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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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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숭은 명나라 가정제 치하에서 권력을 휘두른 인물로, 청사(靑詞)에 능통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어 내각대학사, 내각수보를 역임했다. 그는 부패와 전횡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아들 엄세번과 함께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축재했다. 만년에는 실각하여 몰락했고, 그의 서예와 시문은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2. 생애

엄숭은 홍치 18년(1505년)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도교 제문인 청사(青詞)에 능통하여, 도교에 심취했던 가정제의 신임을 얻어 내각대학사가 되었다.[2]

가정 20년(1541년), 가정제가 서원(西苑)의 만수궁(万寿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조정 회의(朝議)를 열지 않자, 엄숭은 이를 기회로 정치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뇌물을 받았다. 가정 28년(1549년) 이후 내각수보가 되어 정치의 전권을 장악했고, 아들 엄세번과 함께 대승상(大丞相), 소승상(小丞相)으로 불릴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2]

그러나 가정제가 서계를 신임하면서 권세가 약해졌고, 주응룡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가정 44년(1565년), 아들 엄세번이 처형되자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여 고향에서 궁핍하게 생을 마감했다.[2]

엄숭은 뇌물 정치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낮지만, 문장에 뛰어나 「첨산당집(鈐山堂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2. 1. 초년 생활

엄숭은 성화 16년(1480년), 강서성 펀이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엄씨 가문은 쇠락하여 생계 유지가 어려워 처가를 통해 생필품을 조달받았다. 엄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매우 영민하였다.[4][5] 아버지는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정성껏 엄숭을 가르쳤다. 엄숭은 5세에 엄씨사당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8세에 막립지(莫立之) 분의현지현의 눈에 띄어 현학(縣學)에 진학하여 학비를 면제받았다. 이후 강서제학사가 분의를 지나가다 엄숭을 시험하고 늠선생(廪膳生)으로 삼았다. 10세에 현시(縣試)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19세에 거인(擧人)에 발탁되었다.

홍치 18년(1505년), 엄숭은 25세에 진사 학위를 취득하여 편수관으로서 한림원에 들어갔다.[2] 그러나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초기 경력이 중단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해야 했다. 이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 류진의 지배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숭은 류진이 실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과 부수도인 난징의 한림원에서 일했다.

2. 2. 출사

25세에 엄숭은 부친의 바람대로 1505년(홍치 18년) 을축과(乙丑科)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庶吉士)로 선발되었고, 편수(編修)에 제수되었다.[6] 큰 뜻을 품었던 당시, 엄숭은 큰 병을 얻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직 후 10년간은 환관 유근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였다.

엄숭은 유근이 실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과 부수도인 난징한림원에서 일했다.

2. 3. 순탄한 관료 생활

유근(劉瑾)과 당원들이 멸망한 이후, 엄숭은 순천부(順天府)로 북상하여 복직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엄숭은 북경(北京)과 남경(南京) 한림원(翰林院)에 번갈아 임직하였다.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에 임명되고 남경한림원(南京翰林院) 업무를 대리하면서,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로 소환되었다. 가정(嘉靖) 7년(1528),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에 임명되었다.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으로 옮긴 뒤에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로 진급하였고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尙書)로 옮겼다. 남경 생활 5년차에 엄숭은 만수절(萬壽節) 하례를 위해 북경에 갔다. 당시 조정에서는 『송사(宋史)』를 다시 편찬하고 있었으며 보신들은 엄숭을 예부상서겸한림원학사(禮部尙書兼翰林學士)에 임명할 것을 요청하였다.[7]

가정제(嘉靖帝)는 도교(道敎)에 빠져 장생불로술(長生不老術)에 심취하여 정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조정의 업무는 조신들이 처리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하언(夏言)은 가정제의 총애를 얻고 있었으며, 엄숭과 같은 고향이었기에 엄숭은 하언에게 아첨하였다.[7]

하루는 엄숭이 집에서 연회를 열고 하언을 초청하였으나 하언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엄숭은 하언의 집 대문 앞에 가서 도포를 걷어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언은 미안해하며 사절했지만 결국 엄숭의 집에 가서 연회에 참석했다. 이후 엄숭은 하언과 친분을 쌓았고 하언은 다방면으로 엄숭을 추천했다. 하언의 추천으로 엄숭은 승승장구하였고 가정제의 총애도 얻었다. 가정 15년(1537) 하언이 내각수보(內閣首輔)에 임명되자 엄숭은 예부상서로 승진하였으며, 후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추가되었다.[7]

하언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점차 가정제의 총애를 잃었다. 하루는 가정제가 하언과 엄숭 등 대신들에게 침향수엽관(沈香水葉冠)을 내렸으나, 하언은 머리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엄숭은 매번 조정에 나갈 때마다 관을 썼고 특히 경사(輕紗)에 담아두어서 공경함을 보였다. 가정제는 이를 보고 더욱 엄숭을 좋아하고 하언을 싫어했다.[7]

엄숭은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승진하였고 세력이 더 커지면서 하언을 공격하였고 하언을 내쫓도록 가정제를 종용하였다. 하언이 파직된 뒤 엄숭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가정 22년(1543) 이부상서(吏部尙書) 허찬(許贊), 예부상서 장벽(張璧)과 엄숭은 함께 기무에 참여하였지만 가정제는 업무를 볼 때에는 엄숭만을 불렀다. 가정 24년(1545) 12월, 허찬은 노병으로 사직되었고 장벽은 세상을 떠나자 가정제는 하언을 다시 기용하였다. 이때 하언은 엄숭의 사람됨을 알고 조금씩 방어하였다. 엄숭은 표면상으로 하언에게 겸손하게 대하였지만 마음에는 한을 품고 있었다. 이후 엄숭은 다시 청사(靑詞)로 가정제의 신임을 되찾았다.[7]

2. 4. 가정제의 신임

가정제도교에 심취하여 장생불로술에 빠져 정사에 관심이 없었고, 조정의 사무는 대신들이 처리하였다. 예부상서 하언은 가정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엄숭과 같은 고향이었기에 엄숭은 하언에게 아첨하였다. 한번은 엄숭이 연회를 열어 하언을 초대했으나 하언은 오지 않았다. 이에 엄숭은 하언의 집 대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고, 하언은 미안해하며 사절했지만 결국 엄숭의 집에 가서 연회에 참석했다. 이후 엄숭은 하언의 추천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가정제의 총애를 얻었다. 가정 15년(1537), 하언이 내각수보가 되자 엄숭은 예부상서로 승진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가 추가되었다.[7]

하언은 자존심이 강하여 점차 가정제의 총애를 잃었다. 가정제가 하언과 엄숭 등에게 침향수엽관(沈香水葉冠)을 내렸으나, 하언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엄숭은 조정에 나갈 때마다 관을 썼고, 얇은 비단(경사, 輕紗)에 담아 공경함을 보였다. 가정제는 이를 보고 엄숭을 더욱 좋아하고 하언을 싫어했다.[7]

엄숭은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승진하여 세력이 커지자 하언을 공격하여 쫓아내도록 가정제를 종용하였다. 가정 22년(1543), 이부상서 허찬(許贊), 예부상서 장벽(張璧)과 함께 엄숭이 기무에 참여하였으나, 가정제는 엄숭만 불렀다. 가정 24년(1545) 12월, 허찬은 노병으로, 장벽은 사망으로 물러나자 가정제는 하언을 다시 기용하였다. 하언은 엄숭을 경계하였으나, 엄숭은 표면상 겸손하게 대하며 속으로는 한을 품었다. 이후 엄숭은 청사(靑詞)로 가정제의 신임을 되찾았다.[7] 청사(青詞)는 도교의 제문으로, 엄숭은 이것에 능통하여 도교에 심취한 가정제의 신임을 얻었다.[2]

이후, 엄숭은 달단의 침공을 기회로 하언을 공격하였다. 가정 23년(1544) 달단이 하투(河套, 오늘날 영하회족자치구와 내몽고자치구 경내 하란산 동쪽, 낭산과 대청산 남쪽)를 침공하자, 섬서총독 증선이 하투를 되찾고 변장(邊將) 축성을 건의하였고, 이는 하언의 지지를 얻었다. 가정제는 하투 탈환을 결심하고 증선을 포상했다. 이때 엄숭은 황제의 근시를 매수하여 증선이 '변방의 사단을 함부로 연다(輕啓邊釁)'고 모함하고, 변장 구란을 시켜 증선이 패배를 숨기고 군향을 빼돌렸으며 하언에게 뇌물을 줬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엄숭은 가정제에게 두 사람이 하투를 탈환한 것은 다른 뜻이 있다고 모함했다. 가정제는 이를 믿었다.[7]

가정 27년(1548) 3월, 증선은 살해되었고 아내는 유배되었다. 하언은 하옥되었고, 엄숭은 가정제가 하언을 훼방한다고 믿게끔 하였다. 같은 해 10월, 하언은 참수되었고, 하언의 일파 역시 처벌받았다.[7]

2. 5. 권력 장악과 전횡

가정제가 도교에 심취하여 정사에 관심을 두지 않자, 엄숭은 예부상서 하언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키웠다. 하언의 추천으로 엄숭은 승진하였고, 가정제의 총애를 얻었다. 하언이 내각수보가 되자 엄숭은 예부상서, 태자태보로 승진하였다.[7]

엄숭은 가정제의 신임을 이용하여 하언을 모함하여 쫓아내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가정 22년(1543), 이부상서 허찬, 예부상서 장벽과 함께 기무에 참여했지만, 가정제는 엄숭만 불러 정사를 논의하였다. 가정 24년(1545) 12월, 허찬과 장벽이 사망하자 가정제는 하언을 다시 기용하였으나, 엄숭은 하언을 다시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7]

하언 사후, 엄숭은 대권을 장악하였고, 가정제가 수도에 전념하며 정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모든 정사는 엄숭이 처리하였다. 엄숭은 가정제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충근민달(忠勤敏達)'이라는 은인(銀印)을 하사받았다. 엄숭이 연로해지자 아들 엄세번이 권력 장악을 도왔고, '대승상(大丞相)'과 '소승상(小丞相)'으로 불렸다.[8][9]

엄숭 부자는 20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며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엄세번은 재산을 축적하고, 여러 대신들이 엄숭 부자를 탄핵하였으나 가정제의 비호로 면피되었다. 그러나 가정 41년(1562), 도사 남도행의 점괘와 서계의 탄핵으로 엄숭 부자는 몰락하였다.[10] 엄세번은 양계성, 심련을 죽이고 왜구 두목 왕직과 내통했다는 죄로 처형되었고, 엄숭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삭탈관직되어 고향에서 시묘살이 움막에서 살다가 2년 후 병사하였다.[11]

2. 6. 몰락

엄숭은 가정제(嘉靖帝) 치하에서 영상(領相)을 지내며 조정 정치를 장악했다.[1] 그는 황제의 재산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관직을 공개적으로 매매하는 등 부패로 악명이 높았다.[1] 하지만, 그의 부패와 배신 행위는 많은 정적을 만들어냈다. 그는 반대파를 억압하기 위해 양기생(楊繼盛)과 같은 저명한 비판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했다.

엄숭은 도교(道教) 제문(祭文)인 청사(青詞)에 능통하여 도교에 심취했던 가정제의 신임을 얻어 내각대학사(内閣大学士)가 되었다.[2] 가정제가 서원(西苑)의 만수궁(万寿宮)으로 거처를 옮겨 조의(朝議)를 포기한 것을 이용하여 정치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뇌물 정치를 펼쳤다. 이후 내각수보(内閣首輔)가 되어 정치의 전권을 장악하고, 아들 엄세번(嚴世蕃)과 함께 대승상(大丞相)·소승상(小丞相)이라 불릴 정도의 권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가정제가 서계(徐階)를 신임하게 되면서 권세가 쇠퇴하였고, 주응룡(鄒応龍)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몰락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빈곤 속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엄세번은 당시 중국 연안 지방을 침략한 왜구(倭寇)와 결탁한 죄로 처형되었다.[1] 가정 44년(1565년) 엄세번이 처형되자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민으로 떨어져 고향에서 궁핍하게 죽었다.

2. 7. 최후

가정 44년(1565년) 엄세번이 처형되자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여 고향에서 궁핍하게 죽었다.[2]

3. 평가

엄숭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간신으로서의 부정적인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 있는 정치가이자 예술가로서의 긍정적인 평가이다.

청나라 기윤(紀昀)은 『사고총목제요(四庫總目提要)』에서 엄숭의 시집 『검산당집(鈐山堂集)』을 평가하며 "엄숭은 비록 총애를 믿고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시는 동시대 사람들보다 단연코 독보적으로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왕세정(王世貞)은 '공작은 독이 있지만 무늬마저 가릴 수 없다'고 평했고,[18] 청나라 반덕여(潘德輿)의 『양일재시화(養一齋詩話)』에도 같은 평가가 실려있다.[19]

3. 1. 부정적 평가

『명사』는 엄숭을 「간신전(奸臣傳)」에 넣으면서, 특별한 재주는 없이 '오로지 황상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잡고 이익을 취하였다(惟一意媚上, 竊權罔利)'고 평가하였다.[12] 희곡 및 기타 문예 작품을 통하여 엄숭의 간신 이미지는 민간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러나 수년간 엄숭이 아주 큰 간신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그가 국정을 독단하였는지,[13]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핍박하였는지,[14] 그리고 실제로 매우 탐욕스럽고 막대한 부를 쌓았는지에 관한 것이다.[15]

엄숭은 부패로 유명했으며, 가정제 재위 기간 동안 관직을 공개적으로 매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반대파를 억압하기 위해 양기생과 같은 저명한 비판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했다.

뇌물 정치를 하는 등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낮지만, 문장에 뛰어나 「첨산당집(鈐山堂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3. 2. 긍정적 평가

『명사(明史)』는 엄숭을 「간신전(奸臣傳)」에 넣으면서, 특별한 재주 없이 '오로지 황상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잡고 이익을 취하였다(惟一意媚上, 竊權罔利)'고 평가하였다.[12] 그러나 수년간 엄숭이 아주 큰 간신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그가 국정을 독단하였는지,[13]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핍박하였는지,[14] 그리고 실제로 매우 탐욕스럽고 막대한 부를 쌓았는지에 관한 것이다.[15]

엄숭의 고향 분의 출신 학자 엄백문(嚴曰文)과 엄소평(嚴小平) 등은 엄숭에 대한 평가에서 전혀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또한 엄숭도 충군애민(忠君愛民)하고 인재를 발탁할 줄 아는 면모도 있었으며 정치적 공적도 탁월하다는 평가도 있다. 일례로 엄숭이 중용한 호종헌(胡宗憲)은 중국 동남 연해의 왜환(倭患)을 평정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16] 엄숭과 부인 구양씨(歐陽氏)는 서로 공경하였고 일생동안 첩을 들이지 않았으며 고향에도 잘 베풀어 구전으로 전하는 평가가 매우 좋다.[17]

3. 3. 서예

엄숭은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역사학자 조국경(曹國慶)에 따르면, 엄숭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을 때부터 서법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명대 한림원은 천하의 인재들이 모인 곳이었는데, 엄숭은 경의와 문장에서 항상 선두였고 시사 작법 역시 뛰어났다. 사람들은 그의 문장에 감탄하면서 서법 기예도 음미했다. 이후 한림원에서 다른 임지로 가거나, 북경에서 지방으로 갈 때도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엄숭의 묵서를 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21]

고향 분의(分宜) 검산(钤山)으로 돌아가 은거한 8년 동안 엄숭은 서법을 더욱 연마하여 그 조예가 날로 정묘해졌다. 북경에는 '육필거(六必居)' 등 엄숭이 쓴 편액 10여 개가 남아 있으며,[21] 산해관(山海關)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역시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진다.(엄숭이 썼다고 말하기 꺼려 소현(蕭顯)이 썼다고도 한다.) 산동(山東) 곡부(曲阜)의 '성부(聖府)', 항주(杭州) 서호(西湖) 악비묘(岳飛廟)의 '만강홍(滿江紅)'(후에 낙관은 하언(夏言)으로 고침)[22] 역시 그의 작품이다. 전국 유명 명승 20여 곳에는 여전히 엄숭의 필적이 남아 있다.[23] 엄세번의 딸은 연성공(衍聖公)에게 시집갔는데, 공부(孔府)에는 지금도 엄숭이 손녀의 결혼을 구애하며 앉았던 냉판등(冷板凳)인 '각로등(閣老凳)'이 남아 있다.

청나라 장정옥(張廷玉)은 『명사(明史)』에서 엄숭을 간신으로 평가하면서도, '시나 고문사를 짓는데 있어서는 매우 뛰어나다(爲詩•古文辭, 頗著淸譽)'고 평가했다.[20] 하량준(何良俊)은 "엄숭의 시는 수려하고 청아하면서도 찌르는 것이 있어, 근래 명가 가운데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은 없으며, 작문 역시 고아하고 엄숙하니, 어찌 사람의 됨됨이로 그 사람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능력이 떨어지는 사인들의 재주를 아끼고 응원하는 것이 가히 아낄만 하다"라고 하였다.[20]

참조

[1] 서적 Military culture in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05-28
[2] 문서 엄숭은 "청사재상"이라고도 불렸다.
[3] 서적 명사(明史) 열전(列傳)196 엄숭
[4] 서적 명산장(名山藏) 卷93 엄숭
[5] 뉴스 才華橫溢 奈何爲奸臣 中国日報 2009-08-12
[6] 서적 명사(明史) 열전(列傳)196 엄숭
[7] 서적 명사(明史) 세종본기(世宗本紀)2
[8] 서적 명사(明史) 왕종무열전(王宗茂列傳)
[9] 서적 명사(明史) 장충열전(張翀列傳)
[10] 서적 명사기사(明史紀事) 52권 세종숭도교(世宗崇道敎)
[11] 서적 천수빙산록(天水氷山錄)
[12] 서적 명사(明史) 권308 간신전(奸臣傳) 엄숭
[13] 서적 국각(國榷) 권64, 명숙황제세종실록(明肅皇帝世宗實錄) 권566
[14] 서적 국각(國榷)
[15] 서적 청주적신소(请诛贼臣疏)
[16] 서적 茅鹿門先生文集 卷三 上袁元峰相公書
[17] 서적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내각(內閣) 거관거향부동(居官居鄉不同)
[18] 문서
[19] 문서
[20] 서적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 卷26
[21] 서적 도문식소록(都門識小錄)
[22] 서적 혜방잡기(蕙榜雜記)
[23] 서적 众说纷纭论严嵩 中国文史出版社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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