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인 튜구스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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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베인 튜구스케그는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었으며, 1013년에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하랄 블루투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으며, 스웨덴의 에릭 6세에게 덴마크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980년대부터 잉글랜드를 습격하여 데인겔드를 징수했으며, 1002년 세인트 브라이스 데이 학살 이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1013년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스베인은 1014년 급사했으며, 잉글랜드 왕위는 아들 크누트 1세가 계승하여 북해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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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년 사망 - 사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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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다크누트는 아버지 크누트 대왕 사후 덴마크 왕위에 올랐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었으며, 높은 세금 부과와 가혹한 통치로 백성들의 불만을 샀지만 2년 만에 사망하여 덴마크 왕조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스베인 튜구스케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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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963년 4월 17일 |
출생지 | 덴마크 |
사망일 | 1014년 2월 3일 (50세) |
사망지 | 잉글랜드, 링컨셔, 게인즈버러 |
매장지 | 로스킬레 대성당 또는 룬드 대성당 |
다른 이름 | 스ヴェン双叉髭王 (스벤 소우시사왕) |
통치 | |
덴마크 국왕 | 986년 – 1014년 |
노르웨이 국왕 | 999/1000년 – 1013/14년 |
잉글랜드 국왕 | 1013년 – 1014년 |
계승자 (덴마크) | 하랄 2세 |
계승자 (노르웨이) | 올라프 2세 |
계승자 (잉글랜드) | 애설레드 2세 |
선임자 (덴마크) | 하랄 1세 |
선임자 (노르웨이) | 올라프 1세 |
선임자 (잉글랜드) | 애설레드 2세 |
가족 | |
배우자 | 시비에토스와바 / 시그리드 / 군힐드 |
자녀 | 하랄 2세 크누트 대왕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 |
왕가 | 크뉘틀링가 |
부친 | 크누트 다나스트 또는 하랄 1세 |
모친 | 토베 또는 군힐드 |
2. 생애
스베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자료로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이름이 ''Swegen''으로 표기됨),[4] 브레멘의 아담의 11세기 저서 ''함부르크 교구 주교들의 업적'',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13세기 저서 ''헤임스크링글라''가 있다.[5] 스베인의 말년에 대한 상반된 기록은 그의 아들인 크누트 왕의 왕비인 노르망디의 엠마를 기리는 11세기 라틴어 ''엠마 여왕의 찬가''인 ''엠마 여왕의 찬가''와 11세기 작가인 우스터의 플로렌스의 ''연대기''에도 나타난다.
브레멘의 아담에 따르면 스베인은 하랄 블루투스와 "군힐드"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 하랄드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스베인은 "오토"(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를 기려)로 세례를 받았다.[6]
스베인은 승리왕 에릭의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군힐드"[7]로 불리거나 폴란드의 통치자 볼레스와프 1세의 이름 없는 누이로 확인되었다.
역사학자 이안 하워드는 스베인을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자 정치가이며 외교관"으로 묘사하며, 그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왕"이 되었다고 말했다.[5]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벤드 왕 볼레스와프 1세의 딸 군힐[23]이었다. 그녀의 사후[24], 스웨덴 왕 올로프 1세의 어머니이자 스코글의 토스티/Skagul Toste영어의 딸 시그리드(Sigrid Storråda, Sigrid Storråda)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25]。
또한, 크누틀링가 사가/Knýtlinga saga영어에 따르면, 군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크누트 1세 (크누트 2세)였다. 또한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딸 귈라[26](Gyda Sveinsdatter, no)는 노르웨이의 에이리크 호콘손의 부인이 되었다[27]。또, 여동생 튀리/Tyra of Denmark영어[26](타이라, 튜리라고도 함)는 볼레스와프 왕의 부인이 된 후, 이교도였던 왕을 싫어하여 도망쳐서 올라프 1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28]。그 외에 딸 에스트리드가 있었는데, 데인의 백작 울프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 나중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이 되어 에스트리센 왕가를 열었다.
스벤 1세는 아버지 하랄 1세 "블루투스"의 뒤를 이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웨덴의 에릭 6세 "승리왕"에게 패하여 덴마크에서 추방되었다. 에릭 6세가 죽은 후 스벤 1세는 덴마크로 돌아왔다.
덴마크는 980년대부터 잉글랜드를 습격하여, 퇴거료로서 데인겔드/Danegeld영어를 징수했다. 더 나아가 994년에는 노르웨이의 올라프 트리그바손과 함께 런던과 켄트를 습격했다. 999년 또는 1000년, 스벤은 스웨덴의 올라프, 노르웨이와 벤드의 군대와 함께 스볼데 해전에서 올라프 왕을 물리쳤다. 1002년에 에설레드 2세 "무지왕"이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데인인을 학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스벤은 북유럽 각국에서 군사를 모아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9]。1013년에는 에설레드 무지왕을 물리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30]。
1014년, 스벤 1세는 급사했다. 덴마크 왕위는 아들 하랄 2세가, 노르웨이 왕위는 올라프 2세 "성왕"이 계승했다. 잉글랜드는 에설레드 2세가 복위했지만, 크누트 1세가 이를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했다. 크누트 1세는 나중에 덴마크 왕위와 노르웨이 왕위도 차지하여, 거대한 북해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스베인 튜구스케그는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첫 번째 부인으로 벤드 왕 볼레스와프 1세의 딸 군힐을 맞이했다.[23] 그녀가 사망한 후,[24] 스웨덴 왕 올로프 1세의 어머니이자 의 딸 시그리드(Sigrid Storråda, Sigrid Storråda)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25] 『』에 따르면, 군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크누트 1세 (크누트 2세)였다.『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딸 귈라(Gyda Sveinsdatter, no)는 노르웨이의 에이리크 호콘손의 부인이 되었다.[27] 또한, 여동생 [26](타이라, 튜리라고도 함)는 볼레스와프 왕의 부인이 된 후, 이교도였던 왕을 싫어하여 도망쳐서 올라프 1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28] 그 외에 딸 에스트리드가 있었는데, 데인의 백작 울프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 나중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이 되어 에스트리센 왕가를 열었다.
스베인 1세는 아버지 하랄 1세 "블루투스"의 뒤를 이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웨덴의 에릭 6세 "승리왕"에게 패하여 덴마크에서 추방되었다. 에릭 6세가 죽은 후 스벤 1세는 덴마크로 돌아왔다.
2. 2. 아버지와의 갈등과 왕위 찬탈
980년대 중반, 스베인은 아버지 하랄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하랄은 망명길에 올라 986년 11월 또는 987년 직후에 사망했다.브레멘의 아담은 스베인을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아버지를 배신하며 독일 주교들을 스코네와 셸란에서 추방한 반역적인 이교도로 묘사했다. 아담에 따르면, 스베인은 아버지의 독일인 친구들에 의해 망명길에 올랐고, 스웨덴의 왕 에릭 승리왕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며, 에릭 승리왕이 994년 또는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통치했다고 기록했다.[8] 소렌센(2001)은 아담의 스베인 묘사가 "냉정하고 편협한 시각"을 통해 과도하게 부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8] 스베인이 스코틀랜드에서 14년 동안 망명했다는 주장은 스베인이 같은 기간 동안 룬과 로스킬레의 교회를 포함하여 덴마크에서 교회를 건설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9] 아담은 스베인이 피난처를 구한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잠시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스베인이 젊은 시절 이교도들 사이에서 살았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야 통치자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암시한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벤드 왕 볼레스와프 1세의 딸 군힐[23]였고, 그녀의 사후[24], 스웨덴 왕 올로프 1세의 어머니이자 스코글의 토스티의 딸 시그리드(Sigrid Storråda, Sigrid Storråda)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25]。
『크누틀링가 사가』에 따르면, 군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크누트 1세 (크누트 2세)였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딸 귈라[26](Gyda Sveinsdatter, no)는 노르웨이의 에이리크 호콘손의 부인이 되었다[27]。또, 여동생 튀리[26](타이라, 튜리라고도 함)는 볼레스와프 왕의 부인이 된 후, 이교도였던 왕을 싫어하여 도망쳐서 올라프 1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28]。그 외에 딸 에스트리드가 있었는데, 데인의 백작 울프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 나중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이 되어 에스트리센 왕가를 열었다.
스벤 1세는 아버지 하랄 1세 "블루투스"의 뒤를 이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웨덴의 에릭 6세 "승리왕"에게 패하여 덴마크에서 추방되었다. 에릭 6세가 죽은 후 스벤 1세는 덴마크로 돌아왔다.
덴마크는 980년대부터 잉글랜드를 습격하여, 퇴거료로서 데인겔드를 징수했다. 994년에는 노르웨이의 올라프 트리그바손과 함께 런던과 켄트를 습격했다. 999년 또는 1000년, 스벤은 스웨덴의 올라프, 노르웨이와 벤드의 군대와 함께 스볼데 해전에서 올라프 왕을 물리쳤다. 1002년에 에설레드 2세 "무지왕"이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데인인을 학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스벤은 북유럽 각국에서 군사를 모아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9]。1013년에는 에설레드 무지왕을 물리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30]。
1014년, 스벤 1세는 급사했다. 덴마크 왕위는 아들 하랄 2세가, 노르웨이 왕위는 올라프 2세 "성왕"이 계승했다. 잉글랜드는 에설레드 2세가 복위했지만, 크누트 1세가 이를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했다. 크누트 1세는 나중에 덴마크 왕위와 노르웨이 왕위도 차지하여, 거대한 북해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2. 3. 스볼데르 해전과 노르웨이 지배
하랄 블루투스는 이미 970년경에 노르웨이에 교두보를 마련하여 비켄을 통제했으나, 974년 독일군과의 패배 이후 노르웨이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을 수 있다.[10]스베인은 스웨덴 왕 올로프 솃코눙, 에이리크 호콘손, 라데의 야를과 동맹을 맺어 노르웨이 왕 올라프 트리그바손에 대항했다. 왕들의 사가는 이 동맹의 원인을 올라프 트리그바손의 불운한 시그리드 데 호티에게 청혼, 그리고 스베인 포크비어드의 여동생인 티리와의 문제적인 결혼으로 돌린다. 사가에 따르면, 시그리드는 올라프가 자신을 때렸기 때문에 스베인을 올라프와의 전쟁에 끌어들였다.[10]
동맹군은 서부 발트해에서 원정에서 돌아오던 올라프 왕을 공격하여 격파했는데, 이는 999년 9월 또는 1000년에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였다.[10] 승리자들은 노르웨이를 분할했다. ''헤임스크링글라''의 기록에 따르면, 스베인은 비켄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되찾았다.

스웨덴의 올라프 왕은 트론헤임의 4개 지역과 뫼레, 롬스달, 로네리케를 받았다 (반면에 ''파그르스킨나''는 스웨덴령이 오플란과 트론헤임의 일부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지역들을 자신의 사위인 야를 스베인 호콘손에게 봉신으로 주었다. 노르웨이의 나머지 지역은 에이리크 호콘손이 스베인 왕의 봉신으로 통치했다.[11]
야를 에이리크와 스베인은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그들의 통치는 번영했다. 대부분의 자료는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백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여, 올라프 트리그바손의 선교 활동의 많은 부분을 무효화하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을 초래했다고 말한다.[11]
2. 4. 잉글랜드 침공과 정복
존 오브 월링퍼드의 연대기 (c. 1225–1250)는 스베인이 1002–1005년, 1006–1007년, 1009–1012년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약탈에 연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13] 스베인의 침략은 1002년 11월 세인트 브라이스 데이 학살에서 잉글랜드의 데인족들이 무능왕 애설레드의 명령에 따라 학살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베인의 여동생과 매형이 사망한 것이 부분적인 원인이었다.[13] 그러나 약탈의 주요 동기는 수익 확보의 가능성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9]침략이 시작될 무렵, 스베인은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와 협약을 맺어 데인족이 노르망디에서 전쟁 약탈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14] 그는 1003–1004년에 웨섹스와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원정을 벌였지만, 기근으로 인해 1005년에 덴마크로 돌아가야 했다. 1006–1007년에는 추가 약탈이 있었고, 1009–1012년에는 토르켈 데 더 톨이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략을 이끌었다.[20] 스베인이 이러한 침략을 지원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토르켈 군대의 활동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을 재빨리 이용했다.[20] 스베인은 약탈을 통해 막대한 양의 ''데인겔드''를 획득했다. 1013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피터버러 연대기''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일부)는 8월 이전에 스베인 왕이 함대를 이끌고 켄트주 샌드위치에 도착하여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을 지나 험버강 어귀로 빠르게 이동했고, 트렌트강을 따라 링컨셔주 게인즈버러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작 우흐트레드 더 볼드와 모든 노섬브리아는 그에게 재빨리 굴복했고, 린지 왕국의 모든 사람들도 굴복했으며, 이후 데인로의 5개 자치구의 사람들이 굴복했다.[16] 그는 각 셔에서 인질을 받았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군대에 식량과 말을 공급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침략군의 주력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일부 침략군과 인질들은 그의 아들 크누트와 함께했다. 그는 와틀링가를 건너 옥스퍼드로 갔고, 그곳의 주민들은 곧 그에게 굴복하여 인질을 내주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윈체스터로 갔고, 주민들은 같은 방식으로 했으며, 동쪽으로 런던으로 향했다.[16]
그러나 런던 사람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애설레드 왕과 애설레드에게 망명한 바이킹 지도자 토르켈 데 더 톨이 런던에서 직접 그에 맞서 방어했기 때문이다. 스베인은 그 후 서쪽으로 서머싯주 바스로 갔고, 서부 영주들이 그에게 굴복하여 인질을 내주었다. 런던 사람들은 더 이상 저항할 경우 스베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그 뒤를 따랐다. 애설레드 왕은 아들 참회왕 에드워드와 알프레드 애설링을 노르망디로 보냈고, 자신은 와이트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그들을 따라 망명했다.[16]
링컨셔주 게인즈버러에 본거지를 둔 스베인은 거대한 새 왕국을 조직하기 시작했지만, 1014년 2월 3일에 그곳에서 사망하여 잉글랜드를 단 5주 동안 통치했다.[17]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그가 지은 교회에 묻히기 위해 덴마크로 돌려보내졌다.[20] 전통적으로 이 교회는 로스킬레에 위치해 있지만,[20] 실제로는 스칸디나비아의 룬드(현재 스웨덴의 일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21]
2. 5. 급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스베인의 장남 하랄 2세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크누트는 데인로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 잉글랜드 왕으로 선포되었다.[29][30] 그러나 잉글랜드 귀족들은 에설레드 2세를 불렀고, 에설레드는 1014년 초 노르망디 망명에서 돌아와 크누트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냈다. 크누트는 곧 돌아와 1016년 에설레드와 그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죽은 후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는 1019년 형제로부터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고, 결국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 포메라니아, 슐레스비히까지 통치했다.크누트와 그의 아들들인 해럴드 하레풋과 하르다크누트는 잉글랜드를 26년 동안 공동으로 통치했다(1016-1042). 하르다크누트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에설레드의 차남 참회왕 에드워드 (1042-1066년 재위) 아래의 웨섹스 왕가로 돌아갔다.
스베인의 딸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는 덴마크의 스베인 2세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덴마크에서 계속 통치하고 있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벤드 왕 볼레스와프 1세의 딸 군힐이었다.[23] 그녀의 사후[24], 스웨덴 왕 올로프 1세의 어머니이자 의 딸 시그리드(Sigrid Storråda, Sigrid Storråda)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25]。
또한, 『』에 따르면, 군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크누트 1세 (크누트 2세)였다. 또한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의 딸 귈라[26](Gyda Sveinsdatter, no)는 노르웨이의 에이리크 호콘손의 부인이 되었다[27]。또, 여동생 [26](타이라, 튜리라고도 함)는 볼레스와프 왕의 부인이 된 후, 이교도였던 왕을 싫어하여 도망쳐서 올라프 1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28]。그 외에 딸 에스트리드가 있었는데, 데인의 백작 울프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 나중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이 되어 에스트리센 왕가를 열었다.
3. 종교 정책
스베인은 브레멘 대주교령보다 잉글랜드에서 사제와 주교를 데려온 것으로 보인다.[12] 이는 스베인이 독일에 개인적인 연고가 거의 없는 반면, 데인로에는 덴마크 출신 기독교 사제가 많았던 사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12] 스베인이 잉글랜드 교회를 선호한 데에는 정치적인 동기도 있었을 수 있는데, 독일 주교들이 국가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12] 스베인이 독일 지도자들에 의한 독립성 약화를 사전에 막으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12] 이는 아담 폰 브레멘이 스베인에 대해 쓴 기록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일 수 있는데, 스베인은 자신의 왕국에서 잉글랜드 교회의 영향력을 강조함으로써 브레멘 대주교를 사실상 무시했다.[12]
4. 가족 관계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의 ''연대기''와 ''엠마 여왕의 찬가''는 크누트의 어머니가 미에슈코 1세의 딸인 시비에토스와바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 노르드 자료, 특히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는 폴란드 공주를 크누트의 어머니로 언급하며, 그녀를 군힐드라고 부르고 빈델란트의 왕인 부리슬라프의 딸이라고 한다.[1] 브레멘의 아담은 ''함마부르크 교회 주교들의 행적''에서 크누트의 어머니(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를 스웨덴의 전 여왕이자 승리왕 에릭의 아내, 그리고 이 결혼을 통해 올로프 셰트코눙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유일하다.[1] ''엠마 여왕의 찬가''에 따르면 크누트의 형제 하랄 2세는 두 형제 중 더 어렸다.[1]
스벤은 거만한 시그리드와 빈덴의 군힐드 사이에서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1]
- 하랄 2세 (989년경 - 1018년) - 덴마크 국왕 (1014년 - 1018년)[1]
- 크누트 2세 (995년 - 1035년) - 잉글랜드 국왕 (1016년 - 1035년), 덴마크 국왕 (1018년 - 1035년), 노르웨이 국왕 (1028/30년 - 1035년)[1]
- 에스트리드 (990/7년 - 1057/73년) - 데인 백작 울프와 결혼, 아들 스벤 2세는 에스트리드센 왕조를 열었다.[1]
- 기타[1]
- 군힐드[1]
- 산츠라우에[1]
- 티라[1]
- 규자(980년경 - ?) - 에이리크 호콘손과 결혼[1]
5. 평가
참조
[1]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Vintage
1989
[2]
서적
The Viking King's Golden Treasure. About the Curmsun Disc, the discovery of a lost manuscript, Harald Bluetooth´s grave and the location of the fortress of Jomsborg
https://books.google[...]
Rivengate AB
2021-07-17
[3]
문서
"Svæinn Harallz sunr'; Latinized forms of the name Sveinn are Suanus, Suenus, or Sveinus (Haraldi filius). The nickname tjúguskegg is a compound of tjúga fork and skegg beard. Sweyn is so named in [[Fagrskinna]] chapters 27 and 41 (ed. [[Finnur Jónsson]] 1902–08, pp. 161, 206), in both cases in references to [[Estrid Svendsdatter|Astriðr dottor Svæins tiuguskægs]]."
[4]
웹사이트
The Anglo-Saxon Chronicle
http://asc.jebbo.co.[...]
2011-08-18
[5]
서적
Swein Forkbeard's Invasions and the Danish Conquest of England, 991–1017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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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5
[6]
문서
Adam of Bremen Gesta II.3
[7]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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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8]
간행물
"Religions Old and New"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9]
간행물
"The Danish Empire and the End of the Viking Age"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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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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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07-22
[11]
문서
This is according to Heimskringla and Fagrskinna, see Lee M. Hollander (trans.) (1991) Heimskringla, p. 244 and Finlay Finlay, Alison (editor and translator) (2004) Fagrskinna, p. 130.
[12]
간행물
"The armies of Swein Forkbeard and Cnut: leding or li(th)"
1986
[13]
문서
Mike Ashley, British Monarchs; A complete genealogy, gazetteer and biographical Encyclopaedia of the Kings and Queens of Britain, Robinson Publishing (1998) p. 483: "Probably his [Æthelred's] worst decision was the St. Brice's day massacre on 13 November 1002...he ordered the killing of every Dane who lived in England, except the Anglo-Danes in the Danelaw. The massacre brought back to English shores the Danish commander Swein, whose sister and brother-in-law had been killed in the massac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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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Quasi in domo propria sub securitate sanaretur: a peace agreement between King Swein Forkbeard and Duke Richard II of Normandy
https://onlinelibrar[...]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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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n Introduction to Anglo-Saxon Englan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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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Anglo-Saxon Chronicle
http://mcllibrary.or[...]
200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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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wein Forkbeard's Invasions and the Danish Conquest of England, 991–1017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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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weyn Forkbeard: England's forgotten Viking king
https://www.bbc.com/[...]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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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eath of Svein Forkbeard
https://www.historyt[...]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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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Swein Forkbeard
Blackwell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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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weyn Forkbeard
http://www.medievalh[...]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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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Vintage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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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実ではポーランド公[[ミェシュコ1世]]と考えられている"
Vintage Book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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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あるいは1000年以前にグンヒルを離縁したとも考えられている"
Vintage Books
2008
[25]
서적
"『ヘイムスクリングラ(二)』64-65頁(「第三十四章 ハラルド・ゴルムスソンの死」)"
[26]
서적
"『ヘイムスクリングラ(二)』で確認できる表記"
[27]
서적
"『ヘイムスクリングラ(二)』142頁(「第九十章 エイリークの東方への遠征」)"
[28]
서적
"『ヘイムスクリングラ(二)』143-145頁(「第九十二章 ブーリズラヴ王の結婚」)"
[29]
서적
"『北欧史』30頁"
[30]
서적
"『北欧史』4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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