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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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1097년부터 109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1085년 셀주크 왕조에게 안티오키아를 빼앗긴 비잔티움 제국은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기 위해 공방전을 벌였다. 십자군은 도시를 포위했으나,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십자군은 성창 발견과 같은 사건을 통해 사기를 높였고, 결국 도시를 함락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내부 분열과 지도자 부재로 인해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이 지연되었고, 안티오키아 공국이 세워졌다.
1085년 셀주크 왕조가 비잔티움 제국에서 안티오키아를 빼앗았다. 안티오키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비잔티움 축성술로 강화되었는데, 이때는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기 때문에 재건 및 강화된 지 얼마 안 된 성벽은 상처 없이 그대로였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던 야기 시얀(Yaghi-Siyan)은 1097년 아나톨리아 반도를 진군한 십자군을 경계하여 인근 무슬림 정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는 십자군에 대비하여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주교(Orthodox Patriarch of Antioch) 요한 더 오시트(John the Oxite)를 수감하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람들을 추방했으나, 시리아 정교회 시민들은 거주를 허락했다.[14]
1097년 10월 20일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하면서부터 1098년 6월 2일 함락될 때까지 이어진 첫 번째 공방전은 십자군 내부의 갈등, 식량 부족, 외부 세력의 개입, 그리고 배신으로 인한 함락 등 다사다난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2. 배경
안티오키아 공방전과 제1차 십자군에 관해서는 샤르트르의 풀처, 투데보드의 페테르, 아길레르의 레몽, 그리고 익명의 ''게스타 프랑코룸''과 같은 여러 동시대 자료가 존재한다. 십자군에서 온 9통의 편지가 남아 있으며, 그 중 5통은 공방전이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편지는 도시가 함락된 직후인 9월에 쓰여졌다.[13]
1097년 안티오키아는 오론테스 계곡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었고, 400개의 탑이 박힌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강은 도시 북쪽 벽을 따라 흐르다가 북서쪽에서 안티오키아로 들어와 도시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나갔다. 실피우스산은 요새로 덮여 있었고, 안티오키아의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6개였다. 계곡 경사면 때문에 남쪽, 동쪽, 서쪽에서 접근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평평한 땅을 가로질러 북쪽에서 오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경로였다. 도시 방어 시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통치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1097년 십자군 도착 전까지 안티오키아가 두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매번 배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14]
비잔틴 제국이 969년에 안티오키아를 재정복한 후, 주변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실피우스 산에 요새가 건설되었다. 역사가 휴 케네디는 이 요새가 "주요 방어 수단으로 접근 불가성을 이용했다"고 평했다.[15]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점령 방법을 고려했다. 군대의 아나톨리아 횡단 중 소모된 피해로 인해 지도자들은 봄에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미루는 것을 고려했다. 십자군의 비잔틴 고문 타티키오스는 968년에 비잔틴군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전술, 즉 약 약 19.31km 떨어진 바그라스에 자리 잡고 통신망을 차단하여 도시를 봉쇄하는 것을 제안했다.[19] 툴루즈의 레몽 4세만이 도시 공격을 옹호했다.[20] 결국,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공방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19]
2. 1. 안티오키아의 중요성
안티오키아는 한때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 제국 아래에서 동지중해 최고의 대도시로 번영했던 곳이다. 비록 중세에는 우마이야 왕조와 동로마 제국 간의 쟁탈전으로 쇠퇴했지만,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유명한 중요한 도시였다. 이 성곽 도시는 서쪽으로는 오론테스 강에 면하고, 남쪽은 가파른 계곡으로 보호받았으며, 동쪽은 하비분 나자르 산(실피우스 산) 정상까지 성벽이 뻗어 있고 산 정상에는 요새를 갖추고 있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 쉬운 구조였다.[14][15]
1085년 셀주크 왕조에게 함락될 당시,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의 마지막 비잔틴 요새였다.[16] 이 함락은 내부 배신으로 인한 것이었고, 재건 및 강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벽은 손상되지 않았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한 야기-시얀은 1097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를 진격해 온 십자군에 주목하고 있던 시리아 지방의 몇 안 되는 영주 중 하나였다. 그는 인근 셀주크계 무슬림 정권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알레포의 리드완은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에 거절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등 다른 귀족들은 증원군을 보내기로 동의했다.[18]
십자군을 맞이하면서 야기-시얀은 도시 내 다수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이 십자군에 호응할 것을 우려했다. 정교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를 체포하고,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을 성 밖으로 추방했지만,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은 남는 것을 허락했다.[17][18]
2. 2. 셀주크 제국의 지배
1085년 셀주크 왕조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빼앗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강화된 비잔티움 축성술 덕분에 성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던 야기 시얀(Yaghi-Siyan)은 1097년 십자군의 접근을 의식하고 주변 무슬림 정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주교(Orthodox Patriarch of Antioch) 요한 더 오시트(John the Oxite)를 가두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람들을 추방했지만, 시리아 정교회 시민들은 거주를 허락했다.[14]
야기-시얀은 1097년 십자군이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십자군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18] 터키 통치하에 있었지만, 주민 대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17] 야기-시얀은 이전에는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지만, 십자군이 접근하면서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옥시테의 요한을 투옥하고, 성 바울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바꾸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그리고 알레포의 리드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토그테킨, 케르보가, 바그다드와 페르시아의 술탄, 홈스의 에미르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한편, 안티오키아에서는 공방전에 대비하여 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18]
2. 3. 십자군의 등장과 야기 시얀의 대비
1085년 셀주크 왕조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빼앗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비잔티움 축성술로 강화된 안티오키아는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기 때문에, 재건 및 강화된 지 얼마 안 된 성벽은 손상되지 않았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던 야기 시얀은 1097년 아나톨리아 반도를 진군한 십자군을 경계하여 인근 무슬림 정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십자군에 대비하여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주교 요한 더 오시트를 수감하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람들을 추방했으나, 시리아 정교회 시민들은 거주를 허락했다.[14][17][18]
야기-시얀은 십자군이 아나톨리아를 통과하여 진군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십자군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18] 안티오키아 주민 대다수는 기독교인이었으나,[17] 야기-시얀은 이전과 달리 십자군에 대비하여 안티오키아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 옥시테의 요한을 투옥하고, 성 바울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바꾸었으며,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도시에서 추방했다. 야기-시얀은 알레포의 리드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에 거절당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토그테킨, 케르보가, 바그다드와 페르시아의 술탄, 홈스의 에미르는 증원군을 보내기로 동의했다. 한편 안티오키아에서 야기-시얀은 공방전에 대비하여 물자를 비축했다.[18]
안티오키아는 한때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 제국 아래에서 동지중해 최고의 대도시였으나, 중세에는 우마이야 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쟁탈전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설한 이래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알려진 중요한 도시였다. 이 성곽 도시는 서쪽으로는 오론테스 강에 면하고, 남쪽은 가파른 계곡으로 보호받았으며, 동쪽은 하비분 나자르 산(실피우스 산) 정상까지 성벽이 뻗어 있고 산 정상에는 요새가 있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 쉬운 구조였다.
1085년 셀주크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았을 때는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기 때문에, 재건 및 강화된 지 얼마 안 된 성벽은 손상되지 않았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던 야기-시얀은 1097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를 진격해 온 십자군에 주목하고 있던 시리아 지방의 몇 안 되는 영주였으며, 인근 셀주크계 무슬림 정권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응답이 없었다. 유력한 세력으로는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셀주크 왕조의 왕 두카크와, 두카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이며 시리아 셀주크 왕조를 분열시켜 싸우고 있던 알레포의 왕 리드완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십자군을 맞이하면서 야기-시얀은 시내에 다수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이 십자군에 호응할 것을 우려하여, 정교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를 체포하고,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을 성 밖으로 추방했지만,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은 남는 것을 허락받았다.
3. 제1차 공방전 (1097년 10월 ~ 1098년 6월)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안티오키아 공격 방식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툴루즈 백작 레몽은 즉각적인 공격을 주장한 반면,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타란토 공 보에몽은 도시 포위를 선호했다. 결국 포위전으로 결정되었지만, 이는 십자군에게 여러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12월, 식량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와 보에몽이 식량을 찾아 원정을 떠났지만, 그 사이 안티오키아 총독 야기 시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십자군의 식량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굶주림으로 식인 행위까지 벌어졌고, 은자 피에르를 포함한 탈영병도 속출했다.
2월 9일 알레포에서 온 리드완의 군대도 십자군에게 패배했다.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특사 타티키오스가 십자군 진영을 떠나자,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함락 후 자신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에드거 애설링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도착하여 공성 무기 제작용 목재 등을 지원했다. 십자군은 이를 활용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도시 봉쇄를 강화했다.
4월, 파티마 왕조 사절단이 셀주크 제국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지만, 예루살렘 영유 문제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5월 말, 모술의 케르보가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진군해 왔다. 십자군은 케르보가가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함락시켜야 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성벽 경비병 피루즈를 매수하여 성문을 열게 하는 계략을 세웠고, 6월 2일 실행되었다. 피루즈의 배신으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3. 1. 십자군의 도착과 포위
1097년 10월 20일,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성 밖의 오론테스강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타란토 공 보에몬, 툴루즈 백작 레몽이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 공격 방법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레몽은 직접 공격을 주장했으나, 보에몽과 고드프루아는 공성전을 주장했다. 레몽은 마지못해 동의했고, 10월 21일 십자군은 도시의 일부분을 포위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쌓은 성벽은 직접 공격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으나, 야기 시얀은 도시를 충분히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이 없었다. 십자군이 즉시 공격하지 않자 야기 시얀은 안도하고 용기를 얻었다.[26]
보에몬은 도시의 북동쪽 모퉁이의 "성 바울 문"에 야영을 했다. 레몽은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개 문" 앞에, 고드프루아는 역시 서쪽의 "공작 문" 앞에 진지를 세웠다. "공작 문" 앞에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타렌키(Talenki) 마을에 이르는 배다리(bridge of boats)가 있었다. 남쪽 "두 자매의 탑", 북서쪽 모퉁이의 "성 게오르기오스 문"은 십자군이 봉쇄하지 못해, 공성전 기간 이들 문은 야기 시얀에 대한 보급에 사용되었다. 도시의 남쪽과 동쪽의 측면은 언덕 지역으로, 성채와 철문이 지키고 있었다.
3. 2. 초기 전투와 기아
11월 중순,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또한 제노바 공화국 함대가 성 시메온 항구에 도착하여 많은 식량과 보급품을 가져왔다.[35] 그러나 공성전이 길어지면서 12월에 고드프루아가 병에 걸렸고, 충분했던 식량도 겨울이 오기 전에 바닥나기 시작했다. 12월 말,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는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식량 징발을 위해 남쪽으로 떠났다.
십자군 병력이 줄어든 틈을 타 야기 시얀은 12월 29일 성 게오르기우스 문으로 출격하여 강 건너 탈렌키 마을에 있던 레몽의 숙영지를 공격했다.[35] 레몽은 이를 격퇴했지만, 성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다.[35] 한편, 보에몽과 로베르의 군대는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러 온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군대와 충돌했다.[35] 십자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식량을 충분히 약탈하거나 징발하지 못한 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야 했다.[35]
12월은 양측 모두에게 불길한 사건들로 가득했다. 12월 30일에는 지진이 일어났고,[37] 그 후 몇 주 동안은 추운 날씨와 계절에 맞지 않는 폭우가 내렸다.[37] 두카크는 지진과 악천후 때문에 십자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37]
식량 부족으로 인해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십자군 진영에는 기아가 발생하여 사람과 말이 죽어갔다. 전군에서 7명 중 1명이 굶어 죽었고,[37] 군마는 700마리밖에 남지 않았다.[38] 군중 십자군에서 살아남은 은자 피에르가 이끌던 가난한 병사들 중에는 죽은 적병의 시체를 먹는 식인 행위를 하는 자들도 나타났다.[39] 기사들은 굶주림을 견디거나 말의 시체 등을 먹었다. 시리아의 크리스트 교도와 키프로스 섬에 있던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 시메온이 십자군에게 식량을 보냈으나 기아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39]
1098년 1월, 기사와 병사들 중에서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은자 피에르도 있었는데, 탕크레드에 의해 즉시 발견되어 야영지로 돌아왔다.[40] 이 사건으로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40]
3. 3. 타티키오스의 이탈과 보에몽의 계략
2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특사이자 동로마 제국의 장군 타티키오스가 십자군 숙영지를 갑자기 떠났다. 그는 십자군에게 조언과 아나톨리아 반도 길 안내를 맡고 있었다. 안나 콤네나의 역사서에 따르면, 십자군은 타티키오스의 조언을 계속 거부했고, 보에몽은 "다른 십자군 제후들 사이에서 타티키오스가 은밀히 셀주크 측을 돕고 있다는 설이 있어 죽일 계획도 있다"고 그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41]
한편 보에몽은 타티키오스가 배신했거나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라고 주장하며,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해야 할 의무는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함락 후 그곳을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도 진영을 떠나겠다고 했다. 타티키오스에게 암살 음모가 있다고 털어놓고 진영을 떠나도록 권유한 것은 안티오키아 영유를 주장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42] 고드프루아와 레몽은 보에몽의 협박을 무시했지만, 하급 기사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보에몽 지지 여론이 확산되었다. 한편, 야기 시얀은 인근 무슬림 정권에 계속 구원을 요청했고, 알레포에서 리드완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2월 9일 안티오키아 근교 하림에서 십자군에게 패배하고 퇴각했다.[44]
3. 4. 잉글랜드 증원과 요새 건설
3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거 애설링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성 시메온 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공성 무기 구축용 목재 등 보급 물자를 다수 운반했지만, 3월 6일 레몽과 보에몽의 군대가 보급물자와 함께 해안에서 안티오키아 성 아래로 운반하는 도중 야기 시얀 수비대의 별동대에게 습격을 받아 대부분의 물자를 잃었다. 고드프루아의 원군이 도착해 별동대를 격퇴한 후 남겨진 보급물자는 확보되었다. 에드거는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로부터 함대 및 자재 등을 제공 받았으나, 십자군은 이것을 비잔티움 제국에 의한 직접 원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45]
십자군은 자재를 사용해 공성탑을 만들기 시작하고, 라 마오메리(La Mahomerie)라고 명명한 성채도 쌓았다. 이 성채에서 안티오키아 도시의 교문(Bridge Gate)을 봉쇄해 야기 시얀의 군세가 성밖으로 나와 성 시메온 항 및 알렉산드레타 항에서 보내지는 십자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끔 레몽은 이 성채에 병사를 배치했다. 또한 성내의 보급물자 출입구였던 성 게오르기우스 문에 대해서는 예전에 포기했던 수도원을 수복하고 성채로 삼아 탕크레드가 병사를 배치했다. 연대기에서는 이 수도원 유적을 탕크레드 성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으로 가까스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의 봉쇄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봄이 가까워지자 십자군의 식량 사정도 호전되었다.[45]
3. 5. 파티마 왕조의 사절
4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로부터 사절이 십자군 진영에 도착했다. 그들은 십자군과의 평화를 맺고 공통의 적 셀주크 제국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다. 아랍어에 능숙한 은자 피에르가 협상을 맡았다.[47]
하지만 협상은 성사되지 못했다.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을 동로마 제국의 용병 정도로 생각했으며, 파티마 왕조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십자군이 시리아를 영유하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 영유없이는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정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파티마 왕조의 사절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3월에 십자군이 야기 시얀의 군대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을 선물로 가져갔다.[47]
3. 6. 안티오키아 함락
1098년 5월 말, 모술의 영주 케르보가가 안티오키아의 야기 시얀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왔다. 케르보가는 메소포타미아의 오르투키드 군대와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었고, 두카크와 리드완의 군대도 합류했다. 그러나 케르보가는 에데사를 공격하느라 3주를 낭비하여 십자군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49]
병력에서 열세였던 십자군은 케르보가가 도착하기 전에 안티오키아를 함락해야 했다. 보에몽 1세는 "두 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인 경비병 피루즈와 비밀리에 연락했다. 피루즈는 야기 시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보에몽의 뇌물을 받고 성문을 열어주기로 약속했다.[50] 보에몽은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안티오키아를 자신에게 준다면 피루즈를 통해 도시를 함락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레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도시를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고드프루아, 탕크레드, 로베르 등은 보에몽의 요구를 수락했다.[50]
6월 2일, 블루아 백작 스테판이 십자군을 이탈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보에몽과 피루즈의 계획이 실행되었다. 피루즈는 보에몽에게 케르보가를 만나러 가는 척하다가 밤에 돌아와 성벽을 오르라고 지시했다. 십자군은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었고, 안티오키아 시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십자군은 학살을 벌였는데, 무슬림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시민들도 희생되었고, 피루즈의 형제도 포함되었다.[51][50] 야기 시얀은 도망쳤지만 시리아 기독교도에게 붙잡혀 참수당했고, 그의 머리는 보에몽에게 보내졌다.[50]
4. 제2차 공방전 (1098년 6월)
6월 27일, 은자 피에르는 보에몽의 사자로서 케르보가의 진영에 찾아갔으나, 교섭은 성과 없이 끝났고, 셀주크 군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53] 보에몽은 십자군을 6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직접 지휘하고, 남은 5개는 위그 드 베르망두아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부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부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의 부대, 탕크레드 및 베아르 자작 가스통 4세의 부대, 교황사절 르 퓌의 아데마르의 부대로 편성했다. 병으로 쓰러진 레몽은 200명 정도의 병사와 함께 시내에 남아 산 정상의 요새를 수비했다. 요새는 샴스 앗 다울라에서 케르보가가 파견한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6월 28일 월요일, 십자군은 성창을 앞세운 아귈레스의 레몽을 선두로 성문을 나섰다. 케르보가는 성문을 나온 십자군을 각개격파 할 수 있었지만, 부하 장군들은 십자군 전군이 나온 뒤 대군으로 일거에 격파하자고 주장했고, 케르보가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케르보가는 십자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적게 예상했고, 성 밖으로 나온 십자군 전군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르보가 군의 궁병과 궁기병은 십자군 기사에게 무수한 화살을 날렸다. 케르보가는 퇴각하는 척하며 십자군을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하려 했다. 십자군의 좌익은 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케르보가는 분대를 보내 공격을 가했으나, 보에몽은 즉시 7번째 부대를 조직해 적 분대를 배후에서 격파했다. 투르크 연합군은 십자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아데마르의 군기를 든 병사 등 다수가 쓰러졌다. 케르보가는 아군과 십자군 사이의 풀밭에 불을 질렀으나, 십자군은 이를 끄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십자군은 성 게오르기우스, 성 데메트리오스, 성 마우리티우스 등 3명의 성인이 그들과 함께 기마로 진군하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전투는 단시간에 이루어졌다. 십자군이 케르보가가 있던 전열에 도착하기 전, 다마스쿠스 왕 두카크 등이 차례로 도망치면서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케르보가 군은 수적 우위를 잃었고, 케르보가도 철수해야 했다. 이로써 무슬림 연합군은 십자군에게 패배했다.
4. 1. 케르보가의 포위
6월 3일이 끝날 무렵, 십자군은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산 정상의 요새는 아직 함락하지 못했다. 요새에는 야기 시얀의 아들 샴스 앗 다울라(Shams ad-Daulah)가 저항하고 있었다. 교황 특사 르퓌의 아데마르는 요한 더 오시트를 해방시켜 다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아데마르는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영유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정교회 및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양호하게 유지하려고 했다.그러나 성 안은 식량이 부족했고, 케르보가의 군대도 가까이 다가왔다. 케르보가는 안티오키아 함락 이틀 후인 6월 5일에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6월 7일 성 안으로 돌입을 시도했으나, 난공불락의 성벽 때문에 실패했다. 케르보가는 전법을 공성전으로 바꾸어 6월 9일까지 십자군이 지키던 안티오키아 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로써 십자군은 거꾸로 공성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성 안의 십자군 중 다수는 케르보가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안티오키아를 탈출해 타르수스에 있던 브루아 백작 스테판과 합류했다. 스테판은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케르보가 군이 도시를 포위하고 진을 치는 것을 보고, 이제 성 안의 십자군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탈주병들도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중, 브루아 백작 스테판 등 십자군 탈주자는 십자군 지원을 위해 수도를 나섰던 알렉시우스 1세 황제의 군대와 만나 황제와 면담했다. 사정을 알지 못한 황제는 십자군의 상황을 물었으나, 스테판은 다른 십자군 장병은 모두 전사했다고 설명했다.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자신의 정찰병으로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 다른 셀주크 왕조 군대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4. 2. 성창의 발견과 십자군의 사기 고취
그때쯤 포위된 안티오키아에서는 6월 10일, 일행 중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라는 가난한 수도사가 제후들 앞에 나섰다. 그는 성 안드레아의 환영을 보았고 이 도시에 성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54] 굶주린 십자군 일행 중에는 성인을 보았다는 환시나 환각을 경험했다는 자들이 많았고, 발랑스의 스테판이라는 수도사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는 환시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53] 6월 14일 유성이 적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길조라고 해석했다.[55]교황사절 아데마르는 성창 및 환시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창과 같은 성유물을 보았기 때문에 안티오키아에서 성창을 발견했다는 것을 가소롭게 생각했다.[55] 그러나 레몽은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의 말을 믿었다. 레몽, 연대기 작가 아귈레스의 레몽, 오랑주 주교 기욤 등은 6월 15일 도시의 성 베드로 성당 지하를 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 헛수고라고 생각할 때쯤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는 직접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밑바닥에 흘러내린 흙 속에서 창의 앞부분을 발견해냈다.[55] 레몽은 이것을 성창이라고 믿었고, 이 성유물의 발견은 항복하기보다는 포위를 풀기 위한 최후의 전투에 대비하라는 신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는 성 안드레아가 십자군에게 5일간 단식을 하라고 지시했으며(이미 먹을 것이 없어 단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십자군이 대승을 거둘 것이라는 환시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케르부가의 숙영지에 풀어놓은 첩자에게서 진영 내에서 언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었다. 리드완 및 두카크 등 시리아의 영주들은 모술에서 온 케르부가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리아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시리아 영주들에게 케르부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양인 침략자보다 더 현실적인 위협이었다.[57]
보에몽도 성창 발견에는 회의적이었으나, 성창 발견으로 십자군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4. 3. 안티오키아 성 밖 전투
6월 28일, 십자군 병사들은 아귈레스의 레몽이 성창을 들고 앞장선 가운데 도시 성문을 나섰다.[53] 케르보가는 부하 장군들의 간청에 망설이며, 십자군을 한 번에 공격하려 했으나 그 규모를 과소평가했다. 케르보가는 십자군을 더 험한 지형으로 유인하기 위해 후퇴하는 척했고, 그의 궁병들은 계속해서 전진하는 십자군에게 화살을 퍼부었다.케르보가 군의 궁병과 궁기병들은 십자군 기사들에게 맹렬하게 활을 쏘았다. 십자군의 좌익은 강으로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케르보가는 분대를 보내 공격했지만, 보에몽은 재빨리 일곱 번째 부대를 구성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투르크 연합군은 십자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아데마르 드 르퓌의 군기를 가지고 있던 병사 등 많은 수가 쓰러졌다. 케르보가는 자신의 위치와 십자군 사이의 풀에 불을 질렀지만, 십자군은 멈추지 않았다.[59][60] 십자군은 성 게오르기우스, 성 데메트리오스, 성 마우리티우스 세 성자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전투는 짧았고 셀주크 제국에게는 재앙이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는 케르보가를 버렸고, 소크만과 홈스의 아미르도 그랬으며, 이들의 탈주는 투르크 군대가 기독교 상대보다 훨씬 우세했던 수적 우위를 감소시켰다. 곧 패배한 투르크 군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후퇴했다.[59][60]

5. 영향
안티오키아 공방전의 결과, 십자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과정과 이후의 상황은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케르부가의 군대가 물러난 후,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이 이끄는 성채 수비대는 레몽이 아닌 보에몽에게만 항복했다. 이는 레몽이 모르는 사이에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도시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고, 아데마르와 레몽은 이에 반대했다.[53] 위르망두아의 위그와 에노의 발두인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지만, 발두인은 매복 공격을 받고 실종되었다.[61] 알렉시오스 1세는 원정을 보내는 데 관심이 없었고, 보에몽은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을 버렸다고 주장하며 맹세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안티오키아에서는 티푸스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발생했고,[53] 8월 1일 아데마르가 사망했다.[62]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안티오키아 통치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거절했다.[55]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주변을 장악했지만, 군마 부족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1월, 레몽은 십자군을 계속 진군시키기 위해 보에몽에게 굴복했다. 1099년 초,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으로 남고,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방전을 시작했다.[63]
베드로 바르톨로메오는 성창 환상으로 비난을 받았고, 불의 심판에 도전했다. 그는 심한 화상을 입고 1099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64] 성창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었지만, 레몽 백작은 예배당에 성창을 보관했다.[65]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전설이 되었고, 12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노래 등 무훈시의 주제가 되었다.[66]
5. 1. 안티오키아 공국의 성립과 십자군의 분열
케르부가의 군대가 물러난 후,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이 이끄는 성채 수비대도 항복했다. 그러나 이 항복은 레몽 등이 아닌 보에몽 개인에게 한 것으로, 레몽 등은 이 사실을 모르는 사이에 미리 의논된 것이었다.[53] 보에몽은 이전에 공언한 대로 안티오키아 도시의 영유를 주장했고, 이에 반대하는 아데마르, 레몽과 대립했다. 에노 백작 보두앵과 위그 드 베르망두아는 알렉시오스 1세의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으나, 보두앵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복병을 만나 행방불명이 되었다.[61] 알렉시오스 1세는 원군 요청에 대해 안티오키아 영유를 위한 군대 파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을 버렸다고 주장하며 황제에 대한 맹세는 모두 무효라고 주장했다.
보에몽과 레몽은 야기 시얀의 궁전을 공유했지만, 시가지 대부분은 보에몽의 지배하에 있었고, 산 정상의 성채에는 보에몽의 군기가 걸렸다. 이러한 불화에 대해 후세 역사가들은 북프랑스의 프랑크인,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인,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인이라는 십자군 구성원들이 각자 별개의 주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제후 각자의 개인적인 야심이 원인이었다는 논의도 있다.
십자군의 진군은 안티오키아에서 정지되었다. 함락 후 안티오키아에서는 티푸스로 추정되는 질병이 만연했다.[53] 8월 1일, 대립하는 제후들의 조정 역할을 했던 교황 사절 아데마르가 병으로 사망하자,[62] 십자군은 지도자 부재 상태에 놓였다. 9월, 제후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안티오키아 지배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55] 1098년 여름 이후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근교 농촌 지대를 지배했지만, 군마의 수는 줄어들었고 무슬림 농민들도 식량 제공을 거부하여 십자군 내에 기아가 만연했다. 약소 기사와 병사들은 불안해하며 다투는 제후들을 남겨두고 자신들만 예루살렘으로 향하겠다고 위협했다. 11월에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회의 중인 제후들에게 대드는 사건도 일어났다.
11월, 레몽은 평화롭게 십자군을 진군시키고 굶주린 병사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보에몽에게 굴복했다. 1099년 1월, 안티오키아 공국의 초대 공작이 된 보에몽을 뒤로 하고 레몽이 이끄는 십자군은 남쪽으로 진군을 재개했다.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 영내로 들어가 6월에 예루살렘 공방전을 시작하게 된다.[63]
한편,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오의 성창 발견 경위와 환시는 당시 상황에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쟁이로 의심받았다. 1099년 4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자 성경에 의한 신명 재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이 성창에 인도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불타는 판벽 사이를 통과하는 시련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12일 동안 고통받다 사망했다.[64]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유럽에 전해져 전설화되었고, 12세기 초에는 '안티오키아의 노래'(chanson d'Antioche)라는 무훈시도 탄생했다.[66] 알프레드 더건 (1964)의 ''보에몬드 백작''은 보에몬드의 삶에 관한 역사 소설이며 안티오키아 포위를 묘사한다.[67]

5. 2. 전염병과 지도부의 혼란
케르보가가 도망친 후,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이 지휘하는 성채는 마침내 항복했지만, 레이몬드에게가 아니라 보에몬드에게만 항복했다. 이것은 레이몬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예상대로 보에몬드는 아데마르와 레이몬드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다.[53] 위르망두아의 위그와 에노의 발두인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지만 발두인은 가는 길에 매복 공격을 받은 후 사라졌다.[61]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는 여름이 늦어진 시점에서 도시를 차지하기 위한 원정을 보내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보에몬드는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을 버렸고 따라서 그에 대한 모든 맹세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보에몬드와 레이몬드는 야기-시얀의 궁전을 점령했지만, 보에몬드는 나머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성채에서 자신의 깃발을 휘날렸다. 북프랑크의 프랑크족,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족,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이 스스로를 별개의 "국가"로 여기고 각자가 지위를 높이려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이것이 분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인 야망이 파벌 싸움의 원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
곧 장티푸스일 가능성이 있는 전염병이 발생했고,[53] 8월 1일 르 퓌의 아데마르가 사망했다.[62] 9월에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안티오키아를 직접 통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55] 그는 거절했다. 1098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들은 안티오키아 주변의 시골을 장악했지만, 말은 이전보다 훨씬 적었고 아랍 농민들은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급 기사와 병사들은 불안해졌고 기아 상태가 시작되어 분쟁 중인 지도자 없이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겠다고 위협했다. 11월에 레이몬드는 십자군을 평화롭게 계속 진행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굶주린 군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국 보에몬드에게 굴복했다. 1099년 초에 행진이 재개되었고, 보에몬드는 초대 안티오키아 공으로 남겨졌으며, 봄에는 예루살렘 공방전이 레이몬드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63]
안티오키아에서의 성공은 베드로 바르톨로메오의 회의론자들에게 너무나 과했다. 베드로의 환상은 너무 편리하고 전투적이었고, 그는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한 혐의를 받았다. 도전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이 신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로 심판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성경적인 땅에 있었기에 그들은 성경적인 시련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불타는 용광로를 통과할 것이고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십자군은 불길 사이의 길을 건설했고 베드로는 불길 사이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끔찍하게 화상을 입었고 1099년 4월 20일, 12일 동안 고통을 겪은 후 사망했다.[64] 프로방스 출신의 레이몬드 부대는 베드로가 불꽃을 안전하게 통과했지만 그를 환영하는 군중에 의해 밀려났다고 주장했지만 성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레이몬드 백작은 그의 예배당에 모든 경건함으로 창을 보관했다.[65]
5. 3. 예루살렘으로의 진군
케르보가가 도망치자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이 지휘하는 성채가 마침내 항복했지만, 레이몬드가 아니라 보에몬드에게만 항복했다. 이것은 레이몬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예상대로 보에몬드는 아데마르와 레이몬드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다.[53] 위르망두아의 위그와 에노의 발두인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지만 발두인은 가는 길에 매복 공격을 받은 후 사라졌다.[61]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여름이 늦어진 시점에서 도시를 차지하기 위한 원정을 보내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보에몬드는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을 버렸고 따라서 그에 대한 모든 맹세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보에몬드와 레이몬드는 야기-시얀의 궁전을 점령했지만, 보에몬드는 나머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성채에서 자신의 깃발을 휘날렸다. 북프랑크의 프랑크족,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족,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이 스스로를 별개의 "국가"로 여기고 각자가 지위를 높이려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이것이 분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인 야망이 파벌 싸움의 원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곧 장티푸스일 가능성이 있는 전염병이 발생했고,[53] 8월 1일 르 퓌의 아데마르가 사망했다.[62] 9월에 십자군 지도자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안티오키아를 직접 통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55] 그는 거절했다. 1098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들은 안티오키아 주변의 시골을 장악했지만, 말은 이전보다 훨씬 적었고 아랍 농민들은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급 기사와 병사들은 불안해졌고 기아 상태가 시작되어 분쟁 중인 지도자 없이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겠다고 위협했다. 11월에 레이몬드는 십자군을 평화롭게 계속 진행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굶주린 군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국 보에몬드에게 굴복했다. 1099년 초에 행진이 재개되었고, 보에몬드는 초대 안티오키아 공으로 남겨졌으며, 봄에는 예루살렘 공방전이 레이몬드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63]
안티오키아에서의 성공은 베드로 바르톨로메오의 회의론자들에게 너무나 과했다. 베드로의 환상은 너무 편리하고 전투적이었고, 그는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한 혐의를 받았다. 도전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이 신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로 심판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성경적인 땅에 있었기에 그들은 성경적인 시련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불타는 용광로를 통과할 것이고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십자군은 불길 사이의 길을 건설했고 베드로는 불길 사이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그렇게 했고, 끔찍하게 화상을 입었다. 그는 1099년 4월 20일 12일 동안 고통을 겪은 후 사망했다.[64] 프로방스 출신의 레이몬드 부대는 베드로가 불꽃을 안전하게 통과했지만 그를 환영하는 군중에 의해 밀려났다고 주장했지만 성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레이몬드 백작은 그의 예배당에 모든 경건함으로 창을 보관했다.[65]
5. 4.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의 죽음과 성창 전설
안티오키아에서의 승리는 베드로 바르톨로메오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것이었다. 베드로의 환상은 너무나 편리하고 전투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베드로는 도전을 받아 자신이 신의 인도를 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불의 심판을 받겠다고 제안했다.[64] 십자군은 성경의 땅에 있었기에 성경적인 시련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불타는 용광로를 통과해야 했고, 하느님의 천사가 그를 보호할 것이었다. 십자군은 불길 사이로 길을 만들었고, 베드로는 그 길을 걸어갔다. 그는 끔찍한 화상을 입었고, 12일 동안 고통받다가 1099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64]
성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지만, 프로방스 출신의 레이몬드 부대는 베드로가 불꽃을 안전하게 통과했지만 그를 환영하는 군중에 의해 밀려났다고 주장했다. 레이몬드 백작은 자신의 예배당에 성창을 경건하게 보관했다.[65]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곧 전설이 되었고, 12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노래와 ''시에주 당티오슈''[66]라는 두 개의 영웅 서사시(십자군 연대기)의 주제가 되었다.
알프레드 더건 (1964)의 ''보에몬드 백작''은 보에몬드의 삶에 관한 역사 소설이며 안티오키아 공방전을 묘사한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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