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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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비번은 가마쿠라 시대에 휴가 이토 씨가 휴가국의 지토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근세 다이묘로 부활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에도 막부로부터 영지를 인정받았고, 폐번치현까지 14대에 걸쳐 이토 씨가 번주를 맡았다. 영농에 불리한 환경에서 임업과 어업을 발전시켰으며, 1801년에는 학문소를 설치했다. 막말에는 재정난을 겪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오비 현이 되었다. 14대 번주 이토 스케요리는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메이지 시대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외무대신으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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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번 - 오비성
오비성은 일본 남북조 시대 도모치 씨가 축성하고 에도 시대에는 이토 씨의 거성이었으며 센고쿠 시대 시마즈 씨와의 공방전 요충지이자 에도 시대 오비 삼나무 집산지로 번성한 곳으로, 현재 성터와 성하 마을은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이자 일본 100대 명성이다. - 니치난시 - 기타고정
기타고정은 미야자키현 남부에 위치했던 지역으로, 2009년 니치난시 등과 합병되어 니치난시의 지역 자치구가 되었으며, 농업과 임업이 주요 산업이고, 니치난 선이 지나간다. - 미야자키시 - 사도와라번
사도와라번은 에도 시대 휴가국 나카군에 시마즈 씨족이 다스린 번으로, 1603년 시마즈 이사히사가 3만 석을 하사받아 사도와라성을 거점으로 독립하여 성립되었으며, 이후 고쿠다카 변화와 번 내 소동 등을 거쳐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 미야자키시 - 기요타케정
기요타케정은 미야자키현 남동부에 위치하며 미야자키시에 둘러싸여 베드타운 역할을 했고, 과거 촌의 합병을 거쳐 정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다양한 산업과 농업이 발달해 있다.
오비번 | |
---|---|
개요 | |
이름 | 오비 번 (飫肥藩) |
로마자 표기 | Obi-han |
위치 | 휴가국 |
현재 위치 | 미야자키현 |
수도 | 오비성 |
역사 | |
성립 | 1617년 |
폐지 | 판적봉환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통치 | |
정치 체제 | 번 |
다이묘 | 이토 씨 |
가문 문장 | 이오리니 밋코 |
지리 | |
기타 | |
관련 문서 | 오비 봉 |
2. 역사
막말의 오비번은 재정난에 빠져 1851년에는 번사의 녹봉을 3분의 1로 줄였고, 1857년에는 검약령을 내렸다.[6]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오비 현이 되었다. 이후 미야코노조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을 거쳐 다시 분현되어 미야자키현에 편입되었다.[6]
1884년 14대 번주 스케요리는 자작의 작위를 받고 화족이 되었다.[6] 메이지 시대에 외무대신이 되어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고무라 주타로는 오비번 출신이다.[6]
2. 1.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
휴가국의 지두로 임명된 휴가 이토 씨는 1335년 6대 당주 이토 스케모치(伊東祐持)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서 300개 마을을 배당받고 하향하면서 시작되었다.[6] 한때 시마즈씨와의 싸움에 져 휴가국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12대 당주 스케타카(祐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워 오비의 땅을 되찾아 근세 다이묘로서 부활했다.[6]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스케타카는 오사카에서 병을 얻어 서군에 가담했지만, 몰래 구로다 요시타카를 통해 동군에 가담했고, 아들 스케노리(祐慶)를 시켜 미야자키 성을 공격했다.[6] 1617년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5만 7천 석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는 문서를 받았다.[6] 이후 폐번치현까지 14대에 걸쳐 이토 씨가 오비번주를 맡았다.
3대 번주 스케히사(祐久)는 1636년 동생 스케토요(祐豊)에게 3천 석을 분배했고,[6] 4대 번주 스케미치(祐由)는 1657년 동생 스케하루(祐春)에게 3천 석을 분배하여 이후 수확량은 5만 1천 석이 되었다.[6]
영내는 경작지가 적고, 산림과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600년대에 번은 일본 삼나무 묘목 재배를 시작하여 임업을 주요 수입원으로 개발했다.[6]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를 이용하여 삼나무, 노송나무 등의 임업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오비 삼나무’가 이 땅의 특산물로 남아있다.[6] 동시에 어업도 번 재정의 일익을 담당했다.[6] 이전 기요다케성(清武城)은 번의 두 번째 거점으로서 기요 지두가 배치되어 있었다.[7]
11대 번주 스케타미(祐民)는 1801년 학문소를 설치하고, 이것이 1830년 번교(番校) 신토쿠도(振徳堂)가 되었다.[6]
2. 2. 에도 시대
휴가국의 이토 씨는 가마쿠라 시대에 지두로 임명되었고, 1335년 6대 당주 이토 스케모치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서 300개 마을을 배당받고 하향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때 시마즈 씨와의 싸움에 져 휴가국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토 스케타카가 오사카에서 병을 얻어 서군에 속했지만, 몰래 구로다 요시타카를 통해 동군에 가담했고, 아들 이토 스케노리를 시켜 미야자키 성을 공격했다. 그 결과 12대 당주 이토 스케타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워 오비 땅을 되찾아 근세 다이묘로서 부활했다.1617년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5만 7천 석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오비번 제3대 번주 이토 스케히사는 1636년 동생 이토 스케토요에게 3천 석을, 4대 번주 이토 스케미치는 1657년 동생 이토 스케하루에게 3천 석을 분배하여, 이후 수확량은 5만 1천 석이 되었다.
영내는 경작지가 적고 산림과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를 이용하여 삼나무, 노송나무 등의 임업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오비 삼나무’가 이 땅의 특산물로 남아있다. 어업도 번 재정에 기여했다. 이전 기요다케성은 번의 두 번째 거점으로서 기요 지두가 배치되어 있었다.
11대 번주 이토 스케타미는 1801년 학문소를 설치하고, 이것이 1830년 번교(番校) 신토쿠도(振徳堂)가 되었다. 막말의 오비번은 최고 재정난에 빠져 1851년에는 번사의 녹봉을 1/3로 줄였고, 1857년에는 검약령을 내렸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오비 현이 되었다. 이후 미야코노조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을 거쳐 다시 분현되어 미야자키현에 편입되었다. 1884년 14대 번주 이토 스케요리는 자작의 작위를 받고 화족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 외무대신이 되어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고무라 주타로는 오비번 출신이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스케타카는 오사카에서 병을 얻어 서군에 속하게 되었지만, 몰래 구로다 요시타카를 통해 동군에 가담하여 아들 스케노리를 보내 미야자키 성을 공격하였다.[6] 1617년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5만 7천 석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6]오비번 제3대 번주 스케히사는 1636년 동생 스케토요에게 3천 석을 분배했다. 4대 번주 스케미치는 1657년 동생 스케하루에게 3천 석을 분배했기 때문에, 이후 오비번의 수확량은 5만 1천 석이 되었다.[6]
영내는 경작지가 적고, 산림과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를 이용하여 삼나무, 노송나무 등의 임업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오비 삼나무’가 이 땅의 특산물로 남아있다. 어업도 번 재정에 기여했다. 사쓰마번과 마찬가지로 ‘지두’라는 명칭의 일자리도 있었다.[7] 이전 기요다케성(清武城)은 번의 두 번째 거점으로서 기요 지두가 배치되어 있었다.
11대 번주 스케타미는 1801년 학문소를 설치하고, 이것이 1830년 번교(番校) 신토쿠도(振徳堂)가 되었다.
막말의 오비번은 재정난에 빠져 1851년에는 번사의 녹봉을 3분의 1로 줄였고, 1857년에는 검약령을 내렸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오비 현이 되었다. 이후 미야코노조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을 거쳐 다시 분현되어 미야자키현에 편입되었다.
1884년 14대 번주 스케요리는 자작 작위를 받고 화족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외무대신이 되어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고무라 주타로는 오비번 출신이다.
3. 역대 번주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石高|고쿠다카일본어 |
---|---|---|---|---|---|
1 | 이토 스케타케(伊東祐兵) | 1587년 ~ 1600년 | 豊後守|분고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2 | 이토 스케노리(伊東祐慶) | 1600년 ~ 1636년 | 修理大夫|슈리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3 | 이토 스케히사(伊東祐久) | 1636년 ~ 1657년 | 大和守|야마토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 |
4 | 이토 스케미치(伊東祐由) | 1657년 ~ 1661년 | 左京亮|사쿄노스케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2] |
5 | 이토 스케자네(伊東祐実) | 1661년 ~ 1714년 | 大和守|야마토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6 | 이토 스케나가(伊東祐永) | 1714년 ~ 1739년 | 修理亮|슈리노스케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7 |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之) | 1739년 ~ 1744년 | 大和守|야마토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8 | 이토 스케타카(伊東祐隆) | 1744년 ~ 1757년 | 修理大夫|슈리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9 | 이토 스케요시(伊東祐福) | 1757년 ~ 1781년 | 大和守|야마토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0 | 이토 스케아쓰(伊東祐鐘) | 1781년 ~ 1798년 | 修理亮|사쿄노스케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1 | 이토 스케타미(伊東祐民) | 1798년 ~ 1812년 | 修理大夫|슈리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2 | 이토 스케히로(伊東祐丕) | 1812년 ~ 1814년 | 修理大夫|슈리노카미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3 | 이토 스케토모(伊東祐相) | 1814년 ~ 1869년 | 右京大夫|사쿄노다이부일본어 | 従五位下|종5위하일본어 | |
14 | 이토 스케요리(伊東祐帰) | 1869년 ~ 1871년 | 修理大夫|슈리노카미일본어 | 正四位|정4위일본어 |
도자마 다이묘였던 이토 가문은 1617년부터 1871년까지 오비 번을 다스렸다. 이토 가문의 번주들은 초기에 을 받았으나, 3대 이토 스케히사 때 영지 분할로 으로,[1] 4대 이토 스케미치 때 다시 영지 분할로 으로 줄어들었다.[2]
4. 가신
오비번의 가격은 급인, 중소성, 보행(후에 도사), 외좌간, 토기, 족경, 소인 등으로 분류된다.
분큐 원년 신유 국성물성고[8]에서는 가신을 상사(어일문, 마회), 중사(중소성), 하사(도사, 보행이라고도 함), 다도승, 서원승, 준사(토기, 외좌간), 준사격(족경, 소인 등)으로 세분화했다.
사쓰마번과 마찬가지로 성대의 연장으로서 지두직이 존재했으며, 기요타케 지두는 마회에서 나왔지만, 그 외의 지두는 중소성이나 도사에서도 나왔다.[8]
4. 1. 어일문(御一門)
분큐 원년 신유 국성물성고[8]에 따르면 상사를 어일문, 마회로 분류하며, 인원은 상사가 어일문을 합쳐 오비에 126명, 기요타케에 17명이다.(단, 인원은 "국성물성고"를 참조하며, 이하의 신분도 같다.)영격 상석에 위치하는 번주 가문의 친족에 해당하는 3가문은 다음과 같다.
- 필두인 이토 사몬가는 유헤이의 차남 유토시(사몬)를 조상으로 하는 가문으로, 세입은 1000석이다. 번주가 된 유나가와 유타카는 사몬가 출신이다.
- 남은 이토 몬도 가문과 이토 도쇼 가문 2가문은 나루세 마사타케와 유헤이의 셋째 딸의 유복자로, 이토 성을 하사받은 이토 유마사와 이토 유아키를 각각 조상으로 한다.
"오비번 분한장"에서는 이토 겐바, 이토 몬도, 이토 타테와의 3명이 어일문으로 보인다.
4. 2. 급인(給人)
분큐 원년 신유 국성물성고[8]에서는 급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신분 | 오비 번 | 기요타케 |
---|---|---|
상사 (어일문, 마회) | 126명 | 17명 |
중사 (중소성) | 50명 | 11명 |
하사 (도사 (보행이라고도 함)) | 194명 | 55명 |
다도승 (서원승과 마찬가지로 오비에만 존재) | 13명 | - |
서원승 | 2명 | - |
준사 (토기 (오비에서는 총토기라고 불림)) | 147명 | 86명 |
외좌간 (오비에만 존재, 광대도 포함) | 51명 | - |
준사격 (족경, 소인, 마취, 창방, 세공소(번주가 거느린 불사나 갑옷 장인, 옻칠 장인), 매사, 야금, 대목, 배목, 감청) | - | - |
오비 번에서는 급인 중 65석 이상을 받고 말을 소유하는 것을 허가받은 자를 "승마 이상"이라고 불렀으며, 50석 이하는 "소급인"이라고 불렀다.
4. 3. 그 외 가신
「분큐 원년 신유 국성물성고」[8]에 따르면, '''준사'''는 토기(오비에서는 총토기라고 불리며 147명, 기요타케에는 86명), '''외좌간'''(오비에만 있으며 51명. 이 계층에는 광대도 포함)이었다. '''준사격'''은 족경, 소인, 마취, 창방, 세공소(번주가 거느린 불사, 갑옷 장인, 옻칠 장인), 매사, 야금, 대목, 배목, 감청이었다.5. 영지
휴가국의 나카군 36개 촌, 미야자키군 4개 촌, 그리고 막부령'''오비번'''예지로 미야자키군 2개 촌, 기타나카군 7개 촌, 미나미나카군 5개 촌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
영내는 경작지가 적고, 산림과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를 이용하여 삼나무, 노송나무 등의 임업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오비스기’가 이 땅의 특산물로 남아있다. 또한 어업도 번 재정의 일익을 담당했다.
다음은 오비번의 영지 목록이다.
국명 | 군명 | 비고 |
---|---|---|
휴가국 | 나카군 | 36개 촌 (그 중 1개 촌은 제1차 현 통합 시 미미쓰현에 편입) |
휴가국 | 미야자키군 | 4개 촌 |
휴가국 | 막부령오비번예지 | 미야자키군 2개 촌, 기타나카군 7개 촌, 미나미나카군 5개 촌 |
6. 번저
에도 번저는 외사쿠라다에 상저택, 센다가야에 하저택이 있었다. 또한, 오사카와 후시미에 번저가 있었으며, 오사카 번저는 도사보리 다나베바시에, 후시미 번저는 시모이타바시 시마카에다니 정에 있었다.[1]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간행물
おびりんぎょう
日本林業技術協会
1984
[7]
문서
飫肥藩分限帳
[8]
문서
飫肥藩分限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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