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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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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준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딸 양지가 황후가 되면서 권력을 얻어 거기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생들과 함께 삼양으로 불리며 권세를 누렸으나, 사마염 사후 전권을 장악하고 사마량 등을 제거하려 하면서 평판이 나빠졌다. 결국 291년, 모반 혐의로 관직을 잃고 토벌 과정에서 사망했으며 삼족이 멸족되었다. 그의 가계는 묘지를 통해 양봉, 양진으로 이어지는 명문 가문과 연관되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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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준
원어 이름楊駿
출생 정보알려지지 않음
사망일291년 4월 23일
자녀양지
직위
직함진나라의 섭정
군주혜제
임기 시작290년 5월
임기 종료291년 4월

2. 생애

양준은 홍농군 화음 출신으로, 그의 조카 양염은 무제(사마염)의 첫 번째 부인이자 황후였다. 274년 양염이 죽자 그녀의 유언에 따라 양준의 딸 양지가 황후가 되었고, 양준은 황후의 아버지로서 동생 양요, 양제와 함께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들 삼형제를 '천하 삼양'이라고 불렀다.

무제 말년에 양준과 그의 형제들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289년 무제가 병이 들자, 양준은 숙부 사마량을 쉬창으로 보내는 등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290년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양준은 혜제의 섭정이 되었다. 그는 가남풍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칙령에 자신의 딸인 양태후의 공동 서명을 받도록 했다.

양준은 많은 정적을 만들었지만, 널리 승진시켜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마량을 뤄양으로 불러 공동 섭정을 맡게 하라는 동료들의 건의는 거부했다.

가남풍은 양준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291년, 사마위가 군대를 이끌고 뤄양으로 돌아온 후 쿠데타가 일어났다. 가남풍은 혜제에게 양준이 죄를 저질렀다는 칙령을 내리게 하고, 사마위 등에게 양씨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준은 궁궐 문을 불태우라는 책사들의 제안을 거부한 후 패배했고, 그의 일족은 몰살되었다.[5]

2. 1. 무제 시대

276년에 딸 무도황후가 황후가 되면서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임진후에 책봉되었다. 양준은 교만하고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가 호분에게 비판을 받았다.[5]

이후 동생 양요, 양제와 함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 권력이 대단해 당시 삼양(三楊)이라 불릴 정도였다.[5]

289년, 여남왕 사마량을 꺼려해 조정에서 쫓아냈다.[5]

290년, 사마염이 중서에게 조서를 만들게 해 사마량과 함께 보정하게 하자 조서를 빌렸다가 이를 감췄다. 무도황후가 양준에게 보정하도록 하면서 4월 12일에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로 임명되어 전권을 장악했다.[5]

얼마 안 가 사마염이 죽자 양준은 태극전에서 살면서 호분무사 100여 명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했으며, 어떤 사람이 사마량이 병사를 일으켜서 자신을 토벌할 것이라고 고발하자 이를 무도황후에게 얘기하면서 석감과 생질인 장소를 시켜 사마량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동생 양제와 하남윤 이빈 등이 사마량을 경사에 머무르게 하거나 양제가 종실과 외척이 서로 믿어야 편안하다고 했지만 이를 무시했으며, 스스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조예가 즉위했던 때를 본떠 모든 관원의 봉작을 높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5]

모든 신하들을 1등급, 상사에 참여한 사람은 2등급, 2천석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모두 관중후에 책봉해 세금인 조조를 1년간 면해주도록 했으며, 산기상시 석숭, 산기시랑 하반 등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무시했다. 또한 태부, 대도독, 가황월, 녹조정을 맡아 백관들이 모두 알아서 그에게 보고할 정도였다. 부함이 황제가 상을 당한 후에 갖는 복상 기간인 양암을 시행하도록 주장했지만 이를 무시했으며, 부함이 자주 간언하자 군수로 내쫓으려다가 이빈의 반대로 중지했다.[5]

가남풍을 꺼려하면서 가남풍의 생질인 단광을 산기상시로 삼았으며, 자신의 생질인 장소를 중호군으로 삼았다. 양준이 정사를 처리했지만 괴팍하게만 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싫어했으며, 손초가 양준에게 공명정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종실이 강성한데도 그들과 논의하지 않으니 화가 이르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충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흉노의 동부 지역에 사는 王彰 (漢趙)|왕창 (전조)중국어을 등용하려고 했지만 왕창이 기피했다.[5]

291년, 맹관과 이조 등이 모반했다고 무고하자 관직을 철폐해 후작의 지위만을 가져 집에 가 있도록 했다.[5]

동안왕 사마요 등이 양준을 토벌하려고 할 때 양준은 조상의 집에 살면서 궁궐 안에서 변고가 일어난 것을 알고 많은 관리를 불러 이를 논의했으며, 태부주부 주진이 운용문에 불을 질러 그들을 위협하고 이 일을 만든 사람을 색출하면서 만춘문을 열고 동궁과 밖에 있는 병영의 군사를 이끌고 황태자를 옹호해 궁궐로 들어가서 반대파들의 목을 베어서 보내라고 지시했다.[5]

그러나 양준은 평소에 겁이 많고 나약해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운용문은 조예가 만든 것이고 그 노력과 비용이 아주 많이 든 것인데 어찌 그것에 불을 지르냐면서 반대했으며, 양준은 결국 궁중의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집이 불에 타면서 마구간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혀 참수당했고 그의 동생들과 삼족이 멸족되었다.[5]

2. 2. 혜제 시대와 몰락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혜제)이 즉위하자 양준은 유언에 따라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에 임명되어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다.[5] 그는 태극전(황제의 거처)에 거처하며 호분(용사) 100명으로 자신을 경비하게 했다. 무제의 관은 태극전으로 옮겨졌지만, 양준은 태극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양준은 사마량을 허창으로 보내기 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부하 무장들이 이를 거부하여 사마량은 화를 면했다.[5]

양준의 정치는 매우 엄격하여, 사소한 일에도 용서 없이 규탄했기 때문에 중앙과 지방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는 민심을 얻기 위해 군신의 작위를 남발했으며, 고대의 법령과 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 오래된 관례를 여러 번 어겼다. 『춘추』에서는 "새로운 군주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개원(연호를 고침)을 행하고, 이것을 정식 즉위로 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무제가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영평으로 개원하는 실수를 범했다. 게다가 스스로 태부·대도독에 올라 가황월(군대를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얻으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이 인사는 중지되었다.[5]

가남풍은 음흉하고 책략을 좋아하는 인물로, 점차 조정을 농단하는 양준을 껄끄럽게 여겼다. 평소 양준에게 경시당하던 전중중랑 맹관, 이조와 환관 동맹 등과 밀의하여 양준 주살과 황태후 양지의 폐위 계획을 세웠다. 이조는 형주의 초왕 사마위에게 양준 주살을 제안하여 낙양으로 불러들였고, 사마위는 기뻐하며 상소를 올려 입조를 청했다. 양준은 평소 사마위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낙양으로 불러들여 곁에 두고 싶어했기에 이를 허락했다.[5]

291년 3월, 맹관과 이조는 혜제에게 양준의 모반을 고했다. 이들은 양준의 모든 관직을 면한다는 조서를 작성하고, 밤중에 낙양성 안팎에 계엄령을 내려 양준의 저택을 제압하고 불태웠다. 양준은 변고를 듣고 군신을 모아 논의했다. 태부 주부 주진은 "운룡문(남문)을 불태워 일당을 위협하고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황태자 사마휼을 옹립하여 황궁으로 향하면, 전내는 전율하며 반드시 주모자의 목을 보낼 것입니다. 빨리 결단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권했다. 그러나 양준은 "운룡문은 위의 조예가 만든 문이며,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었다. 그것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시중 부지는 양준이 큰일을 해낼 그릇이 아니라고 판단, 상황 확인을 명목으로 궁중으로 도망쳤고, 다른 관료들도 대부분 부지를 따라 양준을 떠났다. 양준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고, 진퇴양난에 빠진 그는 마구간으로 도망쳤지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5]

이후 맹관 등은 양준의 동생 양요, 양제, 부하인 장소, 이빈, 단광, 유예, 무무, 산기상시 양막, 중서령 장준, 문앙을 체포했다. 양요와 양제는 뛰어난 공적을 세운 인물로 인망도 있었고, 양요에 대해서는 종유(종회의 형)의 선례를 들어 살려달라고 탄원했지만, 결국 연좌되어 양씨는 삼족이 몰살되었다. 양씨에게 협력했다고 여겨진 인물도 대부분 삼족이 몰살되었지만, 문앙이나 무무(무주의 아들)처럼 참언으로 억울하게 연루된 자도 있었다. 황태후 양지 또한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후에 살해되었다.[5]

양준은 어리석었고 많은 관료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직언이 노여움을 샀을 때도 멀리 내쫓는 데 그쳤으며,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5]

3. 가계

홍농 양씨 가계도


양준의 묘지는 훼손된 부분이 많지만, 1991년 발행된 『낙양출토력대묘지집승(洛陽出土歴代墓誌輯縄)』에 "양준잔비(楊駿残碑)"로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諱敷。大父東萊太守・蓩亭侯,諱〓……|……휘부(는). 대부 동래태수·묘정후(蓩亭侯), 휘〓(衆)……중국어

라는 부분은 기존의 문헌 자료에서는 확증되지 않았던 관계를 보여주며, 양준의 조부는 묘정후(蓩亭侯) 楊衆|양중중국어이고, 증조부는 양부(楊敷)가 된다. 이로 인해 양봉, 양진으로 거슬러 올라가, 소위 4대 3공(四代三公)으로 알려진 가계와 양준의 가계의 연관성이 밝혀졌으며, 세대 또한 확정되었다[4]. 예를 들어, 양준이 양진의 5세손이므로, 조카 양염(楊艶)은 양진의 6세손이 된다.

4. 평가

양준은 혜제가 즉위하자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록상서사에 임명되어 조정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태극전에 거처하며 용사 100명으로 자신을 경호하게 했다.[1] 사마량을 토벌하라는 참언을 받아들였으나, 부하들이 거부하여 시행되지 않았다.[1]

양준의 동생 양요(楊珧)와 양제(楊済)는 뛰어난 공적을 세워 인망이 높았고, 종유의 선례를 들어 양요를 구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결국 양씨 삼족은 몰살되었다.[1] 이 과정에서 문앙이나 무무처럼 억울하게 연루된 사람들도 있었다.[1] 황태후 양지(楊芷) 또한 서인으로 강등된 후 살해되었다.[1]

4. 1. 부정적 평가

양준은 엄격한 정치로 사소한 일에도 용서를 하지 않아 중앙과 지방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1] 민심을 얻기 위해 작위를 남발하고, 고대 법령과 제도를 이해하지 못해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1] 예를 들어 『춘추』의 규정과 달리 무제 사후 1년도 되지 않아 영평으로 연호를 바꾸는 실수를 범했다.[1] 또한 태부·대도독에 올라 군사 지휘권(가황월)을 얻으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무산되었다.[1]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음흉하고 책략이 뛰어나 조정을 장악한 양준을 껄끄럽게 여겼다.[1] 결국 양준은 가남풍의 계략에 빠져 마구간에서 살해되었고, 삼족이 몰살되는 비극을 맞았다.[1]

양준은 어리석고 많은 관료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직언을 한 사람도 멀리 내쫓는 데 그쳤을 뿐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1]

참조

[1] 문서 Yang Jun's birth year 추정
[2] 서적 Yang Jun 사망 정보 291-04-23
[3] 서적 晋書 인용
[4] 간행물 西晋墓誌二題 http://repo.komazawa[...] 駒沢大学文学部 2006-03
[5] 서적 《[[진서]]》 40권 중 楊駿 :zh:晉書/卷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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