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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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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제1공화국은 1873년 2월 11일 국왕 아메데오 1세의 퇴위 이후 선포된 스페인의 공화국이다. 자유주의, 전통주의, 연방 공화주의 사상의 대립과 1868년 혁명, 아마데오 1세의 재위 기간을 거쳐 수립되었다. 초기에는 피게라스, 마르갈 등의 정부가 들어섰으나, 칸토날 반란, 카를로스 전쟁, 내부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살메론 정부는 칸톤 반란 진압을 위해 노력했으나 사임했고, 카스텔라르 정부는 의회를 일시 중단하고 군대 개편을 시도했으나, 1874년 1월 파비아 장군의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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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1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스페인 제1공화국 국기
국기
스페인 제1공화국 국장
국장
표어Plus Ultra (라틴어) "더 멀리"
스페인과 그 식민지 (1873년)
스페인과 그 식민지 (1873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스페인어)
통칭스페인
정치 체제연방 준 대통령제 공화국
수도마드리드
공용어스페인어
종교가톨릭교
통화스페인 페세타
국가리에고 찬가
역사
시작 사건아마데오 1세의 퇴위
시작 날짜1873년 2월 11일
종료 사건왕정 복원
종료 날짜1874년 12월 29일
주요 사건칸톤 혁명 (1873년 7월 12일)
정치
대통령에스타니스라오 피게라스 (1873년)
프란세스크 피 이 마르갈 (1873년)
니콜라스 살메론 (1873년)
에밀리오 카스텔라르 (1873–1874년)
프란시스코 세라노 (1874년)
총리후안 데 사발라 (1874년)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 (1874년)
입법부하원
기타
국가 코드스페인
데몬ym스페인 사람, 스페인

2. 공화국 선포 이전의 배경

19세기 후반 스페인이사벨 2세 여왕 통치 말기의 극심한 혼란 끝에 1868년 '영광의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새로운 국왕을 물색한 끝에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가의 아마데오 1세가 1871년 즉위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7]

아마데오 1세는 쿠바에서 계속되는 독립 전쟁(10년 전쟁)과 본토에서 격화되는 제3차 카를로스 전쟁, 부르봉 왕정 복고를 노리는 알폰소주의자들의 반발, 끊임없는 공화주의 봉기 등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게다가 국왕을 지지해야 할 급진 민주당과 입헌당마저 내부 분열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다.

결국 스페인 통치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낀 아마데오 1세는 즉위 2년여 만인 1873년 2월 10일,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퇴위는 스페인 정치에 권력 공백을 가져왔고, 이는 다음 날 스페인 제1공화국 선포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사상적 배경

19세기 스페인에서는 국가 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두고 세 가지 주요 사상이 서로 대립했다. 이는 자유주의, 전통주의, 그리고 연방 공화주의이다.[2] 183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는 입헌 군주제를 바탕으로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중앙 집권 체제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우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자유주의와는 다른 연방 공화제 모델이 점차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군주가 없는 민주 공화제(남성 보통 선거제를 기본으로 함)를 추구했으며,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중립적인 국가를 지향하고 다양한 형태의 연방제를 주장했다.[2] 연방 공화제는 주로 서민층과 일부 중산층의 요구를 반영했으며, 단순히 정치 형태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의 개혁까지 목표로 삼았다.[3] 이들은 미국의 건국 정신을 본보기로 삼아 개인의 존엄성에 기초한 연방주의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과 이론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있어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4]

2. 2. 1868년 혁명과 임시 정부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사벨 2세 여왕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확산되었다. 1864년 마드리드 중앙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탄압 사건이 있었고, 1866년에는 오도넬 장군의 자유 연합 정권 하의 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반란이 마드리드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은 진보당과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나 실패로 끝나면서 관련 포병 66명이 총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경제 상황도 악화되어, 이전부터 지속되던 산업 위기가 1866년 금융 위기로 번졌고, 이는 철도 회사들과 바르셀로나의 은행 두 곳의 위기로 이어지며 대중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설상가상으로 1867년과 1868년에는 연이은 농작물 흉작으로 인해 일부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 요소들이 쌓이면서 왕정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1868년 9월 말, 여러 장군들이 주도한 군사 봉기가 성공하면서 이사벨 2세 여왕은 국외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을 '1868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 이후 10월 초,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을 중심으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정부는 자유 연합, 진보당, 민주당의 3당 연립으로 구성되었다.

임시 정부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모색했고, 1869년 6월에는 제헌 의회(코르테스)에서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 새 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으나, 적합한 국왕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왕가를 물색한 끝에, 1870년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가의 아마데오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안이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아마데오 1세는 1871년 1월 마드리드에서 즉위했다. 1868년 혁명부터 아마데오 1세의 재위 기간과 이후의 공화제 시대를 포함하는 1868년부터 1874년까지의 기간을 통틀어 '민주주의 6년'이라고 칭한다.

2. 3. 민주 연방 공화당 창당

1868년 혁명으로 이사벨 2세 여왕이 국외로 망명하고 프란시스코 세라노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등 스페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등장했는데, 1869년에는 1849년에 창설된 민주당을 기반으로 하여 민주 연방 공화당(Partido Republicano Democrático Federales)이 창당되었다.[2][3]

1869년 가을, 임시 정부 하에서 군주제를 국가의 기본 통치 형태로 삼는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 이에 반발한 연방 공화파 소속 의원 대부분은 이 법안이 통과되자 의회를 떠났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제1회 연방당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당내 주요 인물들 간의 노선 차이가 드러났다.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은 각 지방의 자발적인 합의를 통해 아래로부터 위로 연방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니콜라스 살메론과 에밀리오 카스텔라르는 중앙 정부가 주도하여 위로부터 아래로 연방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방법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방당은 당시 일부에서 나타나던 급진적인 봉기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통해 목표를 추구하기로 합의했다.

2. 4. 온건파와 급진파의 분열

1870년 민주 연방 공화당 제1회 당 대회에서는 연방 공화국 건설 방식을 두고 이견이 드러났다.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권한을 쌓아 올리는 "아래에서 위로" 방식을 주장한 반면, 니콜라스 살메론과 에밀리오 카스텔라르 등은 중앙 정부 주도의 "위에서 아래로" 방식을 선호했다. 이 회의에서는 또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공화국을 건설하기로 합의하며, 반란과 같은 비합법적 수단에 선을 그었다.[3]

그러나 1872년 제3회 당 대회에서는 합법 노선을 고수하려는 온건파와 혁명적 수단도 불사해야 한다는 급진파(과격파) 사이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합법주의를 대표했던 피 이 마르갈은 "급진적인 길은 개인의 자유를 방해한다"고 주장하며 혁명 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노선 차이로 인해 급진파는 결국 1872년 6월, 피 이 마르갈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1872년 가을, 급진파는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카탈루냐, 발렌시아, 아라곤 등지에서 연방 공화파 반란을 주도하며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는 공화국 초기, 새로운 국가 건설 방향을 둘러싼 내부 진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공화국의 선포

아메데오 1세 국왕이 1873년 2월 11일 왕위에서 물러나자, 코르테스 헤네랄레스는 다음 날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시도였으나, 불과 11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스페인은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과 폭력을 겪었다.

공화국은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프란세스크 피 이 마르갈, 니콜라스 살메론, 에밀리오 카스텔라르 등 네 명의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했지만, 정국 혼란은 계속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제3차 카를로스 전쟁, 칸토날 혁명, 쿠바에서의 10년 전쟁 등 세 개의 내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연방 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과 중앙 집권적인 단일 공화국을 선호하는 세력 간의 분열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또한, 진정한 공화주의자의 부족, 민중의 지지 기반 약화, 군대의 전복 시도, 연이은 지방 칸톤 봉기, 바르셀로나의 불안정, 국제 노동자 협회의 혁명 요구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면서 정권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결국 1874년 1월 3일, 마누엘 파비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연방 정부를 무너뜨리고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이 이끄는 통일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제1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3. 1. 공화국 선포 과정

아메데오 1세 국왕은 1873년 2월 11일 스페인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결정은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이 직면해야 했던 어려움들, 즉 10년 전쟁, 제3차 카를로스 전쟁의 발발,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 복고를 지지하는 알폰소파 군주주의자들의 반대, 수많은 공화주의 반란, 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 내부의 분열 때문이었다.

2월 10일, 국왕 퇴위 소식이 당시 주요 일간지를 통해 알려지자,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자들은 즉시 거리로 나와 공화국 선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급진당 소속의 루이스 소리야 총리는 정부 회의를 소집했으나, 총리와 진보파 각료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진보파 각료들은 임시 정부를 구성한 뒤 추후 국민 투표를 통해 정부 형태를 결정하자는 입장이었고, 세라노 장군의 입헌당 역시 즉각적인 공화국 선포는 없을 것이라 예상하며 이 입장을 지지했다. 반면, 크리스티노 마르토스 국무장관이 이끄는 민주당 출신 각료들은 니콜라스 마리아 리베로 하원 의장의 지지를 받으며, 양원에서 연방 공화파와 민주당 출신 급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즉시 상하 양원 합동 회의를 열어 공화국 선포로 이어질 정부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루이스 소리야 총리는 하원에 출석하여, 의회 다수를 점한 자당 의원들에게 질서 회복을 위한 최소 24시간의 회기 정지를 요청하고, 국왕 아메데오 1세의 공식적인 퇴위 표명서가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소리야 총리의 시간 벌기 시도는 자신의 내각 각료인 크리스티노 마르토스 국무장관에 의해 저지되었다. 마르토스는 국왕의 공식적인 퇴위 표명서가 도착하는 즉시 모든 권력은 의회에 귀속될 것이며, "여기에는 왕조도 군주제도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연방 공화국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의회에서 주장했다. 연방 민주 공화당 소속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가 제출한 상하 양원의 상설 개최 선언 동의안이 소리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결되었다[8]. 그 사이 공화국 선포를 요구하는 군중이 하원 의사당을 에워쌌으나, 국민 민병대에 의해 간신히 해산되었다[9]. 의회는 오후 9시에 폐회되었고, 세라노 장군은 쿠데타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지지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10].

다음 날인 2월 11일, 공화당 지구당장들은 오후 3시까지 공화국이 선포되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의회를 압박했으며, 바르셀로나의 공화파들도 같은 내용의 전보를 마드리드로 보냈다[11]. 오후 3시, 하원 의회가 재개되었고, 아메데오 1세의 왕위 퇴위서가 낭독되었다. 마르토스 장관은 정부가 권한을 의회에 반환하며, 의회는 국민 공회로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승계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공화파와 급진파 의원들이 공화제를 정부 형태로 승인하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행정부 선출을 제안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12].

토론 과정에서 연방 민주 공화당의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사상의 일부를 희생해야 하며, 공화국의 정의는 미래의 과도기 의회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며 당장의 형태보다는 미래의 논의를 강조했다. 반면, 소리야 총리는 "입헌 군주주의자로서 의회에 참여했으나, 하룻밤 사이에 국가를 군주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다고 믿는 의원들에게 항의하며, 혼자 남더라도 항의할 것"이라며 공화국 선언에 반대했다. 이후 공화파의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연단에 올라 열렬한 박수 속에 공화국 선포를 "역사상의 당연한 수순"으로 묘사하는 연설을 했다. 오후 9시, 양원 합동 표결에서 찬성 258표, 반대 32표로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당시 의회는 군주주의자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결과는 많은 스페인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주주의자들에게는 이사벨 2세의 복위나 아직 어린 알폰소 12세의 즉위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공화국 제도는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불가피하게 다가올 실패를 고려할 때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선택지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회기에서 연방 공화주의자인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가 초대 "행정 권력 대통령"(Presidente del Poder Ejecutivo|프레시덴테 델 포데르 에헤쿠티보es)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발렌시아, 말라가, 세비야 등 공화주의자나 급진파가 장악한 도시들에서는 공화국 선포를 둘러싼 시위가 폭력적으로 번지며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3. 2. 피게라스 정부 (1873년 2월 12일 ~ 6월 11일)

1873년 2월 12일 새벽 3시, 코르테스는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스페인 역사상 첫 공화정을 시작했다. 피게라스 정부는 연방 공화주의자와 급진파의 연립으로 구성되었다. 내각에는 연방 공화주의자 3명(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 니콜라스 살메론,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과 급진파 5명이 참여했는데, 이 중 4명은 아마데오 1세 국왕 시절 장관을 지낸 인물들이었다. 연방 공화주의는 각 지방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제를 지향했지만, 급진파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는 단일 공화국을 선호하여 양측의 갈등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급진파 크리스티노 마르토스는 국민 공회(새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출범과 동시에 공화국 정부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재정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에 달하는 재정 적자와 당장 갚아야 할 의 부채가 있었으나, 수중에는 밖에 없었다. 군사적으로도 제3차 카를로스 전쟁과 쿠바 독립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포병대가 해산되었고, 병력과 무기, 자금 모두 부족했다. 사회적으로는 1873년 공황과 맞물린 심각한 경제 위기로 실업률이 급증했으며, 이에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은 파업, 시위, 토지 점거 등으로 대응하며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특히 연방 공화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에서는 공화국 선포를 새로운 혁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혁명 위원회'가 결성되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특히 안달루시아에서는 공화제를 '토지 재분배'로 오해하여 부유층 저택 습격, 공문서 소각, 사적 보복 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피게라스 정부가 구 왕당파와 연립했다는 이유로 정부를 불신하는 연방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기도 했다.[14]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신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질서 회복이었다. 통치 대신을 맡은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연방주의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법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혁명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강제로 폐쇄되었던 시의회를 복구하려 했으나, 급진파 각료들은 치안 불안을 이유로 선거 실시에 반대했다.[15] 또한, 2월 14일에는 "질서, 자유, 정의, 이것이 공화국의 모토이다"라는 칙령을 발표하고, 지방 민정관을 왕당파에서 공화파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3. 2. 1. 제2차 피게라스 정부

2월 23일, 새로 선출된 국민 의회 의장인 급진파 크리스티노 마르토스는 단일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는 시민 근위대를 동원해 정부 부처를 점령하고, 국민 민병대로 의회를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쿠데타 시도는 정부의 첫 개편으로 이어져, 기존의 진보주의자 각료들이 물러나고 연방주의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공화국 수립 12일 만에 의무 병역 제도가 폐지되고, 하루 1ESP와 약간의 식량을 지급하는 자원병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가입 시 50ESP, 하루 2ESP와 식량을 지급하는 '공화국 자원 봉사대'가 창설되었다.

피게라스 정부는 3월 9일, 카탈루냐 지역에서 스페인 연방 공화국 내 카탈루냐 자치국(Estatal Català)을 선포하려는 움직임에 직면했다. 이 문제는 중앙 정부와 카탈루냐 지도자들 간의 전신을 통한 소통으로 해결되었다.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는 두 차례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있었다. 먼저 알폰소 지지 군주주의자들이 군대 내 동조 세력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 분열로 실패했다. 같은 날, 전 국민 의회 의장 크리스티노 마르토스는 마드리드 시민 총독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번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는 민병대 대대를 프라도 대로에 배치하고, 약 4천 명의 무장 자원 봉사자를 알칼라 문 근처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핵심 인물로 여겨지던 프란세스크 피 이 마르갈은 이 음모를 미리 파악하고 시민 근위대를 동원하여 대응했다. 전쟁 장관 역시 신임 마드리드 사령관 발타사르 이달고에게 휘하 부대를 동원하여 반란 세력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쿠데타는 시작과 동시에 무산되었고, 정부는 쿠데타에 가담한 군 부대와 의회 상임위원회를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프란세스크 피 이 마르갈이 주도하는 정부는 기존 국민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 의회를 5월 1일에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제헌 의회 선거는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카를로스주의자들은 여전히 공화국과 전쟁 중이었고,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가 이끄는 알폰소 지지 군주주의자들, 단일 공화주의자들, 그리고 제1 인터내셔널과 연계된 초기 노동 운동 세력까지 주요 정치 세력 대부분이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은 선거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어, 총 371석 중 343석을 연방 공화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압도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는 낮은 대표성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투표율은 스페인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카탈루냐에서는 약 28%, 마드리드에서는 25%에 불과했다.

3. 3. 연방 공화국 선언과 피게라스 정부의 종말

1873년 2월 12일 새벽 3시, 의회가 다시 열려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출신의 변호사인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Estanislao Figueras)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제1공화국의 첫 정부는 연방 공화주의파와 급진파의 합의로 구성되었다. 내각에는 연방 공화주의자 3명과 급진파 5명이 참여했는데, 이 중 4명은 아마데오 1세 국왕 시절의 각료였다. 연방 공화주의자 각료 3명은 이후 대통령직을 맡게 되는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통치 대신), 니콜라스 살메론(사법 대신),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국무 대신)였다. 연방 공화주의는 지방 주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주의를 지향했고, 급진파는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선호했다. 한편, 크리스티노 마르토스는 국민 공회(새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모델을 따라 의장에게 국가 최고 권력을 부여하려는 의도였다.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정부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했다. 재정 적자는 에 달했고, 즉시 갚아야 할 부채도 였으나, 수중에는 밖에 없었다. 제3차 카를로스 전쟁과 쿠바 독립 운동 진압 과정에서 포병대가 해산되었고, 병력, 군비, 자금 모두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1873년의 세계적인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이 겹치면서 스페인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로 인해 실업률이 급증했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따른 파업과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민주 연방 공화당의 지지 기반은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에 집중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지역들에서 가장 격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지방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국 선포를 새로운 혁명의 시작으로 받아들여, 각지에서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특히 안달루시아에서는 공화제가 곧 "토지 재분배"를 의미한다는 인식이 퍼져, 일부 지역에서는 부유층 저택 습격, 관공서 방화, 토지 문서 소각, 개인적인 복수 등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주로 연방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들 중 일부는 구 왕당파와 연립한 피게라스 정권과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자들을 미온적이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았다[14]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사회 질서 회복이었다.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 통치성 장관은 여러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는 본래 "아래로부터 위로"의 연방주의 건설 과정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자신의 지지자들의 의향에 반하더라도 합법성을 존중하겠다는 결의를 명확히 보여주며" 혁명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강제로 중단되었던 시의회를 복구시키는 데 성공했다. 갈등 해결을 위해 피 이 마르갈 장관은 첫 각료 회의에서 시의원 및 주·지방 의원 선거 실시를 제안했으나, 급진파 각료들은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서 선거 운동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내란 분자"들의 "열광적인 활동"을 부추길 수 있다고 반대했다[15]

또한, 2월 14일에는 "질서, 자유, 정의, 이것이 공화국의 모토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지방 민정관들을 기존의 왕당파에서 공화파 인사들로 교체했다. 교체된 민정관 대부분은 급진파였다. 그러나 민정관의 영향력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 인선 문제는 이후 정부 내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피 이 마르갈 장관은 아마데오 1세 시대에 창설된 왕당파 성향의 "자유 지원병"을 "공화국 지원병"(Voluntarios de la Repúblicaes)으로 개편하여 통치성 소속으로 두었다. 한편, 계속되는 전쟁과 정부의 재정난 속에서 2월 18일에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현금 지급을 조건으로 하는 지원병 제도를 도입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6월까지 목표 인원 4만 8천 명 중 1만 명밖에 모집하지 못해 이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3. 4. 피게라스의 망명

임시 대통령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는 새 의회가 열리자 의회에 권한을 반환하고,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을 새로운 임시 대통령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공화국 내 강경파의 반대로 피 이 마르갈의 정부 수립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후 내각 구성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졌지만, 선출 방식 등을 놓고 지지부진한 논쟁만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지친 피게라스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모두에게 질렸어!"라고 카탈루냐어로 외치며 좌절감을 드러냈다.

이 무렵 피게라스는 강경파인 후안 콘트레라스 장군이 소위 "아래에서 위로" 방식으로 연방 공화제를 시작하려는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피 이 마르갈조차 자신의 정권에 참여하려 하지 않자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전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부인을 잃었던 피게라스는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의회 운영에 깊은 실망과 우울감을 느꼈다. 결국 1873년 6월 10일, 그는 파리로 망명을 결심하고 떠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레티로 공원을 산책한 뒤 아토차 역에서 파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20]

4. 마르갈 정부 (1873년 6월 11일 ~ 7월 18일)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망명 이후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이 1873년 6월 11일 새로운 행정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마르갈 정부는 새로운 연방 공화국 헌법 제정과 각종 사회 개혁 입법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출범 직후부터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의 주요 과제는 연방제에 기반한 국가 구조를 확립하고, 정교분리, 노예제 폐지, 노동 환경 개선 등 진보적인 개혁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헌법 초안 위원회가 구성되어 논의를 시작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각 지방이 독자적인 자치 정부(칸톤)를 선포하는 칸토날 반란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북부에서는 제3차 카를로스파 전쟁이 격화되면서 공화국 정부의 통치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연방주의자였던 피 이 마르갈은 칸톤 반란에 대해 군사적 진압을 망설였고, 이는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취임 37일 만인 7월 18일 사임하였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은 제1공화국이 직면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내부 분열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4. 1. 마르갈의 선출

피 이 마르갈이 행정 수반으로 선출되기 이전, 공화국 초기에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특히 1873년 4월에는 급진파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12]

4월 22일 밤, 급진파였던 마드리드 시장 후안 파블로 마리나는 군주주의 성향의 국민 민병을 동원하여 무장 집결시켰다. 이는 급진파 군 장성들의 승인 아래 진행된 행동이었다.[12] 23일 새벽, 국회 상설 위원회가 회의 중이던 대의원회 건물은 공화국 측 지지자들에게 점거되었고, 위원회 위원들은 강제로 퇴거당했다. 당시 통치 장관이었던 피 이 마르갈은 공화국 지원병을 마드리드 주요 거점에 배치하고 투우장으로 보냈다. 그의 지휘 아래 공화국 지원병들이 투우장으로 향하자, 쿠데타를 시도했던 국민 민병대는 약간의 총격전 끝에 쉽게 물러났다.[12]

다음 날인 4월 24일, 피 이 마르갈은 독단적으로 국회 상설 위원회를 해산했다. 이는 법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은 조치였으나[12], 결과적으로 급진파의 쿠데타 시도를 완전히 진압하고 공화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쿠데타에 연루되었거나 급진파로 분류된 인사들은 마드리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살해 위협을 받거나 집을 습격당하는 등 탄압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또한,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급진화 경향에 불안을 느낀 일부 부유층은 프랑스 등 해외로 이주하기도 했다.[12] 5월 6일, 해산된 상설 위원회의 급진파 및 보수파 위원들은 피 이 마르갈의 조치가 "폭력적이고 위헌적인 결의"였다는 내용의 항의문을 발표했다.[12]

이처럼 급진파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반작용으로 공화파 내 강경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피 이 마르갈은 점차 공화국 정부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12]

4. 2. 마르갈의 행정

피게라스가 프랑스로 망명한 후 발생한 권력 공백 상황에서, 마누엘 소다스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으나 시민 경비대 대령 호세 데 라 이글레시아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그는 의회에 나타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아무도 떠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피게라스의 동료 연방주의자이자 정부 장관이었던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이 6월 11일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회 연설에서 자신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새 정부는 주로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과 사회 개혁적 성격의 법안 마련에 집중했다. 주요 추진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 해산된 토지를 소작농, 정착민, ''아파세로''(aparceros, 이윤 분배 조건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
  • 의무 징병제에 기반한 정규군 재건.
  • 페르난도 7세 시기 강화되었고 이사벨 2세 시기에도 불완전하게 분리되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 스페인 전역의 노예제 폐지. (이미 1812년 카디스 헌법에서 일부 조치가 있었으나 식민지의 반발이 있었다.)
  • 아동 노동 제한 계획 수립.
  • 자유롭고 의무적인 교육 시스템 구축.
  • 노동 조합 권리 합법화, 노사 공동 배심원 제도 도입, 8시간 노동제 확립.


6월 16일, 의회는 연방 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25명의 위원회를 구성했다. 주로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주도한 이 초안에 대한 토론은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6월 28일, 피 이 마르갈은 내각을 개편했지만, 헌법 토론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러 사건들이 빠르게 정부를 압박했다. 6월 30일 세비야 시의회는 도시를 사회 공화국으로 선포했고, 다음 날 많은 연방주의 의원들이 항의하며 의회를 떠났다. 약 일주일 후인 7월 9일, 알코이에서는 제1 인터내셔널 지역 지도자들이 주도한 파업 중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노동자들이 무장하여 도시를 장악했다.[1] 이 사건은 석유 혁명으로 알려졌다.

칸토날 혁명이 스페인 남부와 중부로 확산되었지만, 전통주의 친 칼리스트 북부 지역인 카탈루냐, 아라곤, 바스크 지방은 제3차 칼리스트 전쟁에 연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칸토날 반란이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연방주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인 칸톤(cantón, 자치 구역)을 선포했다. 특히 발렌시아, 무르시아, 안달루시아 등 남동부 지역에서 봉기가 잇따랐다. 카르타헤나, 세비야, 카디스, 그라나다 등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칸톤이 형성되었고, 카무냐스나 후미야 같은 작은 마을 단위 칸톤도 등장했다. 일부 지방 공화주의자들은 공화국 선포를 새로운 혁명으로 받아들여 각지에서 '혁명 위원회'를 결성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특히 안달루시아에서는 공화제를 토지 재분배로 인식하여 부유층 저택 습격, 공문서 소각 등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피게라스 정권 당시 구 왕당파와의 연립 때문에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자"를 미온적으로 보는 시각과도 연관이 있었다.[14]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피 이 마르갈 행정부는 질서 회복에도 힘썼다. 그는 "질서, 자유, 정의, 이것이 공화국의 모토이다."라는 칙령을 발표하고[15], 각지의 '혁명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강제로 정지되었던 시의회를 복구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스스로의 지지자의 의향에 반하더라도 합법성을 존중한다는 결의를 명확히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15] 또한 지방 민정관을 왕당파에서 공화파(주로 급진파)로 교체했는데, 이는 민정관의 영향력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추후 정부 내 갈등 요인이 되었다.[15] 아마데오 1세 시절의 '자유 지원병'(왕당파)을 '공화국 지원병'으로 재편하여 통치성 산하에 두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제3차 칼리스트 전쟁과 쿠바 독립 운동 진압, 그리고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 2월 18일 징병제를 폐지하고 도입한 지원병 제도(현금 지급 조건)는 모병 목표(4만 8천 명)에 크게 미달(6월 기준 1만 명)하며 실패했다.

피 이 마르갈은 본래 연방 구성 단위를 먼저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 정부를 구성하는 "아래에서 위로" 방식의 연방주의를 지지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국가 구조 위에서 연방제를 도입하는 "위에서 아래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것이 권력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혼란을 줄이는 더 안전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급진적인 연방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칸토날 반란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황과 새 헌법 제정 지연 속에서 피 이 마르갈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칸토날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군부와 정치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방주의 신념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취임 37일 만인 7월 18일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훗날 총리 재임 시절을 "권력에 대한 나의 많은 좌절은 내가 더 이상 그것을 탐내지 못하게 했다. 정부에 있는 동안 나는 침착함, 환상, 동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는데, 그것이 내 성격의 기초였다. 감사하는 사람 한 명당, 백 명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고, 사심 없고 애국적인 한 사람당, 정치에서 자신의 변덕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수백 명이 있었다. 나는 좋은 일에 대해 나쁜 것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4. 3. 강경파의 움직임

피 이 마르갈 정부 수립 이후, 새로운 연방 공화국 헌법 제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6월 16일, 코르테스는 헌법 초안 연구를 위한 25명의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초안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그러나 헌법 제정 논의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 사이 스페인 각지에서는 연방주의자들 내부의 급진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공화국 선포를 토지 재분배와 같은 사회 혁명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부유층 습격, 공문서 파기 등 과격한 행동이 발생하기도 했다.[14] 이러한 움직임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은 피게라스 정권이나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자"들이 구 왕당파와 타협하여 미온적이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14]

피 이 마르갈 정부는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연방주의 원칙("아래로부터 위로의 연방 구성")과 현실적인 통치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스스로의 지지자의 의향에 반하더라도 합법성을 존중한다는 결의를 명확히 보여주며"[15] 혁명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강제로 정지되었던 시의회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15] 또한 아마데오 1세 시대에 창설된 "자유 지원병"을 "공화국 지원병"(Voluntarios de la Repúblicaes)으로 재편성하고 통치성 소속으로 두었다. 하지만 급진파 각료들은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서 선거 실시는 오히려 "내란 분자"의 활동을 조장할 수 있다며 반대하기도 했다.[15]

6월 28일, 피 이 마르갈은 정부 구성을 갱신하며 상황 타개를 시도했지만[1], 불과 이틀 뒤인 6월 30일, 세비야 시의회가 도시를 사회 공화국으로 선언하는 동의안을 통과시키는 등[1] 지방의 분리주의적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이는 곧이어 스페인 전역을 휩쓴 칸토날 반란의 서막이 되었다. 일부 연방주의 의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항의하며 코르테스를 떠나기도 했다.[1] 이러한 급진적인 움직임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공화국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4. 공화국 헌법 초안 위원회

피 이 마르갈이 이끄는 새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새로운 공화국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1]

이를 위해 1873년 6월 16일, 코르테스는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여 스페인 연방 공화국 헌법 초안 연구 및 작성을 시작했다. 헌법 초안은 주로 에밀리오 카스텔라르의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다음 날부터 관련 토론이 시작되었다.[1]

하지만 코르테스 내에서의 헌법 제정 논의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6월 28일 피 이 마르갈이 내각을 개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한 헌법 논의 속에서 칸토날 반란과 같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정부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1] 결국 새로운 헌법이 코르테스를 통과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피 이 마르갈은 취임 37일 만인 7월 18일에 사임해야 했다.[1]

위원회에서 마련한 연방 헌법 초안은 총 17개의 제목 아래 117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1]

  • 제1조: 스페인 연방을 구성하는 17개 주(안달루시아 알타, 안달루시아 바하, 아라곤, 아스투리아스, 발레아레스, 카나리아스, 카스티야 라 누에바, 카스티야 라 비에하, 카탈루냐, 쿠바, 에스트레마두라, 갈리시아, 무르시아, 나바라, 푸에르토리코, 발렌시아, 바스크 지역)를 명시했다. 각 주는 기존의 지방 구획을 유지하되 필요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1]
  • 자율권: 각 주는 "국가의 존립과 양립할 수 있는 완전한 경제적-행정적 자치와 정치적 자치"를 가지며,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제92조, 제93조).[1]
  • 권력 구조: 고전적인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삼권 분립 외에, 공화국 대통령이 행사하는 제4의 '관계 권력'(Relational Power)을 규정했다.[1]
  • '''입법권''': 양원제인 연방 코르테스가 행사하며, 하원은 인구 비례(5만 명당 1명)로, 상원은 각 주에서 4명씩 선출하는 지역 대표로 구성된다.[1]
  • '''행정권''': 공화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의장을 중심으로 한 자문 장관 회의가 행사한다.[1]
  • '''사법권''': 연방 최고 법원이 중심이 되며, 행정부나 입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고 전문 직업 법관 제도를 확립했다.[1]
  • '''관계 권력''': 연방 공화국 대통령이 행사하며, 임기는 4년 단임으로 즉시 재선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제81조).[1]
  • 주권 및 권력 원칙: 제40조는 권력 분배 원칙(개인-지방자치체-주-연방)을 명시했고, 제41조는 모든 권력은 선출되고 소환 가능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42조는 주권이 모든 시민에게 있으며, 보통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주권을 행사한다고 명시했다.[1]


헌법 초안 작성 및 심의 과정에는 당시 코르테스를 구성했던 연방 공화당 내 여러 파벌들의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주요 파벌과 그 입장은 다음과 같다.[1]

파벌주요 인물핵심 입장
강경파 (좌파, 자코뱅-사회주의자)사회 개혁 강조, 아래로부터의 연방 방식, 의회 중심 권력 집중 주장
중도파 (사회 민주파)피 이 마르갈아래로부터의 연방 원칙 동의, 현실적으로 위로부터의 연방(선 헌법 제정, 후 연방 주 구성) 방식 지지
온건파 (민주 혁신·개혁파)니콜라스 살메론헌법 제정 우선, 안정적 공화국 수립 지향
개인주의 개혁파에밀리오 카스텔라르급진파, 입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 포용하는 융화적 입장


4. 5. 칸톤주의자 반란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은 연방 공화국 수립 방식으로 각 지방 대표가 모여 합의하는 상향식("아래에서 위로")보다는, 중앙 권력이 먼저 틀을 잡고 지방의 권한을 정하는 하향식("위에서 아래로")이 이미 형성된 스페인에는 더 적합하고 안정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 공백이나 지방 간 갈등 없이 더 빠르고 안전하게 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에스타니스라오 피게라스 대통령이 프랑스로 망명한 후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마누엘 소다스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시민 경비대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6월 11일,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뚜렷한 계획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임을 인정했다. 새 정부는 연방 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과 사회 개혁 입법에 집중하려 했다. 주요 개혁안에는 토지 분배, 징병제 폐지, 정교분리, 노예제 폐지, 아동 노동 제한, 의무 교육 도입, 노동조합 권리 보장 및 8시간 노동제 등이 포함되었다.

6월 16일,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주도하여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다음 날부터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헌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상황은 급변했다. 6월 30일 세비야 시의회는 도시를 사회 공화국으로 선포했고, 이에 항의하며 많은 연방주의 의원들이 의회를 떠났다. 7월 9일에는 알코이에서 제1 인터내셔널 주도의 파업 중 경찰 발포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들이 무장하여 도시를 장악하는 석유 혁명이 일어났다.[1]

이러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칸톤주의자 반란이 스페인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연방주의적 열망은 각 지역에서 독립적인 칸톤(Canton) 선포로 이어졌으며, 특히 발렌시아, 무르시아, 안달루시아 등 남동부 지역에서 봉기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칸톤은 발렌시아 지방이나 말라가 지방처럼 주 단위로 형성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특정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주요 칸톤 목록
지역주요 도시/칸톤
발렌시아 지방발렌시아, 알코이, 카스테욘
무르시아카르타헤나, 후미야 (선포 여부 논란 있음)
안달루시아세비야, 카디스, 그라나다, 말라가, 바일렌, 안두하르, 타리파, 알헤시라스
기타살라망카, 알만사, 토레비에하, 카무냐스 (알바세테)



후미야 칸톤의 경우, "후미야 국가는 모든 이웃 국가, 특히 이웃인 무르시아 국가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공식 기록 부재로 인해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반공화주의 선전으로 보기도 한다.

가장 강력하고 오래 지속된 칸톤은 카르타헤나 칸톤이었다. 7월 12일, 연방주의 의원 안토니오 갈베스 아르세(별명 "안토네테")의 주도로 해군 기지가 있는 카르타헤나에서 자치 칸톤이 선포되었다. 이들은 산 훌리안 성을 점령하고, 해군 기지 사령관이 "산 훌리안 성에 터키 국기가 게양되었다"고 보고할 정도로 독자적인 붉은 깃발(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적기)을 사용했다. 갈베스는 도시 항구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해군 주력 함대까지 장악했다. 카르타헤나 칸톤은 6개월간 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며, "두로 칸토날"이라는 자체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갈베스가 이끄는 함대는 인근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고, 마드리드 정부는 그를 해적으로 규정하고 현상금을 걸었다. 육상에서는 마드리드로 진격하려 했으나 친치야에서 패배했다. 칸톤 소속 프리깃함 "알만사"와 "빅토리아"는 자금 마련을 위해 알메리아를 공격했으나, 이후 영국과 독일 군함에 의해 해적으로 나포되었다.

에밀리오 카스텔라르는 당시 상황을 "스페인이 완전히 해체되는 듯했다"고 회고하며, 합법성이 무시되고 나라가 천 조각으로 나뉘는 혼란 속에서 가장 연방주의적인 정부에 대항해 봉기가 일어난 현실을 개탄했다.

설상가상으로 제3차 카를로스파 전쟁이 격화되어, 카를로스파 반군은 바스크, 나바라, 카탈루냐 대부분을 장악하고 스페인 전역에서 활동했다. 자칭 국왕 카를로스 7세는 에스텔라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내전과 칸톤 반란으로 인해 제1공화국 정부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마드리드와 북서부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급진적인 칸톤 반란의 확산 속에서, 피 이 마르갈 대통령은 자신의 연방주의 신념에 따라 무력 진압을 거부했다. 그는 칸톤주의자들 역시 자신의 연방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군부와 보수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그는 취임 37일 만인 7월 1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훗날 권력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정부에 있는 동안 나는 침착함, 환상, 동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좋은 일에 대해 나쁜 것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4. 6. 피 이 마르갈의 사임

).[1]

곧이어 발렌시아, 무르시아, 안달루시아 등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와 지방에서 독립적인 칸톤을 선언하는 칸토날 반란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7월 12일 안토니오 갈베스 아르세의 주도로 자치권을 선언한 카르타헤나 칸톤은 가장 강력하고 오래 지속된 칸톤이었다. 카르타헤나 칸토날리스트들은 해군 기지를 장악하고 자체 화폐(두로 칸토날)를 발행했으며, 장악한 함대를 이용해 알메리아, 알리칸테 등 인근 도시를 공격하기도 했다. 마드리드 정부는 이들을 해적으로 규정하고 현상금을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제3차 칼리스트 전쟁 역시 격화되어, 카를로스 7세를 따르는 칼리스트 반군이 바스크, 나바라, 카탈루냐 등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에스텔라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화국 정부의 실질적인 통치 영역은 수도 마드리드와 북서부 일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피 이 마르갈은 칸토날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군부와 정치권의 압박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연방주의 원칙과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봉기 진압을 거부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를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시켰고, 결국 새로운 헌법 제정에도 실패하면서 국정 운영 동력을 상실했다.

결국 피 이 마르갈은 취임 37일 만인 7월 1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훗날 총리 재임 시절을 회고하며 권력에 대한 깊은 환멸과 인간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5. 니콜라스 살메론 정부 (1873년 7월 18일 ~ 9월 6일)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의 사임 이후, 니콜라스 살메론이 1873년 7월 18일 찬성 119표, 반대 93표로 새로운 행정권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도주의 성향의 연방 공화주의자로서, 온건파 및 보수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연방 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메론은 이미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자비와 정의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정치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그의 임기 동안 주요 과제는 격화되는 칸톤 운동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연방 공화국에 비판적인 파비아 장군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 등에게 군 지휘를 맡겨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 등지로 군대를 파견하여 칸톤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군 지휘관들이 카를리스트 전선에서 탈영한 병사들의 사형 집행 승인을 요구하자, 확고한 자유주의 원칙을 가졌던 살메론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형 선고에 서명하지 않기 위해 권력을 포기한다"며 1873년 9월 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5. 1. 칸톤주의자 반란 확대

니콜라스 살메론은 피 이 마갈의 사임을 수락한 후, 찬성 119표, 반대 93표로 행정권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중도주의 성향의 연방 공화주의자였던 신임 대통령 살메론은 온건파나 보수 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연방 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에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에서 자비와 정의부 장관을 지내며 사형 폐지를 추진하고 사법권 독립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살메론의 임명 이후 칸톤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는 연방 공화국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파비아 장군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 등에게 의존하여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 지방에 군대를 파견했다. 파견된 군대는 각 칸톤을 차례로 진압했으며, 카르타헤나 칸톤만이 1874년 1월 12일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살메론 휘하의 장군들은 카를리스트 전선에서 발생한 탈영병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위해 정부의 승인과 대통령의 서명을 요청했다. 군 기강 확립에 필수적이라는 이유였지만, 진보적 자유주의 신념을 가졌던 살메론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지 않기 위해 권력을 포기했다"는 신념에 따라 결국 9월 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5. 2. 칸톤주의자 반란 진압

니콜라스 살메론은 피 이 마르갈의 사임 후, 찬성 119표 대 반대 93표로 새로운 행정권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도주의 성향의 연방 공화주의자로서, 온건파 및 보수파와의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연방 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 능력은 뛰어났으며, 프란시스코 실벨라는 그가 연설에서 강력한 논리만을 사용했다고 평가했고, 안토니오 마우라는 그의 교수 같은 어조를 언급하기도 했다. 살메론은 이전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에서 자비와 정의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사형제 폐지와 정치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이루려 노력한 바 있다.

살메론이 집권하자 칸톤 운동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살메론은 연방 공화국에 공공연히 반대 입장을 보이던 장군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파비아 장군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에게 군대를 맡겨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 지방으로 군사 원정을 보냈다. 이들의 군사 작전으로 각 지역의 칸톤은 차례로 진압되었고, 1874년 1월 12일까지 저항한 카르타헤나 칸톤을 제외하고는 모두 항복했다.

그러나 군 지휘관들은 카를리스타 전선에서 탈영한 여러 병사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요구하며 정부의 승인("인식")과 살메론의 서명을 요청했다. 군대의 기강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이유였지만, 확고한 진보적 자유주의 원칙을 가졌던 살메론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지 않기 위해 권력을 포기했다"는 신념에 따라 9월 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그의 묘소 벽에도 새겨진 문구이다.

5. 3. 니콜라스 살메론의 사임

니콜라스 살메론은 피 이 마르갈의 사임을 수락한 후, 찬성 119표, 반대 93표로 행정권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중도주의 성향의 연방 공화주의자였던 살메론은 온건파 및 보수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연방 공화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자비와 정의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사형 제도를 폐지한 경험이 있었다.

살메론의 임명 이후 칸톤 운동이 더욱 격화되자, 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연방 공화국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장군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파비아 장군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칸톤들을 차례로 진압했다. 1874년 1월 12일까지 저항한 카르타헤나 칸톤을 제외하고 모든 칸톤이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군 지휘관들은 카를리스트 전선에서 탈영한 병사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위해 정부의 승인과 살메론의 서명을 요청했다. 군 기강 확립에 필수적이라는 이유였으나, 진보적 자유주의 신념을 가졌던 살메론은 이를 거부했다. 그의 묘비명에도 "사형 선고에 서명하지 않기 위해 권력을 포기했다"고 새겨져 있듯이, 그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9월 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6. 카스텔라르 정부 (1873년 9월 7일 ~ 1874년 1월 4일)

1873년 9월 7일, 피 이 마르갈의 뒤를 이어 단일주의자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행정 권력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를로스 전쟁과 칸톤 반란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군사력 강화를 통한 질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20] 이를 위해 국회로부터 특별 권한을 부여받아 통치했으나, 연방주의자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1874년 1월 2일, 카스텔라르 정부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회가 다시 소집되었으나, 연방주의자들의 반대로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다음 날인 1월 3일 새벽, 마드리드 사령관 마누엘 파비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시켰다. 파비아는 카스텔라르에게 대통령직 유임을 제안했지만, 카스텔라르는 비민주적인 방식으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 쿠데타와 카스텔라르의 거절은 스페인 제1공화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비록 공화국은 이후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의 군사 정권 하에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민주적인 공화정은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6. 1. 카스텔라르의 취임과 방침

1873년 9월 7일, 역사 교수이자 뛰어난 웅변가였던 단일주의자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행정 권력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33표를 얻어 67표를 얻은 피 이 마르갈을 앞섰다. 카스텔라르는 이전에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쿠바에서의 전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푸에르토리코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추진하여 승인받은 바 있다. 이는 스페인 제1공화국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에서 기념되고 있다.

대통령에 취임한 카스텔라르는 카를로스 전쟁의 악화와 지속되는 칸톤 반란 등 공화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군대 개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회 연설을 통해 "이 정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보병, 많은 기병, 많은 포병, 많은 시민 경비대, 그리고 많은 사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군사력 강화를 주장했다.

이러한 카스텔라르의 방침은 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는 결국 국회로부터 통치를 위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1873년 9월 20일, 카스텔라르는 국회를 폐쇄했다. 그는 또한 전임자 니콜라스 살메론의 사임을 촉발했던 사형 선고를 확정하는 등 질서 회복을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했으며, 카르타헤나를 중심으로 한 칸톤 반란 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6. 2. 정치적 움직임

피 이 마르갈은 칸톤 반란에 신속히 대응하고자 했다. 카르타헤나에서 칸톤 선언이 발표된 7월 13일, 그는 즉시 모든 주지사에게 전보를 보내고, 코르도바의 리포이 장군에게는 설득과 제압을 병행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지시했다.[35] 그러나 그의 내각 안에서는 마이소나베 장관을 비롯한 일부 각료들이 더 강력한 진압을 요구하며 칸톤주의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피 이 마르갈을 비판했다.

피 이 마르갈은 민주 사회주의파의 지지를 받으며 의회 운영 정지와 같은 비상조치를 거부했다. 그는 연방 공화국 헌법의 신속한 채택을 통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과거 카탈루냐 분쟁을 전보로 진정시킨 경험에 기반한 자신감을 보였다. 7월 15일, 그는 의회에 신헌법 심의와 승인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지만, 내각 통합 시도는 실패했고 헌법 표결에서도 부결(찬성 93표, 반대 119표)되었다. 결국 피 이 마르갈은 7월 18일, 37일간의 임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사임 연설에서 자신의 정책이 "비난뿐만 아니라 분노와 중상"의 대상이 되었다고 토로했다.[36]

7월 18일, 니콜라스 살메론이 잠정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안달루시아 알메리아 출신의 전 철학 교수였던 그는 온건파 연방주의자로서 점진적인 연방 공화국 이행을 추구했다. 그의 정부는 "법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이 따르도록" 한다는 기치 아래 칸톤 반란 진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후 카를로스 전쟁 해결에 나설 계획이었다.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사형 폐지를 시행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메론 취임 이후인 7월 19일부터 칸톤 반란은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발렌시아, 살라망카, 아빌라 등지로 오히려 확산되었다. 많은 연방 공화주의자들이 살메론 정부 아래에서는 "위로부터"의 연방 공화국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헌법 제정을 기다리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성급한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37] 봉기는 통일된 지휘 체계 없이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소상인, 자유주의 전문가,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이들은 물품세·담배세·소금세 폐지, 성직자 재산 해체,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치, 죄수 사면, 군대의 민병대 교체, 공중 보건 위원회 설립 등을 공통적으로 요구했다.[37] 카를로스 전쟁으로 군사력이 분산되어 치안이 미흡한 지역에서 반란이 주로 발생했으며, 군대의 효과적인 지원은 드물었다.[38]

9월 7일, 단일주의자 에밀리오 카스텔라르가 133표를 얻어 피 이 마갈(67표)을 누르고 행정 권력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역사 교수이자 뛰어난 웅변가였던 그는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정부의 국무장관 시절, 쿠바의 전쟁 상황을 고려하여 푸에르토리코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추진하고 승인받은 바 있다. 이는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에서 기념되는 업적이다.

카를로스 전쟁 악화와 칸톤 반란으로 공화국이 위기에 처하자, 카스텔라르는 군대 개편에 착수했다. 그는 국회에서 "이 정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보병, 많은 기병, 많은 포병, 많은 시민 경비대, 그리고 많은 사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군사력 강화를 주장했다. 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그에게 통치를 위한 특별 권한을 부여했고, 카스텔라르는 9월 20일 국회를 폐쇄했다. 그는 질서 회복을 위해 전임자의 사임을 촉발했던 사형 선고를 확정했으며, 카르타헤나의 칸토날리스트들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칸톤 반란과 카를로스 전쟁 악화 속에서 1874년 1월 2일 국회가 다시 열렸다. 카스텔라르는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임을 묻고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무제한의 권한을 요구했으나, 연방주의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한편, 마드리드 사령관 마누엘 파비아 장군은 카스텔라르를 지지하며 군대를 동원할 태세를 보였다.

국회 표결 결과, 카스텔라르는 101표 대 119표로 패배했다. 공화국 전 대통령이자 국회 의장이었던 니콜라스 살메론이 새로운 행정 권력 수장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를 진행하려 하자, 파비아 장군은 국회 해산을 명령하고 5분 내 퇴거를 요구했다. 시민 경비대가 의회 홀을 점령했고, 대표들은 혼란 속에서 건물을 탈출했다.

단일주의 공화주의자였던 파비아는 카스텔라르에게 대통령직 유임을 제안했지만, 카스텔라르는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제1공화국의 사실상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공화국 자체는 공식적으로 거의 1년 더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로페스 도밍게스 장군은 1월 12일 카르타헤나에 입성하여 칸톤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 지도자 안토네테 갈베스는 오란(알제리)으로 망명했으나, 이후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에 사면을 받아 귀국하여 왕정 복고의 핵심 인물인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와 기묘한 우정을 맺기도 했다.

카스텔라르가 대통령직을 거부하자, 비아리츠 망명에서 돌아온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에게 연립 정부 구성이 맡겨졌다. 이 정부에는 왕정주의자, 보수주의자, 단일 공화주의자가 참여했으나 연방 공화주의자는 배제되었다. 이사벨 2세의 전 협력자였던 세라노는 단일 공화국을 선포하고 행정 권력을 장악했으며, 코르테스를 폐지하고 보수적인 공화국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칸톤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고 카를로스 전쟁에 군사력을 집중시켰으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몰락 후 등장한 공작과 장군 체제를 모방하여 스스로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몇 달 후인 5월 13일, 세라노는 후안 데 사발라 이 데 라 푸엔테에게 정부 수반직을 넘기고 직접 북부의 카를로스파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9월 3일에는 프라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가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12월 10일 팜플로나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사군토 선포로 중단되면서 공화국은 최종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6. 3. 말라가 칸톤주의자 반란 진압

피 이 마르갈 대통령은 칸톤주의자 반란에 신속하게 대응하고자 했다. 카르타헤나에서 칸톤 선언이 발표되자, 7월 13일 즉시 모든 주지사에게 전보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또한 코르도바의 공화국군 리포이 장군에게는 반란 진압에 있어 설득과 무력 사용을 적절히 조합하라고 지시했다.[35]

그러나 피 이 마르갈 내각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마이소나베 장관을 비롯한 일부 각료들은 반란에 대해 더욱 강력한 진압을 요구하며, 칸톤주의자들과 공존하려는 듯한 대통령의 태도를 비판했다. 반면, 피 이 마르갈은 민주 사회주의파 각료들의 지지를 받으며 의회 운영 정지 등을 포함한 비상사태 선포를 거부했다. 그는 공화국 헌법을 신속히 제정하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과거 카탈루냐 분쟁 당시 전보만으로 상황을 진정시켰던 경험에 근거한 자신감도 있었다.

7월 15일, 피 이 마르갈은 칸톤 반란 확산을 막기 위해 의회에 새로운 헌법안의 신속한 심의와 승인을 요청했다. 7월 17일에는 카스테랄이 초안한 「스페인 연방 공화국 헌법안」이 낭독되었다. 민주 사회주의파 의원들이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심의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곧 철회했다. 하지만 내각 내에서도 통일된 의견을 모으지 못한 상황에서 피 이 마르갈은 내각 개편과 여러 정파 통합을 시도했으나, 헌법 표결 결과는 찬성 93표, 반대 119표로 부결되었다. 이는 니콜라스 살메론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다음 날인 7월 18일, 피 이 마르갈은 37일간의 임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임 연설에서 자신의 정책이 "비난은 물론 분노와 중상"의 대상이었다고 토로했다.[36]

같은 날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니콜라스 살메론은 안달루시아 주 알메리아 출신의 전직 철학 교수로, 온건파 연방주의자였다. 그는 점진적인 연방 공화국 이행을 추구했으며, "법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이 따르도록" 한다는 기치 아래 칸톤주의자 반란 진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반란 진압 후에는 카를로스 전쟁을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사형 폐지를 추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메론의 취임 이후인 7월 19일부터 칸톤 반란은 오히려 카르타헤나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연방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살메론 정부 아래에서는 "위로부터"의 연방 공화국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헌법 제정을 기다리기보다 사회 구조를 "아래에서 위로" 바꾸는 즉각적인 혁명을 원했다.[37]

7월 19일부터 23일까지 칸톤 운동은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발렌시아, 살라망카, 아빌라 등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카를로스 전쟁과 겹치면서 스페인 내 32개 지방 및 도시가 분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37] 이러한 봉기는 중앙의 지휘 없이 각 지역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으켰다. 참여 계층은 소상인, 실업가,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가,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직공 등 다양했으며, 이들은 기존 공화주의 권력층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품고 개혁을 요구하며 혁명적 행동에 나섰다. 칸톤 선언들에는 공통적으로 물품세, 담배세, 소금세 등 민중에게 부담이 큰 세금 폐지, 성직자 재산 몰수 및 분배,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 수립, 정치범 사면, 정규군 대신 민병대 창설, 공중 보건 위원회 설립 등의 요구가 담겨 있었다.[37]

또한, 카르타헤나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혁명군에 대한 효과적인 군대의 지원은 매우 드물었다. 카를로스 전선에서의 군사적 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에 치안 대책이 미흡한 마을에서 반란이 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부 지방의 반란은 혁명적 행동이 두드러졌다기보다는 치안 부재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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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El movimiento cantonal de 1873 (1.ª República) Ediciós do Castro, Sada (A Coruña):
[36]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37]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38]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Auge y destrucción de una experiencia democrática. Akal, Madrid
[39]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40] 서적 La Pasión Revolucionaria. Culturas políticas republicanas y movilización popular en la España del siglo xix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Madrid
[41]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42]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43] 서적 La Pasión Revolucionaria. Culturas políticas republicanas y movilización popular en la España del siglo xix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Madrid
[44] 서적 La Pasión Revolucionaria. Culturas políticas republicanas y movilización popular en la España del siglo xix.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Madrid
[45] 서적 El movimiento cantonal de 1873 (1.ª República) Ediciós do Castro, Sada (A Coruña)
[46]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47]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48]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49]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0]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1]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52] 서적 La Pasión Revolucionaria. Culturas políticas republicanas y movilización popular en la España del siglo xix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Madrid
[53]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4]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5]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56]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7]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8]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59] 서적 La Pasión Revolucionaria. Culturas políticas republicanas y movilización popular en la España del siglo xix.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Madrid
[60]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61] 서적 La Primera República Española (1873-1874). De la utopía al caos (3.ª edición) Espasa, Barcelona
[62] 서적 El movimiento cantonal de 1873 (1.ª República) Ediciós do Castro, Sada (A Coruña)
[63] 서적 Alfonso XII y Regencia. 1875-1902 ed. Restauración y Dictadura. Vol. 7 de la Historia de España, Crítica/Marcial Pons, Barcelona-Madrid
[64]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 Madrid
[65] 서적 La revolución de 1868 y la I República Siglo XXI, Madrid
[66]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67] 서적 La revolución de 1868 y la I República. Siglo XXI, Madrid
[68] 서적 Progreso y Libertad. El Partido Progresista en la Revolución Liberal Española Alianza Editorial, Madrid
[69] 서적 Alfonso XII. Un rey liberal. Biografía breve Ediciones 19, Madrid
[70] 서적 Alfonso XII Ariel, Barcelona
[71] 서적 Los amigos políticos. Partidos, elecciones y caciquismo en la Restauración (1875-1900) Marcial Pons, Madrid
[72] 서적 Alfonso XII. Un rey liberal Ediciones 19, Madrid
[73] 서적 Los amigos políticos. Partidos, elecciones y caciquismo en la Restauración (1875-1900) Prólogo de Raymond Carr Marcial Pons,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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