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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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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국사상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여기고 일본의 국토와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진다는 사상이다. 고대 일본 신화에 뿌리를 두고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정치적 통일과 타국 의식의 발달과 함께 배타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중세 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이념으로, 근세에는 유교, 국학 등과 결합하여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며 존왕론의 기반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신토와 결합하여 천황 중심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대동아공영권 등 침략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현대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과 관련하여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2. 역사

일본에서 신국사상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파악하고, 일본 국토와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가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상이다.[11] 원래는 이자나기 · 이자나미에 의한 국토 창성이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신들의 탄생 등을 골자로 하는 일본 신화를 원류로 하여 농경 의례 등에 연결되는 소박한 신앙에 뿌리를 둔 관념이었다.[9][11][12]

중세 시대, 몽고습래라 불리는 사건으로 국가적인 위기가 닥치자 일본인들에게 민족의식이 일깨워졌고, 무가공가의 권력 교체기에 천황 중심의 고대 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신국사상이 강조되었다.[9]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신황정통기에서 "대일본은 신국이라, 천조로 비롯되어 기틀을 세우고, 태양신으로부터 계통을 전하느니라. 우리나라만이 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조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신국'이라 일컫는 까닭이니라."라고 하였다.[14]

근세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천하인'들이 모두 사후 신격화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쿠니 대명신(豊国大明神)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쇼 대권현(東照大権現)으로 모셔졌다. 이를 통해 에도 막부와 일본 민중 사이에서는 닛코 참배 등을 통해 신국사상이 일반화되었다.[15] 근세 중기에는 조선에서 유입된 유교 사상(성리학)과 결합하여 미토학(水戸学)이나 사키몬학(崎門学) 같은 국수주의 사상을 만들어냈다.[16] 고쿠가쿠(国学)는 유교에 맞서 일본 고유의 가치를 강조하고 봉건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를 주장하며 신국사상을 활성화시켰다.[9][17]

에도 막부 말기에는 서구 열강에 대한 개항과 새로운 정치 권력 수립이 주요 과제로 떠오르면서, 신국사상에 기반하여 막부가 아닌 왕실을 정치 권위의 원천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존왕론으로 변화하였다.[17] 이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기반을 제공하고,[9] 도막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 되었다.[17]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고쿠가쿠신토가 신국사상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미토학고쿠가쿠에서는 천황뿐 아니라 그 신민(臣民) 자체도 신령들의 후예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이러한 신국사상은 민속 신앙으로서의 조상 숭배와 연결되어 메이지 이후의 경신숭조(敬神崇祖)와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이에(家) 제도를 지지하는 도덕 사상으로 이어졌다.[9]

제2차 세계 대전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천황가를 종조(宗祖)로 하는 가족국가론(家族国家論)이나 팔굉일우론(八紘一宇論)이 신국사상의 기초가 되었다.[18] 이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제국주의 일본의 국민 정신 통합 및 통제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19] 이처럼 중세에서 근현대에 걸쳐 대외 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거나 위기를 맞았을 때 신국사상은 강조되어 왔다.[7]

2. 1. 고대

일본에서 신국사상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파악하고[10] 일본 국토와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가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상이다.[11] 원래는 이자나기 · 이자나미에 의한 국토 창성이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신들의 탄생 등을 골자로 하는[9] 일본 신화를 원류로 하여[12] 농경 의례 등에 연결되는 소박한 신앙에 뿌리를 둔[11] 관념이었다.[9]

2. 2. 중세

일본에서 신국사상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파악하고,[10] 일본 국토와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가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지고 있다는 사상이다.[11] 원래는 이자나기 · 이자나미에 의한 국토 창성이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신들의 탄생 등을 골자로 하는[9] 일본 신화를 원류로 하여[12] 농경 의례 등에 연결되는 소박한 신앙에 뿌리를 둔[11] 관념이었다.[9]

이것이 일본 역사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중세, 몽고습래라 불리는 사건이 벌어졌던 시대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가 일본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나아가 일본의 역사상 무가공가의 권력 교체기였던 이 시기에,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 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강조되면서였다.[9]

동시에 신국관이 강조된다.[13]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 첫머리에서 "대일본(大日本, 오야마토노쿠니)는 신국(神国, 가미노쿠니)이라, 천조(天祖, 아마쓰미오야)로 비롯되어 기틀을 세우고, 태양신(日神, 히노카미)으로부터의 계통(統)을 전하느니라. 우리나라만이 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조(異朝)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신국'이라 일컫는 까닭이니라."라고 하였다.[14]

2. 3. 근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이른바 '천하인'(天下人)들은 모두 사후 신격화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쿠니 대명신(豊国大明神)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쇼 대권현(東照大権現)으로 모셔졌다. 이를 통해 에도 막부와 일본 민중 사이에서는 닛코 참배 등을 통해 신국사상이 일반화되었다.[15]

근세 중기에는 조선에서 유입된 유교 사상(성리학)과 결합하여 미토학(水戸学)이나 사키몬학(崎門学) 같은 국수주의 사상을 만들어냈다.[16] 유교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일본 고유의 가치를 강조하고 봉건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를 주장한[17] 고쿠가쿠(国学)는 신국사상을 활성화시켰다.[9]

에도 막부 말기에는 서구 열강에 대한 개항과 새로운 정치 권력 수립이 주요 과제로 떠오르면서, 신국사상에 기반하여 막부가 아닌 왕실을 정치 권위의 원천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존왕론으로 변화하였다.[17] 이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고,[9] 도막 운동(倒幕運動)의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 되었다.[17] 미토학이나 고쿠가쿠에서는 통치자인 천황뿐만 아니라 그 신민(臣民) 자체도 신령들의 후예라는 생각이 나타났고, 신국사상은 민속으로서의 조상 숭배와 연결되어 메이지 이후의 경신숭조(敬神崇祖)와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이에(家) 제도를 지지하는 도덕사상으로 이어졌다.[9]

2. 4.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고쿠가쿠신토가 신국사상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신국사상을 바탕으로 막부가 아닌 왕실을 존경해야 한다는 존왕론으로 바뀌어 존왕양이 운동의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도막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 되었다.[17]

미토학고쿠가쿠에서는 통치자인 천황뿐 아니라 그 신민(臣民) 자체도 신령들의 후예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이러한 신국사상은 민속 신앙으로서의 조상 숭배와 연결되어 메이지 이후의 경신숭조(敬神崇祖)와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이에(家) 제도를 지지하는 도덕 사상으로 이어졌다.[9]

제2차 세계 대전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천황가를 종조(宗祖)로 하는 가족국가론(家族国家論)이나 팔굉일우론(八紘一宇論)이 신국사상의 기초가 되었다.[18] 이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제국주의 일본의 국민 정신 통합 및 통제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19] 이처럼 중세에서 근현대에 걸쳐 대외 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거나 위기를 맞았을 때 신국사상은 강조되어 왔다.[7]

2. 5.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적인 독립과 국민 통합이 강하게 요구되면서 신토고쿠가쿠가 신국사상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천황가를 종조(宗祖)로 하는 가족국가론(家族国家論)이나 팔굉일우론이 신국사상의 기초가 되었다.[18] 이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일본 제국주의의 국민 정신 통합 및 통제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19] 이처럼 중세부터 근현대에 걸쳐 대외 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거나 위기를 맞았을 때 신국사상은 강조되어 왔다.[7]

3. 비판 및 논란

신국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논란은 주로 그 사상의 배타성, 역사 왜곡, 정치적 이용 가능성 등에서 비롯된다.

참조

[1]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2018-10-25
[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選民思想 https://kotobank.jp/[...] 2018-10-25
[3]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4]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2018-10-25
[5] 서적 将軍権力の創出 岩波書店
[6]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尊王論 https://kotobank.jp/[...] 2018-10-25
[7]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2018-10-25
[8]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選民思想 https://kotobank.jp/[...] 2018-10-25
[9]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10]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11]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2018-10-25
[1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2018-10-25
[13]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14]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15] 서적 将軍権力の創出 岩波書店
[16]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17]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尊王論 https://kotobank.jp/[...] 2018-10-25
[18]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2018-10-25
[19]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https://kotobank.jp/[...] 2018-10-25
[20]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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