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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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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사는 원나라 때 편찬된 496권 분량의 송나라 역사서로, 이십사사 중 가장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본기, 지, 표,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나라 역대 황제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기 47권, 15개 분야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기술한 지 162권, 재상, 종실, 공신 등의 계보를 나타내는 표 32권,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한 열전 25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송사에는 일본 관련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며, 방대한 분량과 상세한 기록이 특징이지만, 편찬 기간이 짧아 내용의 일관성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후 명, 청, 조선 시대에 걸쳐 보완 및 개정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송나라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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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개요
제목송사
원어 제목宋史
저자토크토 등
편찬 시기원나라
편찬 완료1345년
권수496권
이전 역사신오대사
다음 역사요사, 금사
상세 정보
언어한문
아루투의 역할아루투는 《송사》 편찬에 참여함

2. 구성

s=宋史|t=宋史|p=Sòng shǐ|labels=no|first=t중국어이십사사 중 하나로, 북송남송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으로 구성되어 총 496권에 달하며, 이십사사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1]

송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본기(本紀): 황제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이다.
  • 지(志): 송나라의 제도와 문물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부분으로, 천문, 오행, 율력, 지리, 하거, 예, 악, 의위, 여복, 선거, 직관, 식화, , 형법, 예문 등 15개 분야를 다룬다.[1]
  • 표(表): 황실세계(皇室世系)와 재보(宰輔) 등 주요 인물들의 관계를 도표 형태로 정리한 부분이다.
  • 열전(列傳): 황제, 후비, 종실, 공신, 문인, 충신, 역신 등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부분이다.


송사는 다른 정사(正史)에 비해 권수가 매우 많고 내용이 상세하다. 북송남송을 합쳐 약 300여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거의 같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나라의 정사인 구당서(200권)와 신당서(225권)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분량이다.

그러나 송사는 체제에 미비한 점이 많아 후세 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원나라를 어느 왕조의 후계 왕조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 편찬 기간의 부족, 사료 취사 선택의 미흡함 등 여러 요인 때문이다.

송사 편찬에는 왕단 등이 저술한 태조 · 태종 2대의 역사서인 『양조국사(前期)』, 왕규 등이 저술한 인종 · 영종 2대의 역사서인 『양조국사(後期)』, 등순무 등이 저술한 인종 1대의 역사서인 『신종정사』, 왕효적 등이 저술한 철종 1대의 역사서인 『철종정사』, 이도 · 홍매 등이 저술한 인종 · 철종 · 휘종 · 흠종 4대의 역사서인 『송사조국사』 등이 활용되었다. 이 외에도 태조부터 이종까지 15대의 『실록』과 도종 1대를 다룬 사료집 『도종시정기』 등 다양한 역사 자료가 참고되었다.

2. 1. 본기(本紀)

제목군주시기(음력)비고
본기 제1태조 광윤956년 ~ 964년 12월
(후주 현덕 3년 ~ 건덕 2년)
본기 제2태조 광윤965년 1월 ~ 971년 12월
(건덕 3년 ~ 개보(開寶) 4년)
본기 제3태조 광윤972년 1월 ~ 976년 9월
(개보 5년 ~ 개보 9년)
본기 제4태종 경976년 9월 ~ 984년 12월
(개보 9년 ~ 옹희(雍熙) 원년)
본기 제5태종 경985년 1월 ~ 997년 3월
(옹희 2년 ~ 지도 3년)
본기 제6진종 항997년 3월 ~ 1002년 12월
(지도 3년 ~ 함평 5년)
본기 제7진종 항1003년 1월 ~ 1010년 12월
(함평 6년 ~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본기 제8진종 항1011년 1월 ~ 1022년 2월
(대중상부 4년 ~ 건흥 원년)
본기 제9인종 정1022년 2월 ~ 1031년 12월
(건흥 원년 ~ 천성 9년)
본기 제10인종 정1032년 1월 ~ 1040년 12월
(천성 10년 ~ 강정 원년)
본기 제11인종 정1041년 1월 ~ 1049년 12월
(강정 2년 ~ 황우(皇祐) 원년)
본기 제12인종 정1050년 1월 ~ 1063년 3월
(황우 2년 ~ 가우 8년)
본기 제13영종 서1061년 10월 ~ 1067년 1월
(가우 6년 ~ 치평(治平) 4년)
본기 제14신종 욱1067년 1월 ~ 1069년 12월
(치평 4년 ~ 희녕(熙寧) 2년)
본기 제15신종 욱1070년 1월 ~ 1079년 12월
(희녕 3년 ~ 원풍 2년)
본기 제16신종 욱1080년 1월 ~ 1085년 3월
(원풍 3년 ~ 원풍 8년)
본기 제17철종 후1085년 3월 ~ 1093년 12월
(원풍 8년 ~ 원우 8년)
본기 제18철종 후1094년 1월 ~ 1100년 3월
(원우 9년 ~ 원부 3년)
본기 제19휘종 길1100년 3월 ~ 1104년 12월
(원부 3년 ~ 숭녕(崇寧) 3년)
본기 제20휘종 길1105년 1월 ~ 1111년 12월
(숭녕 4년 ~ 정화 원년)
본기 제21휘종 길1112년 1월 ~ 1118년 12월
(정화 2년 ~ 중화 원년)
본기 제22휘종 길1119년 1월 ~ 1125년 12월
(중화 2년 ~ 선화 7년)
본기 제23흠종 환1125년 12월 ~ 1127년 5월
(선화 7년 ~ 정강 2년)
본기 제24고종 구1126년 1월 ~ 1127년 12월
(정강 원년 ~ 건염 원년)
본기 제25고종 구1128년 1월 ~ 1129년 12월
(건염 2년 ~ 건염 3년)
본기 제26고종 구1130년 1월 ~ 1131년 12월
(건염 4년 ~ 소흥 원년)
본기 제27고종 구1132년 1월 ~ 1134년 12월
(소흥 2년 ~ 소흥 4년)
본기 제28고종 구1135년 1월 ~ 1137년 12월
(소흥 5년 ~ 소흥 7년)
본기 제29고종 구1138년 1월 ~ 1141년 12월
(소흥 8년 ~ 소흥 11년)
본기 제30고종 구1142년 1월 ~ 1152년 12월
(소흥 12년 ~ 소흥 22년)
본기 제31고종 구1153년 1월 ~ 1160년 12월
(소흥 23년 ~ 소흥 30년)
본기 제32고종 구1161년 1월 ~ 1162년 6월
(소흥 31년 ~ 소흥 32년)
본기 제33효종 선1132년 5월 ~ 1166년 12월
(소흥 2년 ~ 건도 2년)
본기 제34효종 선1167년 1월 ~ 1177년 12월
(건도 3년 ~ 순희(淳熙) 4년)
본기 제35효종 선1178년 1월 ~ 1189년 2월
(순희 5년 ~ 순희 16년)
본기 제36광종 돈1170년 7월 ~ 1194년 7월
(건도 6년 ~ 소희 5년)
본기 제37영종 확1194년 6월 ~ 1200년 12월
(소희 5년 ~ 경원 6년)
본기 제38영종 확1201년 1월 ~ 1207년 12월
(가태 원년 ~ 개희(開禧) 3년)
본기 제39영종 확1208년 1월 ~ 1216년 12월
(가정 원년 ~ 가정 9년)
본기 제40영종 확1217년 1월 ~ 1224년 8월
(가정 10년 ~ 가정 17년)
본기 제41이종 윤1220년 8월 ~ 1234년 12월
(가정 13년 ~ 단평(端平) 원년)
본기 제42이종 윤1235년 1월 ~ 1243년 12월
(단평 2년 ~ 순우(淳祐) 3년)
본기 제43이종 윤1244년 1월 ~ 1253년 12월
(순우 3년 ~ 보우 원년)
본기 제44이종 윤1254년 1월 ~ 1259년 12월
(보우 2년 ~ 개경 원년)
본기 제45이종 윤1260년 1월 ~ 1264년 10월
(경정 원년 ~ 경정 5년)
본기 제46도종 기1253년 1월 ~ 1274년 7월
(보우 원년 ~ 함순 10년)
본기 제47공제 현
단종 시
소제 병
1274년 7월 ~ 1279년 2월
(함순 10년 ~ 지원 16년)


2. 2. 지(志)

'''송사'''의 지(志)는 송나라의 제도와 문물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천문, 오행, 율력, 지리, 하거, 예, 악, 의위, 여복, 선거, 직관, 식화, , 형법, 예문 등 15개 분야가 포함된다.[1]

colspan="2" |제목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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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3지16오행 2-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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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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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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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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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上
권209지162예문 8
집부 下


2. 3. 표(表)

colspan="2"|제목비고
권210표1재보(宰輔) 1
권211표2재보(宰輔) 2
권212표3재보(宰輔) 3
권213표4재보(宰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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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38표29종실세계(宗室世系)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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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40표31종실세계(宗室世系) 26
권241표32종실세계(宗室世系) 27


2. 4. 열전(列傳)


3. 내용

『송사』는 다른 정사와 비교하여 권수가 매우 많고 상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북송·남송을 합쳐 약 300여 년이지만, 거의 같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의 정사(『구당서』 200권·『신당서』 225권)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권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체제에 미비한 점이 많아, 후세 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송사』 편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 원나라를 어느 왕조의 후계 왕조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토를 지배한 왕조였으나, 원나라 초기 관료 중에는 요나라·금나라에 벼슬한 자들의 자손이 많아 정사 편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몽골인 고관 중에는 한족의 정사 편찬 방식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 토크토는 고위 관직자였기에 이름을 내세운 것이고, 실제 편찬은 오양현이 지휘했지만,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요사』·『금사』와 동시 편찬되어 사료 선택과 조율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기술이 일치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 송대에는 사료가 폭증했다. 사관·국사원 창설로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었고, 개인 전기, 비문 등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인쇄술 보급으로 사료가 풍부해져 원대 사가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점 외에도, 『송사』는 주자학적 정통론의 영향으로 왕안석을 제외한 신법당 인사들과 남송의 재상 진회 등이 '간신전'에 포함되는 등 편향성 문제도 지적된다.

『송사』에는 일본 관련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권491, 열전250, 외국7에서는 일본이 유구국보다 조금 뒤에 언급된다.[1] 조연이 태종에게 바친 『왕년대기』를 인용하여, 천어중주신부터 언점존까지 23세와 진무 천황부터 엔유 천황까지 64세의 계보를 언급한다.[1] 쇼토쿠 태자 관련 일화도 소개하며, 당시 일본에 중국에서 사라진 한적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1]

3. 1. 특징

이십사사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송사(宋史)』는 49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 황제 본기 47편, 송나라 기록 162편, 표 32편, 열전 255편을 포함하며, 2,000명 이상의 개인 열전이 수록되어 구당서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송나라 기록 부분은 천문, 오행, 율력, 지리, 강과 수로, 유교 의례, 음악, 의례 무기 및 경호원, 군복, 선거, 정부 관직, 소비재, 군대, 형벌, 예술 및 문화 등 15개 범주로 나뉜다. 이 장들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송사』의 열전 부분은 다른 역대사서보다 뛰어나 송나라 정부 구조를 상세히 묘사한다. 소비재와 군대 부분도 다른 역대사서보다 자세하며, 소비재 관련 14개 장은 『구당서』 해당 장보다 7배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송사』는 정호, 정이, 장재, 주돈이, 주희 등 유학자 4편과 채경, 황잠선, 진회, 장방창, 유예 등 배신자와 반역자 전기 7편을 포함한다.

첸(Chien)은 181~183권의 소금 전매 논문을 영어로 번역했고, 지리 부분을 구성하는 85~90권의 주요 행정 구역에 해당하는 영문 지도도 포함했다.

『송사』는 다른 정사에 비해 권수가 매우 많고 상세하다. 북송·남송과 비슷한 기간 존속했던 의 정사(『구당서』 200권·『신당서』 225권)보다 거의 두 배에 달한다. 그러나 체제 미비로 후세 사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원나라를 어느 왕조의 후계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 원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토를 지배한 왕조였으나, 원나라 초기 관료 중에는 요나라·금나라에 벼슬한 자들의 자손이 많아 정사 편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 편찬 지휘는 오양현이 맡았으나,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요사』·『금사』와 동시 편찬되어 사료 선택과 조율이 부족했다.

# 송대에는 사료가 매우 많았다. 사관·국사원 창설로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었고, 개인 전기, 비문 등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인쇄술 보급으로 사료가 풍부해 원대 사가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3. 2. 비판

송사는 다른 정사와 비교하여 권수가 매우 많고 상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북송·남송을 합쳐 약 300여 년이지만, 거의 같은 연수 동안 존속했던 의 정사(『구당서』 200권·『신당서』 225권)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권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 체제에 미비한 점이 많아,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원나라를 어느 왕조의 후계 왕조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북송 이래 오랜만에 중국 전토를 지배한 왕조였으며, 그 후계 왕조라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원나라 초기에 벼슬한 관료 중에는, 북방 왕조인 요나라·금나라에 벼슬한 자들의 자손이 많아, 자신의 선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요사』·『금사』를 정사로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과, 『북사』·『남사』처럼 어느 쪽을 정통으로 할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2종류의 정사를 편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더 나아가 몽골인 고관 중에는, 애초에 피정복 민족인 한족의 수법에 따른 정사 편찬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원나라 성립 이후 여러 차례 『송사』 편찬 계획이 세워졌지만, 이 단계에서의 의견 조율 실패로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 토크토는 고관이었기에 이름을 내세운 것이고, 실제 편찬을 지휘한 것은 오양현이었지만, 그 편찬 기간은 불과 3년에 불과했고, 또한 『요사』·『금사』와 동시 병행으로 편찬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료의 취사 선택이나 편찬자들 간의 조율이 불충분했다. 이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1]
  • 송대에는 사료가 격증했다. 사학의 발전에 따라 사관·국사원이 창설되어, 매일의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또한 개인의 전기나 비문·묘지·행장 등과 같은 것들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인쇄술의 보급도 있어 풍부한 사료 앞에서 원대 사가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후세 사가들의 『송사』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체제의 미비에만 쏟아진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측면도 있었다. 송대 이후 주자학적 정통론이 대두되면서, 이는 『요사』, 『금사』, 『송사』 편찬 방침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통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송사』만 만들어져야 하며, 요나라와 금나라에 대해서는 외국지 수준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이었으며, 삼사를 각각 따로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원나라 궁정 내에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유신도 있었고, 그러한 비판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또한, 원나라에 항복한 공제를 마지막 황제로 여기고, 남쪽으로 도망간 사람들에 의해 옹립된 단종・위왕(조병)을 정식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본기를 세우지 않은 것도 주자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실제로 원나라의 지배가 끝나고 한족 왕조인 나라에 들어서자, 가유기는 『'''송사신편'''』을 저술하여, 요・금을 "외국전"에 편입시키고, 공제를 따라 원나라에 항복한 고관들을 "반신전"에 추가했다.

사기』 이래 유학자를 위해 세워졌던 "유림전"과는 별도로 주자학자를 위해 "도학전"이 세워지거나, 북송 말기의 신법・구법의 다툼에서는, 왕안석을 제외한 신법당 정권의 요인들이 "간신전"에 들어가고, 금나라와 강화한 남송의 재상 진회도 "간신전"에 추가된 것도, 주자학적 이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 이후에 그들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보는 움직임이 등장하면서, 『송사』의 기술이 구법당이나 대금 강경파에 편향되어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송사는 급하게 준비되었고 많은 편집자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오류와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1] 예를 들어, 리 시징()은 두 개의 전기 기사가 있는데, 역사적 전기 부분의 116장에 등장한 다음 222장에 다시 등장한다. 이 작품은 또한 북송과 초기 남송 왕조를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후기 남송 왕조는 개략적으로만 다루고 있다. 북송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전기가 더 많으며, 예를 들어 《문원전》(文苑傳)은 총 96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으며, 그 중 남송 시대의 인물은 11명에 불과하다. 송사는 또한 24개의 정사 중 가장 무질서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오이()는 "원나라가 멸망한 송나라의 역사를 쓸 때, 그들은 아마도 기존의 송나라 문서를 정리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청나라의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책은 "송사의 주된 목적은 송나라 황제와 그들의 유교에 대한 찬사이며, 다른 문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오류가 많다"고 말한다. 1977년 중화서국은 구두점을 수정하여 송사의 새로운 버전을 발행했다.

3. 3. 송사의 일본 관련 내용

『송사』 권491, 열전250, 외국7에서는 일본이 유구국보다 조금 뒤에 언급된다.[1] 조연이 태종에게 바친 『왕년대기』를 인용하여, 천어중주신부터 언점존까지 23세와 진무 천황부터 엔유 천황까지 64세의 계보를 언급한다.[1] 리왕 갑인년에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기록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즉위는 신유년이며, 갑인은 동정 개시의 해이다.[1] 둘 다 주나라 혜왕 시대에 해당한다.[1] 쇼토쿠 태자가 3세에 10명의 말을 분별했다는 일화도 소개한다.[1] 당시 역대에 추가되지 않았던 고분 천황준닌 천황 중, 고분 천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준닌 천황은 "천취 천황"으로, 진구 황후는 "신공 천황"으로 기록하여 역대에 추가했기 때문에, 엔유 천황을 제64대 천황으로 하는 현재의 계산법과 일치한다.[1] 일본이 중국에서 멸실된 것을 포함하여 많은 한적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 무렵부터 알려졌던 듯하며, "그 나라에는 중국의 전적이 많다"라는 기록도 보인다.[1] 기술은 남송 영종 가태 2년(1202년)의 기사까지이다.[1]

4. 편찬 과정

쿠빌라이 칸은 류빙중과 왕어(王鶚|왕악중국어)가 제안한 송, 금, 요나라의 역사 기록 편찬을 승인했지만, 편찬 작업은 한동안 중단되었다.[1] 1343년 3월, 원 혜종 우칸투 칸의 지정(至正) 연호 3년(至正年號|지정 연호중국어)에 황제의 칙령에 따라 송, 요, 금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토크토가 총감독을 맡았고, 테무르 다쉬(鐵木兒塔識|철목아탑식중국어), 허웨이이(賀惟一|하유일중국어), 장치옌(張起巖|장기암중국어), 오양쉬안(歐陽玄|구양현중국어), 리하오원(李好文|이호문중국어), 왕이(), 양종두안()이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1] 워위룬투(斡玉倫徒|알옥륜도중국어), 타이부화(泰不華|태불화중국어), 위원좐(于文傳|우문전중국어), 궁스다오(貢師道|공사도중국어), 위취에(餘闕|여결중국어), 자루(賈魯|가로중국어), 웨이수()를 포함한 23명이 역사가로 임명되었다.[1]

토크토는 1344년 5월 사임했고, 그의 자리는 총리 알루투가 이어받았지만, 알루투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책은 단 2년 반 만에 완성되어 지정 연호 6년인 1346년 저장성에서 출판되었다.

『송사』 편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 원나라를 어느 왕조의 후계 왕조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북송 이래 오랜만에 중국 전토를 지배한 왕조였으며, 그 후계 왕조라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원나라 초기에 벼슬한 관료 중에는, 북방 왕조인 요나라·금나라에 벼슬한 자들의 자손이 많아, 자신의 선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요사』·『금사』를 정사로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과, 『북사』·『남사』처럼 어느 쪽을 정통으로 할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2종류의 정사를 편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몽골인 고관 중에는 피정복 민족인 한족의 수법에 따른 정사 편찬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원나라 성립 이후 여러 차례 『송사』 편찬 계획이 세워졌지만, 이 단계에서의 의견 조율 실패로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 토크토는 고관이었기에 이름을 내세운 것이고, 실제 편찬을 지휘한 것은 오양현이었지만, 그 편찬 기간은 불과 3년에 불과했고, 또한 『요사』·『금사』와 동시 병행으로 편찬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료의 취사 선택이나 편찬자들 간의 조율이 불충분했다. 이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 송대에는 사료가 매우 많았다. 사관·국사원이 창설되어 매일의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었고, 개인의 전기나 비문·묘지·행장 등과 같은 것들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인쇄술의 보급도 있어 풍부한 사료 앞에서 원대 사가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5. 후대의 보완 및 개정

명나라의 왕주(王洙)는 1546년에 100권의 송사보(宋史補)를 완성했고, 1561년에는 가유기(柯維祺)의 200권 송사신편(宋史新編)과 왕유검(王惟儉)이 쓴 250권의 송사기(宋史記)가 이어졌다. 청나라 시대에는 진황중(陳黃中)이 219권의 송사고(宋史稿)를 썼고, 육심원(陸心源)은 40권의 송사익(宋史翼)을 저술했다. 조선 정조는 148권의 송사전(宋史筌)을 썼다. 이 모든 작품들은 《송사》의 몇 가지 단점을 수정했지만, 원본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 건륭제 (재위 1735–1796)의 말년에, 역사가 소진한(邵晉涵)은 전대흔(錢大昕), 장학성(章學誠)과 함께 《송사》를 개편하는 작업을 했다. 소진한은 남도사략(南都事略)을 저술한 다음 《송사》 작업에 다시 착수했지만, 완성 전에 사망했다. 육심원의 宋史翼|송사익중국어과 진방첨의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등도 송나라 사람들의 전기에 초점을 맞춰 『송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쓰여졌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Song Dynasty http://www.chinaknow[...] 2010-09-01
[2] 백과사전 송사 브리태니커백과
[3] 서적 송사 이조당사고전서회요(摛藻堂四庫全書薈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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