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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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현은 서위의 시중 위표의 아들로, 북주 무제 때 관직을 시작하여 수나라가 건국된 후 회주총관, 람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601년 산료의 반란을 진압하고 수주총관에 임명되었으며, 수 양제 즉위 후 우후위대장군을 거쳐 612년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관중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6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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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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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위현(衛玄) |
이름 | 위문승(衛文昇) |
자 | 문승(文昇) |
출생일 | 541년 혹은 542년 |
출생지 | 하남군 낙양 |
사망일 | 617년 혹은 618년 (77세) |
사망지 | 장안? |
사망 원인 | 병사 (노환) |
국적 | 서위 → 북주 → 수나라 |
직업 | 정치인, 장군 |
작위 | 흥세공 → 동궤군공 |
칭호 | 개부의동삼사, 우광록대부(훈관과 산관) |
주요 경력 | |
경력 | 기실 → 급사상사 → 태부중대부 겸 경조윤 → 검교웅주사 → 회주총관 → 남주자사 → 위위소경 → 자주자사 → 수주총관 → 위위경 → 공부상서 겸 위군태수 → 우후위대장군 → 형부상서 겸 검교우어위대장군 → 겸 경조내사 |
주요 활동 | |
관련 활동 | 이민족들 위무 및 건설, 형벌 등 |
주요 참전 | 살수 대첩, 양현감의 난 |
2. 생애
위현은 서위의 시중·좌무위대장군인 위표의 아들로 태어났다. 북주 무제 때 기실이 되었고, 급사상사로 전임되어 아버지의 작위인 흥세공을 이었다. 선납하대부, 익주총관장사, 개부의동삼사·태부중대부, 치내사사, 경조윤 등을 역임했으나, 선제 때 면직되었다.
580년 양견이 승상이 되자 검교웅주사로 복귀, 화주의 반란을 진압했다. 581년 수나라 건국 후 회주총관, 동궤군공에 봉해졌으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얼마 후 람주자사로 복귀, 장성 건설 감독 및 삭주총관사를 검교했다. 이후 위위소경을 거쳐 601년 산료의 반란을 진압하고 문제에게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 수주총관에 임명되어 검남을 안무했다.
604년 양제 즉위 후 위위경, 공부상서, 위군태수, 우후위대장군, 좌후위사, 612년 형부상서를 역임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 우어위대장군을 검교하고 증지도 군을 이끌었으나 패전했다. 하지만 홀로 군을 보전하여 금자광록대부를 받았다.
613년 양현감의 난 때 7만 군사를 이끌고 낙양 구원에 나서, 화음에서 양소의 묘를 파헤치고 해골을 불태웠다. 동관에서 하양으로 진격하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물리치고 함곡관으로 직진, 양현감 군과 격전을 벌였다. 우문술, 내호아 등의 원군과 함께 양현감을 격파하고 양제에게 상을 받았다.
615년 관중에 주둔했으나, 반란과 기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노령으로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617년 이연의 장안 진격에 병을 핑계로 관여하지 않았고, 618년 장안 함락 후 사망했다. 향년 77세.
2. 1. 북주 시절
우문옹(훗날 북주 무제)이 노공(魯公)일 때 위현은 젊은 시절부터 도량과 식견이 있어 기실(記室)로 등용되었고, 이내 급사상사(給事上士)가 되었다.[1] 아버지의 봉작인 흥세공(興勢公)을 이어받았고 식읍은 4,000호였다.[1] 무제에게 만정보대(萬釘寶帶)를 받을 정도로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승진한 끝에 개부의동삼사에 오르고 태부중대부(太府中大夫)와 경조윤을 겸했다.[1] 그러나 선제 때 황제의 뜻을 거역하여 면직되었다.[1]580년(대상 2년) 양견(훗날 수 문제)이 섭정으로서 승상에 오르자 검교웅주사(檢校熊州事)로 복귀했고, 화주에서 일어난 만(蠻)의 반란을 행군총관이 되어 토벌하였다.[1]
2. 2. 수나라 건국 초기
580년 양견이 승상이 되자 검교웅주사(熊州司)로 복귀하였다. 화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서 이를 진압하였다.[2]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자 회주총관(淮州總管)으로 전임되고 동궤군공(同軌郡公)에 봉해졌지만,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얼마 후 람주자사(嵐州刺史)로 복귀하여 장성 건설 감독을 맡았다. 또한 삭주총관사(朔州總管司)를 검교했다. 후에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 601년 산료(山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주자사(資州刺史)로 나가 진압하였다. 이때 료족은 대뢰진(大牢鎭)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위현이 이해를 설득하자 료족의 거수가 동의하여 포위를 풀고 떠났고, 10여만 명이 귀부하였다. 문제(양견)에게 칭찬을 받아 비단 2,000필을 포상받고, 수주총관(遂州總管)에 임명되어 검남(劍南)을 안무했다.[2]2. 3. 양제 치세와 고구려 원정
604년 양제가 즉위하자 위현은 위위경으로 다시 중앙에 불려왔다. 이때 이민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2] 606년(대업 2년) 공부상서로 자리를 옮겼는데 위군의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그 태수까지 겸하며 조정을 오갔다. 608년 우후위대장군(右候衛大將軍)이 되었다가[4] 612년 형부상서로 옮겼다. 제2차 여수전쟁에 참전하여 음력 3월, 수나라군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했을 때 양제의 명을 받아 유사룡과 함께 요하 동쪽의 주민들을 위무했다.[5] 음력 6월, 우문술, 우중문 등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별동대로 뽑혀 검교우어위대장군(檢校右禦衛―)으로서 증지도(增地道)군을 이끌었는데,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강을 건너 돌아오던 중 대패하였다. 다만 위현은 유일하게 전력을 보존한 채 퇴각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다.2. 4. 양현감의 난 진압
613년 양현감이 난을 일으켜 낙양을 포위하자 양제는 위현에게 7만 명을 이끌고 구원하도록 했다.[6] 위현은 화음에서 양현감의 아버지 양소의 무덤을 파헤쳐 평탄하게 만들고 유골은 불태웠다.[6] 동관을 지날 때 장수들은 효산(崤山, 殽山)과 함곡관의 복병을 우려하여, 섬현(陝縣)에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하양(河陽, 지금의 허난성 멍저우 시)으로 빠르게 간 뒤에 배후에서 양현감을 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위현은 이를 애송이도 안 쓸 계책이라고 물리치고 북을 치며 전진했고, 위현의 생각대로 무탈하게 함곡관을 통과했다.[6]위현은 무분랑장(武賁郎將) 장준(張峻)을 미끼로 삼아 남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낙양 북쪽으로 향했다. 양현감도 요격해와서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위현은 금곡(金谷)에 진을 쳤다. 위현은 군중에서 수 문제에게 제사를 지내 은덕에 감사하며 결사(決死)를 다짐했고, 이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6]
위현은 선봉 2만 명으로 전수(瀍水)와 간하(澗河)를 건너 싸웠는데, 양현감이 거짓으로 도망가는 데 속아 쫓다가 복병에 당했다. 며칠 후 다시 맞붙었는데, 양현감이 전령을 위조하여 관군이 양현감을 쓰러뜨렸다고 거짓으로 크게 외치니 위현군의 태세가 나태해졌다. 양현감이 바로 수천 명의 기병으로 몰아쳐 궤멸시키고, 위현은 8천 명만 데리고 후퇴하였다. 위현군은 태반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고전했으며, 전투가 길어져 군량도 떨어졌다. 그래서 북망산(北邙山, 北芒山)에 진을 치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결전을 시도하였다. 하루 동안 10여 회를 교전하다가 양현감의 동생 양현정(楊玄挺)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자 마침내 양현감군이 점차 물러났다.[7]
양현감의 공격을 막으며 낙양을 지키고 있던 번자개(樊子蓋)도 공격을 시작했고, 양제가 고구려에서 철수하며 급파한 진릉(陳稜), 굴돌통(屈突通), 우문술, 내호아 등도 원병으로 도착했다. 결국 양쪽에서 협공하니 양현감이 당해내지 못하고 서쪽으로 달아났다.[8] 위현은 곡사만선(斛斯萬善)과 방옥(龐玉)을 선봉으로 삼아 추격하여 문향(閿鄕, 지금의 허난성 링바오 시)에서 따라 잡았다. 우문술, 굴돌통 등과 합공하여 마침내 난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위현은 우광록대부에 오르고 좋은 밭과 저택, 수많은 재물을 하사받았다. 양제는 위현의 신변에 혹시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천 명의 호위병까지 붙여주었다. 번자개와 함께 옥린부(玉麟符)도 받았다.[6]
2. 5. 수나라 말기와 죽음
615년 관중에 도적이 들끓고 백성들에게는 기근이 덮쳤기에 안무하려고 했으나 수나라 정부의 기능 마비와 부정부패로 위현조차 이를 구휼할 수가 없었다.[9] 결국 노년을 이유로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617년 이연(훗날 당 고조)이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병을 핑계로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장안이 함락되자 집으로 돌아가 618년에 죽었다.[9] 향년 77세였다.3. 평가
양현감의 난을 진압했을 때 양제는 위문승을 사직지신(社稷之臣), 즉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라 일컫고, 그가 편안해야 사직도 편안하고 그가 위태로우면 사직도 위태롭다고 하였다. 《수서》에서는 “동도의 포위를 풀고, 주선에도 크게 힘쓰고, 서경도 지켜낸 위문승에게 어찌 수나라에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것을 책망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참조
[1]
서적
사망
구당서, 수서
[2]
서적
수서
[3]
서적
수서
[4]
서적
수서
[5]
서적
자치통감
[6]
서적
자치통감
[7]
서적
수서
[8]
서적
북사
[9]
서적
구당서, 자치통감
구당서,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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