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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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 메이스는 1931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태어나 2024년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그는 1948년 니그로 리그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1951년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메이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뉴욕 메츠에서 22시즌 동안 활약하며, 2번의 내셔널 리그 MVP, 12번의 골드 글러브, 66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여준 '더 캐치'로 유명하며, 1979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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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메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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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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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윌리 메이스 |
영어 표기 | Willie Mays |
출생일 | 1931년 5월 6일 |
출생지 | 웨스트필드, 미국 |
사망일 | 2024년 6월 18일 |
사망지 | 팔로알토, 미국 |
포지션 | 중견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키 | 5피트 11인치 (약 180cm) |
몸무게 | 180파운드 (약 82kg)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니그로 리그 (NgL) |
데뷔일 (니그로 리그) | 1948년 5월 25일 |
데뷔 팀 (니그로 리그) | 버밍햄 블랙 바론스 |
메이저 리그 데뷔 리그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
메이저 리그 데뷔일 | 1951년 5월 25일 |
메이저 리그 데뷔 팀 | 뉴욕 자이언츠 |
마지막 리그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
마지막 경기일 | 1973년 9월 9일 |
마지막 팀 | 뉴욕 메츠 |
소속 팀 | 버밍햄 블랙 바론스 (1948년) 뉴욕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51년–1952년, 1954년–1972년) 뉴욕 메츠 (1972년–1973년)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24회 (1954년–1973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1회 (1954년) |
내셔널 리그 MVP | 2회 (1954년, 1965년) |
내셔널 리그 신인왕 | 1회 (1951년) |
골드 글러브 수상 | 12회 (1957년–1968년) |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 1회 (1971년) |
내셔널 리그 타격왕 | 1회 (1954년) |
내셔널 리그 홈런왕 | 4회 (1955년, 1962년, 1964년, 1965년) |
내셔널 리그 도루왕 | 4회 (1956년–1959년) |
한 경기 4홈런 기록 | 1961년 4월 30일 |
영구 결번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No. 24 뉴욕 메츠 No. 24 |
통산 기록 (MLB) | |
타율 | .301 |
안타 | 3,293개 |
홈런 | 660개 |
타점 | 1,909점 |
도루 | 339개 |
명예의 전당 | |
유형 | 전국 |
헌액일 | 1979년 |
득표율 | 94.7% (첫 번째 투표) |
일본어 정보 | |
일본어 이름 | ウィリー・メイズ |
일본어 로마자 표기 | U~irī Meiz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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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정보 | |
한국어 이름 | 윌리 메이스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THE ANSWER: 윌리 메이스 씨가 사망, 93세, 전설 "더 캐치"를 낳은 MLB 사상 최고의 올라운더 데일리 스포츠: 오타니 쇼헤이, 전설적인 명수 메이즈 이후 66년 만의 기록, 45홈런, 20도루, 6삼루타 ESPN.com: 역대 최고의 중견수 10인 Fox Sports: 역대 최고의 중견수 |
2. 어린 시절
윌리 호워드 메이스 주니어(Willie Howard Mays Jr.|영어)는 1931년 5월 6일, 앨라배마주 버밍햄 외곽의 웨스트필드에서 태어났다.[1] 웨스트필드는 페어필드 (앨라배마주) 인근에 위치한, 주로 흑인이 거주하는 회사 소유의 마을이었다. 아버지 '캣' 메이스(Cat Mays|영어)는 지역 제철소의 흑인 팀에서 뛰었던 재능 있는 야구 선수였고,[2][3] 어머니 애니 새터화이트(Annie Satterwhite|영어)는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농구 및 육상 선수였다.[4] 메이스의 할아버지 역시 야구 선수였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훗날 팀 동료들은 메이스를 애칭인 '벅(Buck|영어)'으로 불렀다.[5]
메이스의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가 세 살 때 헤어졌다.[6] 이후 아버지와 두 이모인 사라와 어니스틴 손에 자랐다.[7][8][9] 이모 사라는 매주 일요일 어린 메이스를 아프리카감리교회에 데려갔다.[10] 아버지 캣 메이스는 처음에는 철도 운반원으로 일하다가 웨스트필드의 제철소에서 근무했는데,[11] 어린 시절부터 아들 윌리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다섯 살 때부터 함께 캐치볼을 했고, 열 살 때는 아버지가 뛰던 버밍햄 산업 리그 팀 벤치에 앉도록 허락했다.[12] 어린 시절 그의 우상은 조 디마지오였으며, 테드 윌리엄스와 스탠 뮤지얼 역시 좋아했다.[29]
페어필드 산업 고등학교(Fairfield Industrial High School) 재학 시절 여러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야구는 물론, 농구팀에서는 제퍼슨군 (앨라배마주) 내 흑인 고등학교 선수 중 최고 득점자였으며,[13]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에서는 쿼터백, 풀백, 펀터로 활약했다.[14] 16세에 준프로 선수로 뛰기 시작했으며, 1948년 17세의 나이로 버밍햄 블랙 배런스에 입단하여 니그로 리그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기 중에는 일요일에만 경기에 나섰지만, 그의 활약은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1949년에 18세가 되었으나 고등학교는 1950년에 졸업했는데, 저널리스트 앨런 바라는 이를 "윌리의 삶에서 작은 미스터리"라고 언급했다.[15] 졸업 직후 뉴욕 자이언츠가 그의 계약권을 사들여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트렌턴 자이언츠로 보냈다.
3. 프로 경력
윌리 메이스는 니그로 리그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뉴욕 자이언츠(후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활약했다. 자이언츠 시절 그는 신인상, 두 번의 MVP, 12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으며, 특히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더 캐치"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비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다.
선수 생활 말년인 1972년 5월 11일, 메이스는 투수 찰리 윌리엄스와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241][168] 이는 오랫동안 그의 뉴욕 복귀를 원했던 메츠 구단주 조앤 페이슨의 영향도 있었다.[169] 5월 14일, 메츠 데뷔전에서 친정팀 자이언츠를 상대로 5회 결승 홈런을 치며 셰이 스타디움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170] 하지만 1973년 시즌에는 부상과 기량 저하를 겪었고, 스프링 캠프 지각 및 무단 이탈 문제로 감독 요기 베라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171][172] 그해 8월 17일, 레즈의 돈 굴렛을 상대로 자신의 마지막 홈런이자 통산 660번째 홈런을 기록했고,[173] 9월 9일 구단에, 9월 20일 대중에게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174][175] 9월 25일, 뉴욕시 시장 존 린제이가 선포한 '윌리 메이스의 밤' 행사가 열려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176] 메이스는 NLCS 3차전에서 피트 로즈와 버드 해럴슨의 충돌 후 관중 소요가 발생했을 때 질서 회복을 돕기도 했으며,[177] 5차전에서는 대타로 나와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는 타점 안타를 기록했다.[178] 월드 시리즈에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2차전 연장 12회에 결승타가 된 선수로서의 마지막 안타를 쳤으나,[182] 수비에서는 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180][181] 그의 마지막 타석은 3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포스 플레이로 아웃된 것이었다.[114][183] 메츠는 7차전 끝에 시리즈에서 패배했다.[184]
3. 1. 마이너 리그 및 니그로 리그 경력
메이스의 프로 야구 경력은 1948년 여름 니그로 마이너 리그 팀인 채터누가 추추스에서 잠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16][17] 같은 해 말, 메이스는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의 버밍햄 블랙 배런스에 합류하여 "벅"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했다.[18] 블랙 배런스의 감독은 메이스의 아버지와 같은 산업팀에서 뛰었던 파이퍼 데이비스였다.[19] 당시 메이스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는데, 페어필드 공업고등학교 교장이 프로 야구 활동을 이유로 메이스를 정학시키겠다고 하자, 데이비스 감독과 메이스의 아버지는 메이스가 학교를 계속 다니는 대신 블랙 배런스의 홈 경기에만 출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20] 메이스는 버밍햄이 1948년 니그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지만, 팀은 홈스테드 그레이스에게 4승 1패로 패배했다. 그는 그 해 타율 .262를 기록했으며, 뛰어난 수비와 주루 실력으로 주목받았다.[21] 2024년 5월 28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니그로 리그 기록을 공식 기록에 통합한다고 발표했다.[22]
고등학교 졸업 후, 몇몇 메이저 리그 팀들이 메이스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브루클린 다저스도 그를 스카우트했지만, 최종적으로 뉴욕 자이언츠 스카우트 에드 몬태규가 그와 4000USD에 계약했다.[23] 메이스는 1950년 남은 기간을 인터스테이트 리그의 클래스 B 팀인 트렌턴 자이언츠에서 보내며 타율 .353을 기록했다.[24] 1951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트리플-A 팀인 미네아폴리스 밀러스로 승격되었고, 그곳에서 3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477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25]
3. 2. 뉴욕/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51~1972)
1950년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한 메이스는 1951년 AAA급 미니애폴리스 밀러스(Minneapolis Millers)에서 3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477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300]
1951년 5월 24일, 메이스는 자이언츠로 콜업되었다.[26] 처음에는 메이저 리그 투수들을 상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승격을 꺼렸으나, 감독 리오 두로셔는 "장거리 전화로 구단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팀에 합류하라"고 재촉했다.[27] 이 시기 "세이 헤이 키드(The Say Hey Kid)"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이언츠는 그의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기여해주기를 기대했다.[34] 홈구장 폴로 그라운즈는 좌우는 짧지만(약 85.34m, 약 78.64m) 중견수가 매우 깊은(약 147.22m) 독특한 구조였다.[35] 5월 25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데뷔전에서 3번 타자로 나섰으나,[36] 첫 12타수 동안 안타를 치지 못했다. 하지만 5월 28일, 13번째 타수에서 명예의 전당 투수 워런 스판을 상대로 폴로 그라운즈 왼쪽 지붕을 넘기는 홈런을 쳐내며 메이저 리그 첫 안타이자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은 그가 부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37][300] 이후 다시 12타수 무안타에 그치자 두로셔 감독은 그를 8번 타순으로 내리고 공을 당겨치려 하지 말고 맞히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했다.[38][39] 메이스는 다음 두 경기에서 4안타를 치며 살아났고, 그달 말 타율을 .30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40] 1951 시즌 12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4, 20홈런, 68타점을 기록했고, 내셔널 리그(NL)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41]
그해 8월 11일, 자이언츠는 NL 페넌트 레이스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에 13.5 게임 차로 뒤져 있었으나,[42] 시즌 마지막 58경기에서 40승 18패를 거두며 극적인 역전극을 만들어 다저스와 동률을 이루었다.[43] 메이스의 수비와 강한 송구는 팀의 여러 중요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전 2선승제의 NL 타이브레이커 시리즈에서 보비 톰슨이 "세상에 울려 퍼진 한 방(Shot Heard 'Round the World)"이라 불리는 끝내기 홈런을 쳐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확정 지었을 때, 메이스는 온덱 서클에 있었다.[44] 자이언츠는 195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와 맞붙었다.[45] 1차전에서 메이스, 행크 톰슨, 몬테 어빈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외야진을 구성했다. 메이스는 시리즈에서 부진했고 팀은 6경기 만에 패배했다. 5차전에서는 메이스의 플라이볼을 쫓던 양키스의 신인 미키 맨틀이 조 디마지오의 콜 플레이 도중 배수관에 발이 걸려 넘어져 무릎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46]
1951 시즌 후, 메이스는 미국 육군에 의해 징집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7] 1952년 시즌 초 34경기에 출전해 타율 .236, 4홈런을 기록한 뒤 5월 29일 입대했다. 입대 전 마지막 경기에서는 숙적 다저스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기도 했다.[48] 버지니아주 포트 유스티스에 배속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군 야구팀에서 뛰거나 체육 교관으로 복무했다.[49][50][51] 이곳에서 동료 외야수 알 포르투나토로부터 바스켓 캐치를 배웠다. 군 복무로 인해 자이언츠 경기 약 275경기를 결장했고,[52] 1954년 3월 1일 제대하여 다음 날 자이언츠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했다.[53]
1954년 복귀 첫 경기에서 칼 어스킨을 상대로 약 126.19m가 넘는 홈런을 치며 시즌을 시작했다.[55] 시즌 초반 타격 부진 후 타격 자세를 조정한 메이스는 타율을 끌어올렸고,[56] 6월 25일에는 내야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57][58] 이 해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20시즌 동안 총 24회 연속 NL 올스타 팀에 포함되었다.[214] 올스타전 이전에 30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60] 7월 28일까지 36홈런을 기록했으나, 두로셔 감독은 팀이 더 자주 출루하기를 원한다며 홈런을 의식하지 말라고 조언했다.[61][62] 이후 홈런은 5개에 그쳤지만 타율을 .326에서 .345로 높여 빌 테리 이후 팀 최초로 타격왕을 차지했다.[62][63] 41홈런, 110타점을 기록하며 NL 최우수 선수상(MVP)과 히콕 벨트를 수상했다.[64][301] 자이언츠는 NL 페넌트에서 우승했고,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4연승으로 꺾었다.[65] 이 시리즈 1차전 8회, 메이스는 폴로 그라운드 깊숙한 중견수로 날아간 빅 워츠의 장타를 홈플레이트에서 약 약 129.54m 떨어진 지점에서 등을 돌린 채 달려가 잡아내는, 일명 "더 캐치"라는 역사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이 수비는 인디언스 주자 두 명의 득점을 막아 동점을 유지하게 했고, 자이언츠는 연장전 끝에 승리했다.[66][67][68] 메이스는 마지막 순간 공을 보지 않고도 계속 달려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69][70][315]
1955년에는 도루 능력을 향상시켜 24개를 기록했다. 두로셔 감독의 요청에 따라 다시 홈런 생산에 집중하여[71] 51홈런으로 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659의 장타율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72][73] 당시 24세 137일의 나이로 달성한 시즌 50홈런은 2007년 프린스 필더(23세 139일)가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최연소 기록이었다.[302] 시즌 후 두로셔 감독이 팀을 떠났다.[74]
1956년, 새 감독인 빌 리그니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리그니는 메이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75] 하지만 메이스는 36개의 홈런을 치고 40개의 도루를 기록하며(커리어 하이), 켄 윌리엄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30-30 클럽에 가입했다.[76][77]
메이스와 리그니의 관계는 1957년에 개선되었다. 리그니는 메이스에게 지시를 줄이고 그의 능력과 본능을 신뢰하기 시작했다.[78] 4월 21일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는 실책으로 출루한 뒤 3루 도루와 결승 득점을 모두 아슬아슬한 슬라이딩으로 성공시키는 명장면을 연출했다.[79][80] 5월 21일 컵스전에서는 홈스틸을 성공시키기도 했다.[81] 1957년 시즌은 골드 글러브가 처음 수여된 해였고, 메이스는 중견수로서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이후 12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는 득점(112점, 3위), 타율(.333, 2위), 홈런(35개, 4위) 등 다양한 공격 부문에서 NL 상위권에 올랐다. 또한 26개의 2루타와 20개의 3루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20-20-20 클럽(2루타, 3루타, 홈런)에 가입했다. 그 해 3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프랭크 슐테(1911년) 이후 두 번째로 2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20-20-20 클럽 멤버가 되었고, 2년 연속 30-30 클럽 시즌을 달성했다.[41]
관중 감소와 새로운 야구장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자이언츠는 1957년 시즌 후 연고지를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했다.[82] 1957년 9월 29일,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자이언츠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 팬들은 그의 마지막 타석 도중 기립 박수를 보냈다.[83]
1958년, 리그니 감독은 메이스에게 베이브 루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60홈런에 도전할 것을 원했다.[84] 메이스는 시즌 마지막 날까지 NL 타격왕을 다투었다. 마지막 날 1번 타자로 나서 3안타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인 .347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필라델피아의 리치 애쉬번은 .350을 기록했다.[85][86] 메이스는 5월과 9월에 두 차례 MLB 월간 최우수 선수상(NL Player of the Month award)을 수상했다.[87][88] 홈런은 29개에 그쳤다.[41]
자이언츠 구단주인 호레이스 스톤햄은 메이스에게 1959년 계약금으로 7.5만달러를 제시하며 메이스를 야구계 최고 연봉 선수로 만들었다.[89] 메이스는 1959년 스프링 훈련 중 큰 부상을 입었지만 시즌 시작에는 출전할 수 있었다.[90][91] 8월에는 손가락이 부러졌지만 비밀로 유지했다.[92] 1959년 9월, 자이언츠는 NL 페넌트 레이스에서 2경기 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다저스에게 스윕을 당하며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일부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여전히 그를 야유했다.[93] 1959년 메이스는 .313의 타율에 34홈런, 113타점을 기록했고, 26도루로 4년 연속 도루 부문에서 리그를 선두했다.[41]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2년을 실스 스타디움(Seals Stadium)에서 보낸 후, 자이언츠는 1960년 새로운 캔들스틱 파크(Candlestick Park)로 이전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메이스의 장타력에 영향을 미쳐 1960년 홈런은 29개에 그쳤다.[94] 그는 이 구장에서 수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플라이볼이 타구되면 5까지 센 후 바람의 영향을 판단하고 추격하는 방식으로 적응했다.[95] 그는 6월 24일에 홈런 2개를 치고 홈스틸을 성공시켰다.[96] 9월 15일에는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트리플 3개를 기록하며 NL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97][98] 자이언츠가 5위로 마감한 후 메이스는 "나는 1960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99] 홈런 29개에 그쳤지만, 190안타와 103타점으로 NL을 선두했고, .319의 타율과 2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41]
1961년 시즌 시작 전에 앨빈 다크가 자이언츠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자이언츠는 3위를 기록했다.[100] 메이스는 1961년 4월 30일 자신의 최고 경기 중 하나를 치렀는데, 밀워키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4홈런, 8타점을 기록했다.[101] 메이스에 따르면, 그는 식중독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한다.[102] 그의 홈런은 모두 약 121.92m 이상을 날아갔다. 미키 맨틀과 로저 매리스가 AL에서 베이브 루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추격하는 동안 메이스와 올랜도 세페다는 NL 홈런 선두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103] 메이스는 40홈런으로 시즌을 마쳤고(세페다 46홈런), 129득점으로 리그를 선두했으며, .308의 타율과 123타점을 기록했다.[41][104]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후에도 계속해서 높은 수준의 경기를 보여주었지만, 메이스는 캘리포니아에서 첫 4시즌 동안 샌프란시스코 팬들의 야유를 감수해야 했다.[105][106] 1961년 메이스의 4홈런 경기 이후 야유는 약해지기 시작했고,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낸 1962년에 더욱 조용해졌다.[108]
메이스는 1962년 8개의 공격 지표에서 팀을 이끌었다. 득점(130), 2루타(36), 홈런(49), 타점(141), 도루(18), 볼넷(78), 출루율(.384), 장타율(.613)이었다.[109] 그는 시즌 도루 기록을 깬 모리 윌스에게 밀려 NL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110] 9월 30일, 메이스는 자이언츠의 연중 마지막 정규 경기에서 결승 홈런을 쳐 팀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공동 1위로 끌어올렸다.[111][112] 자이언츠는 다저스와 3경기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치렀다. 3차전 9회초 자이언츠가 4-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메이스는 적시타를 쳐 결국 득점하며 자이언츠가 6-4로 리드를 잡았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메이스가 중견수 플라이를 잡아 마지막 아웃을 기록하며 자이언츠는 양키스와의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113]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메이스는 3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은 패배했다. 그는 시리즈 전체에서 타율 .250에 그쳤다.[114] 시리즈는 7차전까지 진행되었고, 양키스가 9회말 1-0으로 앞서 있었다. 2아웃 후 메이스는 랄프 테리를 상대로 우익선상 2루타를 쳤으나, 3루 코치 화이티 록맨은 1루 주자 매티 아루를 3루에 멈춰 세웠다. 다음 타자 윌리 맥코비가 바비 리처드슨에게 라인 드라이브로 잡히며 양키스가 우승했다.[115] 이는 자이언츠 소속으로 메이스가 출전한 마지막 월드 시리즈였다.[114]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팬들의 지지를 얻게 된 메이스는 "겨우 5년이나 걸렸군요."라고 나중에 말했다.[116]
1963년 시즌을 앞두고 메이스는 당시 최고액인 시즌 10.5만달러의 계약에 서명했다.[117] 7월 2일, 스판과 후안 마리찰이 각각 15이닝 무실점 경기를 펼친 가운데, 메이스는 16회말 스판을 상대로 홈런을 쳐 자이언츠의 1-0 승리를 이끌었다.[118] 그는 이 홈런을 자신의 첫 홈런과 4홈런 경기와 함께 가장 중요한 홈런 중 하나로 여겼다.[119] 8월에는 8개의 홈런과 27타점, 타율 .387을 기록하며 세 번째 NL 월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87][120] 8월 27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400호 홈런을 기록하며 이 기록에 도달한 10번째 선수가 되었다. 메이스는 1963년 시즌을 타율 .314, 38홈런, 103타점으로 마무리했으며, 도루는 8개로 1954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121]
일반적으로 3번 타자였던 메이스는 1964년 4번 타자로 이동했다가 이후 다시 3번 타자로 돌아왔다.[122] 5월 21일, 다크 감독은 메이스를 자이언츠의 주장으로 임명하여 메이스를 MLB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장으로 만들었다. 다크 감독은 메이스에게 "당신은 그 자격이 있어요. 훨씬 전에 주장이 되었어야 했죠"라고 말했다.[123] 9월 4일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스는 코니 맥 스타디움 전광판 쪽으로 날아간 공을 전력 질주하여 잡아내는 곡예적인 수비를 선보였다.[124] 1956년 이후 처음으로 타율 .300(.296) 이하를 기록했지만, 47홈런으로 NL 홈런왕에 올랐고, 121득점과 111타점으로 2위를 기록했다.[124]
1965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어깨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메이스의 투구 능력이 저하되었다. 그는 상대 선수들에게 이 부상을 비밀로 하고, 경기 전에 연습 투구를 두세 번 해서 상대 선수들이 그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했다.[125] 8월 22일, 메이스는 마리찰이 다저스의 포수 존 로즈보로를 방망이로 때려 부상입힌 후 자이언츠와 다저스 간의 14분간의 난투극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126] 메이스는 로즈보로의 허리를 잡고 그를 필드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그 후 루 존슨이 심판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127] 난투극 후, 메이스는 샌디 쿠팩스를 상대로 경기 결승 3점 홈런을 쳤지만, 홈런 후 어지러움을 느껴 경기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128][129]
메이스는 1965년 8월 네 번째이자 마지막 NL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363, 17개의 홈런, 29개의 타점).[130] 9월 13일, 그는 통산 500번째 홈런을 돈 노테바트를 상대로 기록하며 이 기록에 도달한 다섯 번째 선수가 되었다. 메이스가 자신의 첫 번째 홈런을 기록했던 워런 스판은 이제 그의 팀 동료였다. 홈런 후, 스판은 그에게 "예전 감각과 비슷했나?"라고 물었고, 메이스는 "똑같았습니다. 공도 똑같았죠."라고 대답했다.[131] 다음 날 밤, 메이스는 자신이 가장 극적인 홈런이라고 생각하는 홈런을 쳤다. 자이언츠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2점 뒤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메이스는 클로드 레이몬드를 상대로 풀카운트에서 3개의 파울을 친 후 9번째 공을 홈런으로 만들었다. 자이언츠는 10회말에 6-5로 승리했다.[132] 메이스는 1965년 커리어 하이인 52개의 홈런으로 두 번째 MVP를 수상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최고의 해였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33][303] 그는 .317의 타율을 기록했고, NL 출루율(.400)과 장타율(.645)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의 MVP 수상 간격 11년은 한 번 이상 MVP를 수상한 메이저리거 중 가장 긴 기간이었고, 50홈런 시즌 간격 10년도 마찬가지였다.[134] 그는 118득점을 올렸고, 이는 12년 연속 시즌 100득점 이상을 기록한 것이다.[41]
메이스는 1966년 4월 24일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멜 오트의 NL 기록인 511개의 홈런과 타이를 이루었다. 그 후 그는 9일 동안 홈런을 치지 못했다. 메이스는 슬럼프에 대해 "타석에 설 때마다 홈런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135] 그는 마침내 5월 4일에 512호 홈런을 치며 기록을 세웠다.3. 3. 뉴욕 메츠 (1972~1973)
1972년 5월 12일, 투수 찰리 윌리엄스와 5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었다.[305]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메이스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는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세 번째이자,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긴 후 첫 영구 결번이었다.[306]
메츠로 이적한 후에는 기량 저하가 뚜렷해졌다. 1972년에는 타율 .250, 8홈런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8월 17일 경기에서 현역 마지막 홈런인 통산 660호 홈런을 쳤고,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해당 시즌 성적은 개인 최저인 타율 .211, 6홈런이었다. 하지만 그해 메츠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메이스는 1차전에 선발 출전했다. 2차전에서는 9회 대주자로 나와 연장 12회에 6-6 동점 상황에서 적시타를 쳤는데, 이것이 그의 선수 생활 마지막 안타가 되었다.[307] 3차전에서는 10회 대타로 출전하여 병살타를 기록한 것이 마지막 타석이었다.[308]
메츠 이적 당시 구단주였던 조앤 페이슨은 메이스가 은퇴하면 그의 등번호 '''24'''번을 자이언츠에서처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1975년 페이슨이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4. 은퇴 이후
선수 은퇴 후, 메이스는 1979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뉴욕 메츠의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238]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여러 약속을 지키지 않고 경기에 자주 불참하여 1975년 새로 부임한 조 맥도널드 단장으로부터 해고 위협을 받기도 했다. 야구 커미셔너 보위 쿤과 메이스의 변호사가 개입한 끝에, 메이스는 홈 경기 최소 4이닝 참석 조건으로 코치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239] 메츠 시절 리 매질리는 메이스로부터 바스켓 캐치를 배웠다.[240]
1979년 10월, 메이스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발리 파크 플레이스 카지노의 특별 보좌관 겸 접객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커미셔너였던 보위 쿤은 야구계 인사가 카지노 관련 직업을 겸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이에 메이스는 메츠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쿤은 도박이 야구계에 미치는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지만, 메이스의 역할은 접객원에 한정되었고 계약상 도박 행위가 금지되었으며 해당 카지노는 스포츠 베팅을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241][242]
1985년, 쿤의 후임 커미셔너인 피터 우버로스는 메이스와 비슷한 처분(카지노 관련 직업)을 받았던 미키 맨틀의 야구계 복귀를 허용했다. 우버로스는 기자회견에서 "야구의 일부가 된 두 선수를 복귀시킨다"고 발표했다.[243][244]
1986년, 메이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사장 겸 단장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245][246] 그는 1993년 자이언츠와 평생 계약을 맺었으며, 2000년에 개장한 오라클 파크(당시 PAC 벨 파크) 건설을 위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247] 또한 재정적, 의료적 어려움을 겪는 전직 선수들을 돕는 기구인 베이스볼 어시스턴스 팀(Baseball Assistance Team, BAT)의 자문 위원회(Board of Advisors)에서도 활동했으며,[245] 청소년 야구 장려를 위한 세이 헤이 재단(Say Hey Foundation)을 설립했다.[248]
자이언츠는 이미 1972년 5월 12일 메이스를 메츠로 트레이드하면서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249][306] 자이언츠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 주소는 '24 윌리 메이스 플라자(24 Willie Mays Plaza)'이며, 정문 앞에는 높이 2.74m의 메이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경기장 내 개인 스위트룸을 가지고 있었다. 2008년 자이언츠가 팀 최고의 선수들을 기리기 위해 명예의 벽(Wall of Fame)을 만들었을 때, 메이스는 첫 번째 헌액자 중 한 명이었다.[250]
2022년 8월 27일, 뉴욕 메츠는 60주년 기념 올드타이머스 데이 행사에서 메이스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1972년 메이스를 영입할 당시 메츠 구단주였던 조앤 페이슨이 메이스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었다. 이로써 메이스는 두 팀에서 등번호가 영구 결번된 14번째 선수(또는 감독)가 되었다.[251][252]
5. 선수로서의 특징
윌리 메이스는 타격, 수비, 주루 능력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 특히 "라이플 암"(rifle arm)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어깨를 자랑했다.[34]
타격메이스의 타격 자세는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조 디마지오의 영향을 받았다. 디마지오처럼 다리를 벌리고 서서 양 다리에 같은 무게를 두고 배트를 높이 들었다. 투구를 기다릴 때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공중에 뻗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지만, 스윙할 때는 배트를 제대로 감싸 쥐었다. 메이스는 이 동작이 스윙에 힘을 더한다고 믿었다.[198] 그는 불필요한 동작 없이 허리를 풀어 스윙에 에너지를 집중했다. 브랜치 리키는 메이스가 다른 어떤 선수보다도 더 강력한 파워와 배트 스피드로 스윙한다고 평가했다.[199] 타석에서의 집중력 또한 뛰어나, 다른 타자들처럼 손에 흙을 바르거나 타석 주변을 배회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200]
본래 풀 히터였던 메이스는 1954년, 리오 두로셔 감독의 조언에 따라 타율을 높이기 위해 우중간으로 치는 타격을 시도했다.[201] 자이언츠가 바람이 많이 부는 캔들스틱 파크로 홈구장을 옮긴 후에는 홈 경기에서는 당겨치고 원정 경기에서는 밀어치는 방식으로 경기장에 따라 타격 스타일을 조절하려 노력했다.[95] 그는 통산 타율 .302와 660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은퇴 당시 홈런 개수는 베이브 루스, 행크 애런에 이어 역대 3위였다. 네 차례 홈런왕에 올랐다.
수비수비 면에서 메이스는 역대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외야수로서 골드 글러브를 12년 연속 수상했다.[202]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글러브를 배꼽 높이에서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여 공을 잡는 "바스켓 캐치"였다. 이 기술이 수비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단지 보여주기 위한 동작이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지만, 메이스는 이 캐치 방식을 포함하여 통산 7,095개의 외야 수비 성공을 기록하며 역대 외야수 최다 기록을 세웠다.[203] 그의 수비 범위는 매우 넓었고, 강한 어깨 덕분에 어떤 자세에서도 정확하고 강력한 송구가 가능했다.[34] 넓은 수비 범위 덕분에 그는 비교적 얕은 위치에서 수비하면서도 안타성 타구를 막아내고, 동시에 뒤로 물러나 장타를 처리할 수 있었다.[34]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비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더 캐치"는 그의 뛰어난 수비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루메이스는 강력한 타자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주자이기도 했다. 통산 네 차례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대담하고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로 유명했다. 좌익수 앞 단타 때 1루에서 홈까지 득점하거나, 윌리 맥코비의 번트 안타 때 1루에서 홈까지 파고들어 득점하는 등 인상적인 주루 능력을 보여주었다.[205]
플레이 스타일과 평가메이스의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은 그가 뛰었던 니그로 리그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스스로를 "연예인"이라 칭하며 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로는 쉬운 플라이볼을 일부러 땅에 미끄러지듯 잡아 더 어려워 보이게 만들기도 했고,[204] 주루 시 모자가 벗겨지도록 일부러 한 치수 큰 모자를 쓰기도 했다.[67]
올스타전에 20년 연속(총 24회) 출전했으며, 테드 윌리엄스는 "올스타전은 메이스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 번 출전한 월드 시리즈에서는 통산 타율 .239, 홈런 0개로 정규 시즌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314]
동시대의 위대한 선수인 행크 애런과 자주 비교되었는데, 활동 당시에는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 메이스의 인기가 더 높았으나 애런이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한 이후에는 평가가 달라지기도 했다.[315] 메이스는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선수 시절 가장 뛰어난 선수는 누구였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바로 나"라고 답할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배리 본즈의 대부이기도 하다. 배리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했을 때 메이스의 영구 결번인 24번을 달고 싶어 했고 메이스도 허락했지만, 구단과 팬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배리는 아버지이자 메이스의 팀 동료였던 보비 본즈의 등번호였던 25번을 달게 되었다.
5. 1. 더 캐치 (The Catch)
1954년 월드 시리즈는 윌리 메이스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인 "더 캐치"(The Catch)로 유명하다.[66] 뉴욕 자이언츠는 이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4경기 전승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65]"더 캐치"는 1차전 8회 초, 2-2 동점 상황에서 나왔다. 당시 인디언스는 무사 1, 2루의 득점 기회를 맞았고, 타석에는 강타자 빅 워츠가 들어섰다. 워츠는 폴로 그라운즈의 깊은 중앙 외야, 홈플레이트로부터 약 약 129.54m 떨어진 지점으로 향하는 큰 타구를 날렸다.[67]
중견수였던 메이스는 타구를 보자마자 등을 돌려 외야 펜스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는 펜스 바로 앞에서 마치 바구니를 받치듯 어깨 너머로 떨어지는 공을 잡아냈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내야를 향해 강하고 정확하게 공을 던져 2루 주자 래리 도비가 태그업 후 득점하는 것을 막았고, 1루 주자 알 로젠도 3루까지만 진루할 수 있었다. 이 수비는 인디언스의 역전 기회를 무산시키고 동점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플레이였다.[67][68] 메이스는 나중에 당시 상황에 대해 "달리는 동안 마지막 약 6.10m 동안은 공을 보지도 않았고, 공을 잡으려면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69]
메이스의 이 수비 덕분에 위기를 넘긴 자이언츠는 연장 10회 말, 더스티 로즈의 끝내기 3점 홈런으로 1차전에서 승리했다.[70] "더 캐치"는 단순히 뛰어난 수비를 넘어, 월드 시리즈의 흐름을 바꾸고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수비 장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6][67][68]
6. 일화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긴 후에도 메이스는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지만, 샌프란시스코 팬들은 첫 4시즌 동안 그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전설적인 중견수 조 디마지오와 비교되거나, 뉴욕 시절의 명성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105][106] 메이스 본인도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야유 때문에 힘들었다고 인정했다.[106][107] 하지만 1961년 한 경기 4홈런을 기록한 이후 야유는 점차 줄어들었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후 최고의 성적을 거둔 1962년에는 팬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108] 메이스는 "겨우 5년이나 걸렸군요"라며 마침내 팬들의 지지를 얻게 된 것에 기뻐했다.[116]
1962년 시즌은 메이스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득점(130), 2루타(36), 홈런(49), 타점(141), 도루(18), 볼넷(78), 출루율(.384), 장타율(.613) 등 8개 공격 지표에서 팀 내 1위를 기록했다.[109] 시즌 MVP 투표에서는 도루 신기록을 세운 모리 윌스에 이어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110] 시즌 마지막 정규 경기에서는 결승 홈런을 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공동 1위를 만들었고,[111][112] 이어진 3경기 플레이오프 시리즈 3차전에서는 9회초 동점을 만드는 적시타를 치며 팀의 6-4 역전승과 1962년 월드 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9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메이스의 중견수 플라이 처리로 마무리되었다.[113]
뉴욕 양키스와의 1962년 월드 시리즈에서 메이스는 타율 .250으로 다소 부진했다.[114]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9회말 자이언츠가 0-1로 뒤진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을 맞았다. 2사 1루에서 메이스는 우익수 쪽으로 큼지막한 2루타를 쳤지만, 1루 주자 매티 아루는 3루 코치의 판단으로 홈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3루에 멈췄다. 다음 타자 윌리 맥코비가 라인 드라이브 아웃으로 물러나면서 자이언츠는 아쉽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115] 이는 메이스가 자이언츠 소속으로 경험한 마지막 월드 시리즈였다.[114]
은퇴 후, 메이스는 뉴욕 메츠에서 1979년 시즌 말까지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 같은 해, 메이스는 미키 맨틀과 함께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의 한 카지노에서 홍보 관련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당시 MLB 커미셔너였던 보위 쿤은 선수들의 도박 연루를 엄격히 금지하는 규정을 들어 메이스와 맨틀의 야구 관련 활동을 금지시켰다.
1981년 야구 파업 중, 작곡가 테리 캐시먼은 메이스, 맨틀, 듀크 스나이더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1950년대 야구의 황금기를 추억하는 노래 "Talkin' Baseball"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커미셔너 피터 유버로스가 메이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하면서 그는 명예를 회복했고, 친정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특별 보조인으로 복귀하여 25년 동안 활동했다. 또한 재정적, 의료적 어려움을 겪는 전직 선수들을 돕는 단체인 '야구 보조 팀'(Baseball Assistance Team)의 자문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동료애를 보여주었다.
7. 사회 공헌
메이스는 뉴욕 자이언츠 시절, 흑인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할렘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그는 홈 경기가 있는 날이면 종종 어린이들과 함께 지역 스트리트볼 게임에 참여하며 시간을 보냈다.[233] 개조된 빗자루 자루로 고무공을 치는 이 도시 게임에서 메이스는 약 약 137.16m에 달하는 장타를 날리기도 했다.[234]
하지만 메이스는 재키 로빈슨과 같은 다른 유명 흑인 선수들과는 달리, 당시 만연했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차별적인 관행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235] 이 때문에 로빈슨은 메이스와 다른 팀 동료들이 민권 운동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36] 행크 애런 역시 메이스가 인종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발언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메이스는 자신의 본분은 야구 선수이며,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는 야구 선수입니다. 정치인도, 작가도, 역사가도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함으로써 내 동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뛰어난 야구 실력을 통해 흑인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237]
이러한 신념의 일환으로 메이스는 청소년 야구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자선 단체인 '세이 헤이 재단'(Say Hey Foundation)을 설립하여 운영했다.[248]
8. 수상 및 영예
윌리 메이스는 선수 생활 동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수많은 상과 영예를 안았다. 그의 주요 수상 내역과 영예는 다음과 같다.
상 / 영예 | 횟수 / 연도 | 비고 |
---|---|---|
내셔널 리그 신인왕 | 1951년 | 타율 .274, 20홈런, 68타점[41] |
내셔널 리그 MVP | 2회 (1954년, 1965년) | 1954년: 타율 .345, 41홈런[64] / 1965년: 52홈런, 타율 .317[133] |
골드 글러브 상 (외야수) | 12회 (1957년 ~ 1968년) | 12년 연속 수상[41] |
내셔널 리그 홈런왕 | 4회 (1955년, 1962년, 1964년, 1965년) | 1955(51), 1962(49), 1964(47), 1965(52)[72][109][124][133] |
내셔널 리그 도루왕 | 4회 (1956년 ~ 1959년) | 4년 연속 수상[300] |
MLB 올스타전 출전 | 24회 (1954년 ~ 1973년) | 행크 에런에 이어 역대 2위[222] |
올스타전 MVP | 2회 (1963년, 1968년) | [188][189][191] |
히콕 벨트 | 1954년 | [64]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979년 | 첫 투표에서 94.7% 득표율 (432표 중 409표)[41]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선정 | 1999년 | |
스포팅 뉴스 1960년대 최고의 선수 | 1970년 | [304] |
대통령 자유 훈장 | 2015년 | 버락 오바마 대통령 수여[41]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영구 결번 (24번) | 1972년 | [41] |
메이스는 1951년 내셔널 리그 신인왕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으며,[41] 이후 두 차례(1954년, 1965년) MVP를 수상했다.[64][133] 특히 1965년 MVP 수상은 첫 수상 이후 11년 만으로,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긴 MVP 수상 간격 기록이다.[134] 그는 네 차례의 홈런왕[72][109][124][133]과 네 차례의 도루왕[300] 타이틀을 차지하며 공격과 주루 능력을 겸비한 선수임을 증명했고, 뛰어난 수비력으로 12년 연속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41]
올스타전에는 20년간 총 24회 출전하여 행크 에런에 이어 역대 2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222] 두 차례(1963년, 1968년)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188][189][191] 테드 윌리엄스는 "올스타전은 윌리 메이스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극찬했다.[214]
은퇴 후 메이스의 업적은 더욱 빛났다. 1979년, 그는 압도적인 지지(94.7%)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4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1999년)과 스포팅 뉴스 선정 '1960년대 최고의 선수'(1970년)에도 이름을 올렸다.[304] 그의 등번호 24번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1972년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으며,[41] 2015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41] 그의 통산 7,095개의 외야 수비 척살은 여전히 깨지지 않는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41]
9. 통산 성적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2992 | 10881 | 3283 | 523 | 140 | 660 | 2062 | 1903 | 1464 | 1526 | 0.302 | 0.384 | 0.557 | 0.941 |
MLB를 대표하는 5툴 플레이어로, “라이플 암”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어깨를 가졌다.
통산 660홈런을 기록하여 은퇴 당시 베이브 루스, 행크 에런에 이어 역대 3위에 올랐다. 22년의 현역 생활 동안 통산 타율 .302와 통산 3283안타(3000안타 클럽)를 기록했다. 또한 통산 660홈런과 338도루를 기록하며 300-300 클럽을 사상 최초로 달성했다.
외야수로서 통산 '''7095''' 어시스트를 기록하여 이 부문 역대 1위이다.
'''주요 기록 및 수상 내역'''
- 타격왕: 1회 (1954년)
- 홈런왕: 4회 (1955년, 1962년, 1964년, 1965년)
- 도루왕: 4회 (1956년 - 1959년)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1979년 헌액 (자격 첫 해, 득표율 94.7%)
- 시즌 MVP: 2회 (1954년, 1965년)
- 신인왕: 1951년
- 골드 글러브상 (외야수): 12회 (1957년 - 1968년)
- MLB 올스타전 MVP: 2회 (1963년, 1968년)
-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1회 (1971년)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선출 (외야수): 1999년
- MLB 올스타전 선출: 20회 (1954년 - 1973년) ※행크 에런에 이어 역대 2위 타이[316]
- 30-30 클럽: 2회 (1956년, 1957년)
- 300-300 클럽: 사상 최초 달성 (1969년)
- 20-20-20 클럽: 달성 (1957년)
- 대통령 자유 훈장: 2015년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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