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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신석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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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산 통도사 신석우 초상은 1860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후기 인물화이다. 신석우는 1859년 형조판서, 1860년 예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860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초상화는 신석우의 생애와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 통도사에 베푼 은혜를 기리기 위해 통도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인물화 기법과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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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신석우 초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산 통도사 신석우 초상
한자 이름梁山 通度寺 申錫愚 肖像
지정 번호유형문화재 451호
국가대한민국
지역경상남도 양산시
주소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지정일2006년 11월 2일
유형유형문화재
수량1점
문화재청 ID21,04510000,38

2. 신석우 초상화의 외형 및 묘사 기법

이 초상화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정헌대부 행예조판서 신석우(1805∼1865)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체적인 외형과 묘사 기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면은 섬세한 필선과 자연스러운 바림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의복은 선묘 위주로 대담하게 표현하여 대조를 이룬다. 의복의 경우 채색 아래로 보이는 하묘선과 의습선이 달라, 초안을 참조하되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1]

의자는 짙은 갈색의 목리문을 묘사하고 갈색과 농묵을 바림하여 음영을 강조했다. 족좌대는 주색과 군청색을 대비시키고, 검은 바탕 네모판에 백색 세선으로 화문(花文)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했다. 배경은 돗자리의 옅은 황토색 바탕에 먹으로 세로선을 긋고 농묵으로 간략한 화문석 문양을 그렸다.[1]

신석우는 정2품 예조판서를 지냈으므로 삽금대(鈒金帶)를 착용해야 하나, 초상화에서는 17세기 이후 초상화에 자주 보이는 학정대(鶴頂帶)를 하고 있다.[1]

2. 1. 구도 및 인물 묘사

화면은 황토색 돗자리를 경계로 상하 2단으로 구분된다. 인물은 정면향에 가까운 전신교의좌상으로 호피를 걸친 의자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좌안7분면이다. 양손은 복전(腹前)에 모아 소맷자락 안으로 넣었고 두 발은 족좌대 위에 얹은 모습이다. 인물의 자세는 양발을 족좌대 위에 정면을 향해 밖으로 약간 벌린 채 얹고 있어 측면관의 족좌대 시점과 대조를 이룬다.[1]

안면부는 담황색을 바르고 윤곽선은 옅은 주색으로 그었다. 상검선은 농묵, 하검선은 담묵으로 그었으며, 눈꼬리 선은 살짝 위로 올려 마무리하였다. 눈의 양끝은 옅은 주색으로 바림하여 홍기(紅氣)를 띠며, 눈동자는 갈색으로 채색한 후 농묵으로 윤곽선을 잡고 그 외곽으로 백색 세선을 그었으며 동공은 농묵을 찍어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눈썹은 세묵선으로 간략하게 묘사하고 다문 입술은 주색으로 칠한 후 먹으로 윤곽을 잡았다. 미간과 안와선, 코와 귀 주변에는 동일 계열색으로 다소 짙게 바림하여 음영을 표현하였다. 안정된 시선과 부드러운 선염에 의해 인물의 강직함과 더불어 인자한 성품을 전해주는 느낌이다.[1]

2. 2. 복식 및 배경 묘사

이 영정에서 신석우는 시복(時服) 차림으로 사모, 단령(袍), 대(帶), (靴)를 착용하고 있다. 사모는 모체가 높고 모정이 둥글며 양각의 끝부분이 넓어지면서 완만하게 둥근 형태이며, 양각이 약간 앞으로 굽어져 있어 조선 후기 복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무늬가 없는 담홍색 단령의 의습선은 꺾임이 있는 철선묘의 먹선으로 힘 있게 표현되었다. [1]

안면은 섬세한 필선과 자연스러운 바림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의복은 대담하면서도 입체감을 드러내지 않는 선묘 위주로 묘사되었다. 채색 아래로 보이는 하묘선과 의습선이 다른 점으로 보아, 기존 초안을 참조하되 일부 수정을 가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

의자는 짙은 갈색으로 나뭇결 무늬를 묘사하고 갈색과 농묵을 바림하여 음영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족좌대 측면은 주색과 군청색의 대비되는 색채로 처리하고, 검은 바탕의 네모판에 각각 백색 세선으로 화문(花文)을 그려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배경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며, 돗자리는 옅은 황토색 바탕에 먹으로 세로선을 균일하게 그은 후 농묵으로 간략한 화문석 문양을 그렸다. [1]

3. 신석우의 생애와 초상화 제작 배경

신석우(申錫愚, 1805~186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신재업(申在業)이고 어머니는 좌참찬 김이도(金履度)의 딸이다. 1834년(순조 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59년(철종 10년) 형조판서, 1860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같은 해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고종 즉위년) 「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855년부터 1857년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통도사의 제지역(製紙役)을 면제해 주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로 통도사에서는 신석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석우는 포폄(黜陟) 기록을 소홀히 한 탓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경상도 관찰사직에서 파직되었다. 이 초상화는 신석우가 예조판서를 역임한 18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 1. 신석우의 생애

신석우(申錫愚)의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신재업(申在業)이고 어머니는 좌참찬 김이도(金履度)의 딸이다. 18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병조참판, 우승지, 양주목사, 대사성, 이조참의, 승지, 이조참판 등을 거쳤으며, 1859년 형조판서, 186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 「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855년 10월 6일부터 1857년 6월 28일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이 지역에 수재가 발생하자 진휼을 위한 재원을 요청하였으며, 재해를 입은 논밭을 준획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통도사의 제지역(製紙役)을 면제해주었는데, 이 같은 업적을 기리고자 통도사에서 신석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석우는 포폄기록을 소홀히 한 탓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경상도관찰사직에서 파직되었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신석우가 예조판서를 역임한 18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 2.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의 업적과 파직

신석우는 1855년 10월 6일부터 1857년 6월 28일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수재를 당한 지역 백성을 위해 진휼 재원을 요청하고, 재해를 입은 논밭을 준획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통도사의 제지업(製紙役)을 면제해주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나, 포폄(黜陟) 기록을 소홀히 한 탓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경상도 관찰사직에서 파직당했다.

3. 3. 초상화 제작 시기 추정

聖如|성여중국어라는 자와 海藏|해장중국어이라는 호를 가진 신석우(申錫愚, 1805~1865)는 1860년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1] 따라서 이 초상화는 18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신석우는 경상도관찰사로 재직(1855. 10. 6~1857. 6. 28)할 당시 통도사의 제지업(製紙役)을 면제해주었는데,[1] 이 같은 업적을 기리기 위해 통도사에서 초상화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1]

4.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신석우 초상화는 조선 19세기 인물화의 표현 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제작 연도와 같이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초상화에서 신석우가 학정대를 착용한 것을 통해, 품계에 따른 복식의 변화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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