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코리야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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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다코리야마성은 무로마치 시대에 모리 도키치카가 축조한 일본의 성으로, 모리 가문의 주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1541년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 전투에서 아마고 하루히사의 공격을 격퇴하고, 모리 모토나리의 확장을 거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석벽을 갖춘 근세 성곽으로 변모했다. 도요토미 정권 시기에는 히로시마성으로 이전하면서 폐성되었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막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현재는 역사 공원으로 사용되며, 2006년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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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코리야마성 | |
---|---|
개요 | |
이름 | 요시다-코리야마 성 |
원어 이름 (일본어) | 吉田郡山城 |
다른 이름 | 아키-코리야마 성 (安芸郡山城) |
유형 | 산성 (山城) |
위치 | 아키타카타 시, 히로시마 현, 일본 |
좌표 | 34°40′27.43″N 132°42′34.52″E |
![]() | |
국가 지정 | 일본 국가 사적지 |
역사 | |
건설자 | 모리 모토나리 |
사용 시기 | 센고쿠 시대 |
철거 | 1600년 |
통제 | 모리 씨 |
점유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데루모토 |
전투 | 코리야마 포위전 (1541년) |
구조 및 재료 | |
추가 정보 |
2. 역사
요시다코리야마성은 고노카와와 다지히 강에 둘러싸인 요시다 분지의 북쪽에 위치한 군산 전체에 걸쳐 축성되었다. 초기에는 요새와 같은 소규모 성이었지만, 모리 씨의 세력 확대와 함께 확장되어 산 전체를 요새로 하는 거대한 성곽이 되었다. 이후 모리 데루모토가 히로시마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모리 가문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 안에 있는 기원사( 정중 2년(1325년) 이전 창건, 현재의 세이 신사)보다는 늦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3] 겐무 3년(1336년)에 모리 도키치카가 요시다 장(吉田荘)의 지토로 파견되었으나, 호에이 2년(1705년)에 쓰여진 "다카다 군 촌들 각서"에는 "도키치카 공 이후"에 요시다코리야마성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14]
분와 원년(1352년)에 모리 모토하루가 "요시다성"에 웅거했다는 기록과, 오에이 4~7년(1371년~1374년) 모리 치카히라 서장의 수신인이 "군산전"으로 되어 있어[13] 모토하루가 축성했다고 추정되기도 하지만,[15] 이것이 요시다코리야마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현존하는 요시다코리야마성과 직접 연결되는 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4]
확장 및 정비가 계속된 요시다코리야마성 안에는 성주 모리 모토나리뿐만 아니라 장남 모리 다카모토와 일부 중신들의 관저도 마련되었다. 이는 전시에만 성곽에 틀어박히는 종래의 산성에서 벗어나 평시의 거관과 전시의 성곽이 일체화되는 근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4]
1615년 에도 막부가 발령한 일국일성령에 따라 요시다코리야마성도 철거되었고,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키리시탄의 봉기를 우려한 막부에 의해 석벽이나 해자 등도 파괴되었다.[15]
메이지 초기, 모리 모토나리의 묘소 개수 공사가 진행될 때 니노마루터의 석축에서 일부 돌이 운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8]
2. 1. 무로마치 시대
1336년 모리 도키치카가 요시다 장원의 지토로 파견되어 고리야마 산 남동부에 성을 축조하였다. 이후, 12대 모리 모토나리가 가독을 계승하여 당주의 자리에 오르자, 고리야마 산 전체로 성을 확장하였다.[2]1541년 요시다코리야마성의 전투에서 아마고 하루히사가 이끄는 2만 대군에 공격받았지만, 오우치 가문의 원군으로 온 무장 스에 다카후사의 활약으로 아마고 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모리 가문의 세력 확대와 함께 성은 확장, 정비되었다. 이 무렵 《백만일심》이라고 적힌 석비를 묻어 축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4]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씨와 동맹을 맺고 아마고 씨를 격파한 후, 내부 분쟁으로 약해진 오우치 씨마저 격파하여 주고쿠 지방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2][3]
당초 군산성은 보루 정도의 소규모 성으로, 모리 모토나리가 입성하는 1523년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 모토나리는 국인 영주의 맹주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탈피를 꾀하며 군산 전체로 성역을 확장해 나갔다. 1540년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이어진 요시다코리야마성의 전투 때는 아직 확장 전이었지만, 부분적인 확장이 시작되어 남쪽 기슭에 해자가 설치된 것은 1551년경으로 여겨진다.[13][14][16]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 모리 데루모토가 당주일 무렵, 석벽 등을 사용한 근세 성곽으로 변모하였다. 망루 등이 혼마루에 건립되었지만, 천수각은 존재하지 않았다.[15] 모토나리 시대에는 천수각이 없었지만, 망루용 야구라가 혼마루 최상단에 세워졌다. 데루모토 시대에는 3층 3계의 천수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1584년에도 데루모토가 성의 수축 및 성하 정비를 지시했고, 성하의 가미마치를 "시라카베"로 하도록 명했거나, 모리 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된 후에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금박 기와도 출토되고 있다.도요토미 정권 시기, 산간부 분지에 위치한 요시다코리야마 산성은 교통이 불편하여 본성 이전을 계획하였고, 1591년 히로시마성이 대부분 완성되자 거처를 히로시마 성으로 옮겼다.[15] 그리고 가신과 마을 주민을 히로시마로 이주시켰다. 성이 폐성된 시기는 이 무렵으로 보는 설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날 무렵인 1600년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13][15] 모리 씨의 히로시마 이주 후인 1591년이 사실상 폐성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 산록의 해자는 메워졌다고도 하지만,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보존되고 있는 호이다 모토키요 서장 내용에서 1594년에 모토키요가 형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요시다에 출두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떠한 형태로든 요시다코리야마성이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산성을 중시하는 데루모토가 완전한 평성인 히로시마성에 대해 츠메노성(요새)으로서 요시다코리야마성을 계속 온존시켰다는 견해도 있다.[14]
2. 3. 에도 시대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봉기를 우려한 막부의 명에 따라 석벽과 해자 등이 파괴되었다.[15] 막부 말기에는 히로시마번의 지번인 히로시마 신덴번이 성립하여 분큐 3년(1863년)에 요시다코리야마 성 기슭에 진야가 설치되었으나(요시다 진야)[13], 메이지 2년(1869년) 폐번되면서 진야 건물은 폐지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에도 시대 중기에는 요시다코리야마 성과 그 성 아래 마을을 그린 '요시다코리야마 어성하 고도'가 제작되었고(현재는 모리 가문 문서로 야마구치현 문서관에 소장)[14], 막부 말기에는 아사노 씨에 의해 측량이 이루어졌다.[14]
2. 4. 현대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3] 현재 이 성의 부지는 역사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낮은 석벽과 해자를 포함한 상당한 구조물들이 남아 있다.[4] 그러나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성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약 130개의 성 유물이 남아 있다.[7] 성터는 JR 서일본 게이비 선 무코하라역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8][9]성 근처에 아키타카타시 역사민속자료관이 위치해 있으며, 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10] 2006년 일본성곽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940년 (쇼와 15년) 요시다코리야마성터가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쇼와 63년) 다지히사루카케성터를 추가하여 "모리 씨 성터 다지히사루카케성터 코리야마성터"가 되었다.[13]
1990년 (헤이세이 2년) 코리야마 산록에 요시다마치 역사민속자료관 (현 아키타카타시 역사민속박물관)이 개관하여 모리 씨 관련 자료가 공개되었다. 코리야마 서쪽 다이쓰인 계곡의 계류 사방 사업으로 공원이 정비되었는데, 이에 앞서 1995년 (헤이세이 7년)경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모리 씨 시대보다 오래된 것을 포함하여 유구·유물이 발굴되었다.
3. 구조
요시다코리야마성은 해발 360m의 산 정상에서 방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능선과 계곡 부근에 약 270여 개의 구루와가 배치되어 있으며, 일부는 빈 해자로 구분되어 있다. 산 정상 부분이 혼마루이며, 그 아래에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차례로 위치한다. 산노마루는 성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성문의 흔적도 발견된다.
성의 남쪽에는 내호, 서쪽에는 다이츠인 계곡, 북쪽 능선에는 뒤편 산(갑산)과 구분되는 호리키리가 있으며, 이들 성곽 구역의 총면적은 7만m2에 달한다.[14] 석축은 성의 중심부인 혼마루에서 산노마루 주변까지 사용되었다.[14]
각 구루와의 세부 구조는 다음과 같다.
구루와 이름 | 설명 |
---|---|
혼마루 | 고리야마 산 정상에 위치한 한 변이 약 35m인 구루와(曲輪).[19] 모리 모토나리의 저택이 있었고,[14] 북쪽 끝에는 한 단 높은 야구라대(길이 23m, 폭 10m[19])가 있다. 과거 그림에는 혼마루에 3층 천수각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15] |
니노마루 | 높이 0.5m, 폭 1m의 석루와 돌담(石垣)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27m와 15m의 사각형으로 구획되어 있다.[19] 남쪽에 돌담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과거에는 동쪽, 서쪽에도 돌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
산노마루 | 성내 최대 구루와로, 돌담, 토루, 굴착 등으로 4단으로 나뉘어 있다.[19] 석루와 돌담 등이 현존하며,[13] 서쪽 호구치(虎口)에는 돌담 안에 계단이 짜여 있어 안쪽이 마스(枡) 형으로, 근세 성곽적인 구조이다.[14] 산노마루에서 이어지는 오비구루와(帯曲輪)에는 고쿠라 야시키가 있었다. |
가마야(釜屋)의 단 | 혼마루에서 15m 아래에 위치하며, 취사장이 있었다. 6개의 단으로 형성된 구루와군이다. 북쪽으로 가면 하네노마루로 이어진다. |
우마야(厩)의 단 | 산노마루 동쪽에서 동남쪽으로 400m 뻗어있는 능선 기슭에 있으며, 단 아래에 마장(馬場)이 있었다. 마구간 단은 11단, 마장은 9단의 구루와군이다. |
묘쥬지(妙寿寺)의 단 | 고리야마 남쪽을 지키는 13단의 구루와이다. |
세다마리(勢溜)의 단 | 고쿠라 야시키 아랫단을 호리키리(堀切)로 구획하여 독립시킨 크고 작은 10단의 구루와로 이루어져 있다.[19] 이 단 바로 옆을 지나는 길이 혼마루에서 성 아래로 이어지는 오테스지(大手筋)로 추정되며,[14] 혼마루 수비병이 머무는 등 엄중한 방어선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18] |
쓰리이(釣井)의 단 | 혼마루 서쪽에 있는 1단의 구루와이다. 지름 2.5m의 돌담으로 만들어진 우물이 있지만, 현재는 묻혀있어 깊이는 4m에 그친다.[18] |
히메노마루 | 혼마루 북쪽에 있는 7단의 구루와군으로, 혼마루 북쪽 돌담 기슭에 해당한다. "일일일력일심(백만일심)"이라고 적힌 초석이 묻혀있다고 전해진다.[19] |
만간지(満願寺)의 단 | 만간지를 포함한 6단으로 이루어진 구루와군이다. |
야구라(矢倉)의 단 | 세다마리 단에서 남서쪽으로 더 나아간 능선에 있는 8단의 구루와군이다. |
이치이(一位)의 단 | 야구라 단 북쪽에 있는 10단의 구루와군이다. |
오자키마루 | 옛 본성과 신성 사이를 잇는 위치에 있으며, 호리키리로 구획되어 있다.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17단의 구루와군이며, 모리 다카모토의 거관이 있었다고 추정된다.[19] |
옛 본성 | 오자키마루 능선에서 남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모리 모토나리가 성곽 구역을 확장하기 전의 본성이다. 전국 시대 초기 산성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19] 오자키마루와의 사이(옛 본성에서 보면 뒤편)에는 2개의 호리키리가 있다. 옛 본성의 혼마루에 해당하는 구루와에는 서쪽의 고台에 망루, 다카모토가 한때 거주했던 저택 등이 있었다.[13] 옛 본성에 해당하는 부분은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16개의 구루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루와의 면적은 4000제곱미터 전후이다.[20][14] 해발 293m(비고 90m)[19]이다. |
하네노마루 | 혼마루 북동쪽(간(艮)) 방향에 있으며, 쓰메노마루(詰の丸)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독립적인 구루와이다.[14] 가마야 단과는 폭 7m, 깊이 3m의 호리키리로 격리되어 있다. 구루와 수는 9단이다. |
센로카쿠군(千浪郭群) | 고리야마 배후에 있는 갑산(甲山)과의 사이를 지키는 9단의 구루와군이다.[19] |
요시다코리야마성 서쪽의 다이츠인 계곡에는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복합 유적인 '''다이츠인 계곡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다카미야 군아 관련 유적과 함께 모토나리·데루모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약연호리와 저택 터 등이 발견되었다.[18] 약연호리는 계곡에서 남서쪽으로 만들어진 내호의 기점이 되어, 군산 남쪽 기슭을 돌아가며 파여 있었다.
다이츠인 계곡에서 남쪽 기슭을 둘러싸고, 구 본성이 있었던 동쪽 능선까지 내호가 이어졌다. 현재의 아키타카다 소년 자연의 집 앞에서 현립 요시다 고등학교·시립 요시다 초등학교 방향으로 호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13] 이러한 호리 안쪽은 요시다 군산성을 수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거주 구역이었다.[14] 요시다 분지를 흐르는 가와이 강과 다지히 강은 천연적인 외호 역할을 했다.[14]
내호 바깥쪽에는 도로(나와테)가 정비되어 있었다. 성 안의 오테스지를 내려 기온사(세이신 신사) 부근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기온 나와테', 다이츠인 계곡을 내려간 방향에서 이어지는 '가토리 나와테' 등 산기슭에서 마을을 향해 뻗어 있는 7개의 나와테와, 이 나와테를 가로로 잇는 '타테 나와테'가 있다.[13][14]
4. 관광
현재 요시다코리야마성 터는 역사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낮은 석벽과 해자 등 상당한 구조물들이 남아 있다.[3]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성이었지만, 현재 부지에는 약 130개의 성 유물이 남아 있다.[4] 성터는 JR 서일본 게이비 선 무코하라역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으며,[7] 2006년 일본성곽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10]
4. 1. 교통
JR 서일본 요시다구치역4. 2. 주변 시설
- 모리 가문 묘소
- 백만일심 표석
- 요시다 정 역사민속자료관 (현 아키타카타시 역사민속박물관)
- 아키타카타시 역사민속박물관 - 모리 씨 관련 자료가 공개되어 있다. 1990년 개관. 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8][9] 산록에 위치.[13]
- 미쿠라야시키(御蔵屋敷) 터 - 산노마루(三の丸)에서 이어지는 오비구루와(帯曲輪)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병량고.[19]
- 오사토야시키(御里屋敷) 전승지 - 모리 모토나리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1991년-1992년 시굴 조사에서는 유구 등이 발견되지 않아 재검토되고 있다.[18]
- 만간지(満願寺) - 세이다마리노 단(勢溜の壇) 남동부에 있던 절.
- 모리 모토나리 묘소
- 모리 다카모토 묘소
- 전 모토나리 화장터 터
- 모리 씨 역대 묘소
- 쇼가쿠(嘯岳) 선사 묘
- 백만일심(百万一心) 비
- 다이쓰인타니 공원 - 산록에 위치.[13]
- 세이 신사・코리야마 공원
참조
[1]
웹사이트
毛利氏城跡 / 多治比猿掛城跡 / 郡山城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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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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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서
島根県・広島県を流れる河川全体の名としては「江の川(ごうのかわ)」だが、広島側では「可愛川(えのがわ)」と呼ばれる。
[13]
간행물
「国指定史跡毛利氏城跡 郡山城」パンフレット
安芸高田市未来創造事業 歴史・伝統文化を活用した地域活性化実行委員会
[14]
서적
戦乱中国の覇者 毛利の城と戦略
成美堂出版
1997
[15]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49 毛利戦記
학습연구사
1997
[16]
문서
尼子軍3万・吉田郡山城籠城数8000という数字は、[[毛利元就郡山籠城日記]]やその他[[軍記物]]の記載に由来しているため、誇張されている可能性が高い。
[17]
문서
公益財団法人 大阪市博物館協会 大阪城天守閣
[18]
문서
現地説明板
[19]
웹사이트
郡山城跡見どころ紹介
http://www.akitakata[...]
安芸高田市歴史民俗博物館
[20]
문서
この規模の城であれば、籠城できる推定人数は1000人前後とされる。
[21]
문서
毛利氏の移転と共に広島城、[[萩城]]へと移り、現在は[[防府市]]の[[防府天満宮]]付近に移転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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