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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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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친병은 일본에서 천황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병력이다. 1863년 분큐의 어친병, 1868년 게이오의 어친병, 1871년 메이지의 어친병으로 세 차례 조직되었다. 메이지 시대 어친병은 폐번치현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고, 이후 근대 일본 최초의 국군으로 기능하며 근위로 개칭되어 육군 근위사단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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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친병
개요
유형군대
역할왕 또는 국가원수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는 군사 조직
규모다양함 (소규모 경호 부대부터 대규모 군대까지)
역사적 맥락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
특징
충성심왕 또는 국가원수에 대한 직접적인 충성심
훈련 및 장비일반적인 군대보다 더 높은 수준의 훈련과 장비
정치적 중요성왕권 강화 또는 정치적 영향력 행사
역사적 사례 (어친병)
국가고려
역할왕의 호위병, 친위대
선발 기준무예가 뛰어난 자
임무왕의 경호, 궁궐 수비
중요성왕권 강화에 기여
역사적 사례 (기타)
국가로마 제국
부대프레토리아니
국가오스만 제국
부대예니체리
국가프랑스
부대근위대

2. 연혁

어친병은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설치와 해산을 반복했다.


  • '''분큐(文久)의 어친병 (1863년)'''


1863년 1월, 산조 사네토미 등이 쇄국을 요구하는 칙서를 쇼군에게 전달하면서 친병 설치에 대한 내용을 전달했다.[1] 산조 사네토미의 건의로 천황 호위를 위한 어친병이 설치되었으나,[2] 같은 해 9월에 폐지되었다.[3]

  • '''게이오(慶応)의 어친병 (1868년)'''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군사적 긴장에 대응하여 교토 고쇼 호위를 위해 설치되었다. 조슈 번을 중심으로 교토 주변 여러 번의 낭인들을 모은 것이었다. 보신 전쟁 이후 도쓰카와 고시 등 400명으로 축소되었고, 도쿄 천도 이후에는 조슈 번 부대가 도쿄 성(에도 성에서 개명, 현재의 황거) 경호를 담당했다.

  • '''메이지(明治)의 어친병 (1871년)'''


1870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의 병력으로 어친병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1] 1871년 2월 13일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정식으로 어친병이 발족했으며,[1] 병력은 8,000명 이하였다.[1] 어친병은 폐번치현 단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1] 이후 근위로 개칭되었다.[1]

2. 1. 분큐(文久)의 어친병 (1863년)

1863년 1월 16일(분큐 2년 11월 27일), 칙사 산조 사네토미 등은 쇄국을 독촉하고 친병 설치에 대한 칙서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전달했다.[1]

1863년 5월 5일(분큐 3년 3월 18일), 산조 사네토미의 건의에 따라 천황 호위를 위한 병력으로 어친병이 설치되었다.[2] 10만 석 이상의 다이묘에게 1만 석당 한 명의 비율로 병력을 징발했다.[2]

같은 해 9월에 어친병은 폐지되었다.[3] 1863년 10월 17일(9월 5일), 조정은 친병 해산을 명령했다.[3]

2. 2. 게이오(慶応)의 어친병 (1868년)

1868년 3월 13일(게이오 4년 2월 20일)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고조된 군사적 긴장에 대응하여 교토 고쇼 호위를 위해 설치되었다. 교토 경비 명목으로 여러 번에서 병사를 모았지만, 실제로는 조슈 번의 일부 부대를 중심으로 교토 주변 여러 번의 낭인들을 모은 것에 불과했다. 이듬해 보신 전쟁이 끝났다는 이유로 도쓰카와 고시 등 400명으로 조직이 축소되었다. 도쿄 천도 이후에는 조슈 번 부대가 도쿄 성(에도 성에서 개명, 현재의 황거) 경호를 담당했다.

2. 3. 메이지(明治)의 어친병 (1871년)

1870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의 병력으로 어친병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1] 사이고는 당시 중앙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어친병 구성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1] 기도 다카요시는 어친병의 힘을 배경으로 폐번치현과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려 했고,[1] 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오쿠마 시게노부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하며 어친병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1]

1871년 2월 13일(4월 2일),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정식으로 어친병이 발족했다.[1] 명목상 병부경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수장으로 하였으며,[1] 실제 병력은 8,000명 이하였다.[1]

어친병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2]

병력 구성
사쓰마번보병 4대대, 포병 4개대
도사번보병 2대대, 기병 2소대, 포병 2개대[3]
조슈번보병 3대대



어친병 유지에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따랐으며, 이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마 시게노부의 지방 행정 조직 및 세제 개혁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1]

1871년 7월 14일(8월 29일) 폐번치현 단행에는 어친병의 위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1] 폐번치현 이후 어친병은 근대 일본 최초의 국군으로 기능했으며,[1] 1872년 근위로 개칭되었고, 1891년 육군의 근위사단이 되었다.[1]

3. 정치적 배경과 영향

1868년 3월 13일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어친병 설치가 추진되었다. 어친병은 교토 경비대 명목으로 여러 번에서 병사들을 모았지만, 실제로는 조슈번의 일부 부대를 중심으로 교토 주변의 여러 번에 낭인들을 모은 것에 불과했다. 이듬해 보신 전쟁이 끝나면서 도쓰카와 향사(十津川郷士) 등 400명으로 조직이 축소되었다. 도쿄 천도 후에는 조슈 번 부대가 도쿄성(에도성에서 개명한 현재의 황궁) 경호를 담당했다.

어친병은 폐번치현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근대 일본 최초의 국군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후, 징병령 시행과 함께 그 역할을 신군대에 넘겨 본래 업무인 황거 경호에 전념하게 되었고, 1872년에는 근위로 개칭되었으며, 1891년에는 육군의 근위사단이 되었다.

3. 1. 중앙집권화와 폐번치현

1870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천황과 중앙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에서 군사를 보내 친병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중앙 정부에 속하지 않았던 사이고를 정부에 참여시켜 정부 강화를 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에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1] 기도 다카요시는 어친병의 힘을 배경으로 폐번치현과 중앙집권화 정책을 단행하려 했다. 반면, 오쿠보 도시미치는 기도와 오쿠마 시게노부의 급진적 정책에 비판적이었으며, 사쓰마번 출신인 사이고의 입각이 이러한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1]

1871년 1월, 사이고는 도쿄로 향했지만, 중앙집권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사이고는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신정부 관료로 막부 타도 공로자를 기용할 것을 제언하고, 자신은 군대 편성에 주력하기로 했다.[1]

1871년 2월 13일, 사이고를 중심으로 어친병이 공식 출범했다. 어친병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2]

병력 구성
사쓰마번보병 4대대, 포병 4대[2]
도사번보병 2대대, 기병 2소대, 포병 2대[2][3]
조슈번보병 3대대[2]



어친병은 명목상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수장으로 했으며, 공식적으로 1만 명이었으나 실제로는 8,000명 이하였다.[1]

어친병 유지를 위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궁내성 예산에서 10만 냥이 병부성으로 옮겨졌다. 이는 기도와 오쿠마가 주장하는 지방 행정 조직과 세제 개혁의 착수를 뒷받침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또한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지방 행정 조직과 세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오쿠보와 사이고 측도 점차 기도와 오쿠마 측에 양보하게 되었다.[1]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 단행에는 어친병 자체의 위력과 더불어, 그 정비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어친병은 폐번치현과 함께 일본 최초의 국군으로 기능하게 되었다.[1]

3. 2. 유신 공로자 등용 문제

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유신 공로자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도 다카요시오쿠마 시게노부가 추진하던 관료 중심 정책에 대한 견제였다. 사이고는 신정부에 막부를 타도한 공로자를 기용하라는 제언을 하기도 했다.[1]

3. 3. 재정 문제

어친병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고, 이미 1871년 3월에는 궁내성 예산에서 10만 냥이 유지비 명목으로 병부성으로 옮겨지고 있었다.[1] 이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마 시게노부가 주장하는 지방 행정 조직과 세제의 개혁 착수 주장을 뒷받침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하는 유신 공로자 등용의 선구자로서 1870년 대장성과 민부성이 분리될 때, 기도, 오쿠마 파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오쿠보의 천거로 히타 현 지사에서 민부 대승(大丞)에 기용된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재정 문제 타개는 결국 지방 행정 조직과 세제의 개혁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오쿠보와 사이고 측도 점차 기도, 오쿠마 측에 양보를 했다.[1]

4. 한국과의 관계

어친병과 관련하여 한국과의 관계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참조

[1] 문서 薩長土ノ三藩ニ令シテ御親兵ヲ徴シ兵部省ニ管轄セシム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 서적 法令全書 内閣官報局
[3] 문서 高知藩騎兵二小隊ヲ御親兵騎兵隊ト唱ヘシム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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