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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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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언장은 오대 십국 시대 후량의 무장으로, 뛰어난 무용과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주전충의 휘하에서 군공을 세워 개국후에 봉해졌으며, 후당의 이존욱에게 굴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참수당했다. 그는 100근의 쇠창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해 '왕철창'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후량 멸망 후, 사후 태사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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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전의는 당나라 말기 오대십국시대 혼란기에 황소의 난에 가담 후 당나라에 항복하여 절도사가 되었고, 뛰어난 처세술로 후량과 후당을 섬기며 권력을 유지했지만 부도덕한 행위도 저질렀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왕언장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언장
본명왕언장 (王彥章)
현명 (賢明)
자명 (子明)
별칭왕철창 (王鐵槍)
출생 연도863년
사망일923년 11월 15일
사망 원인처형
국적중국
직업군인

2. 생애

운주수장(鄆州寿長)사람이다. 무용, 무략에 뛰어나 군졸로 시작해 차례로 군공을 세워 후량 건국후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항상 선봉으로써 용맹한 싸움을 벌여 이란 이명을 가졌다.

후당주덕위와 비견되어 이존욱에게도 외경받아, 처자를 인질로 복종을 요구받았으나 사자를 베어버리고 거절했다. 오랫동안 요직에 있었으나, 923년 선의군절도부대사지절도사에 북면초토사를 겸직하여 후당군을 격퇴했으나, 균왕 측근과의 반목으로 참언을 받아 마지막엔 후당군과 싸우다 사로잡혔다.

항복을 요구받자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거절하고 참수당했다.

왕언장은 863년 당 의종 치세에 태어났다. 그는 수장(壽張, 현재의 산둥성랴오청시)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왕슈(王秀)와 아버지 왕칭종(王慶宗)은 모두 관료나 장군으로 복무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왕언장은 주요 군벌 주전충 휘하의 병사가 되었는데, 주전충은 쉬안우 절도사(宣武, 본부는 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의 군사 지휘관이었으며, 용맹함과 맹렬함으로 명성을 얻었다.[1] 그는 무거운 쇠 창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으며, 창의 사용으로 인해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전공이 뛰어났기에 주전충에게 중용되었다. 후량 건국 후, 전공으로 복주, 단주 자사, 여주, 정주 방어사, 허주, 활주 절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며, 920년 (정명 6년)에는 개국후가 되었다. 그의 무용을 두려워한 이존욱에 의해 가족이 붙잡히자, 귀순을 요구하는 사자를 베어 거절했다. 이후 후당에 의해 후량이 침공을 받자, 언장은 북면소토사가 되어 백 번 이상의 전투를 벌여 후당의 침공을 막았다. 그러나 연주, 운주의 경계에서 이사원의 대군을 앞에 두고 후퇴하여, 중도로 물러났을 때 간신의 참언으로 500명의 병사로 출격했으나, 붙잡히고 만다. 이존욱은 언장을 등용하려 했지만, 언장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하며 귀순을 거부하고 참수되었다. 향년 61세.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왕언장은 863년 당 희종 연간에 운주(鄆州) 수장(壽張, 지금의 산둥성 랴오청 시 량산 현)에서 태어났다.[10][1] 그의 조부 왕수(王秀)와 아버지 왕경종(王慶宗)은 관료나 장군으로 출사하지 않았다.[10][1]

왕언장은 어린 시절부터 대군벌 선무군 절도사(宣武軍節度使, 본거지는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 시) 주전충 휘하의 병사가 되었고, 용맹하고 사납기로 이름을 알렸다.[10][1] 100근이나 되는 두 자루 철창을 잘 써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3][14][4]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간 그는 전공이 뛰어나 주전충에게 중용되었다.

2. 2. 후량 건국과 활약

왕언장은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가 뛰어난 전공으로 중용되었다.[1] 그는 주전충의 여러 전투에 종군하였고, 후량 건국 후에는 복주, 단주 자사, 여주, 정주 방어사, 허주, 활주 절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며, 920년에는 개국후가 되었다.[1][5]

908년 10월, 개봉부 압아(開封府押牙) 겸 좌친종지휘사(左親從指揮使)였던 왕언장은 좌용양군사(左龍驤軍使)에 임명되었다. 909년에는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제수되었으나, 여전히 좌용양군사로 있었다.[10]

909년 12월, 후량 태조애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을 건국한 후, 서쪽의 기나라를 공격하던 중 기나라 장수 유지준이 후량의 신하였던 삭방군 절도사(朔方軍節度使, 본거지는 지금의 닝샤 성 인촨 시) 한손(韓遜)을 공격하였다. 이때 장군 강회정(康懷貞)이 이끄는 후량군은 기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렸으나, 왕언장이 퇴로를 열어 전멸을 면하게 하였다.[14][5]

911년, 왕언장은 행영좌선봉마군사(行營左先鋒馬軍使)에 보직되었고 검교사공(檢校司空)에 제수되었다. 이때도 그는 감문위상장군 직에 있었다.[10]

2. 3. 주우규, 주우정 시대의 활동

왕언장은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가 뛰어난 전공을 세워 중용되었다.[10] 912년 주우규가 제위를 계승한 후, 검교사도(檢校司徒)에 제수되었고, 913년 복주자사(濮州刺史)에 임명되었으나, 마보군도지휘사(馬步軍都指揮使) 겸 행영좌선봉마군사로서 후량의 주력 금군(禁軍)에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영선봉보군도지휘사(行營先鋒步軍都指揮使)로 보직되었다.[10]

914년 주우정이 즉위한 후, 왕언장은 전주자사(澶州刺史)에 임명되고 백작에 봉해졌다.[10]

915년, 주우정은 천웅군(天雄軍) 번진(藩鎭)을 분할하는 과정에서 대장 유심이 지휘하는 금군 병력을 북쪽으로 파견하였고, 왕언장은 유심의 휘하에서 500명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천웅군 번진의 수도인 위주(魏州)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천웅군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언장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천웅군 반란군은 진나라에 투항하였고, 왕언장의 처자들은 포로가 되었다.[16] 진나라는 왕언장에게 귀순을 권유했으나, 왕언장은 밀사를 죽이고 거절하여, 수년 후 처자들이 처형되었다.[10][16]

그 후, 왕언장은 9월에 여주방어사(汝州防禦使)로 승진되어 검교태보(檢校太保)에 제수되었고, 916년 4월에는 정주방어사(鄭州防禦使)로 전임되었으나, 행영선봉보군도지휘사로서 후량 금군에 남아 있었다. 917년, 서면행영마군도지휘사(西面行營馬軍都指揮使)에 임명되었고, 검교태부(檢校太傅)에 추가로 제수되었으며, 행영제군좌상마군도지휘사(行營諸軍左廂馬軍都指揮使)로 보직되었다.[10]

919년, 왕언장은 북면행영초토사(北面行營招討使) 하괴의 지휘 아래 호류파(胡柳陂) 전투에 참가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후량군과 진군 양측에서 달아나던 병사들이 후량의 수도 대량으로 향하면서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곧 진정되었다.[17]

919년 5월, 왕언장은 광국군(匡國軍) 유후(留後)에 임명되었으나, 여전히 금군에서 장군으로 있었다. 920년 1월,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되어 후작에 봉해졌고, 산원지휘도두도군사(散員指揮都頭都軍使)에 보직되었다. 그 직후 북면행영초토사(北面行營招討使) 대사원의 휘하에서 부사(副使)에 임명되었다. 921년 1월, 광국군 절도사에서 선의군 절도사(宣義軍節度使)로 전임되었다.[10]

921년 4월, 주우정의 사촌인 혜왕(惠王) 주우능(朱友能)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언장은 주우능을 격파하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8] 이존욱은 언장을 등용하려 했지만, 언장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하며 귀순을 거부하고 참수되었다. 향년 61세.[10]

2. 4. 후당과의 최후 결전

923년 봄, 후당이존욱은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이사원에게 황하를 건너 후량의 천평군(天平, 본부 태안)을 공격하여 운주(鄆州)를 함락시켰다. 주진은 경상의 권유에 따라 왕언장을 대사원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단녕을 부관으로 삼았다.[2]

왕언장은 황하로 나뉜 후당 점령지 덕승(德勝, 현대 푸양시)을 공격, 남쪽 도시를 점령하고 수천 명의 후당 군인을 살해했다. 이후 양류(楊劉, 현대 랴오청시)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주의 방어에 막혔다. 후당이 마가구(馬家口, 현대 랴오청)에 요새를 건설하자, 왕언장은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했다.[2]

하지만, 왕언장은 조연과 장씨 일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는 조연과 장씨 일가, 그리고 단녕의 방해로 이어졌다. 주진은 이들의 거짓 고발을 믿고 왕언장을 해임하고, 동장과 합류하여 제주(澤州, 현대 진성)를 공격하라 명했다. 주진은 경상, 이진, 장전의의 반대에도 불구, 단녕으로 왕언장을 교체했다.[2]

왕언장은 제(澤) 전선에서 소환, 장한제를 군대 감시관으로 삼아 운주 공격 명령을 받았다. 동장이 타이위안으로, 곽언장(霍彦章)이 정정(真定, 현대 보정)으로, 왕언장이 운으로, 단녕이 덕승 근처에서 후당 황제를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강언효의 투항으로 작전이 발각되었고, 후당 황제는 이사원과 합류, 대량(大梁)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후당 황제가 운주에 도착, 이사원을 선봉으로 대량을 향해 진격했고, 왕언장을 기습했다. 왕언장은 중도(中都, 현대 제녕)로 후퇴했으나, 하로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2]

후당 황제는 왕언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왕언장은 거절하며 후당을 섬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사원을 보내 설득하자, 이사원을 모욕했다. 왕언장은 단녕의 군대가 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진격을 막으려 했고, 결국 후당 황제는 그를 처형했다. 얼마 후, 후당군은 대량을 점령, 주진은 자살하고 후량은 멸망했다.[2]

2. 4. 1. 후량군의 총대장

923년 봄, 후당이존욱후당의 황제(장종)를 선언하고 황하를 건너 후량의 천평군(天平, 본부는 현대 태안, 산둥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후량은 큰 혼란에 빠졌고, 주진은 경상의 권유에 따라 왕언장을 대사원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단녕을 부관으로 삼았다.[2]

왕언장은 후당이 점령한 덕승(德勝, 현대 푸양에 위치)을 공격, 두 부분 사이의 다리를 파괴하고 남쪽 도시를 점령하여 후당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어서 양류(楊劉, 현대 랴오청에 위치)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주의 방어에 막혔다. 후당이 마가구(馬家口, 역시 현대 랴오청에 위치)에 요새를 건설하자, 왕언장은 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했다.[2]

하지만 왕언장은 조연과 장씨 일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단녕은 왕언장을 질투하여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방해로 왕언장의 군사 작전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주진은 왕언장을 해임하고 동장과 합류하여 제주(澤州, 현대 진성, 산시성)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주진은 경상, 이진, 장전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녕으로 왕언장을 교체했다.[2]

얼마 후 왕언장은 장한제를 군대의 감시관으로 삼아 운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은 동장이 타이위안으로, 곽언장(霍彦章)이 정정(真定, 현대 보정, 허베이성)으로, 왕언장이 운으로, 단녕이 덕승 근처에서 후당 황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후량 장교 강언효가 후당으로 투항하면서 발각되었다. 후당 황제는 이사원과 합류하여 대량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후량 군대가 작전을 실행하려 할 때, 후당 황제가 운주에 도착하여 이사원을 선봉으로 대량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왕언장을 기습했고, 왕언장은 중도(中都, 현대 제녕, 산둥성)로 후퇴했다. 후당군은 신속하게 방어선을 돌파했고, 왕언장은 도주 중 하로기에게 창으로 찔려 포로로 잡혔다.[2]

후당 황제는 왕언장을 항복시키려 했으나, 왕언장은 거절하며 충절을 지켰다. 후당 황제가 이사원을 보내 설득하려 하자, 왕언장은 이사원을 모욕했다. 왕언장은 단녕의 군대가 오고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여 진격을 막으려 했고, 결국 후당 황제는 그를 처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당군은 대량을 점령했고, 주진은 자살했으며, 후량은 멸망했다.[2]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간 왕언장은 전공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920년에는 개국후가 되었다. 이존욱은 그의 가족을 붙잡아 귀순을 요구했으나, 왕언장은 이를 거절했다. 후량이 침공받자, 왕언장은 북면소토사가 되어 후당의 침공을 막았으나, 간신의 참언으로 붙잡히고 만다. 이존욱은 왕언장을 등용하려 했지만, 왕언장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하며 귀순을 거부하고 참수되었다. 향년 61세.

2. 4. 2. 모함과 실각

923년 봄, 위주(魏州)에 있던 후당의 이존욱은 후당의 황제(장종)를 선언, 당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이존욱은 이사원에게 황하를 건너 후량의 천평군(天平, 본부는 현대 태안, 산둥성)을 기습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운주(鄆州)가 함락되자 대량(大梁)은 큰 혼란에 빠졌고, 주진은 경상의 권유에 따라 왕언장을 대사원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단녕을 부관으로 삼았다.[2]

왕언장은 황하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뉜 후당이 점령한 덕승(德勝, 현대 푸양에 위치)을 공격, 두 부분 사이의 다리를 파괴하고 남쪽 도시를 점령하여 후당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양류(楊劉, 현대 랴오청에 위치)를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후당의 장군 이주(李周)의 방어에 막혔다. 후당이 마가구(馬家口, 역시 현대 랴오청에 위치)에 요새를 건설하자, 왕언장은 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해야 했다.[2]

하지만 왕언장은 후량 군대 내부에서 훼손당하고 있었다. 그는 조연과 주진의 사망한 부인 장씨의 네 형제/사촌 (그녀의 오빠인 장한제를 포함)이 부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여겨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단녕은 왕언장을 질투하여 조와 장씨 일가와 동맹을 맺었다. 마가구에서 철수한 후, 주진은 왕언장에 대한 거짓 고발을 믿고 그를 후량 군대의 주 지휘관에서 해임하고, 대신 동장과 합류하여 제주(澤州, 현대 진성, 산시성)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주진은 경상, 이진, 장전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녕으로 교체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왕언장은 제(澤) 전선에서 소환되어, 장한제를 군대의 감시관으로 삼아 운주를 공격하여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은 동장이 타이위안으로, 곽언장 (霍彦章)이 정정(真定, 현대 보정, 허베이성)으로, 왕언장이 운으로, 단녕 자신이 덕승 근처에서 직접 후당 황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후량 장교 강언효가 후당으로 투항하면서 발각되었다. 강언효는 또한 주력 부대가 단녕에게 있다고 폭로했다. 후당 황제는 이사원과 합류하기 위해 운으로 향함으로써 대량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후량 군대가 작전을 실행하려 할 때, 후당 황제가 운주에 도착하여 이사원을 선봉으로 대량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왕언장을 만나 기습했고, 왕언장은 중도(中都, 현대 제녕, 산둥성)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당군은 신속하게 방어선을 돌파했고, 왕언장은 도주하려 했으나, 후당 장군 하로기(夏魯奇)가 그를 알아보고 창으로 찔렀다. 왕언장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2]

후당 황제는 왕언장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처음에는 그의 생명을 살리고 항복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거듭 거절하며, 자신이 충실한 후량 신하이며 결코 후당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당 황제가 이사원을 보내 그를 설득하려 하자, 그는 이사원을 별명으로 부르며 모욕했다. 후당 군대가 대량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자, 왕언장은 단녕의 군대가 오고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여 진격을 막으려 했고, 후당 황제는 그를 처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당군은 대량을 점령했고, 주진은 자살했으며, 후량은 멸망했다.[2]

젊은 시절 주전충의 군대에 들어갔던 왕언장은 전공으로 복주, 단주 자사, 여주, 정주 방어사, 허주, 활주 절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며, 920년에는 개국후가 되었다. 이존욱은 그의 가족을 붙잡아 귀순을 요구하는 사자를 베어 거절하게 만들정도로 그의 무용을 두려워했다. 이후 후당에 의해 후량이 침공을 받자, 언장은 북면소토사가 되어 백 번 이상의 전투를 벌여 후당의 침공을 막았다. 그러나 연주, 운주의 경계에서 이사원의 대군을 앞에 두고 후퇴하여, 중도로 물러났을 때 간신의 참언으로 500명의 병사로 출격했으나, 붙잡히고 만다. 이존욱은 언장을 등용하려 했지만, 언장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하며 귀순을 거부하고 참수되었다.

2. 4. 3. 운주 공격과 최후

923년 봄, 후당의 이존욱은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이사원에게 황하를 건너 후량의 천평군(天平, 본부 태안)을 공격하여 운주(鄆州)를 함락시켰다. 주진은 경상의 권유에 따라 왕언장을 대사원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단녕을 부관으로 삼았다.[2]

왕언장은 황하로 나뉜 후당 점령지 덕승(德勝, 현대 푸양시)을 공격, 남쪽 도시를 점령하고 수천 명의 후당 군인을 살해했다. 이후 양류(楊劉, 현대 랴오청시)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주의 방어에 막혔다. 후당이 마가구(馬家口, 현대 랴오청)에 요새를 건설하자, 왕언장은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했다.[2]

하지만, 왕언장은 조연과 장씨 일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는 조연과 장씨 일가, 그리고 단녕의 방해로 이어졌다. 주진은 이들의 거짓 고발을 믿고 왕언장을 해임하고, 동장과 합류하여 제주(澤州, 현대 진성)를 공격하라 명했다. 주진은 경상, 이진, 장전의의 반대에도 불구, 단녕으로 왕언장을 교체했다.[2]

왕언장은 제(澤) 전선에서 소환, 장한제를 군대 감시관으로 삼아 운주 공격 명령을 받았다. 동장이 타이위안으로, 곽언장(霍彦章)이 정정(真定, 현대 보정)으로, 왕언장이 운으로, 단녕이 덕승 근처에서 후당 황제를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강언효의 투항으로 작전이 발각되었고, 후당 황제는 이사원과 합류, 대량(大梁)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후당 황제가 운주에 도착, 이사원을 선봉으로 대량을 향해 진격했고, 왕언장을 기습했다. 왕언장은 중도(中都, 현대 제녕)로 후퇴했으나, 하로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2]

후당 황제는 왕언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왕언장은 거절하며 후당을 섬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사원을 보내 설득하자, 이사원을 모욕했다. 왕언장은 단녕의 군대가 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진격을 막으려 했고, 결국 후당 황제는 그를 처형했다. 얼마 후, 후당군은 대량을 점령, 주진은 자살하고 후량은 멸망했다.[2]

2. 5. 사후 추증

왕언장은 후진 천복 2년(937년)에 태사(太師)로 증직되었다.[19]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일화

백 근의 쇠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싸움 때마다 선봉을 맡아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왕철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4]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구오대사
[11] 서적 자치통감 0923-10-05
[12] 웹사이트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13] 서적 신오대사
[14] 서적 자치통감
[15] 서적 자치통감
[16] 서적 자치통감
[17] 서적 자치통감
[18] 서적 자치통감
[19] 서적 구양문충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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