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창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창남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비행사로,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1년 일본에서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으며, 1922년에는 한국 지도를 그린 금강호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하여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1930년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한국 최초의 비행사 논란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중장 - 신익희
    신익희는 해공이라는 호를 가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하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중장 - 신규식
    신규식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고 신해혁명에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다가 단식 투쟁으로 사망했다.
  • 일제강점기의 비행사 - 노백린
    노백린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한인 비행사 양성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공군력 강화에 기여했다.
  • 일제강점기의 비행사 - 장덕창
    장덕창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고 조선 횡단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하여 공군 참모총장까지 역임한 군인, 그리고 민주당에서 정치 활동을 한 정치인이다.
  • 중국에 거주한 한국인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중국에 거주한 한국인 - 김구
    김구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통일운동가로서, 동학 입교, 치하포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인애국단 조직,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안창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0년대 안창남
한글 이름안창남
한자 이름安昌男
로마자 표기An Changnam
인물 정보
출생일1901년 1월 29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사망일1930년 4월 2일
직업비행가

2. 생애

안창남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나 휘문의숙 재학 중 미국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품었다.[6]

3·1 운동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1921년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비행사가 되었다.[6] 1922년에는 도쿄와 오사카 간 우편 비행 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1922년동아일보》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여의도 상공에서 모국 방문 비행을 성공시켜, 식민지 치하 조선 민중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안겨주며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7][6][2] 당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6]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조선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2][8] 산시성에서 연석산 군벌 휘하의 항공 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도모하고 비밀 항일 조직 대한독립공명단을 결성하기도 했다.[8]

1930년 4월, 비행 훈련 중 불의의 사고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8][2] 사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8][1]

2. 1. 어린 시절과 비행사의 꿈

순흥 안씨로, 1901년 3월 19일 한성부(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5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휘문의숙에 입학했으나, 1919년 중퇴했다. 휘문의숙 재학 중이던 1916년 또는 1917년, 미국 조종사 아트 스미스가 서울 상공에서 펼친 곡예 비행 시범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6]

안창남


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 과정에서 집안의 돈을 가지고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오사카시 니시구에 있는 자동차 학교 전수과에서 2~3개월간 자동차 운전과 엔진 관련 기술을 배우고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이후 학비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의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 기체부에서 6개월간 비행기 구조 등을 연구했다.

1920년 8월,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비행학교는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어 6개월 과정을 마치면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정식 조종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안창남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 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에 비행학교를 세우려는 꿈도 있었으나 자금난으로 이루지 못했다.

1921년 5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3등 비행기 조종사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은 도쿄-마쓰에 간 원거리 비행, 2000m 상공에서 1시간 머물기, 500m 상공에서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기 등 세 가지 과제로 구성되었다. 총 17명이 응시했으며,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안창남은 2명의 합격자 중 수석을 차지하며 3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제2호)를 취득, 마침내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다.[6] 이듬해인 1922년 5월에는 승격 시험에 합격하여 2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제57호)를 취득했다.

2. 2. 일본에서의 비행 훈련



한성부 출신으로, 휘문의숙 재학 중 아트 스미스의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키웠다.[6] 3·1 운동 직후 휘문의숙을 중퇴하고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카시 니시구의 자동차 학교에서 2개월간 자동차 운전과 엔진 기술을 배운 뒤, 학비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서 6개월간 비행기 구조를 연구했다. 1920년 8월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과 조종술을 배웠다. 비행학교 과정은 기술 교육 중심으로 6개월 만에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으나, 실제 조종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안창남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 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에 비행학교를 세우려는 꿈이 있었으나 자금 문제로 이루지 못했다.

안창남이 졸업한 1920년 11월에는 비행사 자격 규정이 없었으나, 1921년 4월 25일 규정이 신설되었다. 그는 1921년 5월 일본 최초로 시행된 3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면허(제2호)를 취득했다. 시험은 도쿄-마쓰에 간 원거리 비행, 2000m 상공에서 1시간 체공, 500m 상공에서 엔진을 끄고 활공 착륙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총 17명의 응시자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으며, 합격자 2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6] 1922년 5월 9일에는 승격 시험에 합격하여 2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제57호)를 취득했다.

면허 취득 후 도쿄에서 비행사로 활동했으며, 비행학교에서 만난 혼다 이네사쿠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22년 11월, 도쿄-오사카 간 우편 비행 경기에 나카시마식 150마력 비행기로 참가하여 왕복 비행에 성공하고 상금 3천을 획득했다. 그의 성공은 일본에서 비행 기술을 배우려는 조선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23년 6월에는 제4회 현상 비행 경기 대회에 참가하여 1105km를 8시간 20분 만에 비행하여 2등을 차지했으며, 부상으로 비행기 1대와 관련 비용에 상당하는 상금 및 연료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호시 토오루 추도식에서 전단을 살포하던 중 논에 추락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안창남은 지진 발생 3일 전부터 급병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지진 후 마에바시시로 피난했다. 그는 친구 혼다 이네사쿠에게 도쿄 내 조선인에 대한 불안한 분위기를 전하며 신변 보호를 부탁했고, 혼다의 도움으로 시모노세키시를 거쳐 관부연락선을 타고 잠시 귀국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혼다와 함께 지바현 쓰다누마의 이토 오토지로를 찾아가 이토 비행장 사용 허가를 받고 비행 훈련을 계속했다. 1924년에는 이토 비행기 연구소에서 경사 비행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일본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되면서 안창남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1924년 9월 27일, 동료 비행사 스즈키 기쿠오와 함께 음식점에 있다가 일본 국수주의자를 자칭하는 폭력배 3명에게 습격당했다. 이들은 안창남이 조선 독립 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협박하고 금품을 갈취하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창남은 도쿄로 피신했다가 결국 비행기(나카시마식 5형기)를 처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24년 10월 17일, 혼다 이네사쿠가 가고시마에 개설한 비행장의 개장식에서 시범 비행을 한 것이 그의 일본에서의 마지막 비행이 되었다. 이후 1925년 1월, 안창남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2. 3. 모국 방문 비행과 민족의 영웅



1922년, 《동아일보》에서 성금을 모아 안창남을 초청하면서 그의 모국 방문 비행이 성사되었다.[6] 같은 해 12월 10일, 안창남은 한국 지도를 그려넣은 자신의 애기(愛機) '금강호(金剛號)'[7]를 타고 여의도 상공에서 역사적인 비행을 선보였다. 이는 한국에서의 첫 공개 비행은 아니었지만, 한국인 조종사가 조국 상공을 비행하는 최초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약 5만 명의 인파가 여의도 백사장에 운집했다.[6][2] 이 중 학생만 1만 명에 달했으며,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는 하루 4차례 할인된 가격의 임시 열차를 운행하기도 했다.[6]

비행 당일 날씨는 영하였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주최 측은 비행 중단을 권유했지만, 안창남은 "군중을 보라"며 비행을 강행했다.[6] 그는 총 두 차례 비행했으며, 첫 번째 비행은 13분, 두 번째 비행은 5분간 이어졌다.[6] 비행은 군중 위를 선회하는 비교적 간단한 시범 비행이었으나[2], 당시 신문은 "꿈인 듯 생시인 듯 어쩔 줄 모르고 황홀했다"고 보도하며 그 감격을 전했다.[6]

안창남의 비행은 식민지 치하 조선 민중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자전거 선수 엄복동과 함께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6], "날개로는 안창남, 수레로는 엄복동, 다리로는 현금녀" 등의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6] 동아일보는 안창남의 비행을 후원하고 그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했다.[2]

시범 비행 후 서울과 인천 상공을 비행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다른 도시 비행 계획은 취소되었다.[2] 안창남은 같은 해 12월 말, 한국 상공 비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2] 그의 모국 방문 비행은 많은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사의 꿈을 심어주어, 이후 일본 비행학교로 유학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2. 4.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이 심해지면서[2], 안창남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924년 9월에는 일본국수단원을 자칭하는 폭력배들에게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추궁당하며 금품을 갈취당하는 사건까지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창남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1924년 서울로 돌아왔다가[3], 결국 1925년 1월 중국으로 망명했다[2][3].

중국 망명 후 안창남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8],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시성의 군벌 연석산 휘하로 들어가 산시 항공 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8]. 이곳에서 그는 중국인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한편, 비밀리에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항일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8]. 이는 자신의 비행 기술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30년 4월, 안창남은 산시성 타이위안시 인근에서 비행 훈련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2]. 당시 비행기의 성능과 안전성이 매우 낮았던 점을 고려할 때[6], 사고 원인은 엔진 결함[6] 또는 비행 중 모래 먼지로 인한 시야 불량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일본 측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2].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사후 그의 유해는 타이위안시에 매장되었으나, 196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묘지가 파괴되어 유해마저 유실되는 비극을 겪었다[6].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 망명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1][8]. 하지만 미혼으로 사망하여 직계 후손이 없어 훈장은 정부에서 보관 중이다[8].

2. 5. 죽음과 사후

1930년 4월, 산시성 항공학교에서 훈련 비행 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8][2] 사고 원인으로는 엔진 결함[8] 또는 비행 중 모래 먼지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산비탈에 충돌한 것 등이 거론된다. 당시 비행기의 성능과 제조 기술이 매우 열악했던 것도 사고의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8] 일각에서는 일본 당국의 암살 음모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2]

사후 그의 유해는 중국 타이위안시에 매장되었다.[8] 그러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묘지가 파괴되었고, 유해도 함께 유실되었다. 1965년까지는 묘지가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8]

대한민국 정부는 안창남이 중국 망명 후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8][1] 하지만 그는 미혼으로 사망하여 직계 후손이 없어, 추서된 훈장은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다.[8]

3. 한국 최초 논란

안창남은 오랫동안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널리 알려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운동가 노백린미국에서 길러낸 한국인 비행사들이 안창남보다 약 1년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최초는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찍이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비행사 양성에 힘썼으며, 그 결과 여러 한인들이 안창남보다 먼저 비행사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안창남은 한국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9]

3.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행사 양성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찍부터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군무장관이었던 노백린은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강조하며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사 양성을 추진했다.[9] 1919년 4월 17일자 《독립신문》은 이러한 노백린의 활동과 비행사 양성소 설립 계획을 보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월로우드(Willows)에 비행사 양성소가 설립되었다.[9] 양성소 설립에는 김종림, 곽임대 등 많은 해외 동포들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는데, 특히 농장주였던 김종림은 설립 자금으로 현금 3만달러을 기부하고 비행장 건설, 항공기 연료 등 시설과 기구 마련에도 크게 기여했다.[9] 덕분에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명, 한국인 교수진 6명을 갖추고 19명의 학생을 교육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양성소는 이후 문을 닫아 졸업생을 배출하지는 못했다.[9]

월로우드 비행사 양성소 설립 이전에 이미 6명의 한국인이 비행사 자격을 갖추었다. 이용선, 이초, 오임하, 이용근, 한장호, 장병훈은 1920년 2월 캘리포니아주 래드우드(Redwood) 비행학교를 수료했다. 《독립신문》은 1920년 2월 5일자 기사에서 수직 꼬리날개에 태극마크가 그려진 항공기 앞에 선 이들의 사진과 함께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고 소개했다.[9] 이들이 안창남보다 약 1년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안창남은 한국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지만 한국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평가받는다.[9]

3. 2. 초기 한국인 비행사들

안창남은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널리 알려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운동가 노백린미국에서 길러낸 한국인 비행사들이 안창남보다 약 1년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안창남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다.[9] 그러나 여전히 한국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의미는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19년 4월 17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군무총장(현재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백린은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연설하며 항공력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노백린미국으로 건너가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스(Willows)에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이 비행사 양성소 설립에는 김종림, 곽임대 등 많은 해외 동포들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다. 특히 농장주였던 김종림은 설립 자금으로 현금 3만달러을 기부하고 비행장 건설, 항공기 연료 등 시설과 운영 전반을 적극 지원했다. 김종림 등의 후원으로 비행기 2대와 미국인 기술자 1명, 한국인 교수진 6명을 확보했으며, 19명의 학생이 입교했다. 하지만 이후 재정난 등으로 윌로스 비행사 양성소는 문을 닫게 되어 정식 졸업생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안창남보다 앞서 비행사가 된 이들은 윌로스 비행학교의 교수진으로 활동했던 6명이다. 《독립신문1920년 2월 5일자는 수직 꼬리날개에 태극 마크가 선명한 항공기 앞에 선 6명의 사진과 함께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비행사 (1920년 레드우드 비행학교 수료)'''
이름
이용선
이초
오임하
이용근
한장호
장병훈



이들은 1920년 2월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Redwood) 비행학교를 먼저 수료한 인물들이었다.

참조

[1] 뉴스 우리나라 상공 날은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언론학자에 의해 새로 태어난 안창남 (An Chang-nam, the first Korean pilot to fly in our country's skies, born again in the discussions of scholars) http://news.icross.c[...] Chungcheong Review 2002-12-13
[2] 웹사이트 An Chang-nam: First Korean pilot who became national hero https://www.koreatim[...] 2012-03-14
[3] 뉴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 (Our country's first female pilot, Park Kyung-won) http://www.arirang21[...] Arirang News 1999-12-25
[4] 뉴스 여의도가 높아진다 (Yeouido becoming more expensive) http://www.chosun.co[...] The Chosun Ilbo 2005-10-22
[5] 웹사이트 (69)순흥 안씨 https://www.joongang[...] 1983-06-18
[6]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7] 웹인용 안창남(安昌男)의 모국방문 (母國訪問) 비행대회(飛行大會) http://seoul600.visi[...] 서울특별시 2008-04-22
[8] 웹사이트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9] 웹사이트 정부수립 이전의 항공 - 항공의 태동 http://www.airportal[...] 한국정보포탈시스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