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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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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엣추국은 일본의 고대 율령국 중 하나로, 7세기 말에 에치고국, 엣추국, 에치고국으로 분할되면서 성립되었다. 701년에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면서 율령제 국가로 확립되었으며, 현재의 도야마현 지역을 관할했다. 엣추국은 나라 시대에는 고쿠후와 국분사가 다카오카시에 위치했고, '엔기시키' 분류에 따르면 중요도 면에서 '상국', 수도와의 거리 면에서 '중국'으로 분류되었으나, 강력한 호족 세력은 발전하지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하타케야마 씨가 슈고로 등장했고, 센고쿠 시대에는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씨의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정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를 거쳐 에도 시대에는 마에다 씨가 가가 번 아래에서 통치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현으로 분할되었다가, 1883년 도야마 현으로 재편성되었다. 엣추국은 8개의 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국부, 국분사, 신사 등의 주요 시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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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추국
개요
이름越中国 (엣추노쿠니)
별칭엣슈(越州)
현대의 지역도야마현
지도 검색어다카오카
설명도야마현다카오카시에 위치한다.
비고북리쿠도에 속한다.
역사
성립701년, 고시국에서 분리
폐지1871년
정치
정치 체제율령국
등급상국
국부현재의 도야마현다카오카시
행정 구역
4군 42향
소속호쿠리쿠도
사찰 및 신사
국분사도야마현다카오카시(엣추국분사 유적)
국분니사(미상)
이치노미야이즈미 신사(도야마현다카오카시)
케타 신사(도야마현다카오카시)
다카세 신사(도야마현난토시)
오야마 신사(도야마현나카니카와군다테야마정)

2. 역사

일본서기에 최초의 국 중 하나로 기록된 엣추국(Koshi no Kuni/越国일본어)은 고대 율령국 중 하나였다.[2]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엣슈/越州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7세기 말에는 고시국(越国)이 분할되어, 훗날 에치젠국, '''엣추국''', 에치고국의 전신이 되는 행정 구분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된다.[6] 다이호 원년(701년) 8월 3일-2년(702년) 10월 14일 사이에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어 전국적인 시행에 이르면서 늦어도 이때까지는 율령제 국가로서의 엣추국이 성립되었다.

율령 시행 당시의 다이호 2년(702년) 3월 17일에 엣추국의 4군(구비키군·고시군·우오누마군·가모하라군)을 나누어 에치고국에 속하게 했다[7]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문헌상 엣추국의 첫 기록이다. 엣추국은 토나미군·이미즈군·네이군·니이카와군의 4군으로 구성된 율령제 국가가 되어 현재의 도야마현과 거의 같은 지역을 관할했다.

요로 2년(718년) 5월 2일에 에치젠국에서 분립하여 성립된 노토국덴표 13년(741년) 12월 10일에 엣추국과 병합했으나 덴표호지 원년(757년)에 노토국은 엣추국에서 다시 분립했다.

덴표 18년(746년)에 오토모노 야카모치고쿠시로서 부임해 오자 만엽집의 많은 노래가 읊어졌다.

덴표호지 2년(758년), 엣추국에 역령이 처음 설치되었다[8] . 호키 6년(775년) 3월 2일, 대소 목원을 설치했다. 엔랴쿠 23년(804년) 6월 10일, 상국으로 정해졌다[9] .

나라 시대국부와 국분사는 현재 다카오카시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이치노미야의 칭호를 놓고 경쟁하는 4개의 신사가 있으며, 이 중 2개는 다카오카시에, 1개는 난토시, 나머지 1개는 다테야마정에 위치해 있다. ''엔기시키'' 분류 시스템에 따르면 엣추 국은 중요도 면에서 "상국"(上国)으로, 수도와의 거리 면에서 "중국"(中国)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분류에도 불구하고 엣추 국은 강력한 지역 고족 씨족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보통 더 강력한 이웃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엣추에는 큰 세력이 없고, 호족이나 국인이라고 불리는 소세력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시세에 따라 기소 요시나카호조씨의 지류로 슈고나고에 씨족, 모모이 나오쓰네 등에 협력하여 활약했다.

2. 1. 고대

일본서기에 최초의 국 중 하나로 기록된 엣추국(Koshi no Kuni/越国일본어)은 고대 율령국 중 하나였다.[2]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엣슈/越州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701년, 다이호 율령 개혁에 따라 고시 국은 에치젠 국, 엣추 국, 에치고 국 세 개의 국으로 분할되었다.

702년, 엣추 국의 서부 4개 (구비키, 고시, 우오누마, 간바라)은 에치고 국으로 이관되었다. 엣추 국은 741년에 노토 국을 병합했지만, 757년에 노토 국은 다시 분리되었다. 746년, 시인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고쿠시가 되었고, ''만엽집''에 이 지역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나라 시대국부와 국분사는 현재 다카오카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치노미야의 칭호를 놓고 경쟁하는 4개의 신사가 있으며, 이 중 2개는 다카오카시에, 1개는 난토시, 나머지 1개는 다테야마정에 위치해 있다. ''엔기시키'' 분류 시스템에 따르면 엣추 국은 중요도 면에서 "상국"(上国)으로, 수도와의 거리 면에서 "중국"(中国)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분류에도 불구하고 엣추 국은 강력한 지역 고족 씨족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보통 더 강력한 이웃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하타케야마 씨가 이 지역의 슈고로 등장했지만, 교토에 머물면서 진보 씨와 시이나 씨와 같은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타케야마 씨는 권력 기반을 노토 국의 나나오성으로 옮겼고, 엣추 국은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씨가 경쟁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잇코잇키''가 한쪽을 다른 쪽과 대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지역은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그의 부관 삿사 나리마사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하에 마에다 도시이에로 교체되었다. 마에다 씨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동안 가가 번 아래에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에도 시대 중반에 네이군, 니이카와군의 대부분이 가가 번에서 분리되어 마에다 씨의 분가에서 통치하는 10만 코쿠의 도야마 번으로 편입되었다.

메이지 유신과 1871년 폐번치현 이후, 엣추 국은 가나자와 현, 도야마 현, 나나오 현, 니이카와 현으로 분할되었지만, 이 지역은 1876년에 이시카와 현으로 재통합되었다. 1883년, 이시카와 현은 분할되어 엣추 국의 원래 4개 군이 새로운 도야마 현이 되었다.[3] "엣추 국"이라는 명칭은 이후에도 일부 행정 목적을 위해 공식 문서에 계속 나타났다. 1894년 (a)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 및 (b)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4]

2. 2. 중세

701년, 다이호 율령 개혁에 따라 고시 국은 에치젠 국, 엣추 국, 에치고 국 세 개의 국으로 분할되었다.[2] 702년, 엣추 국의 서부 4개 은 에치고 국으로 이관되었다. 엣추 국은 741년에 노토 국을 병합했지만, 757년에 노토 국은 다시 분리되었다. 746년, 시인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고쿠시가 되었고, ''만엽집''에 이 지역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나라 시대국부와 국분사는 현재 다카오카시에 위치해 있었다. ''엔기시키'' 분류 시스템에 따르면 엣추 국은 중요도 면에서 "상국"(上国)으로, 수도와의 거리 면에서 "중국"(中国)으로 분류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하타케야마 씨가 이 지역의 슈고로 등장했지만, 교토에 머물면서 진보 씨와 시이나 씨와 같은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메이오의 정변으로 진보 나가자네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호조즈로 맞아들여지고, 일대 정권을 구축하여 호조즈 막부로 칭해졌다. 이때 정토진종이 널리 퍼져 잇코잇키도 다발했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타케야마 씨는 진보 씨(진보 요시무네, 진보 나가모치)와 사이가 나빠져, 대신 분가인 노토 하타케야마 씨의 힘을 빌려 통치를 유지하려 했으나, 기내(畿内)에서의 내분이 격화되는 가운데 세력을 잃었다. 신카와 군의 슈고다이인 시이나 씨가 에치고나가오 씨(우에스기 씨)의 지원을 받아, 이미즈 군・네이 군의 슈고다이인 진보 씨와 항쟁을 시작하여, 엣추의 센고쿠 시대(엣추 대란)라고 불리는 싸움이 발발했다.

1559년부터 1568년까지, 엣추의 내란은 다케다 신겐 파의 진보 나가모치와 우에스기 겐신 파의 시이나 야스토에 의한, 이른바 다케다 씨・우에스기 씨의 대리 전쟁이라는 형태가 되었다. 1568년 이후 우에스기 겐신은 출병하여 엣추 전토를 제압하려 했으나, 가이 다케다 씨가 엣추 호족 및 엣추 잇코잇키를 지원하여 방해했다. 1576년, 우에스기 겐신은 마스야마성, 신지성 등을 함락시키고 엣추를 제압한다. 그러나, 1582년, 시바타 가쓰이에를 사령관으로 하는 오다 씨의 호쿠리쿠 침공이 시작되어, 이윽고 엣추의 우에스기 씨 세력은 구축되었다(우오즈 성 전투).

이 지역은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그의 부관 삿사 나리마사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하에 마에다 도시이에로 교체되었다.

2. 3. 근세

701년, 다이호 율령 개혁에 따라 고시 국은 에치젠 국, 엣추 국, 에치고 국 세 개의 국으로 분할되었다.[2] 702년, 엣추 국의 서부 4개 은 에치고 국으로 이관되었다. 엣추 국은 741년에 노토 국을 병합했지만, 757년에 노토 국은 다시 분리되었다. 746년, 시인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고쿠시가 되었고, ''만엽집''에 이 지역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2]

나라 시대국부와 국분사는 현재 다카오카시에 있었다. ''엔기시키''에 따르면 엣추 국은 중요도 면에서 "상국"(上国)으로, 수도와의 거리 면에서 "중국"(中国)으로 분류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하타케야마 씨가 이 지역의 슈고로 등장했지만, 교토에 머물면서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엣추 국은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씨가 경쟁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그의 부관 삿사 나리마사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하에 마에다 도시이에로 교체되었다.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시바타 가쓰이에의 지원을 받아 사사 나리마사가 엣추를 통일했지만, 가쓰이에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자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게 귀순하지 않고, 히데요시 측의 마에다 도시이에와 다투었다. 도야마 전투로 나리마사는 패배했다.

1595년에는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엣추의 남은 니이카와군도 가증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누노이치 번이 있었지만, 노토 국 내의 영지와 교환되어, 엣추 국 전역이 마에다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가가 번의 지번으로서 도야마 번이 설치되었지만, 국내의 대부분은 가가 번 영지였다.

마에다 씨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동안 가가 번 아래에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에도 시대 중반에 네이군, 니이카와군의 대부분이 가가 번에서 분리되어 도야마 번으로 편입되었다.

메이지 유신1871년 폐번치현 이후, 엣추 국은 여러 현으로 분할되었지만, 1876년에 이시카와 현으로 재통합되었다. 1883년, 이시카와 현은 분할되어 엣추 국의 원래 4개 군이 새로운 도야마 현이 되었다.[3] 그러나 "엣추 국"이라는 명칭은 이후에도 일부 행정 목적을 위해 공식 문서에 계속 나타났다.[4]

2. 4. 근대

701년, 다이호 율령 개혁에 따라 고시 국은 에치젠 국, 엣추 국, 에치고 국 세 개의 국으로 분할되었다.[2] 702년, 엣추 국의 서부 4개 군은 에치고 국으로 이관되었다. 엣추 국은 741년에 노토 국을 병합했지만, 757년에 노토 국은 다시 분리되었다.[2] 746년,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고쿠시로 부임하여 ''만엽집''에 이 지역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2]

나라 시대국부와 국분사는 현재 다카오카시에 있었다.[2] 이치노미야는 다카오카 시에 2개, 난토시다테야마정에 각각 1개가 있다.[2] ''엔기시키''에 따르면 엣추 국은 "상국"(上国)이자 "중국"(中国)으로 분류되었다.[2] 엣추 국은 강력한 지역 고족 씨족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보통 더 강력한 이웃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하타케야마 씨가 슈고로 임명되었으나 교토에 머물며 대리인을 통해 통치했다.[2] 센고쿠 시대에는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씨가 엣추 국을 두고 경쟁했으며, 잇코잇키가 이들의 경쟁에 영향을 미쳤다.[2] 오다 노부나가의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삿사 나리마사가 이 지역을 정복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마에다 도시이에에게 통치권을 넘겼다.[2] 마에다 씨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동안 가가 번 아래에서 이 지역을 통치했다.[2] 에도 시대 중반, 네이군, 니이카와군의 대부분이 가가 번에서 분리되어 도야마 번으로 편입되었다.[2]

메이지 유신1871년 폐번치현 이후, 엣추 국은 가나자와 현, 도야마 현, 나나오 현, 니이카와 현으로 분할되었다.[3] 1876년, 이 지역은 이시카와 현으로 통합되었다.[3] 1883년, 이시카와 현에서 분리되어 엣추 국의 4개 군은 도야마 현이 되었다.[3] "엣추 국"이라는 명칭은 1894년 일본과 미국,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4]

메이지 초년 시점 엣추 국은 신카와군, 네이군, 이미즈군, 토나미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1] 1871년 폐번치현으로 가나자와 현과 도야마 현으로 나뉘었다가, 같은 해 11월 20일 이미즈 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신카와 현, 이미즈 군은 나나오 현 관할이 되었다.[11] 1872년 나나오 현이 폐지되면서 이미즈 군은 신카와 현에 합쳐졌고, 1876년에는 이시카와 현에 통합되었다가 1883년 다시 도야마 현으로 분리되었다.[11]

3. 행정 구역

엣추 국은 8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 도나미 군/礪波郡일본어(도나미 군) (1896년, 히가시토나미 군(東礪波郡)・니시토나미 군(西礪波郡)으로 분할.)
  • 이미즈 군(射水郡) (1896년, 히미 군(氷見郡)을 분할.)
  • 누이 군(婦負郡)
  • 니카와 군/新川郡일본어(니카와 군) (1878년, 가미니카와 군(上新川郡)・시모니카와군(下新川郡)으로 분할. 1896년, 가미니카와 군에서 나카니카와군을 분할.)

3. 1. 군(郡)

엣추 국은 8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 도나미 군/礪波郡일본어(1896년, 히가시토나미 군(東礪波郡)・니시토나미 군(西礪波郡)으로 분할.)
  • 이미즈 군(射水郡) (1896년, 히미 군(氷見郡)을 분할.)
  • 누이 군(婦負郡)
  • 니카와 군/新川郡일본어(1878년, 가미니카와 군(上新川郡)・시모니카와군(下新川郡)으로 분할. 1896년, 가미니카와 군에서 나카니카와군을 분할.)


다이호 2년 (702년) 3월에 구비키 군(頸城郡), 고시 군(古志郡), 우오누마 군(魚沼郡), 가와라 군(蒲原郡)은 에치고 국(越後国)으로 이관되었다. 덴표 13년 (741년) 12월부터 덴표호지 원년 (757년) 5월까지 노토 국(能登国)이 엣추 국(越中国)에 병합되었을 때는 하쿠이 군(羽咋郡), 노토 군(能登郡), 호우시 군(鳳至郡), 스즈 군(珠洲郡)이 엣추 국에 속했다.

4. 주요 시설

4. 1. 국부(国府)

(다카오카시 후시키 고코후)|다카오카시]]

다카오카시


엣추국의 국부는 이미즈군에 있었으며, 현재의 다카오카시 후시키 고코후이다. 현재의 쇼코지 부근이 국부 터로 여겨지며, 경내에는 "엣추국청지" 석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근처의 다카오카시 후시키 기상 자료관 (구 후시키 측후소)이 "히가시다치"라는 작은 지명에서 국사관 터로 추정되어 "국수관지" 석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부지 내에서는 9세기의 건물 터가 발굴되었지만, 나라 시대의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신미나토(현 이미즈시)로 이전된 적이 있으며, 타헤이키에는 신미나토에서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다.

4.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사(国分尼寺)

다카오카시 후시키이치노미야에 국분승사가 있으며, 기타 신사 근처의 "국분사 터"에 약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국분니사의 유구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4. 3. 신사(神社)

『엔기시키 진묘초』에는 대사 1사 1좌·소사 32사 33좌의 총 33사 34좌가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목록은 엣추국의 식내사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사는 이미즈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본에 따라 이견이 있어 다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 이미즈군 기타 신사 - 구조가본(가장 오래된 사본)에 따른다. 다카오카시 후시키이치노미야에 위치한다.
  • 이미즈군 이미즈 신사 - 이즈모본에 따른다. 에도 시대까지는 현재의 다카오카시 후타가미에 있었다.


소샤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치노미야는 '''이미즈 신사''', '''기타 신사''', '''다카세 신사''', '''오야마 신사'''이다. 노토국이 엣추국의 일부였던 시대, 엣추국의 이치노미야는 현재의 기타 대사였지만, 노토국을 분리할 때 이노미야였던 이미즈 신사가 엣추국 이치노미야가 되었다. 하쿠산히메 신사의 사전 『하쿠산기』에 따르면, "두 신(이미즈 신사)이 원래의 이치노미야였지만, 신기타(기타 신사)에게 이치노미야를 빼앗겼다"라고 하며, 기타 대사에서 분사하여 고쿠후 근처에 새로 창건된 기타 신사(신기타)가 힘을 얻어, 후타가미와 신기타가 세력 다툼을 한 결과 신기타가 이겨 이치노미야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엔기시키의 사본에서의 명신대사의 이견도 이 세력 다툼의 결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타 신사는 새로 만들어진 신사라는 점에서 명신대사이면서도 이미즈군의 마지막에 쓰여져 있다.

이후 기타 신사의 사세가 쇠퇴하고, 헤이안 시대 말 일시적으로 고쿠후가 토나미군으로 옮겨진 관계로 토나미군의 다카세 신사(난토시 다카세)가 이치노미야를 칭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다이일본국 이치노미야기』에서는 엣추국 이치노미야는 "토나미군의 기타 신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같은 대국주명을 제신으로 하는 기타 신사와 다카세 신사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치노미야에 대해 각국 한 곳만을 기록하는 서적에서는, 다이일본국 이치노미야기의 지명 기재 쪽을 정설로 하여 엣추국의 이치노미야는 다카세 신사라고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다카세 신사만이 이치노미야라는 것은 아니다. 에도 시대에 전국의 이치노미야를 순배한 타치바나 미츠요시는 "엣추의 이치노미야는 토나미군에 있는 듯하지만, 그럴 듯한 사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며, 이미즈와 기타에만 참배하고 다카세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중세에 쓰여진 『신토슈』에서는 엣추 이치노미야는 다테야마 곤겐(오야마 신사(다테야마마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세 이후 다테야마 신앙의 보급에 따라 그 중심지인 다테야마 곤겐이 이치노미야로 여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는 이미즈·기타·다카세·오야마의 4사 모두 "엣추국 이치노미야"로 되어 있으며, 전국 일궁회에 가맹하고 있다.

5. 인물

5. 1. 고쿠시(国司)

엣추국 고쿠시는 나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엣추 국의 행정, 사법, 군사 등을 담당했던 지방관이다.

732년 다구치 도시아시가 엣추노카미(越中守)로 임명된[12] 이후, 746년에는 오토모 야카모치가 임명되었다.[12] 오토모 야카모치는 751년까지 엣추노카미를 역임했다. 747년에는 이바라키노 오가, 754년에는 이시카와 도요토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59년에는 아베 히로토가, 767년에는 사에키노 미카타와 국견아담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68년에는 간나비노 이카가, 770년에는 황보동조가, 772년에는 이시카와 사네모리가, 774년에는 모도기왕이, 776년에는 무토키노 오와 소치전제성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77년에는 아베 가사나리가, 778년에는 기궁인과 로석성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82년에는 물부국족이, 783년에는 조시노 오가, 785년에는 기노 마모루와 사백응수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89년에는 후지와라 다카요와 귤면상이, 791년에는 이시우라노 오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799년에는 이시부치노 오와 촌국식계가, 804년에는 후지와라산인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12년에는 후지와라 다카요가 다시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고, 813년에는 도미노 후지쓰와 만가계가, 814년에는 와케노 사네쓰나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15년에는 아베웅능마로, 오오토모흑성, 다지히노 기요오, 가미무라노아타이오카즈라, 와니베노마사쓰구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23년에는 와케노 사네쓰나가 다시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고, 825년에는 후지와라 미쓰나리가, 830년에는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34년에는 이시카와에치히토가, 836년에는 요시다고세와 니시키베노히토카쓰가, 838년에는 쇼코노 오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40년에는 나가미네수명이, 841년에는 사카모토응야가, 842년에는 아사노노 가토리가, 843년에는 미후네노 우지누시와 미마진어조마로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47년에는 미나모토노 아키라가, 848년에는 후지와라 야스나가, 와케노 도요나가, 안지풍액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51년부터 853년까지는 기노 쓰바키모리가, 852년에는 야마시로씨익이, 853년에는 스가노 웅계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56년에는 미나모토노 게이가, 857년에는 후사세노 오, 스하루말계, 사이베키카미, 료제키요카제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58년에는 후사세노 오가 다시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고, 859년에는 히로무네노 이쓰기가, 861년에는 다치바나 하루나리, 오오에나오신, 스가노다카마쓰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62년에는 후지와라 하루오카가, 863년에는 모토무네노 오가, 864년에는 오오오베노 요시코마루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65년에는 무네사다노 오와 구가노 미쓰토키가, 866년에는 스가노무네유키가, 868년에는 요시히데노 오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69년에는 미네오, 미나모토히키, 시키씨경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71년에는 미네오와 다치바나 무네쓰구가, 876년에는 젠부치 나가사다가, 878년에는 하루오카 후유도리와 헤이노사다아이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83년에는 미나모토노 탄과 사에키노 카와오가, 886년에는 후지와라다카히사가, 887년에는 다치바나 큐인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897년에는 다치바나 아키사다가, 905년에는 사에키 아리야가, 910년에는 기요하라 마사모토, 카미츠케노시게자네, 이세노 시게유키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920년에는 고레치카가, 930년에는 구즈이 기요아키라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970년부터 973년까지는 후지와라 나카도오가, 997년에는 기노 사이묘가 엣추노카미를 역임했다. 1061년에는 후지와라 마사이와 미나모토노 이에가타가, 1067년에는 도요하라 호키가, 1077년에는 후지와라 스케키요가, 1080년에는 후지와라 기미모리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091년에는 다치바나 요리사토가, 1099년에는 후지와라 미치토시가, 1100년에는 후지와라 모토자네가, 1103년에는 미나모토노 시게스케가, 1106년에는 다카시나 무네아키가, 1107년에는 후지와라 무네타카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스즈키 시게야스도 엣추노카미를 역임했다.

1114년에는 미나모토노 도시치카가, 1124년에는 나카하라 나리토시가, 1126년에는 후지와라 기미요시가, 1127년에는 미나모토노 나카쓰네와 다이라노 다다모리가, 1129년에는 후지와라 아키나가가, 1130년에는 미나모토노 마사미쓰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32년에는 미나모토노 다다카네가, 1133년에는 미나모토노 아키사다가, 1135년에는 후지와라아키나리가, 1137년에는 미나모토노 스케카타가, 1146년에는 후지와라 아키나리가 다시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48년에는 다카시나 마사이에가, 1152년에는 후지와라 다카노리가, 1157년에는 후지와라 미쓰타카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59년에는 다이라노 노리모리가, 1160년에는 후지와라 미쓰마사가, 1164년에는 후지와라 사다타카가, 1185년에는 후지와라 스케요리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67년에는 후지와라 다카야스가, 1168년에는 미나모토노 아리마사가, 1175년에는 다이라노 모리토시가, 1176년에는 기요하라 요리아업이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79년에는 후지와라 마사타카가, 1180년에는 다이라노 나리아이에와 후지와라 노리치카가, 1183년에는 후지와라 노리타카와 다이라노 지카나가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85년에는 미나모토노 고레요시와 후지와라 이에타카가, 1190년에는 후지와라 스케이에와 후지와라 다다쓰네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193년에는 미나모토노아리토오가, 1198년에는 후지와라 기미나가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1204년에는 후지와라 요리쓰구와 후지와라 요리수케가, 1206년에는 후지와라 무네아키가, 1208년에는 후지와라 나카쓰네가, 1215년에는 후지와라나가미치가, 1219년에는 미나모토노 스케토시가 엣추노카미로 임명되었다.

미나모토노 사다키요, 내장승마로, 오토모노 이케누시 등도 엣추노카미를 역임했다.

진팔천도, 고안종마려는 대목(大目)을, 진석죽은 소목(少目)을 역임했다.

아키모토 나가토모, 아키모토 토미토모, 아키모토 타카모토, 마츠다이라 사다카타, 마츠다이라 사다쿠니,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마츠다이라 사다나가, 마츠다이라 사다카즈, 마츠다이라 사다요시, 마츠다이라 사다타카, 호소카와 타다오키, 호소카와 타다토시, 호소카와 츠나토시, 호소카와 노리노리, 호소카와 무네타카, 호소카와 시게카타, 호소카와 하루토시, 호소카와 나리츠구, 호소카와 나리키, 호소카와 나리모리, 호소카와 아키쿠니 등도 엣추노카미를 역임했다.

5. 2. 슈고(守護)

히키 도모무네가 엣추국의 슈고를 맡은 이후, 1221년부터 1245년까지는 나고에 도키토키가 슈고직을 이었다. 1263년부터는 나고에 키미토키가, 이후에는 나고에 토키아리 등이 엣추국 슈고를 역임했다.

겐무 3년(1336년)에는 요시미 요리타카가 엣추국 슈고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이노우에 토시요시, 모모이 나오츠네 등이 슈고직을 맡았다. 엔분 5년(1360년)에는 호소카와 요리카즈가 엣추국 슈고가 되었고, 이후 요시유키 등이 이 지역의 슈고를 역임하였다. 코랴쿠 2년(1380년) 7월부터는 하타케야마 모토쿠니가 엣추국 슈고를 맡았다.

6. 한국과의 관계 (별도 항목 추가)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출판사 정보 없음)
[2] 서적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출판사 정보 없음)
[3] 서적 Provinces and prefectures https://books.google[...]
[4] 서적 A digest of international law as embodied in diplomatic discussion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s://books.google[...] (출판사 정보 없음)
[5] 문서 별칭「越州」는, 에치젠쿠니・에치고쿠니와 아울러, 또는 단독으로의 호칭.
[6] 문서 일본서기, 지토 천황 6년(695년) 9월 계축조, 속일본기, 문무 2년(698년) 3월 정묘조
[7] 문서 속일본기, 다이호 2년(702년) 3월 갑신조
[8] 문서 속일본기, 덴표호지 2년(758년) 9월 정유조
[9] 문서 일본후기, 엔랴쿠 23년(804년) 6월 계축조
[10] 문서 가모 생란(대로로서 토시이에와 카츠카츠가 조정)의 혼란 시의 때문에, 마에다가 중에 신카와군의 가증과 성 받아들임을 적은 문헌은 있지만(「가가한문서」마에다 이쿠토쿠카이 등), 히데요시 또는 도요토미가로부터의 령지 판물이나 주인장이 없어 에도기에 문제가 된다.
[11] 서적 일본사료선서 13 구고구령취조장 중부편 근도출판사
[12] 서적 고오카시 시제 100년 기념지 타카오카 -역사와의 만남- 고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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