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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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유는 오군 출신으로, 손경의 아들이자 손견의 친족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이다. 손책과 손권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204년 단양태수로 임명되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었다. 주유와 함께 마보 요새를 격파하고, 익주 공략 계획에 참여했으나 주유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에게 자중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분위장군으로 승진하여 단양태수를 겸임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215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손만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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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은 후한 말의 군벌이자 오나라의 시조이며 손책과 손권의 아버지로, 황건적의 난 진압 등 공을 세웠고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낙양 함락에 기여했으나, 향양 전투 중 전사했으며, 뛰어난 무력과 리더십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과감한 성격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 손씨 일가와 주변 인물 - 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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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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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유 |
원어 이름 | 孫瑜 |
자 | 중이 (仲異) |
출생 | 177년 |
사망 | 215년 (38세) |
소속 | 후한 |
관직 | |
단양태수 (丹楊太守) | 213년 – 215년 |
분위장군 (奮威將軍) | 213년 – 215년 |
가문 | |
아버지 | 손정 |
자녀 | 손미 손희 손요 손만 손홍 |
2. 가계 및 초기 생애
손유(孫瑜)는 삼국시대 오나라의 종실이자 장수로, 오군 출신이다.[3] 아버지는 손견의 동생인 손정의 아들 손경이며,[4][5] 손책과 손권에게는 사촌 동생이 된다. 아버지 손경은 손견 휘하에서 군의 핵심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고,[4][5] 손유 역시 후한 말 혼란기에 사촌 형들인 손책과 손권 밑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00년 손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후계 구도가 불안정해지자 손유의 형 손고(孫暠)가 회계군을 차지하려다 실패하는 일이 있었으나,[7] 손유는 교위[9][3] 등을 거치며 꾸준히 손권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인재를 모으고 정중하게 대우하여 명망을 쌓았으며, 204년에는 단양군 태수로 임명되어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는 등 세력을 키워나갔다.
2. 1. 가계
※손강 · 손견의 계보는 각 항목을 참조할 것.
오군 출신으로[3] 아버지는 손경이다. 손경은 손견의 군대에서 핵심 무관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4][5] 손유는 후한 말 내전 시기에 사촌인 손책과 손권 밑에서 일했다. 아버지 손경은 군직에 있었으나, 고향인 오군 부춘현(현재의 항저우시 푸양구)에 머무는 경우도 잦았다.[6]
200년 손책이 암살된 후 후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손유의 형 손고(孫暠)는 오성(烏程)의 수비대를 이끌고 회계군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우번이 이를 미리 대비하고 경고하여 실패했으며, 이 일로 손고의 정치적 생명은 끝났다.[7] 아버지 손경은 이후 승진한 것으로 보이나, 오래 살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8] 이 무렵 손유는 교위에 임명되었지만,[9][3] 지위는 아버지나 형보다 낮았다.
2. 2. 초기 생애
손유는 오군 출신이며,[3] 아버지는 손견 휘하에서 핵심 무관을 양성했던[4][5] 손경이다. 후한 말 혼란기에 사촌이자 군벌인 손책과 손권 휘하에서 복무했다. 아버지 손경은 군직에 있었으나, 때때로 고향인 오군 부춘현(현재의 항저우 푸양 구)에 머물렀다.[6]200년 손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손유의 형 손고(孫暠)는 오성(烏程)의 수비대를 이끌고 회계군을 차지하려 했으나 우번의 반대로 실패했다.[7] 아버지 손경은 이후 승진했지만 오래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8] 이 무렵 손유는 교위에 임명되었는데,[9][3] 이는 아버지나 형에 비해 낮은 직위였다.
이후 공의교위(恭義校尉)가 되어 병사들을 거느렸다. 특히 양주 서부 출신 인재들을 겸손하고 정중하게 대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형 손고가 손책 사후 반란 미수로 실각하고 아버지 손경도 은퇴(혹은 사망)했지만, 손유는 계속 손권에게 중용되었다. 손권의 동생 손익이 부하에게 살해당한 후, 건안 9년(204년)에 단양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두터운 인망을 바탕으로 1만 명의 병사를 모았다.
3. 단양태수 시절
건안 9년(204년), 손익(孫翊)의 뒤를 이어 단양태수로 임명되었고,[37] 수원장군(綏遠將軍) 직위가 더해졌다.[38] 건안 11년(206년)에는 주유(周瑜)와 함께 마둔(麻屯)과 보둔(保屯) 두 요새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군공을 세웠다.[38] 이후 주유가 익주 공략을 손권(孫權)에게 건의할 때, 손유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아 함께 원정하여 점령 후 익주를 맡기자고 제안하기도 했으나,[39] 주유의 죽음으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손권이 유비(劉備)가 점유하고 있던 지역을 공격하려 했을 때, 손유는 명령을 받고 수군을 이끌고 하구(夏口)에 주둔했다. 그러나 유비 측이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을 주요 거점에 배치하며 강력히 방어하자, 손권의 명으로 군대를 되돌렸다. 또한 손권이 유수(濡須)에서 조조(曹操)와 대치했을 때, 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손권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손권은 큰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분위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단양태수 직은 계속 겸임했다. 주둔지를 율양[40]에서 우저[41]로 옮겼다. 그는 부하인 요조(饒助)와 안련(顔連)을 각각 여강군의 양안현(襄安縣)과 거소현(居巢縣) 현장으로 삼아 투항을 권유하게 했고, 이를 통해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42]
건안 20년(215년)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4] 아들 중 손만(孫曼)은 장군에 이르렀고 후에 후작으로 봉해졌다.[44]
3. 1. 손익의 후임
건안 9년(204년), 손씨 가문의 남쪽 지배 핵심 지역인 단양군에서 손권의 동생 손익(孫翊)[37](또는 손이)[10]가 측근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7][10] 이 위기는 곧 수습되었지만, 손권은 이 중요한 자리에 믿을 만한 인물이 필요했고,[3] 당시 공의교위였던 손유를 후임 단양태수로 임명했다. 손유는 처음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겸손한 태도로 손씨의 빈객들, 특히 강서 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가문의 지원과 특유의 관대함으로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으며,[11] 수원장군 직위도 추가로 받았다.[38]손유는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바쁜 군무 중에도 개인적으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학자들을 예우하고 수하 관리들에게도 학문을 장려했으며, 학관(學官)을 설치하기도 했다.[43] 특히 제음군 출신의 학자 마보가 북쪽에서 망명해 오자 그를 잘 대우했으며, 다른 관리들의 친척들을 마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했다. 이후 수백 명 규모의 학교가 단양에 세워졌고, 손유는 직접 강의를 하며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등 학문 진흥에 힘썼다.[12][3][13]
군사적인 면에서는 건안 11년(206년)에 주유(周瑜)와 함께 마둔(麻屯)과 보둔(保屯) 두 곳을 공격하여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38] 나중에 주유가 익주 공략을 손권에게 건의할 때, "분위장군"과 함께 가겠다고 하며 그에게 촉(蜀) 지역을 맡기자고 진언했는데,[39] 여기서 언급된 분위장군이 손유로 추정된다.
이후 손권이 유비(劉備)가 점유하고 있던 촉 지역을 공격하려 했을 때, 손유는 명령을 받고 하구(夏口)에 주둔했다. 하지만 유비는 관우(關羽)를 강릉, 장비(張飛)를 자귀, 제갈량(諸葛亮)을 남군에 배치하고 자신은 잔릉(孱陵)에 머무르며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어 손유 군의 진입을 막았다. 결국 손유는 손권의 명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손권이 유수(濡須)에서 조조(曹操)와 대치했을 때, 섣불리 공격하려는 손권에게 신중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큰 군공을 세우지 못했다.
손유는 이후 분위장군으로 승진했으며, 기존의 단양태수 직은 계속 겸임했다. 주둔지는 율양[40]에서 우저[41]로 옮겼다. 그는 영안(永安) 사람 요조(饒助)와 무석(蕪湖) 사람 안련(顔連)을 각각 여강군 소속인 양안현(襄安縣)과 거소현(居巢縣)의 현장(縣長)으로 임명하여 여강 지역을 포섭하려 했고, 이들은 각자 투항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42]
손유는 건안 20년(215년)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중 손만(孫曼)은 장군에 올랐고 후에 후작으로 봉해졌다.[44]
3. 2. 학문 장려
학문을 좋아하여, 개인적으로는 다른 장군들과 군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43] 학자를 예우하고 수하 관리들에게 학문을 익히도록 장려했으며, 이를 위해 학관(學官)을 두기도 했다.[43]특히 손유의 측근 중에는 북쪽에서 망명해 온 제음군 출신의 학자 마보가 있었는데, 손유는 그를 잘 대우했다. 또한 휘하 관리들의 친척들을 마보에게 보내 공부하게 하였다. 이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단양에 세워진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손유는 이들에게 직접 강의를 하고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등 학문 장려에 힘썼다.[12][3][13]
4. 군사적 활약
공의교위(恭義校尉)가 되어 처음으로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겸손한 태도로 손씨의 빈객들 중 양주 서부(강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손책 사후 형 손분(孫賁)이 반란 미수로 실각하고 아버지 손정(孫靜)도 은퇴했지만, 손유는 계속 손권(孫權)에게 중용되었다. 건안 9년(204년), 측근에게 암살당한 손권의 동생 손익(孫翊)[37]의 뒤를 이어 단양태수를 맡았다. 인망이 두터워 거느린 무리는 1만여 명에 달했으며, 수원장군(綏遠將軍) 직이 더해졌다.
건안 11년(206년), 주유(周瑜)와 함께 마(麻), 보(保) 두 둔영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38][15] 이는 당시 손권이 유표(劉表) 휘하의 황조(黃祖)를 공격하려던 계획의 일환이었다.[16][17] 주유는 손유를 신뢰하여 이후 익주 공략 계획 시 점령한 익주를 손유에게 맡길 것을 구상하기도 했다.[39][19] 손권이 독자적으로 익주를 공격하려 했을 때 손유는 명령을 받고 하구(夏口)에 주둔했으나, 유비(劉備)가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을 배치하여 길을 막아 결국 손권의 명으로 군대를 되돌렸다.
212년 유수구 전투에서는 조조(曹操)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손권에게 자중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23] 손권은 이를 듣지 않았으나, 결국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승진했으며, 옛 단양태수 직은 계속 겸직하면서 주둔지를 율양(溧陽)[40]에서 우저(牛渚)[41]로 옮겼다. 영안(永安) 사람 요조(饒助)와 무석(無錫) 사람 안련(顔連)을 각각 여강군에 속한 양안현(襄安縣)과 거소현(居巢縣)의 현장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통해 구강군과 여강군에 항복을 권유하게 하여 각 군의 투항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42]
손유는 학문을 좋아하여 군무 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학자를 예우하고 수하 관리들에게도 학문을 익히도록 장려하며 학관(學官)을 두기도 했다.[43]
4. 1. 마, 보 2둔 토벌
건안 9년(204년) 손익(孫翊)의 뒤를 이어 단양태수가 된 손유는[37] 건안 11년(206년)부터 이듬해까지[15] 주유(周瑜)와 함께 마, 보 2둔을 공격하여 무찔렀다.[38] 이 둔영들은 현재 후베이 성 자위의 늪지대에 위치한 난민들의 거점으로,[15] 당시 손권(孫權)이 유표(劉表) 휘하의 남쪽 형주 사령관 황조(黃祖)를 공격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토벌이 이루어졌다.[16][17]4. 2. 익주 공략 계획 참여
건안 15년(210년), 주유(周瑜)는 익주의 유장과 한중의 장로를 차례로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손권(孫權)에게 표문을 올렸다.[39][18] 주유는 이 계획에 당시 분위장군으로 여겨지는 손유가 함께 참여하여, 서쪽 땅을 정복한 후 손유가 그곳을 관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손권에게 돌아가려 했다.[19][39] 그러나 주유는 서쪽 침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으로 사망하여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20]이후 손권이 직접 익주를 공격하고자 했을 때, 손유는 손권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하구에 주둔했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손유 군대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는 관우(關羽)를 강릉, 장비(張飛)를 자귀, 제갈량(諸葛亮)을 남군에 배치하고 자신은 잔릉에 주둔하며 손유의 진군을 막았다. 결국 손유는 손권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원위의 《헌제춘추》에는 손권이 손유를 파견했으나 유비가 은둔하겠다고 위협하며 반대하고 부하들을 보내 길을 막아 결국 손유를 소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21]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도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22]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 라페 드 크레스피니는 당시 손권에게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지나치게 위험 부담이 컸을 것이라며, 손유가 실제로 파견되었는지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18]
이 중단된 익주 공략 시도는 손유가 나관중의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소설 속에서는 손유가 손권의 의형제로 묘사되며, 주유가 살아있을 때 익주로 파견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4. 3. 유수구 전투 참여
212년, 손권은 북쪽의 조조에 맞서 새로 구축한 유수구 방어에 나섰고, 손유도 이 전투에 참여했다. 당시 손권은 적극적으로 조조를 공격하려 했으나, 손유는 신중해야 한다며 전투를 만류했다.[23] 그러나 손권은 손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초반에 손실을 입었다.[23] 비록 초반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손권은 213년에 벌어진 유수구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5. 단양태수 재임 및 말년
공의교위로서 처음 병사를 거느렸을 때, 겸손한 태도로 강서 출신 빈객들의 마음을 얻었다. 건안 9년(204년), 암살당한 손익(孫翊)[37]의 뒤를 이어 단양태수가 되었고, 병력은 1만여 명에 달했으며 수원장군 직이 더해졌다. 건안 11년(206년), 주유(周瑜)와 함께 마둔(麻屯)과 보둔(保屯)을 공격하여 격파했다.[38] 주유는 이후 익주를 공략할 때 손유에게 그곳을 맡길 것을 구상하기도 했다.[39]
손권(孫權)이 익주를 취하려 했을 때, 손유는 명령을 받고 하고(夏口)에 주둔하려 했으나, 유비(劉備) 측이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을 배치하여 길을 막았으므로 손권의 명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유수에서 조조와 대치했을 때나 분위장군으로 승진하여 우저[41]로 주둔지를 옮긴 후 조조(曹操)의 백성 강제 이주에 맞서 유민을 회유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42][28][29][30][31]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손유는 학문을 좋아하여 군무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학자를 예우하고 부하들에게도 학문을 장려했다.[43] 건안 20년(215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44] 아들 중 손만(孫曼)이 장군에 이르렀다.[44]
5. 1. 분위장군 승진
손권(孫權)이 유수에서 조조(曹操)와 대치했을 때, 손유는 공격하려는 손권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다.[42] 그러나 손권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 못했다.[42] 이후 손유는 분위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전의 단양태수 직은 계속 겸임했다.[42] 주둔지를 기존의 장쑤성 율양[40]에서 안후이성 우저[41]로 옮겼다.[42][24][25]212년에서 213년 사이, 조조가 양자강[26][27] 인근 백성들을 회수 유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려 하자,[26][27] 손유는 이에 맞섰다. 그는 피난민들에게 관대한 정책[35]을 펼쳐 남쪽으로 피난 오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28][29][30] 영안 사람 요조(饒助)와 무석 사람 안련(顔連)을 각각 여강군에 속한 양안현(襄安縣)과 거소현(居巢縣)의 현장으로 삼아 파견하여 여강군과 구강군 백성들을 불러들이도록 했다.[42][28][29][30] (일부 기록에서는 요조 대신 노주로 나타나기도 한다[28]). 이 정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많은 백성들이 조조를 따라 북쪽으로 가는 대신 손권에게 귀순하는 길을 택했다.[31] 비록 손유가 상안과 거소를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고 해당 지역은 한동안 주인이 없는 땅이 되었지만,[31] 국경 지역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31]
손유는 학문을 좋아하여, 군무를 처리하는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학자들을 예우하고 수하 관리들에게도 학문을 익히도록 장려했으며, 학관을 두기도 했다.[43]
5. 2. 유민 회유
손유는 주강의 력양에 주둔하던 병력을 우저로 이동시켰다.[24][25] 212년~213년 사이 조조(曹操)가 원정에 실패한 후 양쯔강[26][27] 유역의 백성들을 회수 유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하자, 손유는 이에 맞섰다. 평소 피난민들에게 관대했던 손유[35]는 남쪽으로 피난 오는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영안 사람 요조(饒助)와 무석 사람 안련(顔連)을 각각 여강군에 속한 양안현(陽安縣)과 거소현의 현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했고,[42] 이들을 통해 여강군과 구강군 백성들의 귀순을 유도했다.[28][29][30] 손유의 이러한 노력은 국경 지역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많은 백성들이 조조를 따라 북쪽으로 강제 이주하는 대신 손권(孫權)에게 귀순하는 길을 선택했다.[31] 하지만 이후 양안현과 거소현은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31][42]5. 3. 죽음
건안 20년(215년)에 동아시아 나이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4][32] 아들로는 손미(孫彌), 손희(孫熙), 손요(孫燿), 손만(孫曼), 산홍(孫紘) 다섯을 두었으며, 이 중 손만(孫曼)만이 장군에 오르고 작위를 받았다.[44][34]6. 평가 및 영향
손유는 북쪽에서 손권에게 피신해 온 망명객들을 관대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35] 특히 양주 서부 출신 인재들을 겸손하게 구하고 정중하게 대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형 손분이 반란을 꾀하다 실각하고 아버지가 은퇴한 후에도 손유는 계속 손권에게 중용되었다.
군사적인 활동에 자주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유는 항상 고전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꾸준히 책을 읽고 암송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36] 학문에 뛰어난 부하 마보를 우대했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부하들에게도 학문을 배우도록 격려했다.
단양 태수로 임명된 건안 9년(204년) 이후, 두터운 인망을 바탕으로 1만 명의 병사를 모았다. 건안 11년(206년), 주유와 함께 마둔(麻屯)과 보둔(保屯) 두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주유는 손유를 매우 신뢰하여, 훗날 익주를 공격하여 점령하면 그곳의 통치를 손유에게 맡기려 했을 정도였다(「주유전」).
조조가 유수(濡須)를 침공했을 때, 손권이 적극적으로 나서 싸우려 하자 손유는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손권은 손유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손권이 양주 북부로 진출하자 손유는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승진하고, 단양 태수 직은 유지한 채 주둔지를 역양(歷陽)에서 우저(牛渚)로 옮겼다. 손유는 부하들을 현령으로 삼아 구강군과 노강군에 파견하여 항복을 권유하게 했고, 그 결과 두 군은 오나라에 항복했다.
7. 친족 관계
손정의 아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형이 있었는데, 손책 사후 반란을 꾀하다 실각했다. 동생으로는 손교가 있으며, 손유가 215년에 사망하자 그의 군권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으며, 그중 손만은 장군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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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권51 오서 종실전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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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양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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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말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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