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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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티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슬로바키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슬로바키아 인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의원을 거쳐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 수반을 역임했으며, 1939년 슬로바키아 독립 선언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과 총리를 지냈다. 그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반유대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에 가담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사형되었다. 현재까지 그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으며, 극우 세력은 그를 숭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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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티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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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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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 칭호 | 더 레버런드 (The Reverend, 목사) |
직책 | |
슬로바키아 공화국 대통령 | text: 1939년 10월 26일 – 1945년 4월 4일 |
전임 | 사무실 신설 |
후임 | 사무실 폐지 |
슬로바키아 자치 지역 총리 | 1938년 10월 7일 – 1939년 3월 9일 |
전임 (총리) | 직책 신설 |
후임 (총리) | 보이테크 투카 |
내무, 사회 복지 및 보건 장관 | 1938년 12월 1일 – 1939년 1월 20일 |
전임 (내무, 사회 복지 및 보건 장관) | 본인 |
후임 (내무, 사회 복지 및 보건 장관) | 본인 |
내무 장관 | 1938년 10월 7일 – 1938년 12월 1일 |
전임 (내무 장관) | 직책 신설 |
후임 (내무 장관) | 본인 |
체코슬로바키아 보건 및 체육 교육 장관 | 1927년 1월 27일 – 1929년 10월 8일 |
전임 (보건 및 체육 교육 장관) | 얀 슈라메크 |
후임 (보건 및 체육 교육 장관) | 얀 슈라메크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87년 10월 13일 |
출생지 | 너지비체, 오스트리아-헝가리 헝가리 왕국 |
사망일 | 1947년 4월 18일 |
사망지 | 브라티슬라바, 체코슬로바키아 |
사망 원인 | 교수형 집행 |
정치 및 소속 | |
소속 정당 | 슬로바키아 인민당 |
직업 | 정치인 성직자 가톨릭 사제 |
총리 | 보이테크 투카 (1939년–1944년) 슈테판 티소 (1944년–1945년) |
2. 유년기 및 사제 시절
요제프 티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슬로바키아인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빈의 명문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으며 공적인 문제와 사회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종군 사제로 복무하며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전쟁 후 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자 정계에 입문하여 슬로바키아 인민당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정치 활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교구 사제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과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그의 초기 생애와 활동은 이후 슬로바키아 정치에서 그가 맡게 될 역할의 바탕이 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요제프 티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헝가리 왕국 트렌친 현 비치차(당시 Nagybiccsehu)에서 슬로바키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지역 초등학교를 다녔다. 언어에 재능을 보인 우수한 학생으로, 질리나에 있는 하위 문법 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슬로바키아어 문법 학교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이 학교는 헝가리적 분위기가 강했으며,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헝가리어식 표기인 'Tiszó József'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902년부터는 니트라에 있는 상위 피아리스트 문법 학교에서 공부했다. 니트라의 주교 임레 벤데는 그에게 빈의 명문 파츠마네움 신학교(Pázmáneum)에서 사제가 될 기회를 주었다. 여러 엘리트 교수들의 지도를 받으며 다양한 철학과 최신 회칙을 접했고, 이미 알고 있던 헝가리어, 독일어, 라틴어 외에 히브리어, 아람어 방언, 아랍어 등을 공부하며 언어 능력을 넓혔다. 학업 보고서에는 그가 주로 "우수", "모범", "경건한" 학생으로 묘사되었다. 1906년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911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초기 사목 활동은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있는 세 교구에서 보좌 신부로 일하며 시작되었다. 그는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교육 및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빈곤과 알코올 중독 문제 해결에 힘쓰는 과정에서 슬로바키아-유대인 관계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일반적이고 단순화된 견해, 예를 들어 유대인 술집 주인이 알코올 중독을 심화시킨다는 인식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또한 지역 유대인 상점보다 저렴하게 식량과 옷을 판매하는 자조 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 인민당(Néppárt)의 당원이었으며, 슬로바키아 저널 ''Kresťan''에 기고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주로 슬로바키아 병사들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제71 보병 연대의 종군 사제로 복무했다. 이 연대는 갈리치아 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티소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지역 주민들에 대한 독일화와 러시아화 시도를 목격했다. 그는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의 조직화된 모습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의 군 복무는 심각한 신장 질환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군 복무 해제 후 니트라로 돌아와, 벤데 주교의 후임자인 빌모스 바티아니 주교에 의해 니트라 신학교의 영성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사 및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며 전쟁 경험을 담은 ''북부 전선 일기''를 출판했고, 애국적인 기사를 통해 군 기강과 사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티소는 전쟁 이전의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그의 초기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치적 반대자들은 그를 마자르화된 슬로바키아인으로 몰아가려 했고, 일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초기 민족 의식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지나치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 티소는 민족적 자기 규정을 신중하게 피했으며, 그의 행동은 1918년 이전 중앙 유럽에서 흔했던 "민족적 무관심"에 가까웠다. 그의 비판은 주로 유대인을 향했으며, 마자르화나 헝가리 민족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슬로바키아인들 사이에서의 사회적, 종교적 활동에 더 집중했으며, 공개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저술들은 그가 시민권을 가진 헝가리 왕국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체에 더 강한 소속감을 느꼈음을 시사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자, 티소는 정계에 입문하여 공개적으로 자신이 슬로바키아인임을 선언하고 슬로바키아 인민당에 입당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니트라의 새 주교인 카롤 크메트코의 비서로 일했으나, 정치 활동과 관련하여 두 차례 선동죄 유죄 판결을 받았고 두 번째 사건으로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이에 크메트코 주교는 1923년 그를 비서직에서 해임했지만 신학 교수직은 유지시켰다. 1924년 티소는 니트라를 떠나 바노브체나트베브라보우의 교구 사제로 부임했으며, 나중에는 그곳의 수석 사제가 되었다. 그는 수석 사제직을 수행하면서도 매우 활동적인 사제로 알려졌다.
2. 2. 사제 서품과 초기 활동
요제프 티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왕국 트렌친 현에 속했던 비치차(Bytča, 당시 헝가리어 이름 Nagybiccse)에서 슬로바키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 지역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언어에 재능을 보여 질리나의 하위 문법 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슬로바키아어 학교가 폐쇄되었기에 이 학교는 헝가리적 분위기가 강했고, 티소는 자신의 이름을 헝가리어식으로 'Tiszó József'라고 쓰기도 했다.1902년에는 니트라에 있는 상위 피아리스트 문법 학교에 진학했다. 니트라의 주교였던 임레 벤데(Imre Bende)는 티소에게 빈의 명문 신학교인 파츠마네움 신학교(Pázmáneum)에서 사제가 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여러 뛰어난 교수들로부터 다양한 철학과 최신 회칙 등을 배웠으며, 기존에 알던 헝가리어, 독일어, 라틴어 외에 히브리어, 아람어 방언, 아랍어까지 공부하며 언어 능력을 키웠다. 학교 기록에는 그가 "우수하고", "모범적이며", "경건한" 학생으로 묘사되어 있다. 1906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1910년 사제로 서품받았으며, 이듬해인 1911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제가 된 후 초기에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에 있는 세 교구에서 보조 사제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티소는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교육 및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빈곤과 알코올 중독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 슬로바키아 사회의 일부 편견을 반영하여 유대인 술집 주인들이 알코올 중독을 조장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지역 유대인 상점보다 저렴하게 물품을 판매하는 자조 협회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당시 일부 성직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가톨릭 인민당에 가입했으며, 슬로바키아 저널 '크레스탄'(Kresťan, 그리스도인)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티소는 주로 슬로바키아 병사들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제71 보병 연대의 종군 사제로 복무했다. 이 부대는 갈리치아 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티소는 전쟁의 참혹함과 더불어 현지 주민들에 대한 독일화 및 러시아화 정책을 목격했다. 그는 슬로베니아 민족주의 운동의 조직화된 모습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심각한 신장 질환으로 인해 군 복무를 중단하고 제대하게 되었다.
전쟁 후 그는 니트라의 주교가 된 빌모스 바티아니(Vilmos Batthyány)에 의해 니트라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티소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시에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며, 전쟁 경험을 담은 "북부 전선 일기"를 출판했다. 그의 글들은 애국적인 색채를 띠며 군대의 사기와 규율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언론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종교 및 교육 문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슬로바키아어로 된 종교 서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티소는 전쟁 이전의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그의 초기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치적 반대자들은 그를 마자르화된 인물로 비판하려 했고,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초기 슬로바키아 민족 의식을 찾으려 했지만, 양측의 주장은 다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 티소 자신은 민족적 자기 규정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며, 이는 1918년 이전 중앙 유럽에서 흔했던 민족적 무관심과 유사한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비판 외에는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국가 체제나 집권당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했지만, 마자르화 정책이나 헝가리 민족주의 자체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대신 슬로바키아인 공동체 내에서의 사회적, 종교적 활동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으며, 그의 저술들은 그가 형식적으로 속했던 헝가리 왕국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체에 더 강한 정체성을 느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면서 티소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슬로바키아 인민당에 입당했으며,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니트라의 새 주교 카롤 크메트코(Karol Kmetko)의 비서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정치 활동과 관련하여 두 차례 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번은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이에 크메트코 주교는 1923년 티소를 비서직에서 해임했지만, 신학교 교수직은 유지하도록 했다. 1924년, 티소는 니트라를 떠나 바노브체나트베브라보우(Bánovce nad Bebravou)의 교구 사제로 부임했으며, 나중에는 그곳의 수석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 교구에서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정치 입문과 슬로바키아 인민당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통치 시기인 1913년 안드레이 흘린카 신부가 창당한 정당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슬로바키아의 자치를 추구했다. 요제프 티소는 이 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1925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서 활동했으며, 1927년부터 1929년까지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보건체육교육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30년에는 당 부의장이 되었고, 1930년대에는 당내 급진파와 경쟁하며 입지를 다졌다. 1938년 8월, 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였던 흘린카가 사망하자 티소는 당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으며, 1939년 가을에는 공식적으로 당 총재직에 올랐다.[4]
3. 1. 정치 입문 배경
1918년 12월, 요제프 티소는 부활한 슬로바키아 인민당(HSĽS, ''Slovenská ľudová strana'', 일명 "Ľudáks")의 회원이 되었다.[3] 이 당은 안드레이 흘린카 신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통치 시기인 1913년에 창당했으며,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슬로바키아 가톨릭 유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며 체코슬로바키아 틀 내에서 슬로바키아 자치를 추구했다.[3] 쿠데타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티소는 점차 당내 입지를 강화했다. 그의 엘리트 교육, 뛰어난 지능, 에너지, 평범한 사람들과의 광범위한 실무 경험, 그리고 쉬운 언어로 말하는 능력은 그를 당의 인기 있는 연설가이자 언론인으로 만들었다.1919년, 그는 니트라에 당의 지부를 설립했고, 체코/체코슬로바키아 조직인 소콜에 대응하는 체조 조직인 오롤(Orol, 독수리)을 조직했다. 티소는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의회에 출마했다. 비록 그의 선거구 결과는 Ľudáks에게 실망스러운 선거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이었지만, 당은 그에게 의석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티소는 1925년 선거에서 쉽게 의석을 확보했으며, 이는 당에게도 획기적인 승리였다. 1938년까지 그는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티소는 교황청으로부터 몬시뇰로 임명되었지만, 이 임명은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사망으로 효력을 잃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그는 니트라의 새로운 슬로바키아 주교인 카롤 크메트코의 비서로 일했다. 같은 기간, 민족주의 정치 선동으로 티소는 선동 혐의로 체코슬로바키아 법원에서 두 번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중 한 번은 짧은 투옥으로 이어졌다. 불만을 품은 크메트코는 1923년 그를 비서직에서 해고했지만, 신학 교수로 유지했다. 1924년, 티소는 니트라를 떠나 바노브체 나드 베브라우의 교구장이 되었고, 정치 경력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 직책을 유지하며 매 주말마다 교구로 돌아갔다.
양차 대전 사이 기간 동안, 티소는 온건한 정치인이었고 그의 타협 능력은 그를 당의 존경받는 중재자로 만들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더 급진적인 수사법을 사용했지만, 초기 언론 활동의 반유대주의적 수사는 많이 버렸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공격했고 때로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지만, 공식적인 정치 협상에서는 보통 합리적인 주장을 펼쳤다. 티소는 슬로바키아인과 슬로바키아에 관한 중앙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당이 여전히 민주적 틀 내에서 운영되었지만, 티소의 동료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보이테흐 투카는 헝가리 반환주의와 협력하거나 친파시즘적인 로도브라나를 이끄는 등 국가에 반하는 내부 운동을 형성했다. 티소는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티소는 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26년 당 의장 안드레이 린카가 해외에 있을 때 티소는 당 간부회에서 그를 대리했으며, HSĽS의 정부 참여에 대한 복잡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1927년 1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보건 및 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HSĽS는 이전에 야당이었기에 정부 참여 결정은 일부 지지자들의 신뢰 상실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티소는 연설 능력을 발휘하여 결정을 옹호했다. 장관으로서 티소는 슬로바키아에서 몇 가지 중요한 보건 서비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실현했으며, 프라하의 수도원에 머물며 정부 관저 사용을 거부했다. 1929년 10월, 투카 사건 이후 HSĽS는 정부를 떠났다. 티소는 린카보다 다른 정당들과 타협하여 연합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1930년대에는 그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다. 1930년 그는 당의 공식 부의장이 되었고, 린카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1930년대를 린카의 지위를 놓고 당의 급진파, 특히 우익 카롤 시도르와 경쟁하며 보냈다.
1930년, 티소는 『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이데올로기』를 출판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슬로바키아 영토에 대한 슬로바키아 국가의 주권을 주장하고, 슬로바키아인이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다른 해결책을 채택할 권리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티소의 견해는 권위주의 및 전체주의 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는 HSĽS가 슬로바키아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이며 슬로바키아 국민을 위한 유일한 정당이라고 반복해서 선언했다.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민주주의 정권의 종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당, 하나의 지도자"라고 티소는 1936년에 열린 당 대회에서 선언했다. 당은 삶의 모든 측면을 다루어야 했다.
1938년, 나치 독일과 헝가리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HSĽS 대표들은 슬로바키아의 미래에 대한 인접 국가들의 견해를 타진했다. 1938년 5월, 티소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성체 대회 동안 헝가리 외무 장관 칼만 카냐와 비밀 협상을 가졌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사라질 경우 슬로바키아가 자치 연방 국가로서 헝가리에 재가입할 준비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회의는 잘 진행되지 않았고, 티소는 카냐의 태도와 슬로바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주장에 실망했다. 그는 헝가리가 공동 합의보다는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에 더 관심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슬로바키아의 약한 경제적 위치, 자격 있는 인력 부족,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당분간 체코슬로바키아에 머물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1938년 8월 린카가 사망했을 때, 티소는 Ľudák 당에 대한 통제를 빠르게 통합하며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4] 티소는 린카의 장례식에서 당의 공식 연설가였으며, 국민의 단결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의 중앙 정부와 계속 협상하며 잠재적인 자치의 목표를 설명했고, 체코슬로바키아-독일 위기의 군사적 해결을 거부했다. 1939년 가을, 그는 공식적으로 슬로바키아 인민당 총재직에 올랐다.
3. 2. 슬로바키아 인민당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자, 1918년 12월 티소는 안드레이 흘린카 신부가 이끌던 슬로바키아 인민당(Slovenská ľudová strana, Ľudáks)에 가입했다. 이 정당은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슬로바키아 가톨릭 신자의 권익을 대변하고,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 틀 안에서 슬로바키아의 자치를 추구했다.[3] 티소는 뛰어난 학식과 연설 능력, 대중과의 소통 능력을 바탕으로 당내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 있는 연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자리 잡았다.1919년, 그는 니트라에 당 지부를 설립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육 조직인 소콜에 맞서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성향의 체조 조직 '오롤'(Orol, 독수리)을 조직했다. 1920년 총선에 처음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25년 선거에서는 무난히 당선되어 이후 1938년까지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교황청으로부터 몬시뇰로 임명되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사망으로 공식적인 효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같은 해부터 1923년까지 니트라의 새 주교 카롤 크메트코의 비서로 일했으나, 민족주의적 정치 선동 혐의로 두 차례 유죄 판결(그중 한 번은 단기 징역형)을 받자 1923년 비서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럼에도 신학 교수직은 유지했으며, 1924년에는 바노브체 나드 베브라보우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정치 활동 중에도 매주 교구를 방문하며 사목 활동을 병행했다.
전쟁 사이 기간 동안, 티소는 당내 온건파로 분류되었으며, 타협 능력을 발휘해 중재자 역할을 했다. 초기 언론 활동에서 보이던 반유대주의적 수사는 상당 부분 줄었으나, 여전히 정적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슬로바키아에 대한 중앙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으며, 당내 보이테흐 투카 등이 주도한 헝가리 반환주의 연계나 친파시즘 조직 로도브라나와 같은 급진 노선과는 거리를 두었다.
1926년 당 의장 안드레이 흘린카가 미국 방문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티소는 당 대표 대행을 맡아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립 정부 참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성과로 당내 입지가 강화되어, 1927년 1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보건체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시절 그는 슬로바키아 내 보건 서비스 개선에 기여했으며, 프라하의 정부 관저 대신 수도원에 머무는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29년 투카 사건의 여파로 인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하면서 그의 장관직도 끝나게 되었다.
1930년 티소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공식 부의장이 되었고, 같은 해 《흘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 이데올로기》를 출판하여 슬로바키아 영토에 대한 민족 자결권과 독자적인 정치 노선 설정 권리를 주장했다. 1930년대 들어 그는 당내 우익 급진파인 카롤 시도르 등과 흘린카의 후계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이 시기 티소의 정치적 견해는 점차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에 가까워졌다. 그는 1936년 당 대회에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당, 하나의 지도자"를 외치며 슬로바키아 인민당이 슬로바키아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 정당임을 강조했다.
1938년 나치 독일과 헝가리의 압력이 거세지자, 티소는 슬로바키아의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외교적 접촉에 나섰다. 1938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성체 대회 기간 중 헝가리 외무장관 칼만 카냐와 비밀리에 만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시 슬로바키아가 자치 연방 형태로 헝가리에 재편입될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러나 헝가리 측의 고압적인 태도와 영토 주장에 실망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티소는 헝가리가 진정한 협력보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고 판단했다.
1938년 8월, 당의 창립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안드레이 흘린카가 사망하자 티소는 빠르게 당내 권력을 장악하며 사실상의 지도자로 부상했다.[4] 그는 흘린카의 장례식에서 공식 연설을 통해 국민 단결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표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라하 중앙 정부와 슬로바키아 자치 확대를 위한 협상을 계속 진행했다. 이후 1939년 가을, 그는 당 총재직에 오르며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확고한 지도자가 되었다.
3. 3. 당내 권력 투쟁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슬로바키아를 통치하던 1913년에 안드레이 흘린카 신부가 창당한 정당으로, 티소는 이 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양차 대전 사이 인민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틀 안에서 슬로바키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정강을 내세웠다. 1925년 이후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슬로바키아 내 최대 정당으로 성장했다.티소는 1920년 처음으로 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25년 선거에서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938년까지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서 활동했다. 한편, 1924년에는 서부 슬로바키아의 바르노우체 나드 베브라보우 교구 사제로 임명되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티소는 안토닌 슈베흘라가 이끄는 연립 정권에서 후생 노동·스포츠 담당 장관(체코슬로바키아 보건체육교육부 장관)으로 활동하며 인민당과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30년에는 슬로바키아 인민당 부당수로 임명되었다.
1930년대에 티소는 당내에서 카롤 시도르 등 급진파와 함께 창당주인 흘린카의 영향력에 도전하며 차기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1938년 8월, 당수 안드레이 흘린카가 사망하자 티소는 사실상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당내 입지를 굳혀 1939년 가을에는 총재직에 올랐다.
4. 슬로바키아 자치와 독립
1938년 10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혼란에 빠지자 슬로바키아는 자치를 선언하였고, 요제프 티소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이 시기 헝가리의 영토 요구로 제1차 빈 중재가 열려 슬로바키아 남부 영토가 할양되었으며, 국내에서는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티소가 이끄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으로 통합되고 다른 정당 활동이 금지되는 등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9년 초,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해체를 계획하며 슬로바키아에 독립을 압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중앙 정부가 1939년 3월 9일 군대를 투입하여 티소를 축출하고 슬로바키아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개입을 불렀다. 티소는 3월 13일 베를린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즉각적인 독립 선언과 독일의 보호 요청을 강요받았다.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면 헝가리와 폴란드에 의한 슬로바키아 영토 분할을 용인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독립을 선언하여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티소는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 독일은 남은 체코 영토를 점령하여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을 세웠다. 티소는 1939년 10월 26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한 뒤,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4. 1. 뮌헨 협정과 슬로바키아 자치
1938년 10월, 뮌헨 협정에 따라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요 독일어 사용 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병합했다.[1][2]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국외로 망명했으며,[1] 이는 국내 정치의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0월 6일, 슬로바키아 인민당(HSĽS)은 중앙 정부의 약화를 틈타 슬로바키아의 자치를 선언했고, 다른 슬로바키아 정당들도 이를 지지했다.[3] 다음 날인 10월 7일, 요제프 티소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3] 같은 달 그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정식 당수가 되었다.[4]한편, 1918년 이후 슬로바키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온 헝가리 왕국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를 설득,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 할양을 압박했다.[1][4] 티소는 자치 정부 총리로서 1938년 11월 코마르노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국경 협상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을 이끌었으나, 국제 협상 경험 부족과 중앙 정부의 혼란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5] 결국 11월 2일 제1차 빈 중재를 통해 슬로바키아 남부와 카르파토루테니아 남부의 상당 지역이 헝가리에 할양되었다.[1][4][6] 티소는 이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하기도 했다.[5] 그는 라디오 연설에서 프라하 중앙 정부의 지난 20년간 정책을 비난하며 책임을 돌렸다.[5]
빈 중재 직후 티소 정부는 논란이 될 만한 조치를 단행했다. 중재 결과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선전이 퍼지는 가운데,[7][8] 1938년 11월 4일 티소는 "재산이 없는" 유대인과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을 헝가리에 병합된 영토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7][9] 이로 인해 노인, 임산부, 어린이를 포함한 7,500명 이상이 혹독한 날씨 속에 무인지대로 추방되었다.[9] 그러나 이 조치는 국제적 비난과 실행의 어려움 등으로 11월 7일 철회되었다.[9]
빈 중재 이후 슬로바키아 내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4] 1938년 11월,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슬로바키아의 모든 정당은 "흘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 -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으로 통합되었고,[1] 이는 이후 들어설 슬로바키아 권위주의 정권의 기반이 되었다.[1] 티소는 이 통합 정당의 당수가 되었다.[4] 1939년 1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는 통합 인민당, 독일계 정당, 헝가리계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1][10] 또한 1938년 12월에 치러진 슬로바키아 의회 선거는 인민당이 단일 후보 명단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사실상 조작되었고,[10] 티소는 선거 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대인의 피선거권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1]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2]
1939년 초부터 나치 독일은 체코 지역 점령 계획의 일환으로 슬로바키아 정치인들에게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1] 1939년 3월 9일, 위기를 느낀 체코슬로바키아 중앙 정부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를 해임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슬로바키아를 점령했으며, 티소를 포함한 자치 정부 요인들을 연금했다.[1][4] 그러나 이는 독일의 개입을 초래했다. 티소는 독일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3월 13일, 베를린으로 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4] 히틀러는 티소에게 즉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의 보호를 요청하라고 강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독일이 헝가리와 폴란드의 슬로바키아 영토 분할을 용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1][4]

이러한 압박 속에서 티소는 브라티슬라바로 돌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와 슬로바키아 총리 대행 카롤 시도르와 연락했고, 다음 날 슬로바키아 의회를 소집하여 독립을 결정하기로 합의했다.[1]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티소는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1][4] 다음 날인 3월 15일, 독일은 계획대로 남은 체코 영토를 점령해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을 설립했고,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소멸했다.[1][4] 슬로바키아는 독립했지만, 3월 23일 독일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고[4] 같은 날 발발한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에서 독일의 중재에 의존하는 등 사실상 독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인 괴뢰 정권의 성격을 띠었다.[4] 티소는 1939년 10월 26일까지 총리직을 유지하다가, 이후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1][4]
4. 2. 헝가리와의 영토 분쟁
헝가리 왕국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슬로바키아 지역이 자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고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망명하는 등 혼란에 빠지자, 헝가리는 이를 기회로 삼아 슬로바키아 남부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9월 22일, 헝가리는 마자르인이 다수 거주하는 슬로바키아 남부와 카르파토루테니아 남부 지역의 할양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10월 6일, 슬로바키아는 자치를 선언했고 요제프 티소가 자치 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 헝가리의 영토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11월 2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도로 제1차 빈 중재가 열렸다. 티소는 이 협상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을 이끌었으나, 국제 협상 경험 부족과 제2차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중앙 정부의 미흡한 준비, 그리고 헝가리의 강경한 태도 및 테러 행위 등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티소는 헝가리 측의 제안에 반대하며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결국 중재 결과는 슬로바키아에게 매우 불리하게 결정되었다. 남부 슬로바키아와 남부 카르파토루테니아의 상당 부분이 헝가리에 할양되었고, 티소는 이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아 처음에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하려 했으며, 라디오 연설을 통해 프라하 중앙 정부의 지난 20년간 정책을 비난했다. --
빈 중재 이후 슬로바키아 내에서는 독립 운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는 아돌프 히틀러의 압력 하에 독립을 선언하고 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티소는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옛 헝가리 왕국 영토 전체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3월 23일, 헝가리군은 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이 발발했다. 신생 독립국이었던 슬로바키아는 독자적으로 헝가리에 맞서기 어려웠고, 결국 독일의 보호 조약 체결과 중재에 의존하게 되었다. 독일의 중재 결과, 제1차 빈 중재에서 결정된 국경선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남부 영토를 헝가리에 할양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3. 독일의 압력과 슬로바키아 독립
1938년 9월 뮌헨 회담 전후로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과 헝가리 왕국의 영토 요구가 이어지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1938년 10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병합하고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망명하자,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 내 자치를 선언했다. 10월 6일 티소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 수반으로 취임했고, 곧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정식 당수가 되었다. 그러나 11월 8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주재한 제1차 빈 중재 결과, 슬로바키아 남부 영토가 헝가리에 할양되자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이에 공산당을 제외한 슬로바키아 내 모든 정당은 티소가 이끄는 '흘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 -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으로 합쳐졌고, 이는 훗날 권위주의 정권의 기반이 되었다. 1939년 1월, 자치 정부는 이 통합 정당과 소수민족 정당(독일당, 통합 헝가리당) 외 모든 정당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1939년 2월부터 독일은 체코 지역 점령 계획의 일환으로 슬로바키아 정치인들에게 독립 선언을 종용했다. 티소는 독일 대표 아르투어 자이서잉크바르트와 만나 독립 문제를 논의했으나 처음에는 독립 국가로서의 생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한편,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중앙 정부는 슬로바키아의 독립 움직임을 억누르기로 결정했다. 1939년 3월 9일, 중앙 정부는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를 해산하고 티소를 총리직에서 축출했으며, 체코 군대를 슬로바키아에 투입하여 점령했다. 다음 날인 3월 10일, 티소를 포함한 자치 정부 요인들은 체포되어 연금되었고, 슬로바키아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이러한 강경 조치는 독일의 직접적인 개입을 유발했다. 티소는 독일의 도움으로 연금 상태에서 벗어나 3월 13일 베를린으로 갔다. 히틀러는 티소에게 즉시 독일의 '보호' 아래 슬로바키아 독립을 선언하라고 강요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독일이 헝가리와 폴란드에 슬로바키아 영토 분할을 허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5] 결국 티소는 히틀러의 최후통첩을 수락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와 슬로바키아 총리 카롤 시도르에게 연락하여 다음 날 슬로바키아 의회를 소집해 독립을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3월 14일,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슬로바키아 의회는 티소로부터 히틀러와의 회담 내용을 보고받은 뒤 만장일치로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티소는 새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카르파토루테니아도 카르파토-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인 3월 15일 독일은 나머지 체코 영토를 점령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세움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6][7]
독립 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소련과 독일에 의해 공식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의해 사실상 인정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진영은 이를 독일의 괴뢰 국가로 간주했다. 티소는 1939년 3월 1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수상직을 수행했다. 그는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슬로바키아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을 지원했고, 독일은 그 대가로 슬로바키아가 폴란드 영토 일부(약 약 776.99km2)를 병합하도록 허용했다.[8] 그러나 독립 직후인 1939년 3월 23일,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침공을 받았고(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같은 날 독일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중재를 받게 되었다. 이 중재 결과, 슬로바키아는 제1차 빈 중재에서 결정된 대로 남부 영토를 헝가리에 최종적으로 할양해야 했다.
1939년 10월 1일, 티소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공식 의장이 되었으며, 10월 26일에는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보이테흐 투카를 총리로 임명했다. 1942년부터 티소는 독일의 퓌러(Führer)를 모방하여 '보드카'(Vodca|보드카sk, 지도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5. 슬로바키아 공화국 대통령 (1939-1945)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이른바 "독립"은 실제로는 독일의 괴뢰국 상태였기에 진정한 독립으로 보기 어렵다. 요제프 티소는 1939년 10월 26일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보이테흐 투카를 총리로 임명했다. 티소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을 중심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으며, 1942년부터는 독일의 퓌러(Führer)를 모방하여 자신을 ''Vodca''("지도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티소 정권은 나치 독일과 '보호 조약'을 맺고 긴밀히 협력하며 친독일 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지지하고 슬로바키아 군대를 파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독소전에 참전했다. 또한, 티소 정권은 나치의 정책에 발맞춰 반유대주의 입법(소위 '유대인법')을 도입하고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하여, 약 7만 명에 달하는 슬로바키아 내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13] 티소 자신도 뚜렷한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나치 노선을 상당히 지지했음은 분명하다.
정권 내부에서는 가톨릭 보수주의 성향의 티소와 파시즘 경향이 강했던 총리 투카 사이에 노선 대립과 갈등이 존재했다. 1944년에는 나치에 저항하는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가 일어났으나, 티소 정권은 독일과 협력하여 이를 진압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슬로바키아 서부를 점령하면서 티소 정권은 붕괴했다. 티소는 전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 법정에서 "내란죄, 나치와 협력하여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를 진압한 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7년 4월 1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5. 1. 대통령 취임과 권위주의 통치
1939년 2월, 티소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슬로바키아를 세우기 위해 독일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독일 대표 아르투어 자이서잉크바르트와 직접 회담을 가졌으나, 처음에는 독립 슬로바키아가 실제로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되던 중, 3월 9일 체코 군대가 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티소를 강제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티소를 베를린으로 초청하여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5] 히틀러는 슬로바키아가 즉시 독일의 보호 아래(보호령 지위) 독립을 선언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헝가리가 슬로바키아 영토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고 압박했다. 티소는 히틀러와의 합의 없이 귀국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3월 14일 슬로바키아 국회 소집을 요청했다. 국회 회기 동안 티소는 히틀러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하며 독립 결정은 슬로바키아 국회의 몫임을 강조했다. 결국 국회는 독립 선언을 지지했다. 다음 날인 3월 15일, 독일은 병든 체코 대통령 에밀 하차를 압박하여 동의를 얻어낸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영토를 점령했다.[6][7]
이로써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국가는 소련과 독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고,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부터는 ''사실상''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체코 망명 정부와 미국은 슬로바키아를 독일의 괴뢰국으로 간주했다. 슬로바키아의 소위 "독립"은 실제로는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인 괴뢰국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티소는 1939년 3월 1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그는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 군대를 파병하여 지원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대가로 슬로바키아가 약 약 776.99km2의 폴란드 영토를 합병하도록 허용했다.[8] 1939년 10월 1일, 티소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공식 의장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보이테흐 투카를 총리로 임명했다. 1942년부터 티소는 독일의 퓌러를 모방하여 자신을 ''Vodca''("지도자")라고 칭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했다.
티소가 이끄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슬로바키아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치 조직으로 기능하며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티소 정권은 나치 독일의 정책에 발맞춰 반유대주의 입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당의 창시자인 안드레이 흘린카의 "슬로바키아인을 위한 슬로바키아"라는 배타적 민족주의 정책을 티소가 계승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법령인 소위 '유대인법'은 슬로바키아 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했다. 이 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부동산이나 사치품 소유가 금지되었고, 공직이나 자유 직업에서 배제되었으며, 스포츠 및 문화 행사 참여는 물론 중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도 막혔다. 또한 공공장소에서는 다윗의 별이 그려진 옷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다. 티소 자신도 당시 중부 유럽의 많은 이들처럼 뚜렷한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 잘츠부르크 회담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강화하기로 합의하면서 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었다. 티소 정권의 정치적 노선은 친독일, 친나치 성향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그 지지 기반은 가톨릭 교회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주의 및 원리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티소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 하에 시행된 민족 청소와 문화 배제 정책으로 인해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약 3분의 2가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티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나치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5. 2. 나치 독일과의 협력
슬로바키아의 이른바 "독립"은 사실상 독일의 괴뢰국 상태였기에 진정한 독립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이 거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치 조직이었는데, 티소의 지도 아래 이 당은 나치의 정책에 발맞춰 슬로바키아에서도 반유대주의 법안들을 도입했다. 이는 과거 당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이 흘린카가 내세운 "슬로바키아인을 위한 슬로바키아"라는 배타적 민족주의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티소 역시 이 정책을 강하게 지지했다.이러한 정책의 핵심은 소위 '유대인법'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법령이었다. 이 법에 따라 슬로바키아의 유대인들은 부동산이나 사치품 소유가 금지되었고, 공직이나 여러 민간 직업에서 배제되었다. 또한 스포츠 및 문화 행사 참여가 불가능해졌으며, 중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도 막혔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는 다윗의 별이 그려진 옷을 의무적으로 입어야 했다. 티소 자신도 당시 중부 유럽의 많은 이들처럼 뚜렷한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데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나치의 노선을 상당히 지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40년 잘츠부르크 회담에서는 슬로바키아에서 국가사회주의(나치즘)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이는 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티소는 정치적으로는 친독일, 친나치 노선을 걸었지만, 그의 지지 기반은 가톨릭 교회 단체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주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평가받으며, 민족 청소와 문화 배제 정책을 시행하여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약 3분의 2가 학살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티소는 나치 독일과 체결한 '보호 조약'에 따라 총리 보이테흐 투카와 함께 일종의 양두 체제를 구축하고 친독일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추축국의 일원으로 독소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보수적인 종교 세력을 기반으로 했던 티소와, 유대인 탄압을 강하게 주장하며 파시즘 성향이 짙었던 투카 사이에는 점차 갈등이 불거지며 노선 대립이 심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슬로바키아 공화국 정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약 7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주민들을 독일 영토 내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고, 이는 결국 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또한, 1944년에는 슬로바키아 공화국군 일부와 파르티잔 세력이 연계하여 일으킨 슬로바키아 민중 봉기를 나치 독일과 함께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5. 3. 반유대주의 정책과 홀로코스트
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사실상 독일의 괴뢰국 상태였으며, 슬로바키아 인민당(HSĽS)이 거의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기능했다. 티소는 당의 지도자로서 흘린카의 "슬로바키아인을 위한 슬로바키아"라는 민족주의적 정책을 계승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치의 정책에 발맞춰 반유대주의 입법을 도입했다. 그 핵심 법령인 소위 '유대인법'은 슬로바키아 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이 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부동산이나 사치품을 소유할 수 없었고, 공직이나 자유 직업에서 배제되었으며, 스포츠 및 문화 행사 참여도 금지되었다. 또한 중등학교와 대학교 진학이 막혔고, 공공장소에서는 의무적으로 다윗의 별을 착용해야 했다. 티소 자신도 당시 중부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유대인 추방 정책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나치 노선을 상당히 지지했음은 분명하다.1938년 11월, 제1차 빈 중재 직후 티소는 "재산이 없는" 유대인과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 7,500명 이상을 헝가리에 병합된 영토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노인, 임산부, 어린이 등 취약 계층이 포함된 사람들이 혹독한 날씨 속에 무인지대로 내몰렸으나, 며칠 뒤 이 조치는 철회되었다. 이러한 추방 조치는 당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헌법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티소는 자치 정부 총리로서 다른 정당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1938년 슬로바키아 의회 선거를 조작하여 HSĽS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40년 7월 28일 잘츠부르크 회담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나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담에는 티소, 총리 보이테흐 투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흘린카 친위대 수장 알렉산더 마흐, 카르파티아 독일인 대표 프란츠 카르마신 등이 참석했다. 회담 결과, "유대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두 개의 국가 기관이 설립되었고,[9] 독일과의 협력이 더욱 긴밀해졌다. 티소는 아돌프 히틀러와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수용했으며, 투카와 마흐 등 급진파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티소의 초기 가톨릭 기업 국가 구상은 약화되었다. 또한 HSĽS와 흘린카 친위대의 이중 지휘 체제가 요구되었고, 반유대주의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나치 정부는 돌격대 지도자 만프레트 폰 킬링거를 슬로바키아 주재 독일 대표로, SS 장교 디터 비슬리체니를 유대인 문제 "고문"으로 파견했다.

1942년 2월, 슬로바키아는 나치 동맹국 중 최초로 유대인 추방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11] 나치는 노동력 확보를 명분으로 젊고 건강한 유대인 2만 명을 요구했고, 티소는 이를 수락함으로써 독일에 강제 동원된 12만 명의 슬로바키아 노동자들을 귀환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다. 1942년 8월, 호리치에서 열린 집회 연설에서 티소는 유대인을 "기생충"에 비유하며 "당신의 기생충[유대인]을 버리시오"라고 외치고, 유대인 추방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이 연설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이 작은 가톨릭 사제 티소가 우리에게 유대인들을 보내는 것이 흥미롭다!"고 언급했으며, 바티칸 차관 도메니코 타르디니는 "모두가 성좌가 히틀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제를 제어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티소 정권의 행태에 깊은 우려와 불만을 표했다.
1942년 후반, 추방된 유대인들이 독일 점령 폴란드의 강제 수용소에서 체계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다는 참혹한 소식이 전해지고, 바티칸의 항의가 거세지자 슬로바키아는 추방을 중단한 최초의 나치 괴뢰국이 되었다. 추방 중단 결정 배경에는 파볼 얀타우슈 주교와 같은 슬로바키아 내부 성직자들의 항의와 주세페 부르치오 교황청 대표의 보고,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변화된 전황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티소는 바티칸의 항의에 "유대인으로부터 슬로바키아를 해방하는 길에서 우리를 막을 외국 간섭은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결국 남은 24,000여 명의 유대인 추방을 거부했다.[11] 현대 정치인들은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추방에 대한 그의 역할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10] 그는 독일 정책과 "제안"에 따라, 그리고 그의 이전 반유대주의에 따라, 슬로바키아의 일부 주교들이 추방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를 장려한 것이 분명하다.
1943년, 유대인 추방이 재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터키 주재 교황 대사였던 몬시뇰 안젤로 론칼리(훗날 교황 요한 23세)와 부르치오는 성좌의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어냈다. 1943년 4월 7일, 부르치오는 슬로바키아 유대인 학살 소문에 대해 총리 투카에게 직접 항의했다. 바티칸은 5월 5일 추방 재개를 공식적으로 비난했고, 슬로바키아 주교단도 5월 8일 전체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사목 서한을 발표했다.[3] 이러한 교회 안팎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힌 투카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944년 8월, 나치에 저항하는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군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이때 아인자츠그루펜 H와 보안 경찰 병력이 함께 들어와 슬로바키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살해하기 시작했다.[11]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약 13,5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추방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또한 5,000여 명이 투옥되었고, 일부는 크렘니치카와 네메츠카 등 슬로바키아 영토 내에서 집단 학살되었다.[12] 이 시기 티소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지만, 슬로바키아는 사실상 독일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여 그의 권한은 명목상에 불과했다. 부르치오는 티소에게 유대인 혈통의 가톨릭 신자들만이라도 추방을 면제해 달라고 간청하며 교황의 우려를 전달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
홀로코스트가 끝났을 때,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2가 학살된 것으로 추산된다.[13] 티소 정권은 나치 독일과의 '보호 조약' 아래 총리 보이테흐 투카와 함께 친독일 정책을 추진하며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약 7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가톨릭 신자이고 보수적인 종교 세력을 기반으로 했던 티소와 유대인 탄압 등을 주장하며 파시즘 경향이 강했던 투카 사이에는 점차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노선 대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티소 정권은 또한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를 진압했다.
5. 4.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와 진압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슬로바키아 공화국 군대와 파르티잔 일부가 연합하여 요제프 티소 정권에 대항하는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를 일으켰다. 티소 정권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이 봉기를 진압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4월 소비에트 연방군에 의해 권력을 잃은 티소는 전후 재판에서 "내란죄, 나치와 협력하여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를 진압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7년 4월 1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6. 몰락과 처형
1945년 4월, 소련 붉은 군대가 서부 슬로바키아의 마지막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요제프 티소는 권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바이에른주의 한 수도원으로 피신했으나, 1945년 6월 미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티소는 재건된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
1947년 4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법원(Národný súd)은 티소에게 국가 반역, 나치즘과의 협력,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 가담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티소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에 책임이 있으며, 반유대주의 정책 시행, 파시스트 정권 수립 등 다수의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14][15] 티소는 에드바르트 베네스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고,[1] 1947년 4월 18일 브라티슬라바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순교자로 추앙받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매장되었으나, 훗날 신원이 확인되어 니트라의 성 엠메람 대성당에 다시 안장되었다.[16]
요제프 티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로 남아있다.
6. 1. 패전과 망명

1945년 4월, 소련 붉은 군대가 서부 슬로바키아의 마지막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요제프 티소는 모든 권력을 잃었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크렘스뮌스터로 망명했고, 이후 남바이에른주 알토팅에 있는 카푸친회 수도원에 은신했다. 1945년 5월 8일 슬로바키아 망명 정부가 미국군에 항복한 후, 티소는 6월에 미국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같은 해 10월 말 재건된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1]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법원(Národný súd) 재판에서 티소는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1947년 4월 15일, 법원은 티소에게 제기된 여러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국가 반역, 반파시스트 게릴라 봉기에 대한 배신, 나치즘과의 협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티소 정부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해체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으며, 구체적인 유죄 혐의는 다음과 같다.
- 유대인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책" 시행.
- 파시스트 조직인 흘린카 슬로바키아 인민당(HSĽS), 흘린카 근위대(Hlinkova garda), 흘린코바 믈라데지(Hlinkova mládež, 흘린카 청년단)를 설립하여 "하나의 신, 하나의 국가, 하나의 조직"이라는 구호 아래 전체주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고, 특히 흘린카 근위대와 흘린카 청년단 가입을 의무화.
- 민주주의 파괴.
- 체코 학생 학살과 리디체 학살에 연루된 카를 헤르만 프랑크에게 대십자 훈장 수여.
- 베르마흐트가 서부 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도록 허용하고, 이 과정에서 상당의 국가 군사 자산이 나치 독일로 넘어가는 것을 방치.
- 정권에 반대하는 약 3,000명을 투옥, 고문하고 일부는 일라바 강제 수용소에서 학살하는 등 박해와 테러 자행.
- 흘린카 근위대에 의한 체코인과 유대인의 자산 몰수.
- 나치 독일에 대한 청산금 명목으로 , 베르마흐트에 대한 보급품 제공으로 에서 , 독일 점령군에 대한 비밀 지원으로 에 달하는 국가 재정 손실 초래.
-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조장, 공적 생활 및 경제 활동에서의 배제, 개인의 자유 제한.
- 슬로바키아 유대인의 인권을 박탈하고 세레드 강제 수용소와 노바키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는 내용을 담은 유대인 법전 승인. 티소는 이 법전의 예외 조항을 이용하여 일부 유대인을 '판매'하기도 함.
- 1942년, 57,837명의 유대인을 독일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여 살해하는 것을 승인하고, 그 대가로 나치 독일에 지불.
- 살해될 것을 알면서도 전쟁 포로를 독일 점령군에게 인도.
- 게슈타포와 지퍼하이츠디엔스트(SD)가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이전에 슬로바키아인을 포함한 사람들을 투옥, 고문, 납치하는 것을 허용.
- 흘린카 근위대와 다른 파시스트 조직에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연루 혐의로 4,316명을 체포, 고문, 학살하고 3만 명을 독일 강제 수용소로 납치하도록 명령.
- 독일 점령군(예: 에델바이스 (대 게릴라 부대))과 흘린카 근위대에 의한 크랴크, 네메츠카 등 수많은 마을 파괴를 묵인.[14]
- 독일 점령군을 위한 병력 동원.
- 독일 점령군이 슬로바키아인을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을 위해 납치하는 것을 허용.
- 민간인에게 독일 점령군을 위한 군사 요새 건설 작업에 참여하도록 명령.
- 슬로바키아 동부 지역을 독일군 작전 지역으로 선포하도록 승인하고 슬로바키아군을 독일군 지휘 하에 둠.
- 그 외 다수의 범죄 행위.
티소는 사형과 더불어 시민권 박탈,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15]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스에게 사면을 요청하며 감형을 기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성직자 복장을 한 티소는 1947년 4월 18일 브라티슬라바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그의 무덤이 극우 세력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매장했다. 그러나 티소의 극우 추종자들은 브라티슬라바의 성 마틴 묘지에 있는 한 무덤을 그의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수십 년 후인 2008년 4월, DNA 검사를 통해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티소의 시신은 발굴되어 교회법에 따라 니트라에 있는 성 엠메람 대성당에 다시 안장되었다.[16]
요제프 티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슬로바키아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2001년 4월 18일에는 브라티슬라바에서 티소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6. 2. 재판과 처형
1945년 4월 소련 붉은 군대가 서부 슬로바키아의 마지막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티소는 권력을 잃었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가, 이후 바이에른주 알토팅에 있는 카푸친회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1945년 6월, 그는 미국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같은 해 10월 재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로 범죄인 인도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1947년 4월까지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법원(Národný súd)은 티소를 전쟁 범죄의 주범으로 기소했다. 1947년 4월 15일, 법원은 티소에게 제기된 여러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국가 반역, 반파시스트 게릴라 봉기에 대한 배신, 나치즘과의 협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티소 정부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해체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으며, 구체적인 유죄 혐의는 다음과 같다.
혐의 내용 |
---|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해체 책임 |
유대인 문제에 대한 급진적 "해결" 시행 |
파시스트 조직(HSĽS, 흘린카 근위대, 흘린카 청년단) 설립 및 전체주의 파시스트 정권 수립 |
민주주의 파괴 |
리디체 학살 등에 관여한 카를 헤르만 프랑크에게 대십자 훈장 수여 |
베르마흐트의 서부 슬로바키아 군사 점령 허용 및 국가 군사 자산( 상당) 독일 이전 |
정권 반대자 3,000명 박해 (투옥, 고문, 일부는 일라바 강제 수용소에서 학살) |
흘린카 근위대에 의한 체코인 및 유대인 자산 몰수 |
국가 재정 손실 초래 (나치 독일에 대한 청산 , 베르마흐트 공급 ~, 독일 점령군 비밀 공급 ) |
유대인 증오 조장, 공공 생활 및 경제 배제, 자유 제한 |
유대인 법전 승인 (인권 박탈, 세레드 강제 수용소 및 노바키 강제 수용소 추방) 및 법전 예외 조항을 이용한 일부 유대인 거래 |
1942년 유대인 57,837명의 독일 강제 수용소 추방 및 살해 승인 (이에 대해 나치 독일에 지불) |
살해될 것을 알면서도 전쟁 포로를 독일 점령군에 인도 |
게슈타포와 지퍼하이츠디엔스트가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이전에 슬로바키아 내에서 사람들을 투옥, 고문, 납치하는 것을 허용 |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 과정에서 흘린카 근위대와 다른 파시스트 조직에 봉기 연루 혐의자 4,316명을 체포, 고문, 학살하고 3만 명을 독일 강제 수용소로 납치하도록 명령 |
독일 점령군(예: 에델바이스)과 흘린카 근위대에 의한 수많은 마을(크랴크, 네메츠카 등) 파괴 묵인[14] |
독일 점령군을 위한 동원령 발령 |
독일 점령군이 슬로바키아인을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을 위해 납치하는 것을 허용 |
민간인에게 독일 점령군을 위한 군사 요새 작업 참여 명령 |
슬로바키아 동부 지역이 독일군 작전 지역으로 선포되도록 승인하고 슬로바키아군을 독일군 지휘 하에 두도록 함 |
티소는 사형과 더불어 시민권 박탈, 모든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15]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스에게 사면을 요청하며 감형을 기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티소는 1947년 4월 18일 브라티슬라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티소의 무덤이 극우 세력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그를 매장했다. 그러나 티소의 극우 추종자들은 브라티슬라바의 성 마틴 묘지에 있는 특정 무덤이 그의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수십 년이 지난 2008년 4월, DNA 검사를 통해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티소의 시신은 발굴되어 교회법에 따라 니트라에 있는 성 엠메람 대성당에 재매장되었다.[16] 티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슬로바키아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7. 논란과 평가
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사실상 나치 독일의 괴뢰국 상태였기에 진정한 독립으로 보기 어렵다. 티소가 이끌던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슬로바키아 내 거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나치의 정책에 발맞춰 반유대주의 법안을 도입했다. 이는 안드레이 흘린카가 내세웠던 "슬로바키아인을 위한 슬로바키아" 정책을 티소 역시 강하게 신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법령이 소위 '유대인법'(Židovský kódex)이다. 이 법에 따라 슬로바키아의 유대인들은 부동산이나 사치품 소유가 금지되었고, 공직이나 여러 민간 직업에서 배제되었다. 또한 스포츠 및 문화 행사 참여가 불가능했고, 중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도 막혔으며, 공공장소에서는 다윗의 별이 그려진 옷을 의무적으로 입어야 했다.
티소 자신도 당시 중부 유럽의 많은 이들처럼 뚜렷한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그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그가 나치의 노선을 상당히 지지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서부 슬로바키아의 마지막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티소 정권은 무너졌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 법정은 그에게 "내란죄, 나치와 협력하여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를 진압한 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1947년 4월 15일 사형을 선고했다.
7.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공산주의 시대에 티소는 전형적인 성직 파시스트로 비난받았다. 1989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그의 역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임스 메이스 워드는 티소의 전기 『사제, 정치인, 협력자』(2013)에서 이러한 논쟁이 최악의 경우 슬로바키아 사회를 재건하려는 극우 민족주의 시도에 힘을 실어주어 체코슬로바키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티소에 대한 사려 깊은 재평가를 촉발하고 슬로바키아인들이 과거 협력의 유산과 직면하도록 장려했다고 평가했다.티소를 숭배하는 극우 세력은 2008년 10월 마틴 묘지에 티소를 기리는 기념 묘비를 세웠다.[17] 이후 이 묘비는 우리 슬로바키아 인민당을 비롯한 여러 극우 단체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극우 민족주의 선전물에서는 티소를 "자신의 신념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순교자"로 칭하며, 그를 공산주의의 무고한 희생자이자 성인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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