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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평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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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진-평해 전투는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후 국군 제3사단이 동해안 지역에서 북한군에 맞서 벌인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제3사단은 전력 열세 속에서도 울진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6월 25일 서울 차출로 인한 병력 부족, 북한군에 대한 오판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평해까지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은 병력 손실을 입고, 부대를 재편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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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평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6월 29일 ~ 7월 1일
장소강원도 울진, 평해 일대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대한민국유승열 제3사단장 대령
김종원 제23연대장 중령
박재열 제1대대장 소령
백기천 제2대대장 소령
허형순 제3대대장 소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광협 제2군단장 소장
오진우 제766부대장 총좌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병력 규모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사상자 및 피해
대한민국(정보 없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보 없음)

2.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 국군 제3사단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하고 태백산 이남 지역의 공비 토벌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태백산-보현산-지리산 일대에 남아있던 공비와 리승엽이 이끄는 남파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6월 24일 진주에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제3사단장 유승열 대령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했으며, 제3사단은 태백산-보현산 지역을 담당하여 6월 25일부터 작전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면서 공비 토벌 작전은 중지되었다. 제3사단은 육군본부의 긴급 명령에 따라 제22연대를 수도 외곽 방어에 투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제3사단은 1개 연대와 배속 부대만으로 동해안을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2. 1. 국군 제3사단의 상황 (1950년 6월)

1950년 6월 25일, 육군본부의 긴급 명령으로 제22연대가 수도 외곽 전선에 출동하면서, 제3사단은 1개 연대와 배속받은 2개 특수대대로 동해안 해변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사단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하고 6월 25일부터 태백산 이남 지역의 공비 소탕 작전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월 중순, 태백산-보현산-지리산에 걸친 영·호남 일부 지역에는 남아있던 공비와 리승엽이 이끄는 남파 유격대 30개 조가 합류하여 540명 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6월 24일 진주에서 출동 부대 작전 회의를 소집했다.

강문봉 작전국장(대령) 주관으로 열린 이 회의에는 제3사단장 유승열 대령, 장송주 작전참모(소령), 박명권 제5사단 참모장(대령), 김종순 독립 제1대대장(중령), 홍성준 영등포학원 부대장(소령), 그리고 경찰 부대 대표 등이 참석했다. 제3사단은 태백산-보현산 지구를 담당하여 지리산 지구를 담당한 타 부대와 함께 6월 25일 05:00부터 일제히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이 작전은 중지되었고, 제3사단은 6월 26일 05:00까지 1개 연대를 서울에 차출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하라는 육군본부의 긴급명령(육본작명 제93호)을 받았다. 이에 제22연대 2개 대대를 우병옥 사단 참모장(중령) 지휘 하에 선발대로 보냈고, 6월 26일에는 나머지 1개 대대를 강태민 연대장(중령) 지휘 하에 뒤따라 출동시켰다.

결과적으로 제23연대 1개 연대만 남게 된 유승열 사단장은 육군본부에 독립 제1대대 및 영등포학원의 배속을 요청하는 한편, 김종원 제23연대장(중령)에게 마산 등 각지에 분산 배치 중인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출동 명령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2. 2. 북한의 남침과 국군의 대응

1950년 6월 25일 육군본부의 긴급 명령으로 제22연대를 수도 외곽 전선에 급거 출동시킨 제3사단은 잔류 기간 1개 연대와 배속받은 2개 특수대대로써 동해안 해변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사단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6월 25일부터 태백산 이남 지역의 공비 격멸 작전에 착수할 출동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6월 중순, 태백산-보현산-지리산에 걸친 영·호남의 일부 지역에는 남아있던 공비와 리승엽이 이끄는 남파 유격대 30개 조가 합류하여 540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이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6월 24일 진주에서 출동 부대의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 주관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제3사단장 유승열 대령, 동 작전참모 장송주 소령, 제5사단 참모장 박명권 대령, 독립 제1대대장 김종순 중령, 영등포학원 부대장 홍성준 소령, 경찰부대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제3사단은 태백산-보현산 지구를 담당하여 지리산 지구를 담당한 타 부대와 함께 6월 25일 05:00부터 일제히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이 작전은 중지되었고, 정규전에 대응하게 된 사단은 이날 11:00에 하달된 육군본부의 긴급 명령(육본작명 제93호)에 따라 제22연대의 2개 대대를 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의 지휘 하에 선발시켰다. 6월 26일에는 잔여 1개 대대를 연대장 강태민 중령의 지휘 하에 뒤따라 출동시키는 긴급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제23연대의 1개 연대만을 사단 기간으로 보유하게 된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독립 제 1대대 및 영등포 학원의 배속을 육군본부에 요청하는 동시에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으로 하여금 마산 등 각지에 분산 배치 중인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출동 명령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3. 작전 계획

동해안의 요충지인 강릉을 초기에 빼앗긴 것은 사단의 방어 정면에 대한 북한군 제5사단의 압력을 가중시켰으며, 해안 방어선의 구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제8사단은 인구리(주문진 북쪽 10km) - 만월산(623고지) - 어성전리(인구리 서쪽 11km) 선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고, 주문진(강릉 북쪽 17km) - 여곡천(주문진 남쪽 7km)선에서 잔여 병력을 섬멸하여 강릉을 지키려 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주력을 대관령 서쪽 내륙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릉 이남의 해안은 방어 공백 상태가 되었다.

이에 제3사단장은 울진 부근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하고, 제23연대에 제1차 저지선 편성을 명령했다. 이러한 결정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첫째, 삼척 방어가 고려되었으나, 죽변(울진 북쪽 7km) 이북의 임원진리 및 정동진리에 이미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군 때문에 저지선 구축이 어려웠다.
  • 둘째,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의 도보 이동과 우리측의 차량 기동력을 고려하면 울진 부근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다.


사단 작전 명령에 따라 6월 28일 부산을 출발한 제23연대는 대구를 거쳐 6월 29일 오전 10시에 포항에 집결했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박재열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차량으로 먼저 출발시키고, 백기천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와 허형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같은 날 오후 3시에 차량으로 뒤따르게 했다.

한편, 사단장은 김종순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와 홍성준 소령이 이끄는 영등포학원을 같은 날 오후 5시까지 포항에 집결시켜 제23연대 출동 후 상황 변화에 대비했다. 이 2개 대대의 포항 집결은 미 고문관 롤린스 S. 엠메리치(Rollines S. Emmerich) 중령의 강력한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사단장은 2개 대대를 대구와 부산 지역의 후방 경비에 배치하려 했으나, 제23연대 엄호가 더 시급하다는 엠메리치 중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긴급 출동 대기시켰다.

3. 1. 강릉 상실과 초기 방어선

강릉을 초기에 빼앗긴 것은 제3사단의 방어 정면에 대한 북한군 제5사단의 압력을 가중시켰다.

제8사단은 인구리(주문진 북쪽 10km) - 만월산(623고지) - 어성전리(인구리 서쪽 11km) 선에서 북한군 주력을 파악하고, 주문진(강릉 북쪽 17km) - 여곡천(주문진 남쪽 7km)선에서 잔여 세력을 포착 섬멸하려 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주력을 대관령 이서의 내륙 방면으로 이동시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강릉 이남의 해안은 방어할 수 없는 공백 지역이 되었다.

이에 제3사단장은 울진 부근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제23연대로 하여금 제1차 저지선을 급편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삼척 방어가 고려되었으나, 죽변(울진 북쪽 7km) 이북의 임원진리 및 정동진리에 이미 해상으로 잠입한 북한군 공격병력으로 인해 저지선 개편이 어려웠다.
  • 둘째,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의 도보행군과 우리측의 차량 기동력을 고려하면 울진 부근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사단 작전 명령으로 6월 28일 부산을 출발한 제23연대는 대구를 경유하여 6월 29일 10:00에 포항에 집결하였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박재열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차량으로 선발 출발시키고, 백기천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 및 허형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차량으로 15:00에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사단장은 김종순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 및 홍성준 소령이 이끄는 영등포학원을 17:00까지 포항에 집결시켜 제23연대 출동 후의 전황 변동에 대비하였다. 이 2개 대대의 포항 집결은 미 고문관 롤린스 S. 엠메리치(Rollines S. Emmerich) 중령의 주장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초 사단장은 2개 대대를 배속받자 대구와 부산 일원의 후방 경비를 위해 두 지역에 각각 배치하려 하였으나, 제23연대를 엄호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엠메리치 중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긴급 출동을 대기하도록 하였다.

3. 2. 제23연대의 초기 이동과 배치

6월 28일 부산을 출발한 제23연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경유하여 6월 29일 10:00에 포항에 집결하였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박재열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차량편으로 먼저 출발시키고, 백기천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 및 허형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역시 차량으로 같은 날 15:00에 뒤따르게 하였다.

한편, 사단장은 김종순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와 홍성준 소령이 이끄는 영등포학원을 같은 날 17:00까지 포항에 집결시켜 제23연대 출동 후의 전황 변동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사단 미 고문관 롤린스 S. 엠메리치(Rollines S. Emmerich) 중령의 주장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당시 제3사단장은 울진 부근에서 북한군을 처음으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23연대로 하여금 1차 저지선을 급히 편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첫째는 삼척 방어가 고려되었으나 죽변(울진 북쪽 7km) 이북의 임원진리 및 정동진리에 이미 해상으로 잠입한 북한군 공격 병력으로 인해 저지선 재편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 둘째는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의 도보 행군과 한국군의 차량 기동력을 고려했을 때 울진 부근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4. 전투 과정

김종원 중령이 이끄는 제23연대는 북한군의 정확한 동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으나,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울진을 공격하기 전에 울진을 선점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연대 작전명령을 통해 각 대대에 임무를 부여했다.

연대 작전명령
내용



6월 29일, 연대는 영덕 - 영해 - 평해를 거쳐 울진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제23연대는 6월 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제22연대에 1개 대전차포 중대와 2개 중화기 중대를 차출하여 화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제2대대장 박재열 소령은 지용태 중위가 이끄는 제1중대를 전방에 배치하여 정세를 탐색했다. 제1중대는 수산리(울진 남쪽 2km)에서 피난민과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울진 시가지에 이미 북한군 일부가 잠입했음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이에 대대장은 수산리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연대장에게 보고한 후, 각 중대를 수산리 서북쪽 140고지에 배치하여 해안을 경계하며 연대 주력의 진출을 기다렸다. 이 고지는 남대천(북쪽)과 왕피천 사이에 위치하며, 울진교를 비롯한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제1대대의 보고는 연대장 김종원 중령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성급한 대응은 병력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1대대는 수산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읍내리, 제3대대는 노음리에 배치했다. 연대는 6월 30일에도 북한군의 정세 파악에 집중했다.

6월 30일 07:00, 권오봉 중위의 제1대대 2중대가 해안을 따라 접근하는 북한군 12명을 포착, 10분간의 총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여 심문했다. 심문 결과, 울진을 점거 중인 북한군은 6월 25일 온양리로 투입된 여단 진격대의 일부이며, 태백산 잠입 후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울진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울진교를 비롯한 남대천 연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연대장은 수색을 통해 포로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전선에 나타나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 날 새벽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연대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연대 작전명령
내용



연대장은 울진 서쪽 읍남리에 집결한 제2대대로 하여금 측면 공격을 가하게 하고, 제1대대로 하여금 울진 남정면으로부터 주공을 지향하게 했으며, 제3대대를 연대 예비로 배치하여 제1, 2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제2대대의 고성리(울진 시가지 북선) 진출은 북한군 제5사단 주력 부대 진출에 대비하고 울진 시가지의 적을 뒤에서 포위하는 이중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연대장은 이 작전 명령을 하달하면서 며칠 동안의 강우로 남대천 도강이 어려워졌다는 점과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을 공비 정도로 과소평가했다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했다.

4. 1. 초기 정찰 및 교전

김종원 중령이 이끄는 제23연대는 북한군의 정확한 동태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울진을 공격하기 전에 울진을 먼저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연대 작전명령을 통해 각 대대에 임무를 부여했다.

연대 작전명령
내용



연대는 영덕 - 영해 - 평해를 거쳐 울진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제23연대는 6월 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제22연대에 1개 대전차포 중대와 2개 중화기 중대를 차출하여 화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제2대대장 박재열 소령은 울진으로 이동하면서 정확한 적의 규모와 위치를 알 수 없어, 지용태 중위가 이끄는 제1중대를 전방 1km 앞에 배치하여 정세를 탐색했다. 제1중대는 수산리(울진 남쪽 2km) 어귀에서 피난민과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6월 29일 현재 울진 시가지에 이미 북한군 일부가 잠입했음을 확인하고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대대장은 수산리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연대장에게 보고한 후, 각 중대를 수산리 서북쪽 140고지에 배치하여 해안을 경계하며 연대 주력의 진출을 기다렸다. 이 고지는 남대천(북쪽)과 왕피천 사이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해안 길이 남하하고 북쪽으로는 남대천 지류가 흘러 울진교를 비롯한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제1대대의 보고는 연대장 김종원 중령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울진에 침입한 적이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아니더라도 성급한 대응은 병력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1대대는 수산리 현 위치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읍내리 부근에 배치, 제3대대는 노음리에 집결시켜 왕피천 이남 해안에 3km 종심으로 배치했다. 연대는 6월 30일에도 북한군의 정세 파악에 집중했다.

6월 30일 07:00, 수산리 140고지에 배치된 권오봉 중위가 이끄는 제1대대 2중대가 해안을 따라 접근하는 북한군 12명을 포착, 10분간의 총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여 심문했다. 심문 결과, 울진을 점거 중인 북한군은 6월 25일 온양리로 투입된 여단 진격대의 일부이며, 태백산 잠입 후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울진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울진교를 비롯한 남대천 연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연대장은 읍면리 부근의 제2대대로 하여금 울진 서북쪽으로 수색대를 파견하고, 수산리 부근의 제1대대로 하여금 울진 남정면의 울진교를 중심으로 하는 남대천 연안의 수비 상황을 탐색하게 했다. 이 수색을 통해 포로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전선에 나타나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 날 새벽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연대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연대 작전명령
내용



연대장은 울진 서쪽 읍남리에 집결한 제2대대로 하여금 측면 공격을 가하게 하고, 제1대대로 하여금 울진 남정면으로부터 주공을 지향하게 했으며, 제3대대를 연대 예비로 배치하여 제1, 2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제2대대의 고성리(울진 시가지 북선) 진출은 북한군 제5사단 주력 부대 진출에 대비하고 울진 시가지의 적을 뒤에서 포위하는 이중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연대장은 이 작전 명령을 하달하면서 며칠 동안의 강우로 남대천 도강이 어려워졌다는 점과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을 공비 정도로 과소평가했다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했다.

4. 2. 울진 탈환 시도와 실패

김종원 중령이 이끄는 제23연대는 울진을 탈환하려 했으나,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실패했다. 연대는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울진을 공격하기 전에 울진을 먼저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연대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각 대대에 임무를 부여했다.

연대 작전명령 (6월 29일)



하지만 제23연대는 이전에 서울로 긴급 출동한 제22연대에 화력을 지원해준 탓에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연대 주력보다 먼저 출발한 제2대대는 울진으로 향하면서도 북한군의 규모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제2대대는 수산리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접촉했고, 피난민과 주민들의 정보를 통해 울진 시가지에 이미 북한군 일부가 잠입해 있음을 확인했다.

제2대대는 수산리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제1대대는 수산리 서북쪽 140고지에 배치되어 해안을 경계하며 연대 주력을 기다렸다. 이 고지는 남대천과 왕피천 사이에 위치해 울진교와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김종원 중령은 울진에 침입한 적이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아니더라도 성급한 대응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제1대대는 수산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읍내리 부근에, 제3대대는 노음리에 집결하여 왕피천 이남 해안에 급편 배치되었다. 연대는 6월 30일에도 북한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이날 오전 7시, 제1대대 2중대가 해안을 따라 접근하는 북한군 12명을 발견하고 교전 끝에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포로 심문을 통해 울진을 점거한 북한군은 온양리로 투입된 여단 진격대의 일부이며,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울진을 확보하려는 목적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은 울진교를 비롯한 남대천 연안에 병력을 배치하여 국군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김종원 중령은 수색을 통해 포로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전선에 나타나기까지 시간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 날 새벽 공격을 결심했다.

연대 작전명령 (7월 1일)



이 작전 명령에 따라 제1대대는 울진 남정면에서 주공을, 제2대대는 울진 서쪽 읍남리에서 측면 공격을 맡았다. 제3대대는 연대 예비대로 배치되어 상황에 따라 제1, 2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제2대대의 고성리 진출은 북한군 제5사단 주력 부대 진출에 대비하고 울진 시가지의 적을 뒤에서 포위하는 이중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김종원 중령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첫째,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인해 남대천 도강이 매우 어려워졌다는 점, 둘째, 북한군 정규부대인 제5사단 주력을 과거 공비 수준으로 과소평가했다는 점이었다.

4. 3. 왕피천 이남으로의 철수

북한군 제5사단의 우세한 전력에 압도당하는 상황에서,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남대천 및 왕피천 하류가 전선 수습에 제약이 되고 퇴로 차단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제23연대는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7월 2일 05:00,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기성리(울진 남쪽 22km)에, 제3대대는 평해(기성리 남쪽 9km)에 집결했다. 철수 이유는 북한군의 우세한 화력과 SU-76 자주포로 인한 사기 저하, 제2대대의 병력 손실로 인한 재편 필요성, 그리고 사단 지원 부대와의 합류 때문이었다.

김종원 중령은 왕피천 선 철수 전 사단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고,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부대를 연대에 배속시키고 평해로 급파하여 수용진지를 개편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연대는 제2대대에 영등포학원 부대를 편입하고, 독립 제1대대를 기성리 북쪽 3km 무명고지에 배치하여 평해에서 제1대대 및 제3대대의 병력을 재편했다.

5. 결과 및 영향

울진-평해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우세한 전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남대천 및 왕피천 하류가 오히려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하여 전력을 재편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북한군 제5사단의 화력과 SU-76 자주포에 대한 대응, 병력 손실, 그리고 지원 부대와의 합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5. 1. 전력의 한계와 후퇴

7월 2일 05:00, 국군 제8연대는 울진을 재점령한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가 포 지원 하에 왕피천 남안으로 진출을 시도하자 제3대대의 주 진지를 포기하고, 제1대대와 제2대대를 기성리(울진 남쪽 22km)에, 제3대대를 평해(기성리 남쪽 9km)에 각각 집결시켰다.

이러한 후퇴는 첫째, 북한군 제5사단의 화력 및 SU-76 자주포로 인한 부대 사기 저하, 둘째, 제2대대의 병력 손실로 인한 재편 필요성, 셋째, 사단의 지원 부대인 독립 제1대대 및 영등포 학원과의 합류 때문이었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왕피천 선 철수 전 사단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고,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두 부대를 연대에 배속시키고 평해로 급파하여 수용 진지를 개편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연대는 제2대대에 영등포 학원을 편입하고, 독립 제1대대를 기성리 북쪽 3km 무명고지에 배치하여 평해에서 제1대대 및 제3대대의 병력을 재편하였다.

5. 2. 부대 재편과 방어 노력

제2대대의 초기 전투 상황을 볼 때,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중요 지역 방어 개념을 빠르게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군 제5사단의 우세한 전력에 압도당하는 상황에서 남대천과 왕피천 하류는 오히려 전선 수습을 어렵게 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 손실을 키우는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울진 상실 후 남대천을 방어선으로 삼아 전투를 벌이려던 초기 계획을 변경하여, 제1대대가 제2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날 12시를 기점으로 전 병력을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작전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왕피천 이남 지역은 사실상 전투 없이 비워지게 되었다.

연대의 전선 수습은 이날 완료되지 못했다. 울진을 재점령한 북한 제5사단의 10연대가 포 지원을 받으며 왕피천 남쪽으로 진출하려 했기 때문에, 연대는 제3대대의 주 진지마저 비워야 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기성리(울진 남쪽 22km)에, 제3대대는 평해(기성리 남쪽 9km)에 각각 집결했으며, 그 시점은 7월 2일 05시였다.

이러한 철수는 북한군 제5사단의 화력과 SU-76 자주포로 인한 부대 사기 저하, 제2대대의 병력 손실로 인한 재편 필요성, 사단의 지원 부대인 독립 제1대대 및 영등포 학원과의 합류 때문이었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왕피천 선 철수 전, 사단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고,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두 부대를 연대에 배속시키고 평해로 급파하여 방어 진지를 재편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연대는 제2대대에 영등포 학원을 편입하고, 독립 제1대대를 기성리 북쪽 3km의 무명 고지에 배치하여 평해에서 제1대대와 제3대대의 병력을 재편했다.

6. 평가

울진-평해 전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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