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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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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오키 슈조는 나가토국 출신의 외교관으로, 독일 유학을 통해 서양 법률, 정치, 경제학 등을 연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외무성에서 근무하며 주독 대리공사, 공사 등을 역임했고, 이토 히로부미의 유럽 헌법 조사를 돕기도 했다. 1889년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조약 개정 협상을 주도했으나, 오쓰 사건으로 사임했다. 이후 미국 대사로 임명되어 캘리포니아의 일본 이민자 차별에 항의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그는 조약 개정 협상, 독일 문화 도입, 일본의 대륙 진출에 영향을 미쳤으며, 자작 작위를 받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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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슈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오키 슈조
일본어 이름青木 周蔵 (아오키 슈조)
로마자 표기Aoki Shūzō
관직
작위자작
품계종2위
주요 이력
출생1844년 3월 3일 (덴포 15년 1월 15일) 일본, 조슈 번하뉴 촌 (현: 야마구치현산요오노다시)
사망1914년 2월 16일 (71세) 일본, 도쿄시고지마치 (현: 도쿄도지요다구이치반초)
배우자엘리자베트 폰 라데 (1877년 4월 20일 결혼)
자녀한나 아오키
학력
출신 학교메이린칸
경력
외무경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제1차 야마가타 내각
제1차 마쓰카타 내각
제2차 야마가타 내각
추밀고문관추밀고문관
귀족원 의원귀족원 자작 의원
일본 특명전권공사주미 일본 대사
정치 경력
외무대신제8대
제15대
임기 시작1889년 12월 24일
임기 종료1891년 5월 29일
임기 시작 21898년 11월 8일
임기 종료 21900년 10월 19일
추밀고문관 임기 시작1901년 11월 25일
추밀고문관 임기 종료1906년 1월 7일
추밀고문관 임기 시작 21908년 2월 6일
추밀고문관 임기 종료 21914년 2월 16일
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1890년 7월 10일
귀족원 의원 임기 종료1897년 7월 10일
주미 대사 임기 시작1906년 4월 24일
주미 대사 임기 종료1908년 2월 3일
기타 정보
소속 정당무소속
존경정2위
훈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친척미우라 겐추 (아버지)
아오키 겐조 (양아버지)
아오키 우메사부로 (양자)
미우라 야스케 (친동생)
아오키 시게오 (손자)
아오키 모리히사 (증손자)
하라 노리유키 (증손자)

2. 생애

아오키 슈조는 나가토국 아사군 생타무라[11](현재의 야마구치현 산요오노다시) 출신의 메이지 시대 외교관이다.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번교인 명린관과 나가사키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아오키 켄조의 양자가 되어 사족 신분을 얻었다.

1868년 독일로 유학하여 법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 귀국 후 1873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주독일 공사, 주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 등을 역임하며 유럽 외교 무대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엘리자베트 폰 라데와 결혼했다.

1885년 귀국하여 외무대보(차관보)를 거쳐 1886년 외무차관이 되었고,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아래에서 불평등 조약 개정 실무를 담당했다.[16] 1889년 제1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발탁되어 조약 개정 협상을 주도했으나, 1891년 오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8]

이후 다시 주독 공사 및 주영 공사로 임명되어 외교 일선에 복귀했으며, 1894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와 협력하여 영일통상항해조약 체결에 성공, 치외법권 철폐의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1898년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을 맡아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의 군사 개입을 추진했다.

말년에는 추밀원 고문관을 지냈고, 1906년 주미 대사로 부임하여 미국 내 일본인 이민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3][4][5] 자작 작위를 받았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나스시오바라의 아오키 별장


아오키 슈조는 나가토국 아사군 생타무라[11](현재의 야마구치현 산요오노다시)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미우라 단시치였다. 장주번의 마을 의사인 미우라 겐츄와 그의 아내 유우코의 장남으로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기에 있는 번교인 명린관과 나가사키에서 서양 과학과 의학(랑가쿠)을 공부했다.

22세 때 모리 케이친의 시의이자 일본에서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한 란학자 아오키 슈히츠의 동생이며, 훗날 궁정 어의가 되는 아오키 켄조의 양자가 되어 사족 신분을 얻었다. 이때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슈조로 개명하고, 켄조의 딸 테루와 결혼했다.

이후 1868년, 장주번에 의해 독일으로 파견되어 서양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독일에 머무는 동안 그의 연구는 서양 의학에서 정치, 군사 과학,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맥주, 종이와 지폐, 카펫과 양탄자 제조법, 그리고 서양 임업 관리 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2. 2. 독일 유학과 외무성 근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아오키 슈조는 1873년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그는 명륜관(明倫館)에서 공부한 후, 유학 후보로서 마쓰오카 유키(松岡勇記)와 함께 나가사키로 파견되어 의학 수련을 받았다.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인 교사는 수습생들에게 독일 의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습득을 권장했고, 이로 인해 독일은 유학 희망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장주번은 유학생 파견 시 반드시 두 명씩 동행하도록 규정했으나, 아오키는 마쓰오카와의 동행을 꺼려 선배 의사인 한아이 슌켄(半井春軒)과 함께 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발발하면서 현역 의사들이 치료 현장에 투입되어 마쓰오카와 한아이의 유학 건은 보류되었다. 결국 1868년(메이지 원년), 아오키는 번 유학생으로서 도사번 출신의 하기와라 산케이(萩原三圭)와 함께 프로이센 유학 허가를 받았다.[12]

독일 유학 중 아오키는 의학에서 정치학, 경제학으로 전공을 무단 변경하여 문제가 되었으나, 당시 독일에 체류 중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협상하여 이를 해결했다. 1872년(메이지 5년)에는 북독일 유학생 총대가 되어, 당시 군사학과 의학에 집중되어 있던 유학생들의 전공을 다양화하는 것이 일본 근대화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전공 결정에 개입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권유 덕분에 임업, 제지, 맥주, 직물(러사 융단)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워 성공한 유학생들이 배출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 외무성에 들어간 아오키는 외무성 일등서기관을 거쳐 본성에서 근무했다. 이듬해인 1874년(메이지 7년)에는 주독일 대리공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주독 공사가 되어 독일에 부임했다. 이곳에서 그는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엘리자베트 폰 라데(Elisabeth von Rhade)를 만났다. 1875년(메이지 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아오키는 엘리자베트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1877년(메이지 10년) 외무성의 허가를 받았으나, 본가에서 전 부인 테루(暉子)와의 이혼을 승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테루에게 새로운 남편을 찾아주고 그 결혼 비용(납채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혼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총 세 번의 중매와 비용 지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3] 이 결혼 과정의 어려움은 시나가와 야지로 등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14]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네덜란드 공사를 겸임했다.

1879년(메이지 12년), 임신 중인 엘리자베트를 데리고 귀국하여 조약개정조사어용계(条約改正取調御用係)에서 일했다. 그러나 1880년(메이지 13년)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 밑에서 다시 주독 공사로 임명되어 베를린으로 부임했다.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유럽에서 헌법을 조사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 베를린 대학의 루돌프 폰 구나이스트(Rudolf von Gneist) 교수와 빈 대학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교수를 알선하는 역할을 했다.[15] 1885년(메이지 18년)에는 네덜란드노르웨이 공사를 겸임했으나, 같은 해 외무대보(外務大輔, 외무차관보)로 임명되어 귀국했고, 조약개정회의 부위원장을 맡았다.[16]

1886년(메이지 19년) 3월, 제1차 이토 내각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아래에서 외무차관이 되어 전권위임장을 받고 조약개정회의에 참석하는 등 이노우에의 외교 정책을 지원했다.[16] 1887년(메이지 20년) 5월 9일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17] 1888년(메이지 21년) 구로다 내각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아래에서도 외무차관직을 유지했으며,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외무차관 겸 조약개정전권위원으로서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6]

연도주요 직책 및 활동비고
1868년프로이센 유학 시작번 유학생, 하기와라 산케이와 동행
1872년북독일 유학생 총대전공 다양화 주장
1873년외무성 입성, 일등서기관
1874년독일 대리공사, 주독 공사엘리자베트 폰 라데 만남
1875년주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 겸임
1877년엘리자베트 폰 라데와 결혼
1878년네덜란드 공사 겸임
1879년귀국, 조약개정조사어용계
1880년주독 공사 재부임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 하
1882년이토 히로부미 헌법 조사 지원구나이스트, 슈타인 교수 알선
1885년네덜란드, 주노르웨이 공사 겸임
1885년귀국, 외무대보, 조약개정회의 부위원장
1886년제1차 이토 내각 외무차관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 하, 조약개정회의 참석
1887년자작 서작
1888년구로다 내각 외무차관 유임오쿠마 시게노부 외상 하
1889년조약개정전권위원 겸임조약개정협상 주도


2. 3. 외무대신과 조약 개정

아오키 슈조는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일본 제국과 여러 서구 열강 간의 불평등 조약, 특히 치외법권 조항의 개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러시아 제국동아시아 진출에 대한 경계를 표명했다.[16] 라이시마 츠네요시(来島恒喜)의 테러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실각한 후, 1889년(메이지 22년) 12월 24일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조약 개정 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1891년(메이지 24년) 제1차 마쓰카타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직을 유지하며 영사재판권 폐지를 목표로 영국과의 협상에 주력했다. 아오키의 개정안은 외국인 판사를 일본 최고 법원인 대심원에 임용하지 않고,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는 영사재판권 폐지를 전제로 하는 등 상호 대등한 관계를 지향했다.[18]

또한 아오키는 외무대신으로서 오야토이 가이코쿠진 제도를 활용하여 서구의 선진 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7년 아오키의 주도로 정부 및 민간 부문에 초빙된 주요 서구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주요 분야/활동
W. K. 버튼위생 공학, 사진술
오트마르 폰 모흘법률, 궁중 의례
알베르 파브르 자누티(정보 부족)
헨리 스펜서 팔머토목 공학 (요코하마 항만 건설 등)
헤르만 엔데건축 (관청집중계획)
빌헬름 뵈크만건축 (관청집중계획)
루돌프 디트리히임학
루드비히 리스역사학



조약 개정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891년(메이지 24년) 5월 오쓰 사건 발생으로 아오키가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1892년(메이지 25년) 주독 공사로 임명되었고, 후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에 의해 주영 공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1894년(메이지 27년), 아오키는 주영 공사로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와 긴밀히 협력하여 마침내 1894년 7월 16일 런던에서 영일통상항해조약 체결에 성공함으로써 불평등 조약 개정의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1898년(메이지 31년)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복귀한 아오키는 1900년(메이지 33년)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의 움직임에 발맞춰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추진함으로써 일본이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이후 아오키는 추밀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2] 1906년(메이지 39년)에는 주미 대사로 부임하여 일본인 이민 문제 해결에 힘썼다.

2. 3. 1. 오쓰 사건과 아오키 슈조

라이시마 츠네요시(来島恒喜)의 테러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실각한 후, 아오키 슈조는 1889년(메이지 22년) 12월 24일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했다. 그는 외무대신으로서 이른바 “아오키 각서”를 각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고,[16] 이를 바탕으로 불평등 조약, 특히 치외법권 조항 개정을 위한 협상을 주도했다. 특히 주일 영국 공사 프레이저와의 협상을 통해 영사재판권 폐지를 목표로 하는 조약 개정에 힘썼으며, 이는 1891년(메이지 24년) 제1차 마쓰카타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으로 유임되면서 계속 추진되었다. 아오키의 조약 개정안은 외국인 판사를 대심원에 채용하지 않고,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는 영사재판권 폐지를 전제로 한다는 '대등 합의'를 목표로 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던 영국이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국제 정세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협상은 성공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 조약 조인을 앞둔 1891년(메이지 24년) 5월,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훗날 니콜라이 2세)가 쓰다 산조(津田三蔵)에게 피습당하는 오쓰 사건이 발생했다. 아오키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으며, 영국과의 조약 개정 협상도 중단되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아오키는 러시아 공사에게 범인 쓰다 산조의 사형을 약속했으나, 재판 결과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공사의 항의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의 지시였다고 해명했다. 이는 외무대신으로서 최종 결정권을 가졌음에도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비쳐 이토이노우에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사임 후 1892년(메이지 25년) 주독 공사로 부임했으며, 후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는 그에게 주영 공사를 겸임시켰다. 1894년(메이지 27년)에는 주영 공사로서 외무대신 무쓰와 함께 조약 개정 교섭에 다시 참여하여 알렉산더 폰 짐볼트(アレクサンダー・フォン・シーボルト)를 통역으로 두고 일영 통상항해조약 개정에 성공했다.

2. 4. 주미 대사와 말년

1906년, 아오키 슈조는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3] 1908년, 그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심화되던 일본인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일본인을 겨냥한 반아시아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고, 학교에서 일본인 아이들을 차별하는 내용을 포함한 여러 차별적 법안들이 존재했다.[4] 이러한 차별의 배경에는 일본인 이민자들이 캘리포니아의 농업 경제를 장악할 것이라는 현지 백인들의 우려가 있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직접 땅을 사들이고 백인들을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컸다. 아오키는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협상을 통해 여권 발급을 제한하고 일부 일본인을 추방하는 대신, 미국 측이 반이민 법안을 철회하는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합의가 일본인의 미국 이민 자체를 막거나 이후의 차별적인 법률 제정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양국 간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는 데는 기여했다.[5]

3. 조약 개정 협상과 "아오키 각서"

오쿠마 시게노부가 라이시마 츠네요시(来島恒喜)의 테러로 부상을 입은 후, 아오키는 1889년(메이지 22년) 12월 24일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했다. 그는 조약 개정 방침을 담은 "아오키 각서(青木覚書)"를 각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16] 이 각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오키 각서 주요 내용[16]
항목내용
외국 출신의 법률가를 대심원 판사로 임용하지 않는다.
법전을 조속히 편성하고 공포할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영사재판권을 폐지하지 않는 한, 그 대가로 외국인에게 부동산 소유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외국인 취급에 있어 경제적 또는 법률적으로 특권 제한을 설정할 수 있다.



아오키는 이 각서를 바탕으로 대영 조약 개정 협상을 직접 지휘했으며, 주일 영국 공사 프레이저와 협상을 진행했다. 1891년(메이지 24년) 제1차 마쓰가타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으로 유임되어 영사재판권 폐지를 목표로 조약 개정에 힘썼다. 그의 개정안은 기존과 달리 치외법권 문제에 대해 '대등 합의'를 추구했으며, 이는 외국인 판사의 대심원 임용 불가와 영사재판권 폐지 전 외국인 부동산 소유 불허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7월 10일에는 귀족원 자작 의원으로 선출되어 1기 동안 활동했다.[18]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던 영국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국제 정세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협상은 성공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조약 조인 직전인 1891년(메이지 24년) 5월 오쓰 사건이 발생하자, 아오키는 책임을 지고 외무대신직에서 사임했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공사에게 범인 쓰다 산조(津田三蔵)의 사형을 약속했으나 실제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나오자, 공사의 항의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의 지시였다고 해명하여 두 사람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사임 후 1892년(메이지 25년)에는 주독 공사로 임명되었고, 후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는 아오키에게 주영 공사직을 겸임하도록 했다. 1894년(메이지 27년), 아오키는 주영 공사로서 외무대신 무쓰와 협력하고 알렉산더 폰 짐볼트(アレクサンダー・フォン・シーボルト)를 통역으로 하여 일영 통상항해조약 개정을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1898년(메이지 31년)에는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1900년(메이지 33년)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는 등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추밀 고문관을 역임했다.

4. 독일 문화 도입과 영향

아오키 슈조는 명륜관에서 공부한 후, 유학 후보로서 마쓰오카 유키와 함께 나가사키로 파견되어 의학 수련을 받았다.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인 교사들이 독일 의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습득을 권장했기 때문에, 당시 수습생들 사이에서는 독일이 유학 희망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조슈번에서는 유학생 파견 시 두 명씩 동행하도록 했으나, 아오키는 마쓰오카와의 동행을 거부하고 선배 의사인 한아이 슌켄과의 동행을 원했다. 그러나 보신전쟁 발발로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1868년(메이지 원년), 아오키는 번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사번 출신의 하기와라 산케이와 함께 프로이센 유학 허가를 받았다.[12] 독일에 도착한 후, 그는 의학에서 정치 및 경제학으로 전공을 무단 변경하여 문제가 되었으나, 당시 독일에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1872년(메이지 5년)에는 북독일 유학생 총대가 되어 재독 유학생들의 전공 결정에 관여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유학생들의 전공이 군사학과 의학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아오키는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육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권유로 임업, 제지, 맥주, 제융(라샤 융단) 등 새로운 분야를 전공하여 성공한 유학생들도 나왔다.

아오키는 유학생 및 외교관(독일 공사)으로서 독일에 총 25년간 머물렀다. 그는 일본의 독일 전문가 1세대로서 독일의 정치 체제와 문화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독일학협회 회원 및 독일학협회학교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독일학 보급에도 기여했다.[20]

외교관으로서 아오키는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 오랫동안 깊이 관여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일찍부터 강경한 반러시아주의와 한반도 진출을 주장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5. 가족 관계

아오키(青木) 자작가문 문장


1904년 아오키의 딸 한나와 하츠펠트 백작의 결혼식


아오키 슈조는 나가토국 아사군 생타무라[11](후의 야마구치현 산요오노다시) 출신으로, 본명은 미우라 단시치(三浦団七)였다. 조슈번의 마을 의사인 미우라 겐츄(三浦玄仲, 1820–1892)와 그의 아내 유코(友子, 1823–1901, 란학자 메분테이(目文貞)의 여동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에 모리 케이친의 시의이자 일본에서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한 란학자 아오키 슈히츠(青木周弼)의 동생이자 후일 궁정 대전의가 되는 아오키 켄조(青木研蔵, 1815–1870)의 양자가 되어 사족이 되었다. 이때 양아버지와 양할아버지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슈조(周蔵)로 개명하고, 켄조의 딸 테루(テル)와 결혼하였다.

1877년 4월 20일, 아오키 슈조는 독일 브레멘에서 프로이센 귀족의 딸인 엘리자베트 폰 라데(Elisabeth von Rhade|엘리자베트 폰 라데de, 1849~1931)와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프로이센 왕국 폼메라니아 주의 스트립포우(Strippow|슈트리포de, 현 폴란드 스트셰포보(Strzepowo))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기 위해 1877년 외무성의 허가를 얻었으나, 첫 부인 테루와의 이혼이 아오키 가문으로부터 승낙을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아오키는 테루에게 새로운 남편을 찾아주고 그 납채금(結納金)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혼을 성사시켰는데, 총 세 번 남편을 소개하고 세 번 납채금을 지불해야 했다.[13] 이 과정에서 시나가와 야지로 등의 도움을 받았다.[14]

아오키 슈조와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외동딸 한나(Hanna, 일본 이름 하나코(花子), 1879년 12월 16일 ~ 1953년 6월 24일)가 있었다. 한나는 1904년 12월 19일 도쿄에서 하츠펠트 추 트라헨베르크 가문의 알렉산더 폰 하츠펠트 백작(Alexander Graf von Hatzfeldt zu Trachenberg, 1877~1953)과 결혼했다. 알렉산더 백작은 헤르만 폰 하츠펠트 공작의 차남으로, 당시 주일 독일 공사관의 외교관보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부 사이에는 외동딸 히사(Hissa Gräfin von Hatzfeldt, 1906년 2월 26일 ~ 1985년 6월 4일)가 태어났다.[21][22][23]

손녀 히사는 1927년 뮌헨에서 에르빈 폰 나이페르크 백작(Erwin Graf von Neipperg, 1897–1957)과 결혼했다. 에르빈 백작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오스트리아 장군이었던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백작의 증손자이다.[24] 히사와 에르빈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현재 남자 후계는 단절되었다. 히사의 딸 중 한 명인 마리아 헤드비히 폰 나이페르크 백작 부인(Maria Hedwig Gräfin von Neipperg, 1929년 8월 10일 출생)은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였던 앤서니 윌리엄스 경과 결혼했다.

히사의 외손자 중 한 명이자 살름-라이퍼샤이트 가문(Salm-Reifferscheidt)의 당주인 니클라스 살름-라이퍼샤이트 백작(Niklas Graf Salm-Reifferscheidt)은[25] 2004년 아오키 슈조가 세운 나스시오바라시의 아오키 소학교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고, 나스 별저를 방문하여 아오키 하나의 사진 등을 기증했다.[26] 니클라스는 고조부 아오키 슈조에 대해 "일본인으로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어 독일인 같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미래 발전을 확신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26]

아오키 슈조는 1914년 도쿄 고지마치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6][7] 묘는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에 있다. 부인 엘리자베트는 1931년 4월 5일 독일 바이에른 자유주 뮌헨에서 사망했다.

아오키 슈조에게는 양자도 있었다. 첫 부인 테루와 이혼하면서 아오키 가문의 가독을 이을 후계자로 스기 손시치로(杉孫七郎)의 삼남 아오키 우메사부로(青木梅三郎, 1873–1941)를 양자로 들였다.[27] 아오키 우메사부로는 자작위를 계승했으며, 후쿠하라 신조(福原信蔵)의 차녀 푼코(文子, 1885–1941)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 친부모 및 양부
  • 친부: 미우라 겐츄 (三浦玄仲, 1820–1892) - 마을 의사
  • 친모: 유코 (友子, 1823–1901) - 란학자 메분테이(目文貞)의 여동생
  • 양부: 아오키 켄조 (青木研蔵, 1815–1870) - 메이린칸 교수, 궁정 대전의

  • 배우자
  • 전처: 테루 (テル) - 양부 아오키 켄조의 딸
  • 후처: 엘리자베트 폰 라데 (Elisabeth von Rhade, 1849–1931) - 프로이센 귀족

  • 자녀 및 직계 후손
  • 외동딸: 한나 (Hanna, 일본 이름 하나코(花子), 1879–1953) - 알렉산더 폰 하츠펠트 백작(Alexander Graf von Hatzfeldt, 1877–1953)과 결혼[21][22]
  • 손녀: 히사 폰 하츠펠트 (Hissa Gräfin von Hatzfeldt, 1906–1985) - 에르빈 폰 나이페르크 백작(Erwin Graf von Neipperg, 1897–1957)과 결혼[23][24]
  • 증손녀: 마리아 헤드비히 폰 나이페르크 (Maria Hedwig Gräfin von Neipperg, 1929년 출생) - 앤서니 윌리엄스 경과 결혼

  • 양자 및 그 후손
  • 양자: 아오키 우메사부로 (青木梅三郎, 1873–1941) - 자작, 스기 손시치로의 삼남. 후쿠하라 신조의 차녀 푼코(文子, 1885–1941)와 결혼.[27]
  • 의손자: 아오키 시게오 (青木重夫, 1904–1961) - 자작, 우메사부로의 장남. 아라키 와이치(荒木和一)의 삼녀 와코(和子)와 결혼.[27]
  • 의손녀: 타즈루코 (田鶴子, 1906–1989) - 우메사부로의 장녀, 요시오카 노리타케(吉岡範武)와 결혼.
  • 의손녀: 타카코 (多嘉子, 1907–1981) - 우메사부로의 차녀, 이토 킨이치로(伊藤謹一郎)와 결혼.
  • 의손자: 아오키 모리오 (青木盛夫, 1910–1977) - 외교관, 우메사부로의 차남. 스기무라 요타로(杉村陽太郎)의 장녀 와코(和子)와 결혼.
  • 의손자: 사다오 (韶夫, 1912–1944) - 우메사부로의 삼남. 사사키 센슈(佐々木千秀)의 장녀 마사코(昌子)와 결혼.
  • 의손자: 미키오 (幹夫, 1914–1945) - 우메사부로의 사남.
  • 의손녀: 스미코 (寿美子, 1916–?) - 우메사부로의 삼녀, 타카츠지 마사미(高辻正己)와 결혼.
  • 의손자: 슈오 (周夫, 1918–?) - 남작(츠지 타로(辻太郎)의 양자), 우메사부로의 오남. 사사키 센슈(佐々木千秀)의 차녀 요시코(淑子)와 결혼.

  • 기타 친족
  • 친동생: 미우라 타이스케 (三浦泰輔) - 코부 철도 사장 역임.
  • 의리 증손자: 아오키 모리히사 (青木盛久, 1938년 출생) - 페루 일본 대사관 공관 점거 사건 당시 주 페루 특명전권대사. 아오키 우메사부로의 손자로 혈연 관계는 없다.
  • 의리 증손자: 하라 노리유키 (原範行) - 일본 호텔 협회 회장 역임. 아오키 우메사부로의 손자로 혈연 관계는 없다.[28][29]

6. 평가 및 유산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05
[2] 뉴스 VISCOUNT AOKI COMING AS JAPAN'S AMBASSADOR.; Twice Foreign Minister and Twice Envoy to Germany. VISCOUNTESS IS A GERMAN The Appointment of an American Ambassador to Japan Is to be Made in a Few Day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05-12-27
[3] 뉴스 AOKI REACHES WASHINGTON.; First Ambassador from Japan Ready to Take Up Dutie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06-04-25
[4] 뉴스 JAPANESE NOT SO PATRIOTIC---AOKI; Ambassador Would Like Them to Become Naturalized and Intermarry. DENIES ANY "SITUATION " Says There Is Nothing of a Diplomatic Character Now Under Consideratio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07-06-21
[5] 서적 California: a history 2015
[6] 간행물 Japan Times, Weekly Edition 1913
[7] 뉴스 VISCOUNT AOKI DIES.; Former Ambassador from Japan Passes Away at 70 In Tokio.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14-02-17
[8] 문서 See Japanese link of this page
[9] 문서 see Okada
[10]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11] 문서 「生田村」は没時の地方公共団体としての名称であり、出生当時の名称は「小埴生村」。
[12] 논문 青木周蔵 渡独前の修学歴(広島修道大学学術選書) https://shudo-u.repo[...] 丸善出版 2018
[13] 간행물 特集 華族 近代日本を彩った名家の実像 https://books.google[...] 歴史読本 2013-10
[14] 문서 伊藤隆(2001)p.132
[15] 문서 伊藤隆(2001)pp.132-133
[16] 문서 伊藤隆(2001)p.133
[17] 간행물 官報 1887-05-10
[18]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19]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20] 간행물 獨協大学ニュース 2018-11
[21] 웹사이트 Hanna Aoki http://www.thepeerag[...]
[22] 웹사이트 Alexander Graf von Hatzfeldt http://www.thepeerag[...]
[23] 웹사이트 Hissa Gräfin von Hatzfeldt http://www.thepeerag[...]
[24] 웹사이트 Erwin Graf von Neipperg http://www.thepeerag[...]
[25] 웹사이트 Niklas Maria Franz Karl Erwin Vinzenz Altgraf zu Salm-Reifferscheidt-Raitz http://www.thepeerag[...]
[26] 웹사이트 ドイツに学び 日本を強い国に 不平等条約を押し付けられた時代の挑戦者 青木周蔵 http://www.newsdiges[...] ドイツニュースダイジェスト 2015-04-17
[27]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28] 서적 原三渓物語
[29] 서적 熊本県人物・人材情報リスト 日外アソシエーツ 2007
[30] 간행물 官報 1886-10-21
[31] 간행물 官報 1890-02-10
[32] 간행물 官報 {{NDLDC|2952564/2}} 1914-02-18
[33] 간행물 官報 1889-11-30
[34] 간행물 官報 1890-07-01
[35] 간행물 官報 1894-08-31
[36] 간행물 官報 第748号「叙任及辞令」 1885-12-26
[37] 간행물 官報 第1278号「叙任及辞令」 1887-09-30
[38] 간행물 官報 1888年2月24日 敍任及辭令 {{NDLDC|2944629/1}} 1888-02-24
[39] 간행물 官報 第2372号「叙任及辞令」 1891-05-29
[40] 간행물 官報 1895年8月29日 敍任及辭令 {{NDLDC|2946926/3}} 1895-08-29
[41] 아시아역사자료센터 特命全権公使子爵青木周蔵独逸国勲章受領及佩用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A10112[...]
[42] 간행물 官報 第5718号「叙任及辞令」 190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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