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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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의면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명종비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이며, 노론 벽파에 속했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흥선대원군을 멸시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감고당 개축으로 탄핵받아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으로, 청릉부원군 심강의 11대손이자, 심강의 아들 심인겸의 10대손이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과 심충겸의 종9대손(從9代孫)이 된다. 이후 그의 가계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이 분당되자 그의 조상들은 노론이 되고, 사도세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노론 중에서도 벽파와 시파가 갈라지자, 노론 벽파에 가담했다. 노론 벽파의 중진이었던 심의면의 할아버지 심풍지는 정조가 남인 인사들을 등용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다.[1]
2. 생애
1837년(헌종 3년) 참봉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842년(헌종 8년) 옥당, 황해도 암행어사, 1848년(헌종 14년) 홍문관 응교, 승정원 승지, 1850년(철종 1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1851년(철종 2년) 동지의금부사 겸 승지, 1853년(철종 4년) 충청도 관찰사, 1855년(철종 6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비참한 처지에 몰려 술주정꾼에 노름 등으로 소일하던 흥선대원군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었을 때 생계비를 구걸하러 김좌근, 김병기 등의 집에 왔을 때는 흥선군을 면전에서 멸시하고 백안시했다. 그는 흥선군을 향해 궁도령(宮道令), 상가집(上家) 개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차남이 고종으로 등극할 때까지도 기억하였다.[1]
1860년(철종 11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내고, 1864년(고종 1년) 지의금부사에 이르렀으나, 이전에 인현왕후의 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을 함부로 개축하여 사용한 죄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되고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 또 다시,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자신은 공주목(지금의 충남 공주)에 찬배(竄配)되는 유배형을, 아들 의주부윤 심이택(沈履澤)은 제주도에 가극(加棘)되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1865년(고종 2년) 심의면은 유배지인 공주목에서 죽었고, 사후 죄가 탕척(蕩滌)되었다. 아들 심이택은 방축향리(放逐鄕里)로 형벌이 감해졌다.[1]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관직 생활
명종비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으로, 청릉부원군 심강의 11대손이자, 심강의 아들 심인겸의 10대손이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과 심충겸의 종9대손(從9代孫)이 된다. 이후 그의 가계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이 분당되자 그의 조상들은 노론이 되고, 사도세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노론 중에서도 벽파와 시파가 갈라지자, 노론 벽파에 가담했다. 노론 벽파의 중진이었던 심의면의 할아버지 심풍지는 정조가 남인 인사들을 등용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다.[1]
1837년(헌종 3년) 참봉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842년(헌종 8년) 옥당, 황해도 암행어사, 1848년(헌종 14년) 홍문관 응교, 승정원 승지, 1850년(철종 1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1851년(철종 2년) 동지의금부사 겸 승지, 1853년(철종 4년) 충청도 관찰사, 1855년(철종 6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비참한 처지에 몰려 술주정꾼에 노름 등으로 소일하던 흥선대원군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었을 때 생계비를 구걸하러 김좌근, 김병기 등의 집에 왔을 때는 흥선군을 면전에서 멸시하고 백안시했다. 그는 흥선군을 향해 궁도령(宮道令), 상가집(上家) 개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차남이 고종으로 등극할 때까지도 기억하였다.[1]
1860년(철종 11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내고, 1864년(고종 1년) 지의금부사에 이르렀으나, 이전에 인현왕후의 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을 함부로 개축하여 사용한 죄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되고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 또 다시,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자신은 공주목(지금의 충남 공주)에 찬배(竄配)되는 유배형을, 아들 의주부윤 심이택(沈履澤)은 제주도에 가극(加棘)되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1865년(고종 2년) 심의면은 유배지인 공주목에서 죽었고, 사후 죄가 탕척(蕩滌)되었다. 아들 심이택은 방축향리(放逐鄕里)로 형벌이 감해졌다.[1]
2. 2. 흥선대원군과의 악연
심의면이 매입했던 감고당 주변 토지는 흥선대원군이 몰수하여 처가 일족이자 후일 명성황후가 되는 민씨네 일족에게 주었다.
2. 3. 몰락과 유배
명종비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이자, 심강의 11대손이며, 심인겸의 10대손이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과 심충겸의 종9대손(從9代孫)으로, 그의 가계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졌고, 사도세자 문제 때 노론 벽파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심풍지는 정조의 남인 등용에 반대했던 노론 벽파 중진이었다.[1]
1837년(헌종 3년) 문과에 급제, 1842년 옥당, 황해도 암행어사, 1848년 홍문관 응교, 승정원 승지, 1850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1851년 동지의금부사 겸 승지, 1853년 충청도 관찰사, 1855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1] 그는 흥선대원군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생계비를 구걸하러 올 때 면전에서 멸시하며 궁도령(宮道令), 상가집(上家) 개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은 차남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도 이를 기억하였다.[1]
186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를 거쳐 1864년 지의금부사에 이르렀으나, 인현왕후의 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을 함부로 개축하여 사용한 죄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되고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1]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공주목(지금의 충남 공주)에 유배되었고, 아들 의주부윤 심이택(沈履澤)은 제주도에 가극(加棘)되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1865년 유배지인 공주목에서 사망했고, 사후 죄가 탕척(蕩滌)되었다. 아들 심이택은 방축향리(放逐鄕里)로 형벌이 감해졌다.[1]
3. 가계
3. 1. 직계 가계
3. 2. 방계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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