고비르에서 교육과 설교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고비르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의 제자였던 윤파가 술탄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윤파는 우스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의 활동을 제한했고, 결국 1804년 이전에 그를 데겔에서 북서쪽의 구두(Gudu)로 추방했다.[14] 우스만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고비르를 떠나 구두로 모여들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지지자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윤파 술탄은 1804년 2월 21일 우스만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서아프리카의 풀라니 지하드 국가들, 1830년경


우스만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앙의 지도자'라는 의미의 아미르 알무미닌(Amir al-Mu'minin)으로 추대하며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을 알렸다. 우스만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 중 여러 깃발 수호자들을 임명하여 초기 정치 구조를 마련했다.[14] 그는 하우사 왕들의 통치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며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주로 풀라니족 출신의 학자 겸 전사들을 동원하여 고비르에 맞섰다.

풀라니 전쟁으로도 알려진 이 지하드는 1804년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다. 초기에는 츠운투아 전투 등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우스만의 군대는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하우사 왕들의 폭정과 과도한 세금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다. 심지어 비무슬림 풀라니족 일부도 우스만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지하드 군대는 1805년 케비의 수도를 점령하고 잠파라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1807년에는 카치나와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던 카노를, 1808년에는 다우라와 고비르의 수도인 알카라와를 점령했다.[14] 마침내 1809년, 고비르를 완전히 정복하면서 하우사 왕국들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우스만의 아들 무함마드 벨로는 소코토를 새로운 수도로 건설했다.[16]

이 지하드는 서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풀라니족 중심의 새로운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 대규모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는다.[17] 1900년경 소코토 칼리파국은 약 100만에서 250만 명에 달하는 노예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근대 노예 사회 중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17] 지하드 초기에는 하우사족 무슬림과 농민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점차 풀라니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부 하우사족 무슬림들이 이탈하기도 했다. 지하드를 이끈 아미르 14명 중 13명이 풀라니족 출신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우마르 빈 알리 술탄(1888)의 형제, 엘리제 레클뤼 작

2. 3. 칼리파국의 확장



우스만 단 포디오는 하우사족 지도자들의 지원 아래 고비르(Gobir)에서 교육과 설교 활동을 펼쳤으나, 그의 제자였던 윤파가 술탄이 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고 구두(Gudu)로 추방되었다.[14] 많은 이들이 단 포디오를 따라 고비르를 떠났고, 위협을 느낀 윤파 술탄은 1804년 2월 21일 단 포디오에게 전쟁을 선포하며 풀라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단 포디오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앙의 지도자'(Amir al-Mu'minin)로 선출했고,[14] 이는 소코토 국가의 시작을 알렸다. 단 포디오는 하우사 왕들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고 주로 풀라니 출신의 전사-학자들을 동원했다.

초기 츠운투아 전투 등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단 포디오의 군대는 게릴라전을 활용하고 하우사 왕들의 통치와 과도한 세금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 전세를 역전시켰다.[14] 1805년부터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1807년에는 카치나와 다우라, 중요한 왕국인 카노 토후국을 점령했고,[14] 1808년까지 이어진 전쟁 끝에 1809년 고비르를 최종 정복했다. 같은 해, 단 포디오의 아들 무하마드 벨로는 소코토 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16]
확장 과정소코토 칼리파국의 확장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22]

1. 초기 통합 (1804-1808): 고비르와 주변 하우사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통해 권력을 통합하고 향후 확장의 기반을 마련했다.[22] 케비의 수도(1805), 잠파라, 카치나(1807), 다우라(1808), 고빌의 수도 알카라와(1808), 카노(1809) 등이 차례로 정복되었다.[14]

2. 본격 확장 (1809-1815): 동쪽의 보르누 제국과 남쪽의 요루바랜드 방향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시기 확장은 비이슬람 관습에 대한 지하드라는 명분과 함께, 정복과 노예 획득에 대한 풀라니족의 열망에 힘입은 바가 컸다.[22]

3. 안정 및 통합 (1815-1840): 저항 세력에 대한 추가적인 통합과 소규모 군사 작전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 시기 칼리파국은 현재의 나이지리아 북부, 니제르, 카메룬, 베냉 일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22]

1808년부터 1830년대 중반까지 소코토 국가는 서쪽 평원과 요루바랜드의 주요 지역을 병합하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전성기에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카메룬까지, 나이지리아 북부 대부분과 니제르 남부를 포함하는 영토에 30개가 넘는 토후국(emirate)을 두었다.[10]
주변 지역 정복

  • 누페 왕국 (비다 토후국): 19세기 초, 중앙 나이지리아의 강국이었던 누페 왕국은 내부 분열을 겪고 있었다. 압둘라히 단 포디오가 이끄는 소코토 군대는 1806년경 누페 왕국으로 진격하여 1808년경 함락시켰고, 왕 에츠 마지야 2세는 전사했다. 소코토는 이곳에 비다 토후국을 설치하고 풀라족 지도자 말람 덴도를 토후로 임명했다.[23][24] 이 정복으로 누페 지역에는 이슬람교가 주요 종교가 되었고, 누페어 기록에 아자미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새로운 무역로와 시장이 형성되었다.
  • 보르누 제국: 1808년, 우스만 단 포디오의 군대는 두나마 9세 레피아미가 통치하던 보르누 제국을 침공하여 수도 응가자르가무를 불태우고 주력군을 격파하는 등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29] 비록 소코토가 보르누를 직접 멸망시킨 것은 아니지만, 지하드 운동은 보르누 제국의 약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1846년 사이파와 왕조 멸망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했다.[28]
  • 기타 지역: 현재 니제르 남부(예: 비르니 콘니[26])와 베냉 북부 지역도 소코토 칼리파국의 영향권 아래 편입되었다. 정복 방식은 다른 지역과 유사하게 군사 원정과 내부 분열 이용, 토후국 설치와 샤리아 시행, 조공 요구 등으로 이루어졌다.[27]

통치 구조와 체제 정비칼리파국의 정치 구조는 소코토의 술탄을 정점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각 토후국의 지도자는 술탄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졌다.[18] 우스만 단 포디오는 지하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각 지역에 지도자(아미르)를 임명했는데, 이들이 각 토후국의 시조가 되었다. 지하드 초기에 임명된 아미르 14명 중 13명이 풀라니족이었다. 주요 토후국과 설립자는 다음과 같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주요 토후국
지도자토후국
압둘라히 단 포디오관두 토후국
우마르 달라지카치나 토후국
술라이만 단 아부 함마카노 토후국
야쿠부 단 다디바우치 토후국
이스하크다우라 토후국
무사 이븐 술라이만 이븐 무함마드자자우 토후국
이브라힘 자키율 칼비카타검 토후국
모디보 아다마아다마와 토후국
부바 예로곰베 토후국
셰후 알리미일로린 토후국
말람 덴도비다 토후국 (누페 토후국)



1812년, 우스만 단 포디오는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동생 압둘라히에게 서부(수도: 관두), 아들 무하마드 벨로에게 동부(수도: 소코토)를 맡겼다. 1817년 우스만 사후 벨로가 칼리프로 즉위했으나, 초기에는 압둘라히와의 긴장 관계 및 내부 반란(자무파라, 아브드 알 살람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풀라니족


벨로는 국가 안정을 위해 국경 지대에 리바트(Ribat)라는 성채 기지를 건설했다.[19] 리바트는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성벽, 학교, 시장 등을 갖춘 새로운 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유목민의 정착을 유도하고 농업 및 경제 발전을 지원하여 칼리파국의 확장을 뒷받침했다.[20] 1830년경 칼리파국은 동쪽으로는 카넴-보르누 제국, 서쪽으로는 현재의 부르키나파소, 남쪽으로는 요루바랜드,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가장자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확장의 영향
압두르 라흐만 아티쿠 술탄의 형제가 앙투안 미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 (1894년)


소코토 칼리파국의 확장은 정복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영향은 이슬람교의 확산이었다. 칼리파국은 피정복민의 개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슬람은 이 지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어 문화, 법, 사회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21][22] 샤리아(이슬람 법) 시행은 재산권, 결혼, 형사 사법 등 기존 관습에 변화를 가져왔다.[22]

칼리파국의 행정 및 사회 구조가 정복지에 이식되었다. 토후(에미르)가 지역 통치를 담당하는 에미르 제도가 확립되었고, 사회는 술탄과 지배 엘리트, 자유 무슬림, 비무슬림, 노예 순으로 계층화되었다.[17] 이 과정에서 많은 피정복민이 칼리파국에 동화되었지만, 일부 지역 사회는 전통 종교와 관습을 유지하며 저항하기도 했고, 때로는 무장 반란을 통해 자치를 획득하기도 했다.[21]

한편, 지하드는 "새롭게 부활한 이슬람을 기반으로 새로운 노예 제도의 경계"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는다.[17] 1900년경 소코토 칼리파국은 최소 100만 명에서 최대 250만 명에 달하는 노예를 보유했으며, 이는 동시대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17]

2. 4. 다른 풀라니 지하드 국가에 대한 영향

19세기는 서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이슬람 개혁과 지하드의 시대였으며, 소코토 칼리파국은 이 시기에 등장한 여러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성공은 주변 지역의 유사한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 말리 지역에 있었던 마시나 제국과 투쿨르 제국은 이슬람 개혁과 군사적 확장을 통해 세워진 대표적인 국가들이다.[27]

마시나 제국(Massina Empire)은 함달라이의 디이나(Diina of Hamdullahi)라고도 불리며, 19세기 초 현재 말리의 내륙 니제르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풀라니 지하드 국가였다. 이 국가는 세쿠 아마두(Seku Amadu, 또는 셰이크 아마두)가 지역 풀라니족 사이에서 지하드 운동을 시작하면서 건국되었다. 1800년대 초, 우스만 단 포디오의 가르침과 소코토 칼리파국의 성공에 영감을 받은 세쿠 아마두는 포디오로부터 마시나 지역에서 지하드를 수행할 허가를 받았다. 세쿠 아마두의 군대는 기존 지배 엘리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지하드 국가를 세웠으며, 수도는 세쿠 아마두가 직접 건설한 함달라이(Hamdullahi)였다.[21] 마시나 제국은 주로 군사 정복을 통해 확장했으며, 내륙 니제르 삼각주와 주변 사헬사바나 지역 일부를 지배했다. 특히 사하라 횡단 노예 무역의 주요 중심지였던 팀북투제네가 마시나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1] 마시나 제국의 통치는 이슬람 법의 엄격한 해석을 특징으로 했다. 세쿠 아마두는 많은 전통적인 다신교 관습을 금지하고 개혁을 시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다신교 신자들이 노예가 되었다.[21] 그러나 마시나 제국은 내부적인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부 지역 사회는 이슬람 법의 강제 시행과 정치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했다. 또한, 엘 하지 우마르 탈이 이끄는 투쿨르 제국과 같은 이웃 국가들의 외부 위협에도 시달렸다. 결국 마시나 제국은 1862년 투쿨르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마시나 제국은 해당 지역의 이슬람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1]

투쿨르 제국(Toucouleur Empire)은 19세기 현재의 말리, 세네갈, 기니 지역에 등장한 중요한 서아프리카 국가였다. 이 제국은 투쿨르족 출신의 이슬람 지도자인 엘 하지 우마르 탈(El Hadj Umar Tall)이 지하드 국가를 건설하고 지역의 다신교 신자들을 정복하고 노예화하려는 목표를 가지면서 건국되었다. 우마르 탈은 소코토 칼리파국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1850년대에 지하드를 시작했다.[21] 1854년, 우마르 탈은 지역 통치자들의 비이슬람적 관행을 비판하며 지하드를 선포했다. 그는 동족인 투쿨르족뿐만 아니라 다른 무슬림 집단과 노예들을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이 군대를 이끌고 그는 여러 서아프리카 왕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1861년에는 세구 왕국, 1862년에는 마시나 제국을 정복했다. 전성기 투쿨르 제국은 서쪽의 현재 세네갈 지역부터 동쪽의 팀북투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수도는 현재 말리의 세구에 두었다.[21]

엄밀히 말해 지하드 국가는 아니지만, 사모리 투레(Samori Ture)가 세운 와술루 제국(Wassoulou Empire) 역시 이 시대의 중요한 이슬람 국가였다. 현재의 기니,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 지역에 위치했던 와술루 제국은 이슬람 법의 엄격한 시행과 다신교 신자들의 노예화로 알려져 있다.[21]

18세기 이후 볼로프족(Wolof people)은 서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된 격동적인 지하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슬람 무장 운동은 볼로프 왕국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19세기에 프랑스 식민 세력이 서아프리카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볼로프족은 프랑스 통치에 저항하며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향을 보였다.[30][31]

결국 이들 지하드 국가는 해체되었지만, 서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을 확산시키고 지역의 정치·사회 지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국가는 이슬람의 지역적 확산과 토착 정치 및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단계를 상징한다. 많은 지하드 운동은 비이슬람적 관행으로 비난받던 전통 통치자들을 타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하드를 이끈 지도자들은 이들 통치자를 대체하고, 요루바 왕국과 같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새로운 이슬람 규칙에 기반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 계층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21]

2. 5. 쇠퇴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소코토 칼리파국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1870년 이후 여러 탐험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확보 가능성을 살폈다. 프랑스 탐험가 파르페-루이 몽테이는 1891년 소코토를 방문했을 당시, 칼리프가 아르군구 에미르와 전쟁 중이었으며 이듬해 아르군구를 패배시켰다고 기록했다. 몽테이는 계속되는 전쟁과 당시 칼리프였던 압데르라만 단 아비 바카르의 낮은 인기로 인해 풀라니족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3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은 1884년 독일 제국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여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본격화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니제르 강의 자유 항행 원칙과 함께, 특정 지역의 해안을 점령하면 내륙에 대한 소유권도 인정받는 '세력권 원칙', 그리고 타국의 권익이 없는 지역을 확보할 경우 열강에 통보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실효 지배 원칙'이 합의되었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영토를 분할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영국은 이를 통해 소코토 칼리파국 영역에 대한 권익을 주장할 명분을 얻었다.

1885년, 소코토 칼리파국은 영국의 상업 회사인 내셔널 아프리카 회사(National African Company, NAC)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베누에 강과 니제르 강 양안의 넓은 지역에 대한 권리를 NAC에 양도하고, NAC의 무역 독점을 인정하며, 조약의 영구성을 규정하는 등 소코토 측에 매우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NAC가 그완두(Gwandu)와 소코토에 매년 일정량의 조개껍데기(당시 화폐로 사용됨)를 지불하도록 했는데, 이는 사실상 조공과 같은 성격으로 영국이 이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를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영국 정부는 NAC 인물을 부영사로 임명하여 NAC가 체결한 조약이 영국 국왕의 승인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영국은 경제적 침투에 이어 군사적 점령을 준비했다. 1897년, 영국 식민지청은 서아프리카 국경군(West African Frontier Force)을 창설하고 프레더릭 루가드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루가드는 같은 해 소코토 칼리파국 내 주요 토후국인 누페(비다)와 일로린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00년 1월 1일, 영국은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 설치를 선포하고 루가드를 초대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다. 루가드는 소코토 칼리파국을 포함한 북부 나이지리아 전역이 영국령임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당시 소코토 칼리파국은 내부의 여러 저항 세력 및 외부 위협에 직면해 있었기에, 초기에는 영국을 여러 위협 중 하나로 간주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군은 침략을 계속하여 1900년 콘타고라, 1901년 욜라(아다마와), 1902년 바우치를 차례로 점령했다. 카노 남쪽의 자리아는 저항을 포기하고 1902년 영국에 항복했다. 이에 1902년, 당시 소코토 술탄이었던 압둘라만(Abdurrahman)은 루가드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902년 말, 케피(Keffi)에 주재하던 영국 관리가 현지 징세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1903년 1월, 7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징세관이 도피한 카노로 진격했다. 2월 3일 영국군은 카노를 점령했으나, 당시 카노의 에미르였던 알리유(Aliyu)는 소코토에 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소코토로 방향을 돌렸다. 소코토 내부는 영국에 대한 대응을 놓고 복종, 항전, 또는 이교도의 땅을 떠나야 한다는 '히즈라' 주장으로 분열되었다. 1903년 3월 영국군은 소코토 시에 접근했고, 새로 술탄이 된 무함마드 아타히루 1세는 무함마드 빈 아나브와니와 함께 방어전을 펼쳤으나 영국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패배했다. 1903년 3월 13일 소코토의 큰 시장 광장에서 칼리프의 마지막 와지르는 공식적으로 영국 통치에 굴복했고, 며칠 뒤 소코토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소코토 칼리파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33][34]

술탄 아타히루 1세는 소코토 함락 후 도시를 탈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며 영국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히즈라'). 많은 무슬림 지지자와 관리들이 하우사랜드, 세구, 마시나 제국, 아다마와 에미레이트 등지에서 아타히루 1세를 따라 부르미(Burmi)의 군사 기지로 합류했다. 영국은 무함마드 아타히루 2세를 새로운 술탄으로 임명했지만[34], 많은 주민들과 심지어 영국에 복종한 에미르들조차 아타히루 1세를 정당한 술탄으로 여기며 은밀히 지원했기 때문에 추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03년 7월 27일, 영국군은 소코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부르미에서 아타히루 1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아타히루 1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34] 이로써 소코토 칼리파국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끝났으며, 1906년까지 산발적인 무장 저항도 모두 진압되었다.

루가드는 칼리파국을 폐지하는 대신, 간접 통치 방식을 도입하여 기존의 통치 구조를 식민 통치에 활용했다. 소코토 술탄의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정치적·군사적 실권은 영국 고등판무관에게 넘어갔고 종교적 권위만을 인정받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10] 이 잔존 기구는 "소코토 술탄 협의회"로 알려지게 되었다.[36] 칼리파국의 영토는 영국과 독일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35] 특히 동부의 아다마와 에미레이트 지역은 영국령 나이지리아와 독일령 카메룬으로 나뉘었다.

3. 행정 구조

소코토 칼리파국은 소코토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러 독립적인 토후국(에미레이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방적 성격의 국가였다. 초기 행정 체계는 무함마드의 메디나 시절 행정과 알 마와르디의 저서 "정부의 법령(The Ordinances of Government)"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18] 우스만 단 포디오와 무함마드 벨로 같은 초기 지도자들은 기존 하우사 왕국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이슬람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에미르로 임명하는 것을 선호했다.[16]

소코토 칼리프제, 1875년경


에미르는 술탄이 임명했으며,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곡물, 카우리 조개, 노예 등의 형태로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10] 술탄 계승은 에미르들로 구성된 임명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며[18], 직계 계승은 드물었지만 모든 술탄은 단 포디오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웠다. 칼리파국은 정복한 하우사 왕국들의 통치 구조를 일부 수용하고 이슬람 법에 따라 통치되었으며, 많은 에미르와 고위 관리들은 풀라니 전쟁에 참여했던 풀라니 성직자이자 학자들이었다.[37]

주요 행정 구역은 1815년 소코토 술탄국과 구완두 토후국으로 나뉘어 각각 무함마드 벨로와 압둘라히 단 포디오가 관리하게 되었다.[18] 구완두의 에미르는 소코토 술탄에게 충성하고 영적 지도를 받았지만, 휘하 토후국들을 독립적으로 관리했다.[18] 이러한 연방적 구조는 때때로 중앙 권력과 지방 토후국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20][38][39] 이 지역의 수피 공동체, 특히 카디리야[40]와 같은 타리카 수도회는 여러 토후국을 술탄의 권위 아래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18] 통치자의 칭호로는 종교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칼리프 외에 정치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술탄이 사용되었으며, 하우사어인 "Sarkin Musulmi" 또는 샤이흐도 자주 사용되었다.

3. 1. 행정 체계

소코토 칼리파국은 소코토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러 독립적인 토후국(에미레이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초기 행정 체계는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있던 시절의 행정 체계와 알 마와르디의 저서 "정부의 법령(The Ordinances of Government)"의 이론을 따랐다.[18] 우스만 단 포디오 이전의 하우사 왕국들은 주로 세습으로 통치되었으나, 초기 소코토 지배자들인 단 포디오와 벨로는 세습 제도를 폐지하고 이슬람 학식과 도덕적 품위를 갖춘 지도자들을 임명하는 것을 선호했다.[16]

술탄은 각 토후국의 지도자인 에미르를 해당 도시의 기수(flag-bearer)로 임명했으며, 에미르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졌다.[18] 에미르는 매년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곡물, 카우리 조개 및 노예 형태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10] 칼리파국은 정복한 하우사 왕국들의 통치 구조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으며, 이슬람 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많은 에미르와 고위 관리들은 풀라니 전쟁에 참여했던 풀라니 성직자이자 학자들이었다.[37] 술탄이 사망하거나 퇴임하면 에미르들로 구성된 임명위원회가 후임자를 선출했다.[18] 직계 계승은 거의 따르지 않았지만, 각 술탄은 단 포디오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했다.

소코토 제국은 칼리프를 군주로 하는 칼리파국으로 간주되지만, 칼리프는 종교 지도자의 칭호였고 정치적 통치자의 칭호는 술탄이었다. 가장 자주 사용된 칭호는 하우사어로 "무슬림의 왕"을 의미하는 "Sarkin Musulmi" 또는 샤이흐였다.

주요 행정 구역은 소코토(Sokoto)와 구완두로 나뉘었다. 1815년, 우스만 단 포디오는 국가 행정 업무에서 물러나 풀라니 전쟁 중 점령한 지역을 나누어, 그의 형제인 압둘라히 단 포디오(Abdullahi dan Fodio)가 서쪽의 구완두 토후국을, 그의 아들 무함마드 벨로(Muhammed Bello)가 소코토 술탄국의 행정을 맡게 했다.[18] 구완두의 에미르는 소코토 술탄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술탄으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았지만, 술탄과는 독립적으로 휘하의 토후국들을 관리했다.[18] 압둘라히는 벨로가 최고 지도자가 된 초기에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와지르(wazir)라 불리는 장관이나 고관은 술탄의 친족이나 신하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술탄과 에미르의 중개 역할을 맡았다. 에미르의 공납 징수는 장관의 감독 책임하에 있었으며, 태만한 에미르에게는 군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징수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술탄인 무함마드 벨로의 통합 정책의 일환으로 광범위한 리바트(ribat) 시스템이 확립되었다.[19] 리바트는 성벽 요새, 학교, 시장 및 기타 건물을 갖춘 새로운 도시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새로운 도시 개발, 유목민 풀라니족 정착, 그리고 경제에 필수적인 농장 성장 지원을 통해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0] 또한 리바트에는 이슬람 지도자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 지역 전역의 수피(Sufi) 공동체, 특히 소코토의 역대 술탄들이 모두 따랐던 타리카(Tariqa) 수도회, 특히 카디리야(Qadiriyya)[40]는 서로 다른 토후국들을 술탄의 권위에 연결하는 그룹을 제공했다. 학자 번햄(Burnham)과 라스트(Last)는 이 이슬람 학자 공동체가 소코토 주 전역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미성숙 관료제"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18]

토후국들이 술탄에게 느슨하게 충성하는 행정 구조는 항상 원활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무함마드 벨로 통치 기간인 1816~1817년에 하우사 귀족들의 일련의 혁명이 있었지만, 술탄은 지도자들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이를 진압했다.[20] 19세기 동안 소코토 술탄국과 많은 종속 토후국들, 특히 아다마와 토후국(Adamawa Emirate)과 카노 토후국(Kano Emirate) 사이에 여러 위기가 발생했다.[38] 1836년 고비르(Gobir) 도시 국가에서 심각한 반란이 발생했는데, 무함마드 벨로가 가와쿠케 전투(Battle of Gawakuke)에서 진압했다.[39]

칼리프가 정복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지방 통치자가 칼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슬람교를 믿을 것을 선서하면 계속해서 통치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이 있었다.[64]

3. 2. 소코토 대비지어

칼리파국과 그 아래 여러 토후국(에미레이트)들은 각각 비지어(Waziris, 와지리스)를 두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코토에서 가장 학식이 깊은 가문 출신으로, 이슬람의 법률, 정치, 신비주의적 측면에 모두 정통했다. 고전적인 비지어직은 코란의 몇몇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41]

''"그리하여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게 하시고,
내 가족 중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
내 형 아론을 주시옵소서.
그를 통해 나를 강하게 하시고,
그에게 나의 일을 함께하게 하소서."''
(코란 20:28-32)


소코토 출신의 풀라니족


소코토의 비지어직은 압바스 칼리파국의 제도를 본떠 만들어졌다. 우스만 단 포디오(Shaikh Uthman dan Fodio)는 그의 저서 『히즈라의 의무 선언(Bayan wujab al-hijra)』에서 비지어직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왕국의 첫 번째 기둥은 빌라야(wilaya)를 다스리는 정직한 와지르(비지어)이며, 그는 왕이 잠들면 깨우고, 왕이 볼 수 없으면 시야를 주며, 왕이 부주의하면 일깨워준다. 빌라야와 그 백성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은 훌륭한 와지르와 조력자를 잃는 것이다. 와지르의 요건 중 하나는 그가 백성에게 진정으로 자애롭고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41]


초대 소코토 대비지어는 압둘라히 단 포디오였다. 그는 셰이크 우스만 단 포디오의 '조력자'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두 번째 대비지어는 무함마드 벨로 술탄 아래의 와지르 기다도 빈 아부 바크르(Waziri Gidado bin Abu Bakr)였다. 이후 모든 '소코토 대비지어'는 그의 가문에서 배출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기다도 이드리스(Gidado Idris)는 사니 아바차 장군 정부에서 연방 정부 장관(Secretary to the Government of the Federation)을 맡아 국가 원수의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는 전통을 이었다.

와지르 기다도는 셰이크의 딸인 나나 아스마우와 결혼했다. 이전 대비지어였던 압둘라히 단 포디오는 술탄 벨로가 기다도를 임명했음에도 처음에는 직책을 내려놓기를 거부했으나, 나중에 무함마드 벨로와 화해하고 기다도를 새로운 비지어로 공식 인정하며 의복을 선물했다.[42] 비지어로서 기다도는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그는 다우라의 에미르 이샤크(Ishaq)를 은퇴시키고 그의 아들 주베이르 빈 이샤크(Zubair bin Ishaq)를 임명했으며, 이는 나중에 술탄 벨로의 승인을 받았다.[42]

비지어는 '상당한 추종자'를 거느렸다. 1826년 스코틀랜드 탐험가 휴 클래퍼턴은 '말을 탄 수많은 수행원과 보행자'를 언급했고,[43] 또 다른 탐험가 폴 스타우딩거는 1886년 비지어가 100명의 총잡이를 포함한 상당한 '가신 세력(eine ziemliche Hausmacht)'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44] 그는 여러 토지와 마을을 소유했지만, 그 주민들은 종종 흩어져 소코토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고, 주요 원정 시에만 비지어에게 합류했다.[45]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소코토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종종 비지어의 권한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스코틀랜드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조셉 톰슨은 비지어를 '술탄 자신보다 더 강력한'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조언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5] 스타우딩거는 모든 정부 업무가 비지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가 술탄보다 거의 더 강력한 장관이었다고 보고했다.[46] 윌리엄 월러스는 '대비지어가 사실상 풀라 제국을 통치하고 있으며,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고, 술탄들은 형식에 완전히 얽매여 있다'고 밝혔다.[47] 이러한 인상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비지어가 행정 전반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비지어직은 결코 칼리프의 지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비지어는 칼리프의 주요 지지자, 조언자, 친구로서 소코토에 이슬람 전통을 재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와지르(wazir)라 불리는 장관이나 고관은 술탄의 친족이나 신하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술탄과 아미르(amir)의 중개 역할을 맡았다. 아미르의 공납 징수에는 장관이 감독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태만한 아미르에게는 군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징수를 실시했다.

3. 3. 군사

오릭스 가죽으로 만든 큰 방패를 든 소코토 기병


지하드 시대 소코토 칼리파국의 군대는 사르킨 야키(전쟁 사령관)의 지휘 아래 상비군과 기병대로 조직되었다.[48][65] 상비군은 전투 훈련을 받은 하우사족과 풀라니족 전사들로 구성되어 칼리파국의 영토 확장과 방어를 담당했다.[48][65][66] 당시 기병은 기동성 때문에 군대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49][66] 소코토 칼리파국은 군사 작전에서 기병에 크게 의존했다.

특히 뛰어난 승마 기술로 유명했던 풀라니족 기병은 칼리파국 기병대의 핵심을 이루었고,[22][64] 칼리파국 영토의 빠른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2]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지역 세력들이 소코토로의 총기 수출을 제한했기 때문에, 칼리파국은 멸망할 때까지 충분한 총병력을 갖추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기병대는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1890년 칼리파국을 방문한 프랑스 탐험가 파르페-루이 몽테일은 당시 술탄 우마르 빈 알리가 아르군구를 포위하기 위해 "4만 명의 군대, 그중 절반이 기병"을 소집했다고 기록했다.[50][67]

칼리파국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에 에미르국을 설치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 에미르국들은 술탄이 직접 임명하거나 칼리파국의 권위에 복종한 지역 통치자들이 다스렸다.[49] 또한, 칼리파국은 지역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는 전략도 활용했다. 일부 통치자들은 칼리파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들은 정복한 영토에 대한 칼리파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2]

그러나 영토가 확장되고 에미르국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점차 중앙 집권적인 군사 조직은 약화되었다. 각 에미르국은 자체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들의 지역 방어와 위협에 대처하게 되었다. 한편, 기병 중심의 군대는 산악 지형에서의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소코토 칼리파국은 조스 고원과 같은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4. 사회와 경제



소코토 칼리파국은 건국 이후, 특히 1816년에서 1817년 사이의 반란이 진압된 후 수십 년 동안 지역 전반에 걸쳐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20]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20] 이러한 상업적 번영은 이슬람 전통, 시장 통합, 내부 평화 유지, 그리고 광범위한 수출 무역 네트워크 구축에 힘입은 바 크다.[52]

4. 1. 사회

소코토 칼리파국은 풀베족, 하우사족, 누페족, 요루바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37] 지배층은 주로 풀라니족이었으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민족에 비해 적었다. 칼리파국 내에서는 풀라니족과 하우사족 간의 결혼 동맹과 문화적 융합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37] 이는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풀라니족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하우사어는 칼리파국의 행정 언어이자 주요 문학(시) 언어로 사용되었다.[37]

칼리파국은 술탄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각 지역에 에미르(토후)를 두어 다스리는 체제를 갖추었다. 초기 지도자들인 우스만 단 포디오와 무함마드 벨로는 기존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이슬람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지도자로 임명하고자 했다.[16] 에미르는 술탄이 임명했으며, 술탄에게 매년 충성을 맹세하고 곡물, 카우리 조개, 노예 등의 형태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10] 술탄이 사망하거나 물러나면 에미르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후계자를 선출했으며,[18] 비록 직계 계승은 드물었지만 모든 술탄은 단 포디오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웠다. 칼리파국은 정복한 하우사 왕국들의 통치 구조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으며, 이슬람법(샤리아)에 따라 통치되었다.[37] 많은 에미르와 고위 관리들은 풀라니 전쟁에 참여했던 풀라니족 성직자나 학자들이었다.[37] 와지르(Waziri, 비지어)라 불리는 고위 관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학식이 높은 가문 출신으로 이슬람 법과 정치, 신비주의에 정통했으며 술탄의 핵심 조력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41] 또한, 지역 수피 공동체, 특히 카디리야 교단은 여러 토후국들을 술탄의 권위 아래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40]

이슬람의 영향으로 이전의 나체 문화 대신 의복 문화가 도입되었다. 남녀 모두 주로 목화로 만든 칸두이라는 옷을 입었으며, 때로는 비단 자수가 들어가거나 비단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남성은 터키식 모자나 터번을, 여성은 스카프를 착용했다.

이슬람 학문은 건국 초기부터 매우 중시되었다.[10] 우스만 단 포디오, 무함마드 벨로, 압둘라히 단 포디오, 술탄 아부 바크르 아티쿠, 그리고 나나 아스마우 등 칼리파국의 주요 인물들은 역사 기록, 시 창작, 이슬람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10] 이들이 남긴 수많은 저술은 오늘날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종교적 지침으로 남아있다.[10] 이슬람은 문자 해독 능력을 강조했기 때문에, 칼리파국 치하에서 남녀 모두의 문해율이 향상되었고 학자 계층이 크게 성장했다. 이들 학자들은 신학, 법학, 의학, 천문학, 수학, 역사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저술했으며, 이 책들은 아랍어뿐만 아니라 아랍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된 풀베어와 하우사어로도 기록되었다.

여성들은 베일을 착용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교육의 기회가 막히지는 않았다.[51] 우스만 단 포디오의 아내들과 딸 나나 아스마우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그의 제자로서 높은 수준의 학식을 쌓았다.[51] 노예들에게는 이슬람 개종이 장려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이슬람 교육을 받고 아랍어를 배울 수 있었다.[51]

4. 2. 경제

칼리파국 건설 이후, 특히 1816년에서 1817년 사이의 반란이 진압된 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 전역에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20] 소코토의 상업적 번영은 이슬람 전통, 시장 통합, 내부 평화 및 광범위한 수출 무역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었다.[52]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20], 교역은 주로 노예, 카우리 조개 또는 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20] 카노는 소코토의 주요 상업 중심지로, 특히 직물 및 의류 산업이 발달했다. 국가 차원에서 제품의 신용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불량품 발견 시 판매자에게 반품하고 대금을 환불받을 수 있는 제도가 법률로 정해져 있었다.

풀라니 전쟁 이후 제국 내 모든 토지는 와끄프(waqf), 즉 공동체 전체의 소유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술탄은 에미르처럼 개인이나 가족에게 토지를 할당할 수 있었으며, 이 토지는 가족 구성원에게 상속될 수는 있었지만 판매될 수는 없었다.[15] 주요 농산물로는 목화, 인디고, 콜라, 시어 나무 열매, 곡물, , 담배, 양파 등이 있었다.[20] 재정은 다양한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노예 제도는 소코토 칼리파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우스만의 지하드 시대 이후, 비무슬림 포로는 몸값을 받고 풀려나거나 노예가 되었다. 노예를 이용하고 매매하는 것은 소코토 제국의 재정 기반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당수의 학자와 빈민들은 기본적인 생활 유지를 위해 "대저택"이라 불리는 곳에 의존했다. 이곳에서는 음식이 준비되어 공동 급식소 역할을 했으며, 의복은 칼리파국 내 다른 에미르들로부터 받은 지불금으로 마련되어 공동체에 재분배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소코토가 대규모 학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7]

5. 노예 제도

대서양 노예 무역이 종식된 이후에도 노예 제도는 소코토 칼리파국 경제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20] 노예는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방식처럼 지하드 전쟁 중 포로로 잡거나, 국경 지역에서의 습격, 그리고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획득되었다.[20][37] 칼리파국의 창시자 우스만 단 포디오는 이론적으로 비무슬림만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했으며, 노예 제도를 이들을 이슬람 공동체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간주했다.[16] 그러나 현실적으로 19세기 칼리파국 인구의 상당수, 일부 추정에 따르면 최소 절반이 노예였으며,[53] 이들의 노동력은 특히 농업 플랜테이션 확장에 필수적이었다.[20] 노예의 이용과 매매는 칼리파국의 재정 기반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노예 제도는 인종적 장벽이 뚜렷하지 않았고, 노예가 재산을 모으거나 해방될 가능성, 심지어 정부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도 존재하는 등[54] 복잡한 양상을 보였으나,[20] 이러한 유화책은 노예 제도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55] 또한, 불복종하거나 도망치려 한 노예들은 국가 노예 감옥 시스템에 수감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56][57]

20세기 초 영국이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을 설립하면서 노예의 법적 지위는 폐지되었으나, 실질적인 해방과 지원은 미흡했으며 노예 무역의 잔재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59] 심지어 21세기 초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와하야와 같은 사실상의 노예 관습이 보고되기도 했다.[61]

5. 1. 노예 제도와 사회 구조

대서양 노예 무역이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제도는 소코토 칼리파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노예는 이전 서아프리카에서처럼 약탈과 시장을 통해 획득되었다.[20] 칼리파국의 창시자인 우스만 단 포디오는 비무슬림에게만 노예 제도를 허용했으며, 노예 제도는 이들을 이슬람 공동체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간주되었다.[16] 19세기 칼리파국 인구의 최소 절반은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53] 지하드 전쟁, 국경 전쟁, 노예 습격 등으로 인해 노예의 수는 급증했다.[37] 노예를 이용하고 매매할 수 있다는 사실은 소코토 제국의 재정 기반 강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16]

칼리파국 하의 농업 플랜테이션 확장은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했다. 이러한 플랜테이션은 리바트(Ribat) 주변에 설립되었으며, 제국의 도시 주변에서 광범위한 농업 생산이 이루어졌다.[20] 1824년 소코토 제국을 방문한 휴 클래퍼턴은 카노 주민 3만에서 4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노예일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카노에 상설 노예 시장이 존재했으며, 지하드로 주민들이 포획되어 매각됨으로써 황폐해진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카노 동쪽의 카타굼에서는 노예가 주요 교역품이었고, 수도 소코토에서는 노예가 수출입 모두 이루어졌다. 노예의 가격은 소년, 소녀, 특히 미혼 소녀의 가격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가장 가격이 저렴했던 것은 성인 남성이었다.

포목·의류 산업에는 니제르강 중하류 지역 출신 노예가 중용되었는데, 이는 노예제가 단순히 육체 노동력 확보뿐 아니라 전문 기술자 획득을 위해서도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노예 제도는 사람들 사이에 인종적 장벽이 없다는 점과 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에 의해 일부 완화되는 측면도 있었다. 노예는 자신의 토지에서 일하여 재산을 축적할 권리가 있었고, 해방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20] 소코토 칼리파국에서 노예들이 정부 및 행정의 고위직에 오른 기록도 존재한다.[54]

그러나 이러한 노예 제도의 완화 조치는 다른 노예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별 노예에게 유익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모하메드 바시르 살라우는 "불행히도 대부분의 노예들에게 있어서 주인들은 종종 플랜테이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노예들 사이에 집단 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자유를 부여받은 사람들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는 자발적 해방을 장려했고, 노예 소유자들은 노예를 해방시키면 신이 그들에게 보상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대부분의 주인들은 누구를 해방시킬지 매우 신중했다. 그들은 종종 '착한 행실'을 보이고 '정직하고' '근면한' 노예를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또한 '너무 아프고' '너무 늙은'(힘든 플랜테이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예도 해방시켰다. 이것은 플랜테이션의 사회 질서를 영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예 소유자의 지출을 줄였다. 노령 및 허약한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소유자는 그들의 돌봄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지적했다.[55]

실제로 교정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노예들은 국가 노예 감옥 시스템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1829년 휴 클래퍼턴은 소코토의 감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공간에는 또한 감옥이 있는데, 길이 약 약 24.38m, 너비도 거의 같은 건물로… 내부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다… 도둑, 전쟁 포로(단독으로 잡힌), 스파이 및 불복종하는 노예만 감옥에 보내진다. 그들은 술탄에게 일하지 않겠다고 불평하면 감옥에 보내진다. 그들의 유일한 음식은 기장과 수수의 겨 또는 껍질과 물이다… 그것은 더러운 곳이며 소코토의 남성 노예들의 공포의 대상이다. 죄수들은 매일 두 명씩 벽이나 발생할 수 있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데려 나간다."[56] 카노 지역의 기단 마아진 와타리는 주요 노예 감옥 중 하나였다.[57] 판매를 원치 않는 노예 소유주는 특정 혐의를 제기하여 노예를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그 후, 잘못을 저지른 노예는 두 개의 문을 연달아 통과하여 시설에 들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심하게 구타당했다."[57] 프레더릭 루가드는 1903년 식민지 보고서에서 카노 감옥의 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감옥을 직접 방문했다. 2피트 6인치(약 0.76m) x 1피트 6인치(약 0.46m)의 작은 출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내부는… 두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약 5.18m x 약 2.13m이고 높이는 약 3.35m이다. 이 벽은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다리가 허벅지까지 밀려 들어갔고, 그들은 다른 죄수들에게 짓밟히다가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죽을 때까지 방치되었다… 내부의 총 공간은 약 74133.50L3이며, 우리가 카노를 점령했을 때 매일 밤 135명의 사람들이 수감되었고… 최근에는 한때 200명이나 수감된 적이 있다. 지표면적이 약 22.11m2에 불과했기 때문에 물론 서 있을 공간조차 없었다. 매일 밤 희생자들이 짓눌려 죽었고, 시체는 매일 아침 꺼내졌다… 3주 후 내가 방문했을 때 악취는 몇 초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당시에도 출입구 근처에 부패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58] 살라우는 "감옥에 있는 동안 노예는 일반적으로 동료 수감자뿐만 아니라 간수들에 의해 고문을 받았다… 궁극적으로 노예가 시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보낼지 결정한 것은 주인이었다."라고 덧붙였다.[57]

20세기 초,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예 인구(150만~250만 명) 중 하나를 상속받았으며, 노예 습격과 소코토 술탄 및 그의 에미르들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수천 명의 노예에 의해 공급되는 번성하는 노예 무역이 있었다.[59] 영국 고등판무관 루가드는 보상 없이 노예의 법적 지위를 폐지했고, 1901년 3월 31일 이후 노예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을 자유롭게 태어난 것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노예들에게는 어떠한 지원도 제공되지 않았고, 도망친 노예의 사례는 종종 무슬림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토착 이슬람 샤리아 법정에 넘겨지는 등 영국의 조치는 한계가 명확했다.[59] 1920년대까지 식민 당국에 의해 대규모 노예 무역은 근절되었지만, 소규모 노예 무역은 완전히 폐지하기 어려웠다. 한 예로 아다마와 소녀들의 무역이 있는데, 그들은 상인들에게 팔려 카메룬에서 1년 동안 하우사어를 배우다가 나이지리아로 밀수입되어 카노에서 첩이나 가사 도우미로 팔렸다.[59] "스스로 전 첩이었던 노예 브로커들은 노예로 팔기 위해 어린 소녀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식민 시대부터 반대하는 법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1988년 나이지리아 북부 주에서는 노예 첩이 기능하는 제도였다."[60]

21세기 초에도 니제르와 소코토 술탄국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다섯 번째 아내"를 취하는 와하야(wahaya) 관습이 존재했다. 국제 반노예제도(Anti-Slavery International)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4분기에 소코토 술탄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젊은 와하유를 찾으러 갔고, 세 명의 여성 노예가 제공되었으나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공급자에게는 다른 유목민 그룹에서 '적합한' 소녀들을 찾으라는 2개월의 기한이 주어졌는데, 이는 투아레그 엘리트와 그 집단이 노예를 이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불명예스럽기 때문이었다.[61]

소코토 칼리파국의 사회 구조는 계층적이었다. 술탄과 풀라니족 중심의 지배 엘리트가 최상위에 있었고, 그 아래로 자유 무슬림, 비무슬림, 그리고 가장 낮은 계층인 노예가 위치했다.[17] 소코토 제국은 풀라니족, 하우사족, 누페족, 요루바족 등 다민족 국가였으나, 지배층인 풀라니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수가 훨씬 적었다. 풀라니족과 하우사족 간의 혼혈과 문화 융합이 진행되어 현재 나이지리아의 하우사-풀라니족이라는 민족 집단 형성으로 이어졌다.

5. 2. 노예 제도 폐지 노력

20세기 초 영국이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을 설립했을 때,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예 인구(약 150만 명에서 250만 명 추산)를 가지고 있었다.[59] 노예 습격과 소코토 술탄 및 예하 에미르들에게 바쳐지는 조공으로 수천 명의 노예가 공급되면서 노예 무역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59]

영국의 초대 고등판무관이었던 프레더릭 루가드 경은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 없이 노예의 법적 지위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01년 3월 31일 이후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으로 선언되었다.[59]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형식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해방된 노예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더욱이 도망친 노예가 붙잡힐 경우, 지역의 이슬람 샤리아 법정으로 넘겨져 이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59] 이는 식민 당국의 노예제 폐지 의지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식민 당국의 노력으로 대규모 노예 무역은 상당 부분 근절되었다. 하지만 소규모 인신매매는 완전히 뿌리 뽑기 어려웠다. 한 예로, 아다마와 지역 소녀들이 상인들에게 팔려 카메룬에서 1년간 하우사어를 배운 뒤 나이지리아로 밀반입되어 카노에서 첩이나 가사 도우미로 팔리는 사례가 있었다.[59] 또한, 과거 첩이었던 여성들이 어린 소녀들을 구매하여 노예로 파는 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까지도 나이지리아 북부 일부 주에서는 노예 첩 제도가 암암리에 유지되고 있었다.[60]

21세기 초에도 니제르와 과거 소코토 칼리파국 영역이었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다섯 번째 아내'를 의미하는 와하야(wahaya) 관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는 사실상의 노예 제도가 현대 사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제 반노예제도(Anti-Slavery International)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008년 4분기에 소코토 술탄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젊은 와하야를 찾아 조라레 타자(Zorare Taja)로 갔다. 그들에게 세 명의 여성 노예가 제공되었다. 그들은 이 세 소녀들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유목민 그룹에서 ‘적합한’ 소녀들을 찾으라는 2개월의 기한이 공급자에게 주어졌다. 소녀들을 찾아야 했다. 투아레그 엘리트와 그들의 집단이 노예를 이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61]

6. 문화

소코토 칼리파국의 이슬람 전파는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일부 흑인 아프리카 지역에 존재했던 나체 문화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점차 사라지고 의복 문화가 자리 잡았다. 주요 의복으로는 칸두이가 착용되었으며, 주로 목화로 만들어졌으나 비단 실로 자수를 놓거나 아예 비단으로 제작된 것도 있었다. 여성들은 칸두이를 정장으로 입었으며, 평상시에는 허리, 가슴, 등에 천을 두르는 형태의 옷을 입고 스카프를 착용했다. 남성들은 머리에 터키식 챙 없는 모자나 터번을 썼다.

또한, 칼리파국은 국경 방어를 위해 리바트(Ribat)라는 성채를 건설했는데, 이곳에는 이슬람 지도자들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유목민의 정착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6. 1. 언어와 문학

이슬람 학문은 소코토 칼리파국 건국 이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술탄 우스만 단 포디오, 술탄 무하마드 벨로, 에미르 압둘라히 단 포디오, 술탄 아부 바크르 아티쿠, 그리고 나나 아스마우 등 지도층은 역사 편찬, 시 창작, 이슬람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들이 남긴 수많은 사본은 오늘날 중요한 역사 자료이자 종교 문헌으로 평가받는다.[10] 이러한 학문 활동은 무하마드 벨로와 아부 바크르 아티쿠 통치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당시 베일 착용 관습에도 불구하고 여성 교육이 이루어졌다. 특히 우스만 단 포디오의 아내들과 딸들을 포함한 주변 여성들은 그의 제자로서 높은 수준의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노예들에게도 이슬람 개종이 장려되었으며, 그 자녀들은 이슬람 교육과 함께 아랍어를 배울 기회를 얻었다.[51]

하우사어는 칼리파국의 공식적인 행정 언어였으며, 시를 짓는 데에도 주로 사용되었다.[37] 지배층인 풀라니족(풀베족)은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언어인 풀라어는 다른 부족들에게도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풀라어는 성조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타악기 등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대용 언어 체계가 없었다. 따라서 중요한 의식 등에서는 하우사어가 대용 언어로 사용되었다.

6. 2. 음악과 예술

우스만 단 포디오에 의한 급진적인 이슬람화 정책으로 인해,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성격의 음악과 악기는 배척되었다. 대신 소코토 칼리파국에서는 '샤이리(shairi)'라고 불리는 종교 가수가 등장하여, 시와 노래를 통해 이슬람 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니제르 중류 지역과 같이 이슬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곳에서는 전통적인 연애 가요나 세속적인 시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다.

6. 3. 학문

이슬람 학문은 건국 이후 소코토 칼리파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술탄 우스만 단 포디오, 술탄 무하마드 벨로, 에미르 압둘라히 단 포디오, 술탄 아부 바크르 아티쿠, 그리고 나나 아스마우와 같은 주요 인물들은 역사 편찬, 시 창작, 이슬람 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수많은 사본이 남아 중요한 역사적 정보와 영적인 경전을 제공하고 있다.[10] 다만 이러한 학문적 역할은 벨로와 아티쿠의 통치 이후에는 다소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1812년, 우스만 단 포디오는 이슬람 신학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지하드로 획득한 영토를 동서로 나누어 동생 압둘라히 단 포디오와 아들 무함마드 벨로에게 각각 통치를 맡겼다. 이는 학문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슬람은 문자 해독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소코토 칼리파국의 지배 아래 남녀 모두의 문해율이 향상되었다. 또한 칼리파국 내에서는 학자 계급이 크게 성장했다. 베일을 착용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여성의 교육을 막지는 못했다. 셰이크 우스만 단 포디오 주변의 많은 여성들, 특히 그의 아내들과 딸들은 그의 제자로서 뛰어난 학식을 쌓았다. 노예들 역시 이슬람교도가 되도록 장려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이슬람 교육을 받고 아랍어를 배웠다.[51]

칼리파국의 학자들은 신학, 법학, 의학, 천문학, 수학, 역사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서적들은 아랍어뿐만 아니라 아랍 문자로 표기된 풀라니어와 하우사어로도 기록되었으며, 현대 나이지리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법학 분야에서는 샤리아가 시행되었고 카디에 의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사법권은 주로 아미르가 행사했지만, 무슬림에 대한 사형 집행은 칼리프의 허가가 필요했다. 특히 우스만 단 포디오의 저술은 칼리파국의 중요한 규범 및 법규로 기능했다. 그의 법학서에서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컸던 말리키 학파의 견해를 주로 다루면서도, 18세기 중반 이후 서아프리카의 주요 사상가였던 카디리야의 마길리(Maghili)를 중요하게 여겼다.

훗날 투쿨르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알 하지 우마르 탈 역시 1826년 메카 순례 후 소코토 칼리파국에 7년간 머물며 수학했고, 이 기간 동안 벨로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7]

7. 유산

소코토 칼리파국은 비록 멸망했지만, 그 유산은 현대 나이지리아, 특히 북부 지역의 정치, 종교, 사회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 식민 통치 하에서 칼리프제는 폐지되었으나, 소코토 술탄의 상징적 지위는 유지되었으며, 이는 현대 나이지리아에서도 소코토 술탄 협의회를 통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소코토 술탄은 정치적 권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나이지리아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인정받는다.[10][36][15]

한편, 소코토 칼리파국의 지하드 정신은 현대의 일부 이슬람 무장 단체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지하디스트 단체인 안사루는 칼리파국의 부활을 주장하며 그 유산을 계승하려 하기도 한다.[15] 그러나 보코 하람과 같은 극단주의 단체는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코토 칼리파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이념(살라피 지하디즘, 와하비즘)은 소코토 칼리파국의 전통적인 말리키 학파 및 수피즘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62][63] 이러한 현대적 영향과 극단주의 단체와의 관계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7. 1. 현대 나이지리아의 소코토 술탄국

영국 식민 통치 아래 프레더릭 루가드는 칼리프제를 폐지했지만, 새로 조직된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에서 상징적인 지위로 ''술탄''이라는 칭호를 유지하도록 했다.[10] 이는 간접 통치의 일환으로, 소코토 술탄은 종교적 권한만 인정받았고 아미르(지방 통치자)에 대한 감독권은 영국에 넘겨졌다. 이 간접 통치 방식은 현대 나이지리아에도 영향을 미쳐, 카노 등 과거의 수장국 정부 형태가 지방 정부로 남아있게 되었다. 소코토 술탄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 명맥은 "소코토 술탄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36]

1960년 나이지리아 독립 이후에도 소코토 술탄의 계보를 잇는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표적으로 아마드 벨로는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북부 인민 회의(Northern People's Congress)라는 정당을 이끌며 북부 주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오늘날 소코토 술탄국 의회는 과거의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소코토 술탄은 나이지리아 사회에서 "주요 인물"로 인정받는다. 심지어 나이지리아 대통령들도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들의 지지를 구하기도 한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역사적 영향력은 현대 나이지리아의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나타난다. 지하디스트 무장 단체인 안사루는 소코토 칼리파국을 부활시켜 "잃어버린 무슬림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칼리파국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보코 하람과 같은 극단주의 단체 역시 때때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스만 댄 포디오의 유산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투쟁을 소코토 칼리파국의 지하드(성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운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62][63] 역사학자 마이클 쿡에 따르면, 소코토 지하드는 16세기에서 18세기 이슬람 세계의 지적 전통에 기반한 보수적인 운동이었다. 지하드의 지도자였던 우스만, 압둘라히, 벨로는 모두 말리키 학파와 카디리야 수피 교단의 전통을 따르는 저명한 학자들이었다.[62] 반면, 보코 하람은 살라피 지하디즘과 와하비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이고 세계화된 운동이다. 그들은 소코토 칼리파국의 이슬람 전통, 특히 말리키 법학파와 수피즘의 영향을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비판하며 거부한다.[62] 나이지리아의 주요 살라피 학자들조차 보코 하람 지도자들이 피크흐(이슬람 법학)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이슬람 경전을 잘못 해석하고 오용한다고 비판한다.[62] 이는 지하드 이전에 이미 존경받는 학자였던 소코토 지하드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62]

7. 2. 이슬람 극단주의와 소코토 칼리파국

소코토 술탄국 의회는 과거의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소코토 술탄들은 나이지리아 사회의 "주요 인물들"로 남아있다. 심지어 나이지리아 대통령들도 그들의 지지를 구하기도 한다.[15]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소코토 칼리파국은 현대 나이지리아의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하디스트 무장 단체인 안사루는 흑인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무슬림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코토 칼리파국을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15]

소코토 칼리파국의 영향은 보코 하람과 같은 극단주의 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이지리아 북동부에 기반을 둔 보코 하람은 극단적인 이슬람 해석을 내세우며 엄격한 샤리아로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스만 단 포디오의 유산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투쟁을 소코토 칼리파국 시대의 지하드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포장하려 한다. 하지만 이 두 지하디스트 운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쿡에 따르면, 소코토 지하드의 사상적 기반은 16세기에서 18세기 이슬람 세계의 "지적 혁신에 대한 보수적인 방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스만, 압둘라히, 벨로 등 지하드의 세 지도자는 더 넓은 이슬람 지적 네트워크와 연결된 말리키 학파와 카디리야 경전을 깊이 참조했다. 반면, 보코 하람은 세계화된 환경 속에서 활동하며 살라피즘과 와하비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국제적인 살라피 지하디스트 네트워크와 연계되어 있다.[62][63]

보코 하람은 주로 보르노주에서 활동하는데, 이곳은 과거 카넴-보르누 제국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함마드 알-아민 알-카네미가 이끌었던 보르누는 소코토 지하드에 저항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칼리파국의 침입과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지하드 기간 동안 무함마드 벨로와 알-카네미 사이에는 서로의 상반된 관점을 드러내는 격렬한 논쟁과 서신 교환이 있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보르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무함마드 유수프가 창설하고 이후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이끈 보코 하람은 카누리 공동체 내에서 등장했다.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소코토 칼리파국의 기존 이슬람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불순하고 개혁이 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살라피 사상에 기반한 더 '정통적인' 관행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소코토 칼리파국의 말리키 법학 전통과 수피즘적 영향을 거부했다. 나이지리아의 영향력 있는 살라피 학자들은 보코 하람을 비판하며, 그 지도자들이 피크흐(이슬람 법학)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살라피 경전을 잘못 해석하고 오용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지하드 이전에 이미 존경받는 학자였던 우스만과 압둘라히를 포함하여 저명한 말리키 학자들이었던 소코토 지하드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62]

8.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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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 역대 술탄
대수이름재위 기간
1대우스만 단 포디오? ~ 1817년
2대모하메드 벨로1817년 ~ 1837년
3대아브바카르 아티크 1세1837년 ~ 1842년
4대알리유 바바1842년 ~ 1859년
5대아흐마두 아티크1859년 ~ 1866년
6대알리유 카라미1866년 ~ 1867년
7대아흐마두 루파이1867년 ~ 1873년
8대아브바카르 아티크 2세1873년 ~ 1877년
9대무아즈1877년 ~ 1881년
10대우마르1881년 ~ 1891년
11대압둘라만1891년 ~ 1902년
12대아타히르 아흐마두1902년 ~ 1903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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