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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라 간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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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모리오카 번 출신의 신선조 대원으로, 학문과 검술에 능했으며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865년 탈번 후 신선조에 입대하여 격검 사범으로 활동했으나, 실제 전투보다는 외교 및 협상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1868년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행방이 묘연하며, 소설에서는 할복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사망 경위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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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라 간이치로

2. 생애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모리오카번의 하급무사 차남으로 태어났다. 학문과 검술에 열중하여 모리오카 번 내에서 가고시마 신토류 검술을 익혀 두각을 나타냈다. 1863년 에도로 가서 호쿠신잇토류 현무관에 입문했는데, 이 무렵 도장은 존왕양이 사상 등 나라의 정세를 이야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분큐 2년(1862년) 12월, 같은 번의 중신 토야마 레이조의 군역 인원으로 에도로 나가, 겐지 원년(1864년) 2월에는 호쿠신 잇토류의 치바 도우산에게 입문했지만, 게이오 원년(1865년) 1월, 27세 때 모리오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자 같은 달 16일에 탈번했다.[4] 그 후, "요시무라 간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신센구미 대원 모집에 응하여 상경한다.

모리오카 번의 감찰인 카무라 큐시(후에 세헤이, 야지로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카무라 야가라 유히사(후에 료우에몬, 세헤이)로, 200석 6인 부양을 받았다. 카구미 반자구미카시라, 무카이 나카노 미마에 통 대관 등을 역임했다.[2] 일족의 보제사는 모리오카시의 호린인이었으나 폐사되었고, 현재는 온류지[2]에 묘비가 남아있다. 『모리오카 명인 기신록』[3]에는 신토류의 고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2. 1. 에도 유학과 신센구미 입대

모리오카번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학문과 검술에 열중하였다. 가고시마 신토류 검술을 배워 모리오카 번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3]

1863년 에도로 가서 호쿠신잇토류 현무관에 입문하였다. 당시 도장은 존왕양이 사상 등 국가 정세를 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865년 탈번 후 신센구미에 입대하였다. 문무 양쪽에 재능이 있어 제사취급역 겸 감찰, 격검사범으로 발탁되었다.[4]

1867년 신센구미가 막부 신하로 등용되면서 미마와리구미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고향 가족에게 충분히 송금할 수 있게 되어 감격해 울었다고 한다.[10]

2. 2. 신센구미 활동과 논객으로서의 역할

1865년, 가난했던 요시무라는 다섯 가족을 걱정하여 탈번 후, 당시 천하에 용명을 떨친 신센구미에 입대한다.[4] 문무 양쪽에 재능을 가지고 있어 제사취급역 겸 감찰, 격검사범으로 발탁된다.[4] 1867년, 신센구미가 막부의 신하로 등용되어, 요시무라는 미마와리구미 수준의 격식을 받게 된다.[10] 이때, 고향의 가족에게 충분한 송금이 가능하여 감격해 울었다고 한다.

격검 사범직이었지만, 정작 적을 벤 기록은 적다. 신센구미의 둔영지가 이전할 때 니시혼간지에 교섭을 하러 가거나,[9] 산조 제찰사건의 사죄를 목적으로 한 도사 번의 향응에 요시무라가 참여하는[8] 등 논객으로서 활약하였다. 덴마야사건에서 미우라 야스시의 호위 역에 임해졌을 때에는, 요시무라가 벤 기록은 없다.[14]

게이오 2년 11월 4일, 오메츠케 나가이 나오시의 조슈 심문사로 곤도 이사미, 타케다 간류사이, 이토 카시타로, 야마자키 스스무, 아시야 노보루, 아라이 타다오, 오가타 슌타로, 핫토리 타케오 등과 함께 히로시마까지 수행했다.[5]

곤도 등의 귀경 후에도 야마자키와 히로시마에 잔류한 것으로 보이며, 제2차 조슈 정벌 중 게이오 2년 6월 14일, 코세가와구치 전투에서 히코네 번과 다카다 번이 패배한 상황을 다음 날 15일자로 보고한 기록이 남아있다.[6]

게이오 3년 6월 15일, 요시무라와 야마자키가 당시 둔소였던 니시 혼간지와 교섭한 결과, 후도도무라로의 이전을 결정했다.[9]

대정봉환 후 11월 경에는 사쓰마 번 가로 고마츠 키요카도 (오비토)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1]

같은 달 18일, 이토 카시타로 암살 시에는 야마자키 등과 함께 성대한 연회를 벌여, 이토를 취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12]

2. 3. 도바 후시미 전투와 최후

1868년 정월, 도바 후시미 전투에 참가했지만, 전사했는지 탈주했는지 이후의 소식은 두절되었다.[16] 소설가 시모자와 칸에 의하면, 신선조가 오사카에서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시무라는 길거리를 헤매다 모리오카번 저택에 다시 돌아갈 것을 요청했지만, 대리인 오노 지로에몬에게 무사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라고 비난받고 할복을 명받아 모리오카 번 저택 안에서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할복한 방에는 2푼, 금 10장과 쪽지가 놓여 있었고, 쪽지에는 가족에게 송금해 달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노 지로자에몬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져 요시무라의 최후는 시모자와 칸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자손인 카무라 가문의 과거장에는 메이지 3년(1870년) 1월 15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고코노미야의 무진 동군 전사자 영명부에는 "정월 6일 요도에서 전사 제사 조정역 카무라 곤타로"라고 기록되어 있고, 『전망 순난 지사인 명록』[17]에는 "정월 3일부터 6일에 걸쳐 야마시로, 도바, 야와타, 야마자키의 각지 전투에서 전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카무라 가문의 과거장에는 "메이지 3년 1월 15일 유상 동생 카무라 곤타로 섭주 후시미에서 전사 당시 향년 31세"[18]라고 적혀 있다.

니시무라 카네후미는 전쟁 후 요시무라가 오사카로 도망쳐 당시 츠나시마(아미지마?)에 있던 난부 번의 가가(임시 거처)에서 유수거인 모 씨와 구면이었기에, 지금까지는 막부를 위해 헌신했지만 이제부터는 근왕을 주로 할 것이니 잠시 동안 숨겨달라고 부탁했으나, 유수거는 격분하여 나라를 탈출하여 신선조에 들어가 막부를 위해 몸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근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은 성의가 없으며, 막부가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변심하는 것은 불의이므로 사도를 세워 할복하라고 설득했기에 할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3. 요시무라 칸이치로에 대한 평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모습은 고모자와 간의 신선조 이야기 중 「대사 절명기」[20]에 나오는 창작된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 고모자와가 묘사한 요시무라는 다음과 같다.

37, 8세로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왼쪽 눈 밑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성격은 온순하고 학문과 검술에 능했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모리오카번 출신으로 옻칠 등을 하며 처자식 다섯을 부양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분큐 2년(1862년)에 탈번하여 혼자 오사카로 갔다. 그 후에도 생활비는 계속 보냈다. 이듬해 신선조가 교토와 오사카에서 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21] 선발되었을 때, 히지카타 도시조에게서 30냥 2인 부양을 받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신선조가 후시미 봉행소로 옮겨갈 때 받은 백 냥을 처자식에게 보냈다.[22]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아군과 떨어져 신선조가 오사카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요시무라는 아미지마의 모리오카번 저택에 가서 류스이 야쿠(留守居役)인 오노 지로에몬에게 근왕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처자식을 먹여 살릴 봉록을 원하며, 처자식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오노는 요시무라에게 무사의 혼이 없다고 비난하며, 난부 무사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번의 수치라고 말하며 할복을 권유했다. 요시무라는 저택 안에서 할복했고, 방에는 작은 칼과 2푼 금 10매 정도의 꾸러미가 있었고, 옆 벽에는 「이 2품은 저희 집에……」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23]

이후 미즈키 시게루아사다 지로는 고모자와의 창작을 바탕으로 요시무라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미즈키는 만화 『막말의 아버지』[24]를, 아사다는 역사 소설 미부 기사전을 썼다.

그러나 오노 지로에몬은 가공의 인물이며, 실제 요시무라는 200석이라는 높은 녹봉을 받는 무사의 아들이었다. 나이도 많이 다르고, 탈번 연도도 맞지 않으며, 처자식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는다.

4. 창작물에서의 요시무라 칸이치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모습은 고모자와 간의 신선조 이야기 속 「대사 절명기」[20]에 묘사된 창작이 바탕이 되었다. 고모자와가 그린 요시무라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37~8세로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왼쪽 눈 밑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온순한 성격으로 학문과 검술에 능했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모리오카번 출신으로 옻칠 등으로 처자식 다섯을 부양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분큐 2년(1862년)에 탈번하여 단신으로 오사카로 갔다. 그 후에도 생활비는 계속 보냈다. 이듬해 신선조교토와 오사카에서 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했다.[21] 선발되었을 때, 히지카타 도시조에게서 30냥과 2인 부양을 받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신선조가 후시미 봉행소로 옮겨갈 때 받은 100냥을 처자식에게 보냈다.[22]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아군과 떨어져 신선조가 오사카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요시무라는 아미지마의 모리오카번 가옥에 가서, 류스이 야쿠(留守居役)인 오노 지로에몬에게 근왕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처자식을 먹여 살릴 봉록을 원하며, 처자식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노는 요시무라에게 무사의 혼이 없다며 난부 무사의 수치라고 말하고, 할복을 유도했다. 요시무라는 저택 안에서 할복했고, 족자에는 작은 칼과 2푼 금 10매 정도의 꾸러미가 있었고, 옆 벽에는 "이 2품은 저희 집에……"라고 적혀 있었다.[23]

이후 미즈키 시게루아사다 지로는 고모자와의 창작을 바탕으로 요시무라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미즈키는 만화 『막말의 아버지』[24]를, 아사다는 역사 소설 미부 기사전을 집필했다.

하지만 오노 지로에몬은 가공의 인물이며, 실제 요시무라는 200석이라는 고록 무사의 아들이었다. 나이도 크게 다르고, 탈번 연도도 맞지 않으며, 처자식도 확인되지 않는다.

참조

[1] 뉴스 『壬生義士伝』吉村貫一郎 盛岡藩の嘉村権太郎 同一人物説裏付け 大阪の作家 浦出卓郎さん 古文書から確認 岩手日報 2014-08-19
[2] 서적 岩手県姓氏歴史人物辞典 角川書店
[3] 간행물 上飯坂直美編 盛岡市仏教会 1940-01
[4] 서적 新南部叢書 『盛岡南部家文書家老席日誌『覚書』 慶応編』 東洋書院 2000
[5] 서적 定本 新撰組史録 新人物往来社 2003
[6] 서적 中山忠能履歴資料第7巻 「探索書 慶応2年6月」 日本史籍協会 1934-08
[7] 서적 越前藩幕末維新公用日記 福井県郷土誌懇話会 1974-09
[8] 서적 新撰組始末記
[9] 서적 新撰組始末記
[10] 웹사이트 新徴組大砲組之留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
[11] 웹사이트 総合資料館だより No.151 http://www.pref.kyot[...] 京都府立総合資料館 2007-01
[12] 서적 新撰組始末記
[13] 서적 新撰組始末記
[14] 서적 中経出版 2013
[15] 데이터베이스 新撰組金銭出入帳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6] 서적 浪士文久報国記事 中経出版 2013
[17] 간행물 史談会編 共同出版 1907-11
[18] 서적 新選組銘々伝第四巻 新人物往来社
[19] 서적 新撰組始末記
[20] 서적 中公文庫 1977
[21] 문서 隊士絶命記
[22] 문서 隊士絶命記
[23] 문서 隊士絶命記
[24] 만화 星をつかみそこねる男 講談社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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