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가어 포이흐팅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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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트가어 포이흐팅거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정권 하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제21기갑사단 사단장을 역임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파리에 머물며 지휘를 소홀히 했고, 이후 탈영하여 군사 기밀을 소련 정보기관에 넘기는 등 부패한 행적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정보기관에 협력하여 첩보 활동을 하다가 196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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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가어 포이흐팅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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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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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드가 포이히팅거 |
출생일 | 1894년 11월 9일 |
출생지 | 알자스-로렌 메스 |
사망일 | 1960년 1월 21일 |
사망지 | 베를린 |
별칭 | 해당사항 없음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1918년까지) |
소속 |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1933년까지) |
소속 | 나치 독일 육군 (1945년까지) |
복무 기간 | 1914년–1945년 |
최종 계급 | 중장 |
지휘 | 제21 기갑 사단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베르됭 전투 솜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바르바로사 작전 안톤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팔레즈 포위전 |
수훈 | 기사 철십자 훈장 |
수훈 | 독일 십자 은장 |
2.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에트가어 포이흐팅거는 1894년 11월 9일 독일 제국의 메츠(현재의 프랑스 메스)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07년 아비투어에 합격한 후, 카를스루에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트가어 포이흐팅거는 국방군(Reichswehr)에서 다양한 참모직을 수행하다가 1937년 야전 지휘관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2월부터 제7(바이에른) 포병 연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했으며, 같은 해 11월, 대위(Hauptmann)로 진급했다. 1934년 10월에는 제10 포병 연대(구 암베르크 포병 연대)에서 중대장을 맡았다. 1935년 1월, 의 야전 포병 학교에서 교도 연대 교관을 맡았고, 같은 해 11월 소령(Major)으로 진급했다.
1942년 11월 27일, A 전투단(Kampfgruppe A) 지휘관으로서 툴롱의 프랑스 함대 탈취를 목적으로 한 에 참가했다.[11] 1943년 4월 7일, 제931기동포병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몇 달 후, 여러 부대와 노획 장비로 새로운 사단이 편성되어, (동명의 사단이 한 번 북아프리카에서 궤멸되었다)로 명명되었다. 포이흐팅거는 예비역 기간 중 민간 기업 기술자로 일한 경험을 살려, 파리에서 노획된 오치키스 H35의 섀시에 독일제 화포를 탑재한 독자적인 돌격포 및 로켓포 차량을 개발했다고 한다[11]。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사관 후보생으로 제14 바덴 보병 포병 연대에 배속되어 참전했다. 1915년 8월 18일 소위로 진급하여 러시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했다. 베르됭 전투, 솜 전투, 제2차 앤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1917년 9월에는 제212 보병 포병 연대에 배속되어, 동 연대 소속으로 패전을 맞이했다.
1919년 3월 21일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제13 포병 연대에 복귀했다. 1920년 10월 1일에는 제25 저격병 연대, 1921년 1월 1일에는 제13 뷔르템베르크 보병 연대,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제5 포병 연대로 전속되었다. 그 후 3년 뒤 제2 (프로이센) 포병 연대에 정착했다. 1925년 4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3. 나치 정권 하의 포병 장교
포이흐팅거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요청으로 독일 국방군(Wehrmacht) 설치 선언 당 대회에 참여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조직 위원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 제26 포병 연대 제3 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8년 8월 중령(Oberstleutnant)으로 진급했다. 1939년 8월, 제227 포병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벨기에 및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다. 1941년 8월, 대령(Oberst)으로 진급하여 동부 전선으로 이동, 북부 집단군에서 흩어진 병력과 노획 무기를 재편성하여 소련군의 포위를 탈출시키는 등 조직력을 발휘했다.
4. 남프랑스 침공 및 제21기갑사단 재편
이 "신병기 개발"은 총통아돌프 히틀러가 평가하여, 그에게 사단이 주어지게 되었다. 1943년 8월 1일, 그는 소장(Generalmajor)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21장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단장으로 취임한 포이흐팅거는 부하와 상사, 또 다른 사단 사령관으로부터 자주 악평을 샀다[12]。 그는 나치당 요인과의 우호 관계에 따른 포상으로 장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부터 포병과 장교로 계속 복무한 포이흐팅거는 장갑 부대를 지휘한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11]。 사단의 현대적인 통신 시스템 편성에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했지만, 이윽고 자신이 사단장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훈련과 지휘를 각 연대장에게 일임하고 사단의 책임을 완전히 포기한 포이흐팅거는 파리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4. 1.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6월 6일부터 시작된 노르망디 침공에서 제21기갑사단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 근처에 전개된 부대 중 하나였다.[11] 그러나 이 날도 포이흐팅거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고, 사단 사령부에는 애인이었던 함부르크 출신 여배우를 데리고 나타났다.[11] 몇 시간 늦게 도착한 그는 캉 및 해안선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연합군의 공습과 함포 사격에 막혀 부하 연대장의 진언에 따라 공격은 중단되었다.[11] 캉 전투에서 사단은 다량의 병력과 물자를 잃었다.
그는 부하 지휘관들에게 부대 의사 결정에 상당한 재량을 허용했다.[6] 광범위한 경험을 가진 폰 룩 대령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굿우드 작전의 돌파 시도, 팔레즈 포위전에서 제7군의 최종 궤멸에 이르기까지, 포이흐팅거로부터 거의 연락이나 지시를 받지 않고, 그의 장갑 연대를 전체 작전 기간 동안 운용했다.[7] 제21기갑사단의 많은 병력이 팔레즈 갭에 갇혔지만, 포이흐팅거는 포위망을 벗어났으며, 폰 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은 혼자입니다. 연료, 탄약, 식량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말해줄 수 없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룩. 우리 사단의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오십시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흐팅거는 1944년 8월 1일부로 중장(Generalleutnant)으로 승진했으며, 8월 6일에는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1]
팔레즈 포위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제21기갑사단은, 포위를 벗어난 패잔병들로 로렌에서 재편성되었다. 이어서 벌어진 보주 산맥 전투 후, 포이흐팅거는 "우리는 중포 및 전차포를 사용한 짧은 시간의 집중 사격을 실시하여, 40대 이상의 적 전차를 파괴했다[11]"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과 12대 정도의 전차를 격파했을 뿐이었다고 한다.[11] 또한, 많은 기갑 부대 지휘관과 달리, 파리에 틀어박힌 포이흐팅거가 최전선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11]
5. 제국 군사 법정에서의 유죄 판결
1945년 1월, 포이히팅거는 웅덜링 전투에 사단이 참가하고 있음에도 애인과 하사관 3명을 데리고 첼레의 고급 호텔에 투숙했다.[13] 1945년 1월 5일, 지역 주민의 신고를 받은 제국 군사 법정에 의해 포이흐팅거와 일행은 체포되었다.[9][13] 그는 유대인 재산 착취를 통한 모피 불법 판매, 장교들의 군 복무 기피, 국방군 재산 횡령 및 남미 출신 애인에게 군사 기밀 누설 혐의로 기소되었다.[9]
1945년 3월 19일, 제국 군사 법정은 포이흐팅거에게 모든 훈장 및 기장을 박탈하고, 포병과 이등병(Kanonier)으로 강등한 후 사형을 선고했다.[13]
6. 특사와 탈영
1945년 3월 2일, 아돌프 히틀러는 포이흐팅거의 전선 복귀를 인정했다.[9] 그는 젤로 고지에 주둔하는 제20 기갑척탄병 사단에 포병 병과 이등병으로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탈영했다.[9] 1945년 4월 12일부터 사단 및 야전 헌병대(Feldgendarmerie)에 의해 수색이 시작되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9]
전선을 떠나 체레 부근의 농가에 잠복해 있던 포이흐팅거는, 1945년 5월 29일에 장교 제복으로 갈아입은 후 독일 육군 중장으로서 영국군에게 항복했다.[9] 그 후 트렌트 파크 포로 수용소나 미군 관리 하의 알렌도르프 포로 수용소 등 여러 포로 수용소를 전전했다. 알렌도르프 포로 수용소에서는, 함께 수용되었던 다른 장군들로부터 그의 적전 도주에 대한 "폭력적인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9]
7. 전후 활동: 소련 정보기관 협력
그는 포로로 잡힌 후 자신을 나치 정권의 피해자로 위장하여 1946년 일반 위원회로부터 조기 석방을 받을 수 있었다.[2] 실제 죄상이 어떠하든, 제국 군사 법정이 포이흐팅거를 "유대적인 행위"의 죄명으로 재판했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나치 측의 정의에 의한 부당한 재판의 희생자", 즉 나치에 대한 저항자로 위장했다. 석방 후, 전 육군 중장으로서 브레머-풀칸 조선소 등 몇몇 기업에 임원으로서 영입되었고, 게다가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여, 중공업계에서 철강 제품 거래를 하게 된다.
1953년 5월, 포이흐팅거는 크레펠트역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한 묶음의 서류를 받게 된다. 그것은 1945년 4월 12일부터의 수색 때, 야전 헌병대가 작성한 포이흐팅거의 지명 수배서였다. 낯선 남자는 또한, 자신들이 군사 정보를 원하고 있음을 전하고, 협력을 얻지 못하면 이 문서를 공개하겠다고 포이흐팅거를 협박했다. 적전 도망이나 횡령 등, 군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행위가 밝혀져 오명을 입는 것을 두려워한 포이흐팅거는, 이렇게 소련의 첩보 기관 참모 본부 정보 총국(GRU)에 정보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베를린, 판코의 그라니츠 거리 44번지(Granitzstraße 44)에 사는 파울 쿠트(Paul Kutt)라는 남자에게 정보를 계속 넘겨주었다.[2]
Granitzstraßede 44
군사 정보를 얻기 위해 옛 독일 국방군 장성들과의 접촉을 원했던 포이흐팅거는 서독의 재무장 정책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호이징거 전 육군 대장과 한스 슈파이델 전 육군 중장과 접촉했다. 1955년 11월 13일, 국방 장관 테오도르 블랑크는 새로 창설된 독일 연방군의 고급 장교 명부를 발표했는데, 포이흐팅거는 이 명부를 더 빨리 입수했다.
이 시기, 포이흐팅거는 연방군과 정재계의 파이프 역할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많은 부대를 방문했을 뿐 아니라, 국방부에도 출입하게 되었다. 이때, 옛 친구인 카를-오토 폰 힌켈다이(Carl-Otto von Hinckeldey)와 재회했다. 당시 연방군 육군 대령이었던 힌켈다이는 포이흐팅거가 뒤셀도르프의 제26 보병 사단 제26 포병 연대 제3 대대에서 근무했을 때의 부관이었다.
포이흐팅거는 힌켈다이의 신뢰를 얻어 "1944년과 현재의 비교에 기초한 군사 정세 연구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힌켈다이는 핵전쟁이나 공수 작전의 전술과 관련된 연방군의 기밀 문서를 다수 포이흐팅거에게 열람하게 했다. 게다가 포이흐팅거는 공군의 베르너 파니츠키 장군과 교류했다. 파니츠키는 1958년 1월 10일부터 초대 전군 지휘 참모 감부 참모장을 맡았고, 후에 공군 총감이 되는 인물이었다. 많은 국방부 중진의 지인이 된 그는, 결국 성 내에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그는 또한 "연구"를 할 때, 힌켈다이가 부재중일 것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가 서베를린에서 입수한 마이크로필름은 3개월마다 그를 방문하는 국가인민군의 블라들렌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프(Wladlen Michajlowitsch Michajlow) 소령에게 넘겨졌다. 미하일로프는 이 첩보 임무의 지휘관이었으며, 그들의 회견은 동서독 간의 석유 거래에 관련된 사업상의 여행으로 교묘하게 위장되었다.
또한 그의 가족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계속 도왔다. 의붓딸은 비서로서 파리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본부에 파견되었고, 의붓아들은 문서 복사에 협력했다. 역사 연구를 담당하던 한 NATO 장교는 1956년 6월경 1944년 캉에서의 전투에 대해 그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장교와의 대화에서 얻은 군사 정보를 유출하지 않고 GRU에 전달했다. 포이흐팅거는 약 7년 동안 약 1000통의 기밀 문서를 유출했다.
7. 1. 사망
에트가어 포이흐팅거는 1960년 1월 베를린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2] 그는 베를린에서의 회담을 마친 직후 전차 안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가장 가까운 베를린 동물원역에 정차한 후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2] 포이흐팅거는 전화로 아내에게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렸으며, 1월 21일에 사망했다.[2]8. 유산 및 평가
포이히팅거의 행적은 군사적 무능, 부패, 이념적 기회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의 비리는 사후에 폭로되어 독일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9. 훈장
에트가어 포이흐팅거는 1944년 8월 6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당시 소장(Generalmajor)으로서 제21 기갑사단 사령관이었다. 또한, 1943년 7월 15일에는 독일 십자 훈장 은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에는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용맹 훈장 청동 (1915년 11월 26일), 검과 함께하는 체링거 사자 훈장 기사 2급 (1916년 9월 30일), 뷔르템베르크 프리드리히 훈장 검과 함께하는 기사 2급 (1917년 12월 16일), 함부르크 한자 십자 훈장 (1918년 11월 11일)등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세계 대전 명예 십자 훈장 1914/1918 (1935년 2월 22일), 독일 올림픽 훈장 1급 (1936년 8월 16일), 철십자 훈장 부장 (1939) 2급 및 1급, 동부 전선 훈장 (1942년 7월 26일), 전쟁 공로 십자 훈장 검과 함께하는 1급 및 2급 (1942년 9월 1일) , 국방군 장기 복무 훈장 4급 및 1급도 수여받았다. 포이흐팅거는 1945년 1월 5일에 체포되어 사수로 강등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탈영하여 첼레에 숨어 있다가 1945년 5월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으며, 사형 선고로 인해 모든 훈장과 명예 표식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10. 계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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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Falltöter von rec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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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2-20
[2]
웹사이트
Spiegel interview with Dr. Rolf-Dieter Mü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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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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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erman Officer Biograph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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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Luck 2006, pp.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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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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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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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Last Taboo: Will Germany Finally Rehabilitate Nazi-Era 'Traitors'?
http://www.spieg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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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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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piegel
2009
[11]
서적
Mit Rommel an der Front
[12]
서적
Abgehört - Deutsche Generäle in britischer Kriegsgefangenschaft 1942–1945
[13]
뉴스
General Feuchtinger was not convicted of treason, but of the Nazi-era offense of "undermining mor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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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EGEL ONLINE International
200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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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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