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몬텔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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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스웨덴의 고고학자로, 상대 연대 측정 방법인 유형학을 개선하고 유럽 전역의 고고학적 발견물에 절대 연대를 적용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의 관장과 국가 고고물 관리관을 역임했으며, 삼시대 구분법을 세분화하고, 형식학적 연구법을 발표하여 고고학 연구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몬텔리우스는 유형학을 통해 유물의 시간적 순서를 정립하고, 이집트 상형 문자를 활용하여 유럽 고고학적 발견물에 절대 연대를 부여했으며, 그의 연구 방법은 '몬텔리우스 고고학'으로 불리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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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몬텔리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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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1843년 9월 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1921년 11월 4일 사망할 때까지 고고학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웁살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에서 경력을 쌓았다.[7][8][9][10]
1907년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 관장 및 국가 고고물 관리관을 역임하며 스웨덴의 문화재 보존과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9] 은퇴 후에는 1917년부터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발발 시 미하일 로스토프체프를 돕기도 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43년 9월 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7] 어릴 적부터 인류학·선사 고고학을 지망했다고 한다.[7] 웁살라 대학교를 졸업하고,[8] 동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1863년부터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에서 조수로 일하며 연구를 병행했다.[9] 1869년 웁살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871년에는 자선가 아그다(sv)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국립 역사 박물관의 박물관원이 되었다.[10]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시작한 트로이 (트로이 유적) 발굴 조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7]2. 2.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 경력
1863년 이후,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에 조수로 고용되어, 그곳에서도 공부했다.[9] 1871년, 국립 역사 박물관의 박물관원이 되었다.[10] 1880년에는 스웨덴 국립 역사 박물관의 교수로 승진했다.[9]1907년, 국립 역사 박물관의 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국가 고고물 관리관으로 임명되어, 스웨덴의 문화재 보존 및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다.[9] 1913년에 이 두 직위에서 은퇴했다.
2. 3. 은퇴와 죽음
1913년 몬텔리우스는 국립 역사 박물관장과 국가 고고물 관리관 직위에서 은퇴했다.[9]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제18석)으로 활동했다.[9] 러시아 제국의 역사학자이자 후에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한 미하일 로스토프체프와 친분이 있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로스토프체프를 지원했다.1921년 11월 4일 스톡홀름에서 사망했으며, 스톡홀름 북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연구 업적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트로이 유적 발굴에 자극받아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유럽 청동기 문화의 연대와 실제 연대 확립에 힘썼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핀(留め針) 발달사 연구가 유명하다.[7] 특히 그리스 및 이탈리아의 전(前) 고전 문화기 연대에 힘썼다.[9]
그의 연구 방법은 '몬텔리우스 고고학'이라 불리며, 고고학 연구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7][9] 스웨덴 고고학자 오베리(N. Åberg)는 "선사 고고학은 이 연구법 확립으로 비로소 과학이 되었다"라고 말했다.[13][19] 이 방법으로 현대 고고학의 방법론적 기초가 확립되었고, 문헌사학과 구분되는 독립적 학문 영역이 가능해졌다.[17] 몬텔리우스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유럽에서 가장 저명하고 뛰어난 고고학자였으며,[10] 그의 영향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크게 퍼져나갔다.[20]
몬텔리우스의 연구는 큰 구상으로 시작되었으나, 사망 시점까지 두 권만 간행되었다.[10] 1903년 저서 『오리엔트와 유럽의 고대 문명기』 제1권 '연구법'이 출간되었고,[10] 1932년 하마다 고사쿠 번역으로 『고고학 연구법』으로 소개되어 일본 고고학 연구의 기초적 방법론 중 하나가 되었다.[9][13] 하마다 고사쿠는 번역본 서문에서 "본서의 예증에 대해 오늘날 고쳐야 할 점도 다소 있지만, 몬텔리우스 박사의 이 책은 영구히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며, 학계 공적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7]
3. 1. 유형학 연구법 발전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유형학 개념을 개선하여 상대 연대 측정 방법을 발전시켰다. 유형학은 문화적 특징의 가장 일관된 패턴을 생성하는 순서로 문화적 전통의 물질적 유물을 배열하여 연대기를 도출하는 절차이다.[1] 유형학은 영국의 이집트학자 플린더스 페트리가 이집트 발굴을 바탕으로 개발한 기술인 계열화의 기초가 되었다.[2]몬텔리우스는 박물관 소장품의 유물에 상대적인 연대를 제공하기 위해, 유사한 지리적 영역 내의 다른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물질적 유물을 기반으로 해당 위치에 특정한 연대기를 만들었다. 이후, 서면 역사적 참고 자료와 결합하면 유물에 절대적인 연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고안한 삼시대 구분법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을 더욱 세분화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신석기 시대를 I-IV의 네 개로, 북유럽 청동기 시대를 I-VI의 여섯 개로 구분했다. 그는 스웨덴의 암각화에 묘사된 도끼를 고고학적 발견물과 비교하여 암각화가 북유럽 청동기 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확립했다. 또한 톰센의 이동 시대 금 브락테아테 유형학을 지지했다.[3][4]
몬텔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의 이집트 상형 문자로부터 달력상의 연대를 가져와 유형학과 관련된 발견을 통해 복잡한 교차 연대 측정 시스템을 사용하여 유럽 전역의 고고학적 발견물과 특징에 절대적인 연대를 적용했다.
1870년대 몬텔리우스와 한스 힐데브란트는 형식학적 연구법(Typological Method)을 발표했다.[11][12] 형식학적 연구법은 고고학의 연구 방법 중 하나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13] 유물의 형태, 재료, 기법, 장식 등의 특징에 따라 분류된 형식(type)을 연대적 변천을 거쳐 지역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해당 유물 (형식)의 시간적 또는 분포상의 위치 관계, 나아가 형식 간의 관계성을 밝혀내는 방법이다.
몬텔리우스는 인간은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없고, 그 작품은 제작자가 처한 기술적·사회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며, 일정한 발전의 법칙 (유전, 변이, 선택)에 따라 변화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15]
몬텔리우스는 산업 혁명을 거치며 기술 혁신이 두드러진 19세기 후반의 서구에서도 '제약'이 확인될 수 있는 예로 철도 객차의 형태 변천을 들었다. 그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았던 과거에는 전대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대 변화의 계통적 파악 가능성을 주장했다.[15]
몬텔리우스는 유물의 계보를 '형식의 조열(組列, serie)'이라고 명명했다.[15] 그는 '형식의 조열'의 편성은 어디까지나 가설 제시 작업이라고 밝혔다.
몬텔리우스에 따르면, 유물의 형태 변화뿐만 아니라 각 단계에서 정해진 유물의 조합이 있으며, 이를 '일괄 유물'이라고 칭했다.[15][16] '형식의 조열'이라는 작업 가설의 검증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일괄 유물'의 검토, 즉, 거기에 있는 두 개 이상의 유물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의 검토라고 했다.[7][15]
'형식의 조열'의 검증 방법으로 지질학을 응용한, 유적의 층위 확인 (층위학적 연구법)을 제시했다. 유적의 상하층의 시간적인 퇴적 순서 (층서)를 명확히 인식하고, 형식의 조열이 층위적인 상하 순서로 확인되면 그 가설의 타당성이 검증된 것으로 간주했다.[7] [15][17]
몬텔리우스는 '형식의 조열'을 1. 형식의 흔적 기관 확인, 2. 일괄 유물의 검토, 3. 유적의 층위 확인, 이 세 가지 방법으로 검증함으로써 각 지역의 고고 자료에 시간적 순서를 부여하고 상대 연대를 확립하고자 했다.[7][15]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에서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와 같은 큰 시간 단위가 아닌, 보다 세분화된 시간 단위로 유물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1880년대에는 유럽의 청동기 시대를 6기로, 이어서 신석기 시대를 4기로, 철기 시대를 10기로 각각 세분했다.[18]
몬텔리우스의 연구 방법은 '몬텔리우스 고고학'이라고 칭해졌으며, 고고학 연구에 과학적인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7][9] 스웨덴의 고고학자 오베리는 "선사 고고학은 이 연구법의 확립으로 비로소 과학이 되었다"라고 말했다.[13][19]
3. 2. 상대 연대 확립 및 시대 세분화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유형학 개념을 개선하여 상대 연대 측정 방법을 발전시켰다. 유형학은 문화적 특징의 가장 일관된 패턴을 생성하는 순서로 유물을 배열하여 연대기를 도출하는 절차이다.[1] 이는 영국의 이집트학자 플린더스 페트리가 개발한 계열화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2]몬텔리우스는 박물관 소장품 유물에 상대적인 연대를 제공하기 위해, 유사한 지리적 영역 내의 다른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특정 위치의 연대기를 만들었다. 이후 서면 역사적 참고 자료와 결합하여 유물에 절대적인 연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을 더욱 세분화하여, 스칸디나비아의 신석기 시대를 I-IV로, 북유럽 청동기 시대를 I-VI로 구분했다. 그는 암각화에 묘사된 도끼를 고고학적 발견물과 비교하여 스웨덴의 암각화가 북유럽 청동기 시대의 것임을 최초로 확립했다. 또한 톰센의 이동 시대 금 브락테아테 유형학을 지지했다.[3][4]
몬텔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의 이집트 상형 문자로부터 달력상의 연대를 가져와 유럽 전역의 고고학적 발견물에 절대적인 연대를 적용했다. 그의 확산주의 이론은 결국 더 복잡한 견해로 대체되었지만, 그의 세분화 시스템은 개선을 거쳐 여전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870년대에 몬텔리우스와 한스 힐데브란트는 형식학적 연구법을 발표했다.[11][12]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형식학적 연구법은[13] 유물의 형태, 재료, 기법, 장식 등의 특징에 따라 분류된 형식을 연대적 변천을 거쳐 지역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시간적, 분포상 위치 관계를 밝혀내는 방법이다.
몬텔리우스는 인간이 물건을 만들 때 유전, 변이, 선택과 같은 일정한 발전 법칙에 따라 변화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15] 그는 철도 객차의 형태 변천을 예로 들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전대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대 변화의 계통적 파악 가능성을 주장했다.[15]
몬텔리우스는 북유럽의 핀 사례를 비롯하여 유럽에서 오리엔트에 이르는 각종 유물에 대해 형태, 장식, 제작 기술 등을 비교 검토하고 그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많은 유물의 계보를 밝혀냈다. 그는 북유럽의 핀 연대를 4기로 나누고, 유물의 계보를 '형식의 조열(組列, serie)'이라고 명명했다.[15]
몬텔리우스는 유물의 형태 변화뿐만 아니라 각 단계에서 정해진 유물의 조합인 '일괄 유물'이 있다고 칭했다.[15][16] 그는 '형식의 조열'이라는 작업 가설 검증에 '일괄 유물'의 검토와 지질학을 응용한 유적의 층위 확인 (층위학적 연구법)이 중요하다고 했다.[7][15]
몬텔리우스는 '형식의 조열'을 1. 형식의 흔적 기관 확인, 2. 일괄 유물의 검토, 3. 유적의 층위 확인의 세 가지 방법으로 검증하여 각 지역의 고고 자료에 시간적 순서를 부여하고 상대 연대를 확립하고자 했다.[7][15]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보다 더 세분화된 시간 단위로 유물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1880년대에는 유럽의 청동기 시대를 6기, 신석기 시대를 4기, 철기 시대를 10기로 각각 세분했다.[18]
몬텔리우스의 연구 방법은 '몬텔리우스 고고학'이라고 칭해졌으며, 고고학 연구에 과학적인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7][9] 그의 연구 방법은 현대 고고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확립하고, 문헌사학과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여 독립적인 학문 영역을 갖게 했다.[17]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전 유럽에서 가장 저명하고 뛰어난 고고학자였으며,[10] 그의 영향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크게 퍼져나갔다.[20]
1903년에 출간된 『오리엔트와 유럽의 고대 문명기』 제1권 '연구법'은 몬텔리우스 사후 1932년 하마다 고사쿠에 의해 『고고학 연구법』으로 번역되어 일본 고고학 연구의 기초적 방법론 중 하나가 되었다.[9][13]
3. 3. 확산주의와 교차 연대 측정
오스카르 몬텔리우스는 유형학 개념을 개선하여 상대 연대 측정 방법을 발전시켰다. 유형학은 문화적 특징의 가장 일관된 패턴을 생성하는 순서로 유물을 배열하여 연대기를 도출하는 절차이다.[1] 이는 플린더스 페트리가 이집트 발굴을 바탕으로 개발한 계열화의 기초가 되었다.[2]몬텔리우스는 박물관 소장품 유물에 상대적인 연대를 제공하기 위해, 유사한 지리적 영역 내의 다른 유물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으로 물질적 유물을 기반으로 특정 위치의 연대기를 만들고, 서면 역사 자료와 결합하여 유물에 절대적인 연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을 더욱 세분화하여, 스칸디나비아의 신석기 시대를 I-IV의 네 개로, 북유럽 청동기 시대를 I-VI의 여섯 개로 구분했다. 또한, 암각화에 묘사된 도끼를 고고학적 발견물과 비교하여 스웨덴의 수많은 암각화가 북유럽 청동기 시대의 것임을 최초로 확립했다. 그는 톰센의 이동 시대 금 브락테아테 유형학을 지지했다.[3][4]
몬텔리우스는 해독된 고대 이집트의 이집트 상형 문자로부터 달력상의 연대를 가져와, 유형학과 관련된 발견을 통해 복잡한 교차 연대 측정 시스템을 사용하여 유럽 전역의 고고학적 발견물과 특징에 절대적인 연대를 적용했다.
그의 확산주의 이론은 이후 더 복잡한 문화적 상호 작용에 대한 견해로 대체되었지만, 그의 세분화 시스템은 개선을 거쳐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1870년대에 몬텔리우스와 한스 힐데브란트는 형식학적 연구법(Typological Method)을 발표했다.[11][12] 형식학적 연구법은 유물의 형태, 재료, 기법, 장식 등의 특징에 따라 분류된 형식(type)을 연대적 변천을 거쳐 지역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유물의 시간적, 분포상의 위치 관계, 형식 간의 관계성을 밝혀내는 방법으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13]
몬텔리우스는 인간이 물건을 만들 때 진화의 법칙에 놓여 그 법칙에 지배당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물건을 만들 수 없고, 그 작품은 제작자가 처한 기술적·사회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며, 일정한 발전의 법칙 (유전, 변이, 선택)에 따라 변화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15]
몬텔리우스는 산업 혁명을 거치며 기술 혁신이 두드러진 19세기 후반의 서구에서도 '제약'이 확인될 수 있는 예로 철도 객차의 형태 변천을 들었다. 그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았던 과거에는 전대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대 변화의 계통적 파악 가능성을 주장했다.[15]
몬텔리우스는 유물의 계보를 밝혀내고, 이를 '형식의 조열(組列, serie)'이라고 명명했다.[15] 그는 '형식의 조열' 편성은 가설 제시 작업이며, '일괄 유물' 검토와 층위학적 연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고 했다.[7][15]
몬텔리우스는 '형식의 조열'을 1. 형식의 흔적 기관 확인, 2. 일괄 유물의 검토, 3. 유적의 층위 확인, 이 세 가지 방법으로 검증하여 상대 연대를 확립하고자 했다.[7][15]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보다 더 세분화된 시간 단위로 유물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1880년대에는 유럽의 청동기 시대를 6기, 신석기 시대를 4기, 철기 시대를 10기로 세분했다.[18]
몬텔리우스의 연구 방법은 '몬텔리우스 고고학'이라고 칭해졌으며, 고고학 연구에 과학적인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7][9] 그의 연구 방법은 고고학 고유의 방법론적 기초를 확립하고, 문헌사학과의 방법론적 구분을 가능하게 하여 독립적인 학문 영역을 갖게 했다.[17]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전 유럽에서 가장 저명하고 뛰어난 고고학자였으며[10], '몬텔리우스 고고학'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큰 영향을 주었다.[20]
몬텔리우스의 연구법은 그의 큰 구상 하에 착수되었으나, 그의 사망 시점까지 불과 두 권의 간행에 그쳤다.[10] 1903년에 출간된 『오리엔트와 유럽의 고대 문명기』 제1권 '연구법'은 하마다 고사쿠의 번역으로 『고고학 연구법』으로 소개되었고, 이후 형식학적 연구법은 일본 고고학 연구의 기초적 방법론 중 하나가 되었다.[9][13]
4. 수상
푸르 르 메리트 (1898년)[1]
5. 저서
제목 |
---|
『오리엔트와 유럽에서의 고대 문명기』 |
『오리엔트 및 그리스에서의 청동기 시대』 |
『이탈리아 선사 시대 편년』 |
참조
[1]
백과사전
G Oscar A Montelius
https://sok.riksarki[...]
National Archives of Sweden
2015-11-05
[2]
웹사이트
Sir William M. Flinders Petrie, 1853–1942
http://www.pef.org.u[...]
2020-09-01
[3]
웹사이트
Oscar A Montelius
https://www.svenskaa[...]
2020-09-01
[4]
웹사이트
Thomsen, Christian Jürgensen, 1788-1865
https://runeberg.org[...]
2020-09-01
[5]
웹사이트
Agda Georgina Dorothea Montelius
https://skbl.se/en/a[...]
2020-09-0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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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elius, Gustaf Oscar Augustin\Montelius, Agda Georgina Dorotea Alexandra
http://www.svenskagr[...]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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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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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서
ウプサラ大学
[9]
문서
南(2004)
[10]
문서
田中「モンテリウス」(1988)p.337
[11]
문서
Eggers(1959)
[12]
문서
田中「型式学の問題」(1988)p.15
[13]
문서
大塚・戸沢(1996)p.96
[14]
문서
Eggers(1959)による引用
[15]
문서
田中「型式学の問題」(1988)pp.14-26
[16]
문서
田中「型式学の問題」(1988)p.18
[17]
문서
勅使河原(1997)p.5
[18]
문서
安斎(1996)pp.33-37
[19]
문서
田中「型式学の問題」(1988)p.14
[20]
문서
藤本(1994)p.48
[21]
백과사전
G Oscar A Montelius
https://sok.riksarki[...]
National Archives of Sweden
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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