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여성제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첨정 여이량의 아들이었으나 여이징의 양자가 되었다. 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숙종 때 박세채를 변호하다가 경원부에 유배되었으나 복귀하여 다시 정계에 진출했다. 여성제는 금천 강씨와 혼인했으나, 강씨의 고모인 민회빈 강씨 사건으로 인해 이혼했다가 복귀 후 다시 함께 생활했다.
여성제는 본래 첨정(僉正) 여이량(呂爾亮)의 아들이었으나, 후사가 없었던 여이징의 양자가 되었다.[2] 165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 지평, 집의, 동부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내직으로 돌아와서 호조참의, 대사간, 좌부승지를 거쳤다. 1678년, 강릉부사가 되고 병조참판, 좌승지를 거쳐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국상도감제조, 도승지를 거쳐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지냈다.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88년, 박세채가 숙종에게 동평군 이항을 총애함이 지나치다고 간하였을 때 박세채를 변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경원부(慶源府)에 위리안치되었다.[3][4]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여성제의 처 금천 강씨는 강문성의 딸로 강석기의 손녀였는데 고모인 민회빈 강씨의 옥사가 있었을 때 여성제는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강씨와 이혼하고 새 아내 윤씨를 들였다.[1] 그러나 옛정을 잊지 못하고 강씨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어 사람들이 구차하게 여기며 비난하였다.[1] 강빈 옥사의 무고함이 풀리자 여성제는 강씨를 데려와 윤씨와 함께 살았고, 윤씨가 먼저 죽어 강씨가 그 제사를 지냈다.[5] 이후 강씨는 다시 고첩을 돌려받아 정경부인에 봉해졌다.[6][7]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과거 급제
2. 2. 관직 생활
165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다.[2] 같은 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 지평, 집의, 동부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2] 이어 내직으로 돌아와서 호조참의, 대사간, 좌부승지를 거쳤다.[2] 1678년 강릉부사가 되고 병조참판, 좌승지를 거쳐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2] 국상도감제조, 도승지를 거쳐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역임했다.[2]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2] 1688년, 박세채가 숙종에게 동평군 이항을 총애함이 지나치다고 간하였을 때 박세채를 변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경원부(慶源府)에 위리안치되었다.[3][4]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2]
2. 3. 유배와 복귀
여성제는 본래 첨정(僉正) 여이량(呂爾亮)의 아들이었으나 후사가 없었던 여이징의 양자가 되었다.[2] 165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 지평, 집의, 동부승지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내직으로 돌아와 호조참의, 대사간, 좌부승지를 거쳤다. 1678년, 강릉부사가 되고 병조참판, 좌승지를 거쳐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국상도감제조, 도승지를 거쳐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88년, 박세채가 숙종에게 동평군 이항을 총애함이 지나치다고 간하였을 때 박세채를 변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경원부(慶源府)에 위리안치되었다.[3][4] 이후 복귀하여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3. 가계
부인 : 금천 강씨
* 장남 : 여필승(呂必升)
* 장녀 : 오수량(吳遂良)의 처
** 외손자 : 오명항(吳命恒)3. 1. 혼인 관계와 민회빈 강씨 사건
여성제는 강문성의 딸이자 강석기의 손녀인 금천 강씨와 혼인하였다.[1] 그러나 강씨의 고모인 민회빈 강씨가 옥사하자, 여성제는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강씨와 이혼하고 새 아내 윤씨를 들였다.[1]
이후 강빈 옥사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여성제는 강씨를 다시 데려와 윤씨와 함께 살게 하였고, 윤씨가 먼저 사망하자 강씨가 윤씨의 제사를 지냈다.[5] 강씨는 다시 고첩을 돌려받아 정경부인의 봉작을 받았다.[6][7]
여성제의 처가(妻家) 식구는 다음과 같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23권,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8월 14일(병신) 1번째기사
[2]
서적
국역 국조인물고》 권17 경재(卿宰) 여이징의 묘갈명(墓碣銘)
[3]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7월 15일(을유) 2번째기사
[4]
서적
약천집》 제2권 시(詩)
[5]
서적
임하필기》 제28권 춘명일사(春明逸史)
[6]
서적
조선왕조실록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4월 2일(갑인) 3번째기사
[7]
서적
조선왕조실록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5월 23일(양력) 3번째기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