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H. 수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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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H. 수어드는 1801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으로, 휘그당과 공화당에서 활동하며 뉴욕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노예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링컨 대통령 시기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남북 전쟁 중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어드는 링컨 암살 시도 당시 공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았으며, 말년에는 세계 여행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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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H. 수어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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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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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윌리엄 헨리 수어드 |
출생일 | 1801년 5월 16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플로리다 |
사망일 | 1872년 10월 10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오번 |
닉네임 | 오번의 현자 |
정당 | 반메이슨당 (1834년 이전) 휘그당 (1834년–1855년) 공화당 (1855년 이후) |
배우자 | 프랜시스 밀러(1824년 10월 20일 결혼, 1865년 6월 21일 사망) |
자녀 | 6명,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윌리엄, 패니, 올리브 (입양) 포함 |
교육 | 유니온 칼리지 (문학사) |
서명 | William Henry Seward Signature.svg |
공직 | |
직책 | 제24대 미국 국무장관 |
대통령 |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
임기 시작 | 1861년 3월 5일 |
임기 종료 | 1869년 3월 4일 |
전임자 | 제러마이어 S. 블랙 |
후임자 | 엘리후 B. 워시번 |
직책 2 | 미국 상원 의원 |
소속 지역 | 뉴욕주 |
임기 시작 2 | 1849년 3월 4일 |
임기 종료 2 | 1861년 3월 3일 |
전임자 2 | 존 애덤스 딕스 |
후임자 2 | 아이라 해리스 |
직책 3 | 제12대 뉴욕주 주지사 |
부지사 | 루터 브래디시 |
임기 시작 3 | 1839년 1월 1일 |
임기 종료 3 | 1842년 12월 31일 |
전임자 3 | 윌리엄 L. 마시 |
후임자 3 | 윌리엄 C. 부크 |
2. 생애
1801년 5월 16일 뉴욕주 오렌지군 플로리다 마을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새뮤얼 스위지 세워드는 부유한 지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 어린 윌리엄은 공부를 좋아하는 명석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2]
15세에 유니언 칼리지에 2학년으로 입학하여 뛰어난 학생으로 파이 베타 카파에 선출되었다. 동료 학생 중에는 평생 법률 및 정치적 동료가 된 리처드 M. 블래치포드가 있었다. 1818년 아버지와의 돈 문제로 잠시 학교를 떠나 조지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가족의 설득으로 돌아와 1820년 6월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2]
그는 조지아에서 처음으로 어른으로 받아들여진 시간을 즐겼지만, 노예들의 학대도 목격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01년 5월 16일 뉴욕주 오렌지군 플로리다 마을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던 아버지 새뮤얼 스위지 수어드와 어머니 메리 제닝스 수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건강 문제로 농장 일을 돕기 어려웠지만, 학업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공부를 좋아하여 집에 가려고 학교에서 도망치는 대신, 학교에 가려고 집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1816년 유니언 칼리지에 2학년으로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파이 베타 카파에 선출되었다. 동료 학생들 중에는 평생 법률 및 정치적 동료가 된 리처드 M. 블래치포드가 있었다. 1818년 아버지와의 돈 문제로 잠시 학교를 떠나 조지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가족의 설득으로 돌아와 1820년 6월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2]
졸업 후 고쉔과 뉴욕시에서 존 듀어, 존 앤톤, 오그든 호프먼 변호사들과 함께 법률 공부를 하였고, 1822년 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3] 오번에서 은퇴한 판사 엘리야 밀러의 사무실에 합류하여 법조인 경력을 시작했다.
1824년 10월 20일 엘리야 밀러 판사의 딸이자, 누이 코넬리아의 트로이 여자 사립학교 동급생이었던 프랜시스 애들린 밀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아내와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하던 중 로체스터에서 마차 바퀴가 손상되는 일을 겪었다. 이때 지역 신문 발행인 썰로 윌드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정부 정책이 도로와 운하와 같은 기반 시설 개선을 촉진해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3]
자녀
이름 | 출생 | 사망 |
---|---|---|
오거스터스 헨리 수어드 | 1826년 | 1876년 |
프레데릭 윌리엄 수어드 | 1830년 | 1915년 |
코르넬리아 수어드 | 1836년 | 1837년 |
윌리엄 헨리 수어드 주니어 | 1839년 | 1920년 |
프랜시스 아델린 "패니" 수어드 | 1844년 | 1866년 |
2. 2. 법조 및 정치 경력
수어드는 1820년대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며 매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호사 일보다는 지방 및 주의 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3] 1830년, 그는 주의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뉴욕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입법자 중 한 명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법률 사무소를 계속 운영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상원 의원 임무에 쏟았다.1830년대 중반, 수어드는 강력한 국가 은행, 높은 관세,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정당인 휘그당의 열렬한 당원이 되었다. 1834년, 그는 휘그당 후보로 뉴욕 주지사에 출마했지만 큰 표 차로 패배했다. 그러나 4년 후, 그는 상당한 격차로 주지사 직에 당선되었다.

수어드는 1839년부터 1843년까지 두 번의 임기 동안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교육 개선, 경제 발전 촉진, 주의 운하 및 철도 시스템 확장,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뉴욕주 교도소 시스템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어드의 노예제 반대 입장도 이 시기에 분명해졌다. 그는 자유 흑인과 도망 노예 모두의 인권을 증진하는 법안을 지지했고, 흑인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기 더 쉽게 만드는 법률 개정을 추진했다. 수어드의 노예제에 대한 관점은 그가 버지니아주의 노예 소유주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뉴욕주에서 온 세 명의 흑인 선원들이 버지니아주의 노예를 자신들의 배에 밀항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1839년 수어드는 버지니아주와 갈등을 겪었다.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 음모를 알고 세 선원을 재판을 위해 버지니아 당국에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수어드는 노예제 관행을 비판하며 버지니아주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졸업 후, 수어드는 고쉔과 뉴욕시에서 존 듀어, 존 앤톤, 오그든 호프먼 변호사들과 함께 2년 동안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1822년 말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3] 그는 고쉔에서 변호사로 일할 수도 있었지만, 그곳을 싫어했고 성장하는 뉴욕 서부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수어드는 올버니에서 서쪽으로 약 약 241.40km, 고쉔에서 북서쪽으로 약 약 321.87km 떨어진 케이유가 카운티의 오번을 선택했다. 그는 은퇴한 판사 엘리야 밀러의 사무실에 합류했는데, 밀러의 딸 프랜시스 애들린 밀러는 그의 누이 코넬리아가 다녔던 엠마 윌러드의 트로이 여자 사립학교 동급생이었다. 수어드는 1824년 10월 20일 프랜시스 밀러와 결혼했다.
1824년, 수어드는 아내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가던 중 로체스터를 지나다가 마차 바퀴 하나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를 도와준 사람들 중에는 지역 신문 발행인 썰로 윌드가 있었다. 수어드와 윌드는 정부 정책이 도로와 운하 같은 기반 시설 개선을 촉진해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일부 사람들이 초기 정치 보스 중 한 명으로 여기는 윌드는 수어드의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윌드의 지원은 수어드의 경력에 도움이 되었지만, 수어드가 윌드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인식은 1860년 대통령 공화당 후보 지명에서 패배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수어드는 오번에 정착한 거의 직후부터 정치에 참여했다. 당시 정치 체제는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하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뉴욕주에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이름은 다양했지만 마틴 반 뷰렌이 한 파벌을 이끌었고 다른 파벌은 그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특징지어졌다. 반 뷰렌은 25년 이상 연방 정부에서 일련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그의 동맹국들은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반 뷰렌을 위해 통치했기 때문에 올버니 리전시라고 불렸다.
수어드는 처음에는 리전시를 지지했지만, 1824년에는 부패했다고 판단하고 리전시에서 이탈했다. 그는 1826년 뉴욕주 북부의 프리메이슨인 윌리엄 모건의 실종 및 사망 사건 이후 널리 퍼진 반 프리메이슨당에 가입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비밀 의식을 폭로하는 책을 출판했기 때문에 동료 프리메이슨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에 대한 반대 후보가 프리메이슨을 조롱한 메이슨인 앤드류 잭슨 장군이었기 때문에, 반 프리메이슨 운동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반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디윗 클린턴 주지사는 1827년 말이나 1828년 초에 수어드를 케이유가 카운티 유언 검인 법원 판사로 지명했지만, 수어드가 잭슨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 상원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1828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수어드는 애덤스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수어드는 반 프리메이슨당으로부터 연방 하원 의원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싸움이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퇴했다. 1829년 수어드는 뉴욕주 의회 지역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다시 한번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1830년, 윌드의 도움으로 그는 지역구의 주 상원의원 반 프리메이슨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수어드는 지역구 전역에서 법정에 출두했고, 그곳에서 인기 있는 정부의 기반 시설 개선 지원에 찬성하는 연설을 했다. 윌드는 그의 신문인 ''올버니 이브닝 저널''이 수어드를 지지하면서 활동을 올버니로 옮겼고, 수어드는 약 2,000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수어드는 1831년 1월에 주 상원의원으로 취임했다. 그는 프랜시스와 아이들을 오번에 남겨두고 자신의 경험을 편지로 그녀에게 알렸다. 여기에는 전 부통령 애런 버(Aaron Burr)를 만난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버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과의 결투와 반역 재판 이후 유럽에서 자발적으로 망명 생활을 한 후 뉴욕에서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상원은 리전시(혹은 앤드류 잭슨이 이끌고 반 뷰렌이 지지한 전국 정당인 민주당으로 알려지기 시작한)가 장악하고 있었다. 수어드와 그의 당은 반대파 민주당원들과 다른 이들과 연합하여 일부 법안, 특히 수어드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형사 사법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주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수어드는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전 대통령 애덤스를 포함한 잭슨 반대파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아버지 새뮤얼 수어드와 함께 유럽 여행을 가서 당대 정치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수어드는 반 프리메이슨당이 잭슨의 재선에 반대하여 대법원 판사 존 맥린(John McLe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전 법무장관 윌리엄 와트(William Wirt (Attorney General))가 후보가 되었다. 잭슨의 반대파였던 켄터키 상원의원 헨리 클레이(Henry Clay)는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에 당의 표준수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잭슨의 압도적인 승리 이후, 그에게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통합전선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휘그당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휘그당은 국가 개발을 위한 입법 조치를 믿었고, 잭슨의 일방적인 대통령 행위를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며 반대했다. 수어드와 위드를 포함한 많은 반 프리메이슨당원들이 새로운 정당에 기꺼이 합류했다.
1834년 선거를 준비하며, 뉴욕의 휘그당은 주지사 후보를 결정하기 위해 유티카에서 회의를 열었다. 민주당 주지사 윌리엄 마시(William Marcy)가 재선될 가능성이 높았고, 저명한 휘그당원 중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선거운동을 치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어드의 아내와 아버지는 그가 정계를 은퇴하여 법률 사무소의 수입을 늘리기를 원했고, 위드는 그에게 주 상원의원 재선에 출마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출마를 주저하는 바람에 수어드가 주요 후보로 등장하게 되었다. 위드는 유티카 집회에서 수어드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선거는 전국적인 문제, 특히 잭슨 대통령의 정책에 따라 결정되었다. 당시 이 정책들은 인기가 많았고, 민주당에게 유리했던 해에 수어드는 약 1만 1천 표 차이로 패배했다. 위드는 휘그당이 불법 투표에 압도당했다고 적었다.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하고 주 상원의원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수어드는 1835년 초 오번으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다. 그해 수어드와 그의 아내는 버지니아까지 남쪽으로 여행을 갔다. 남부 사람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수어드 부부는 노예제도의 광경을 목격하고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수어드는 뉴욕 서부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홀랜드 랜드 컴퍼니(Holland Land Company)의 새 주인을 위한 대리인직을 수락했다. 많은 정착민들이 할부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다. 새로운 주인들은 구 주인들보다 덜 관대한 지주로 여겨졌고, 불만이 생기자 뉴욕 서부에서 인기가 많은 수어드를 고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성공했고, 1837년 공황이 시작되자 가능한 한 압류를 피하도록 주인들을 설득했다. 그는 또한 1838년에 자신을 포함한 컨소시엄에 회사의 지분 매각을 주선했다.
반 뷰렌은 1836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수어드는 다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대하는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냈다. 경제 위기는 취임 직후 닥쳐 뉴욕 정치에서 리전시의 지배력을 위협했다. 수어드는 1836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민주당이 인기가 없어지자 1838년(당시 임기는 2년이었다) 승리의 길을 보았다. 다른 저명한 휘그당원들도 지명을 추구했다. 위드는 당 대회 대표들에게 수어드가 1834년 다른 휘그당 후보들보다 앞서 있었다고 설득했고, 수어드는 4차 투표에서 지명되었다. 수어드의 상대는 다시 마시였고, 주요 쟁점은 경제였다. 휘그당은 민주당이 경기 침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직책 후보가 직접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수어드는 그 대부분을 위드에게 맡겼다. 수어드는 40만 표 중 약 1만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이 승리는 그 당시까지 휘그당의 가장 중요한 승리였고, 뉴욕에서 리전시의 권력을 영원히 제거했다.
2. 3. 노예제 반대 운동
수어드는 젊은 시절부터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뉴욕 주지사 시절, 자유 흑인과 도망 노예의 인권을 옹호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흑인 어린이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한 법률 개정에 힘썼다.[2] 1839년 뉴욕주에서 온 3명의 흑인 선원들이 버지니아주의 노예를 밀수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자,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수어드는 노예제의 관례를 비판하며 이를 거부했다.[2]1840년에는 뉴욕 의회가 남부 노예 사냥꾼으로부터 흑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도록 장려했다.[3] 이 법률은 도망 노예로 지목된 이들에게 뉴욕에서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노예로 납치된 흑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주의 지원을 약속했다.[3] 1841년에는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9개월 동안 뉴욕주에 데려올 수 있도록 허용했던 "9개월 법"을 폐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여, 뉴욕주로 들어오는 즉시 노예들이 해방되도록 했다.[4] 또한 모든 어린이를 위한 공교육을 설립하는 법안에 서명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지역의 자율에 맡겼다(일부 지역에서는 분리된 학교가 운영되었다).[4]
3. 연방 상원의원 및 공화당 활동
1844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수어드는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휘그당 후보 헨리 클레이를 지지했지만, 클레이는 민주당의 제임스 K. 포크에게 패배했다. 포크 행정부 시절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했는데, 수어드는 남부인들이 노예제 확장을 위해 영토 확장을 추진한다고 보고 전쟁에 반대했다.[4]
1846년, 수어드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흑인 윌리엄 프리먼과 백인 헨리 와이엇을 변호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두 사람 모두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고 교도소에서 학대를 받았다. 시워드는 정신 이상을 이유로 이들의 사형을 막으려 했다. 와이엇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당했지만, 프리먼은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프리먼은 1846년 말 교도소에서 사망했다.[4] 이 사건으로 시워드는 북부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또한 노예 소유주가 지하철도를 통해 흑인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소한 존 반 잔트 사건에서 반(反)노예제 변호사로 활동하며 살몬 P. 체이스와 함께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8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워드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지지했고, 테일러는 루이스 캐스를 상대로 승리했다. 뉴욕 민주당의 분열로 휘그당은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1849년, 시워드는 존 애덤스 딕스의 뒤를 이어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3. 1. 연방 상원의원 선출
1849년 수어드는 휘그당 소속으로 미국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반(反)노예제를 주장하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4] 그는 도망노예법에 반대하며, 법정에서 도망 노예를 변호했다. 수어드는 헌법보다 "상위의 법"이 있다고 믿었으며,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도망 노예를 변호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여러 법률을 지지했다. 1850년에는 1850년 타협에 반대표를 던지며, 만약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으면 미국은 내전에 휘말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10년 동안 수어드는 이러한 견해를 계속 주장하며, 자신을 노예 세력의 주요 적대자로 표현했다. 여기서 노예 세력이란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이 정부를 장악하여 자유의 발전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의미한다.3. 2. 공화당 창당과 활동
1850년대 중반, 노예제 문제로 휘그당이 분열되자, 수어드는 반노예제 정당인 공화당에 합류했다.[5]Republican Party영어 몇 달 안에 수어드는 새로운 당의 지도적인 반노예주의 대변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5]1858년 10월 25일, 로체스터에서 한 유명한 연설에서 수어드는 남부의 노예제 기반 경제와 북부의 자유 노동 경제 사이의 "억압할 수 없는 갈등"을 경고하며, 미국이 "전적으로 노예 소유의 국가 혹은 전적으로 자유 노동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5]
3. 3. 1860년 대통령 선거
1860년에 윌리엄 수어드는 상원 의원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많은 영향력 있는 공화당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해 가을 선거에서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수어드는 자신이 후보 지명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수어드는 당의 후보 지명을 받지 못했다. 일부 대표들은 뉴욕 주지사 시절 그의 과거 정책 때문에 그를 반대했다. 또 다른 대표들은 수어드의 노예제 반대 평판이 남부 유권자들에게 그를 인기 없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이러한 요인들 덕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정치인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링컨의 승리는 수어드와 그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오번에 있는 저택에서 몇 주를 보낸 후, 수어드는 링컨의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5]
4. 국무장관 재임 (1861-1869)
에이브러햄 링컨은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 문제에 직면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미국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터 요새를 봉쇄했고,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보급품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했다. 수어드는 링컨에게 섬터 요새 보급 시도가 분리될 위기에 놓인 주들을 자극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수어드는 연합 대표 위원들에게 섬터 요새가 항복할 것이라는 암시를 했지만, 링컨은 섬터 요새 포기를 꺼렸다.
섬터 요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수어드는 1861년 4월 1일 링컨에게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 멕시코만 연안 요새 증강 등의 행동 방침을 제안하는 각서를 보냈다. 링컨은 어떤 정책을 채택하든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답신을 작성했지만 보내지 않고 수어드와 만났다. 수어드의 전기 작가들은 이 각서가 아직 직무 수행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링컨에게 보내졌다고 지적한다.
링컨은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의 포트 피켄스를 구제하기 위한 원정을 결정했다. 수어드는 연합 위원들과 중재자 역할을 했던 존 아치볼드 캠벨 대법관에게 어떠한 적대 행위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원정에 대한 통보를 보냈고, 4월 12일 찰스턴의 포대가 섬터 요새에 사격을 개시하여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다.[10]
수어드는 1849년 휘그당 소속 미국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반노예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도망 노예법에 반대했고, 법정에서 도망 노예를 변호했으며, 1850년 1850년 타협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으면 미국이 내전에 휘말릴 것이라고 연설했다. 휘그당이 쇠퇴하자 1855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뉴욕주에서 다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60년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했지만, 링컨을 지지했고 1860년 가을 서부 유세 여행을 떠났다.
1861년 링컨은 수어드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했고, 수어드는 1869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국무장관으로서 수어드는 미국의 서부 확장을 주장했다. 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 매입 협상을 통해 1518800km2의 땅을 720만달러에 러시아로부터 매입했다. 이는 텍사스주의 2배 이상 넓이였지만, "수어드의 어리석은 짓", "수어드의 냉장고" 등으로 조롱당했다. 오늘날 알래스카주에서는 3월 마지막 월요일을 "수어드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수어드는 덴마크령 버진아일랜드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사마나 만 합병, 파나마를 미국의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도 했지만, 상원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4. 1. 남북 전쟁 발발과 외교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승리하자, 링컨은 수어드에게 국무장관 직을 제안했고, 수어드는 이를 수락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수어드는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이 남부 연합을 승인하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다.[7][8][9][10]1861년 11월, 찰스 윌크스 함장이 지휘하는 ''샌 재신토'' 호가 영국 우편선 RMS ''트렌트''호를 나포하여 남부 연합의 외교관 제임스 머레이 메이슨과 존 슬라이델을 연행한 트렌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분노했고, 워싱턴 주재 영국 공사는 외교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전쟁 위협까지 가했다. 수어드는 영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링컨은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외교관들을 석방했다.[7][8][9][10]
이후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개선되었고, 1862년 4월에는 수어드와 라이언스 경이 서로의 선박에서 밀수 노예를 검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했다.[7][8][9][10] 또한 1862년 11월, 해방 선언 발표로 미국의 이미지가 개선되면서 영국 내각은 남부 연합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포기했다.[7][8][9][10]
그러나 영국에 있는 남부 연맹의 대리인들은 봉쇄 돌파선을 통해 남부 연맹 항구로 무기를 전달하는 등 남부 연맹 군함을 지원했다. 특히 CSS ''알라바마''호는 1862년 건조된 후 연방군의 선박들을 파괴했다. 1863년 10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건조된 두 척의 군함이 영국 관리들에게 압수되면서 추가적인 군함 지원은 중단되었다.[7][8][9][10]
4. 2. 링컨과의 관계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수어드에게 국무장관 직을 제안했고, 수어드는 이를 수락하여 내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워싱턴 D. C.에 도착한 후, 수어드는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며 다양한 정책 문제에 대해 링컨에게 조언하고 군사 전략을 지시하려 했다.이러한 수어드의 행동은 링컨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링컨은 수어드가 뛰어난 입법가이자 재능 있는 정치인임을 알고 있었다. 1861년 중반, 링컨은 수어드의 행동을 중립시켰고, 이후 수어드는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여 링컨 행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내각 구성원이 되었다.
남북 전쟁 동안 수어드는 여러 방면에서 링컨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맹방 정부를 지지하면 합중국이 남부 주들을 잃거나 유럽과 전쟁을 벌일 수 있음을 인지한 수어드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맹방의 독립 주장을 인정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또한 외국 국가들이 남부에 군함, 무기 및 기타 물품을 제공하는 것을 막는 데에도 기여했다.
1865년 봄, 전쟁이 끝날 무렵 수어드는 링컨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그들은 합중국을 복구하기 위해 4년 동안 함께 노력하며 서로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했다. 4월 14일 저녁, 남부 지지자들이 이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우정과 동맹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수어드는 워싱턴 D. C. 자택 침실에서 루이스 페인에게 찔려 여러 상처를 입었지만 생존했다. 링컨은 워싱턴 D. C.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 존 윌크스 부스에게 살해당했다.

수어드는 링컨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 칼 슈르츠에게 직책을 주지 않으면 실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수어드는 "실망이라니! 당신은 나에게 실망에 대해 말하는가! 대통령직에 대한 공화당 후보 지명을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었고, 한쪽으로 물러나 작은 일리노이 변호사에게 그것을 주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나에게 말인가!"라고 분노하며 말했다.[1] 초기 링컨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링컨이 대통령직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감에 따라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수어드는 1861년 6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행정적 기술과 활력은 희귀한 자질이다. 대통령은 우리 중 최고이지만, 끊임없고 헌신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썼다.[2]
두 사람은 가깝고도 전문적인 관계를 쌓았다. 링컨은 국무부의 권한 밖의 일들을 수어드에게 맡기는 버릇이 들었는데, 예를 들어 델라웨어 인디언과의 조약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링컨은 수어드의 집에 와서 두 변호사는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어드는 대통령의 유머러스한 이야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링컨은 수어드가 자신의 부츠를 닦고 있는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워싱턴에서는 우리 스스로 부츠를 닦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링컨은 "그렇다면 누구의 부츠를 닦으십니까, 수어드 장관님?"이라고 대답했다.[3]
다른 내각 구성원들은 수어드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그들이 각 부서의 문제를 링컨과 논의할 때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외교 문제를 논의할 때는 결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어드는 내각 회의 시간을 발표했고, 그의 동료들은 결국 링컨을 설득하여 정기적인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3] 1862년 7월 링컨이 내각에 노예 해방 선언을 읽었을 때 수어드의 입장은 불확실하다. 당시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은 수어드가 원칙적으로 반대했으며, 노예들은 연방군이 진격함에 따라 단순히 해방되어야 한다고 느꼈다고 썼다. 두 개의 후속 기록은 수어드가 아직 발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며, 링컨은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E. 리의 북부 침입을 종식시킨 앤티텀 전투에서의 끔찍한 교착 상태가 끝난 후에야 그것을 발표했다. 그 사이 수어드는 외국 강대국들이 그러한 선언에 어떻게 반응할지 신중하게 조사하여 그들이 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줄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4]
수어드는 링컨의 부인 메리 링컨과 가깝지 않았는데,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그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메리 링컨은 수어드를 매우 싫어하여 마부에게 수어드의 집을 지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국무장관은 링컨의 어린 아들들, 윌리와 태드와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자신의 애완동물 중 두 마리의 고양이를 그들에게 선물했다.[3]
수어드는 1863년 11월 링컨이 짧은 연설을 하기 위해 게티즈버그에 갔을 때 그와 동행했는데, 이 연설은 게티즈버그 연설로 유명해졌다. 연설 전날 밤, 링컨은 수어드를 만났다. 수어드가 어떤 변화에도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연설 후,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링컨만이 그 연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어드는 또한 링컨에게 전국적인 추수감사절을 선포할 것을 제안하고, 그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수확 후 추수감사절 행사가 오랫동안 열렸지만, 이것이 최초로 추수감사절을 국가적인 행사로 공식화했다.[5]
4. 3. 링컨 암살 미수 사건
1865년 4월 14일, 존 윌크스 부스가 링컨 대통령을 암살한 것과 같은 날, 부스의 동료 루이스 파웰이 윌리엄 수어드를 암살하려 했다.[1] 파웰은 수어드의 하인 윌리엄 벨에게 "약품을 배달하러 왔다"고 속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수어드는 4월 5일에 일어난 마차 사고로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었다. 파웰이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수어드의 장남 프레더릭 윌리엄 수어드가 그를 막아섰다. 파웰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프레더릭은 아버지가 잠자리에 들었으니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파웰은 계단을 내려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프레더릭에게 총을 겨누었다.[1] 그러나 총이 불발되자, 당황한 파웰은 총개머리판으로 프레더릭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쳐 중상을 입혔다.[1]이후 파웰은 윌리엄 수어드의 침실로 뛰어들어 칼로 수어드의 얼굴과 목을 여러 번 찔렀다. 또한 파웰은 수어드의 다른 두 자녀인 아들 오거스터스와 딸 패니, 간호병으로 근무하던 조지 로빈슨 상사, 그리고 파웰이 도망칠 때 마침 도착한 전보 배달부 에메릭 한셀에게도 상처를 입혔다.[1]
수어드는 공격 당시 깨어났을 때 아내 프랜시스가 숟가락으로 홍차를 먹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전 사고 치료를 위해 턱에 목재 지지대를 하고 있었는데(종종 "목깁스"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수어드는 얼굴에 평생 남을 흉터를 갖게 되었다.[1] 이날 밤의 사건은 수어드의 아내와 딸 패니에게 큰 충격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아내 프랜시스는 같은 해 6월에 사망했고, 패니는 다음 해 1866년 10월에 사망했다.[1]
파웰은 다음 날 체포되어, 1865년 7월 7일, 링컨 암살 계획에 가담한 다른 3명(데이비드 헤롤드, 조지 아제롯, 메리 서랫)과 함께 처형되었다.[1]
4. 4. 앤드루 존슨 행정부
1865년 4월 15일 링컨 대통령의 사망으로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수어드는 존슨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으로 계속 일했다. 그는 존슨 대통령의 남부 재통합 정책을 지지했다. 수어드는 "역사는 더욱 활기차고 관대한 정복자들이 정복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욱 곧 승리는 화해와 오래가는 평화에 의하여 따라져왔다."고 주장하며, 남부 주들을 다시 합중국으로 복구하려는 존슨 대통령의 접근 방식을 옹호했다.[1]
초기 존슨 행정부 시절, 수어드는 대통령과 원만하게 협력하지 못했다. 수어드는 부상에서 회복 중이었고, 존슨 또한 1865년 여름 한때 병석에 있었다. 수어드는 남부의 연방 재가입에 대한 존슨의 비교적 온건한 조건과 고위급 인물을 제외한 모든 남부 연합군의 사면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급진 공화당원인 스탠턴과 하원의원 태디어스 스티븐스는 해방 노예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수어드는 그 문제를 각 주에 맡기는 것에 만족했으며(북부 주들 중에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준 곳은 거의 없었다), 북부와 남부의 권력을 쥐고 있는 백인 인구를 서로 화해시키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믿었다.[2]
링컨과는 달리, 존슨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으며, 1865년 12월 의회가 소집될 때 수어드의 정치적 조언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3] 존슨은 남부 주들이 주 정부를 재건하고 선거를 치르도록 허용하는 선언을 발표했으며, 대부분 전쟁 전이나 전쟁 중 지도자였던 인물들이 당선되었다. 수어드는 존슨에게 그의 첫 의회 연례 연설에서 남부 주들이 연방 재가입을 위한 세 가지 조건, 즉 탈퇴 철회, 반란 정부가 부담한 전쟁 채무 거부, 그리고 제13조 수정안 비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밝힐 것을 조언했다. 존슨은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호소하기를 바라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회는 남부 의원들을 수용하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한 권고안을 만들기 위해 양원 합동 위원회를 임명했다. 존슨은 이 위원회에 반대했고, 수어드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4]
1866년 초, 의회와 대통령은 해방 노예국의 권한 연장 문제를 놓고 충돌했다. 양측 모두 주들이 재가입되면 국이 종료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문제였다. 수어드의 지지 속에 존슨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의회의 공화당원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분노했고, 존슨의 거부권을 무효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존슨은 흑인 해방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시민권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수어드는 화해적인 거부권 메시지를 조언했지만, 존슨은 그를 무시하고 의회가 남부 의원들을 수용할 때까지 남부에 영향을 미치는 법안을 통과시킬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의회가 그의 거부권을 무효화했고, 각원에서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다수결을 얻었으며, 이는 미국 역사상 주요 법안에 대해 이러한 일이 발생한 최초의 사례였다.[5]

존슨은 대중이 1866년 중간선거에서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가진 의원들을 선출하기를 바랐고, 그해 여름 여러 도시에서 연설을 하는 원형 순회라는 여행을 시작했다. 수어드는 그와 함께 간 관리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여행은 존슨에게 재앙이었고, 그는 언론에서 비판을 받은 상대방에 대한 여러 가지 무분별한 발언을 했다. 급진 공화당원들은 선거 결과로 강화되었다.[6] 존슨에 대한 공화당의 분노는 그의 국무장관에게까지 미쳤다. 메인주의 상원의원 윌리엄 P. 페센든은 존슨에 대해 "그는 선의로 시작했지만, 수어드의 악한 조언이 그를 구원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두려워한다"고 말했다.[7]
1867년 2월, 상하 양원은 대통령의 임명직 공무원 해임을 제한하려는 직무 재임 법안을 통과시켰다.[8] 존슨은 재건 정책의 차이로 스탠턴을 해임했고, 이는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수어드는 존슨에게 유명한 변호사 윌리엄 M. 에버츠를 고용할 것을 권고했고, 위드와 함께 대통령의 성공적인 변호를 위한 자금을 모금했다.[9]
4. 5. 알래스카 매입
1867년 수어드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달러에 매입하는 알래스카 매매를 협상하였다. 당시에는 "수어드의 어리석은 짓(Seward's Folly)"이라고 비판받았다.[18] 어떤 사람들은 그가 거리가 먼 얼음과 산들로 이루어진 땅을 사는데 너무 많은 돈을 지불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인들은 수어드의 대지의 매매는 역사상 위대한 거래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어드는 상원의원 시절 고래잡이에 관심이 있었고, 러시아령 아메리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것의 부산물이었다. 그는 1860년 대회 이전 연설에서 그 영토가 미국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1864년 그것이 매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에 협상을 압박했다. 러시아 장관 바론 에두아르 드 스토크는 매각을 권고했다.[17] 그 영토는 돈을 잃는 곳이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자체는 1861년에 그 허가를 만료시켰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확장에 더 효율적으로 돈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점령되거나 미국 정착민들에게 압도될 위험이 있었다. 스토크는 매각 권한을 받았고, 1867년 3월에 돌아와 국무장관과 협상했다. 수어드는 처음에 500만달러를 제안했고, 두 사람은 700만달러에 합의했고, 3월 15일 수어드는 내각에 조약 초안을 제출했다. 스토크의 상관들은 몇 가지 우려를 제기했고, 그를 설득하여 포기하게 하기 위해 최종 매입 가격이 720만달러로 인상되었다. 조약은 1867년 3월 30일 이른 아침에 체결되었고, 4월 10일 상원에 의해 비준되었다. 스티븐스는 국무장관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면서 알래스카 매입이 수어드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8]
4. 6. 멕시코 내정 간섭 중단
1864년,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 자리에 앉히고 프랑스 군사력으로 지원했다. 수어드는 공개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프랑스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12]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수어드는 프랑스에 미국이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수를 원한다고 경고했다. 나폴레옹은 대규모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미군이 그의 군대에 맞서 사용될 것을 우려했다.[13]1865년 12월, 수어드는 나폴레옹에게 미국이 우호 관계를 원하지만, "프랑스가 멕시코에 대한 무력 개입을 중단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과 명예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이 정책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14] 미국은 필 셰리던 장군과 경험 많은 정예군을 리오그란데 북쪽 강둑에 배치했고, 수어드는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프랑스는 1867년 초 철수했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베니토 후아레스 군대에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총살형을 당했다.
5. 은퇴 이후 및 사망
1869년 3월에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나 오번으로 돌아왔으나, 은퇴 후에도 쉴 틈 없이 세계 순방에 나섰다. 1870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고 소젠카 외무대신과 회담했다.[23][24] 오번에 돌아온 직후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872년 10월 10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 유산 및 평가
윌리엄 H. 수어드는 생전과 사후 모두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동시대인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전 해군장관 기드온 웰레스는 수어드에게 원칙이 없다고 비판했고, 런던 주재 미국 대사였던 찰스 프랜시스 아담스는 그를 "정치가이지 국사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7] 반면, 전 전쟁부 차관보였던 찰스 앤더슨 데이나는 수어드가 "행정부에서 가장 교양 있고 포괄적인 지성을 가졌으며,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옹호했다.[7][8]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국무장관으로서 수어드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1973년 어니스트 N. 파올리노는 그를 존 퀸시 아담스 이후 "단연 뛰어난 국무장관"이라고 평가했다.[9] 수어드는 재직 중 업적과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9] 그의 전기 작가인 밴 드이즌은 "그의 외교 정책은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미국이 다가올 위대한 시대를 준비하기를 원했다."라고 언급했다.[10]
수어드의 전기 작가들은 그에게 두 가지 면모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큰 꿈을 꾸고 연설로 이를 전달하려 노력하며, 모두를 위한 교육, 이민자를 위한 공정한 대우, 노예제 폐지, 미국의 확장을 추구했던 "존 퀸시 아담스 수어드"이다.[11] 다른 하나는 시가와 술을 즐기며 은밀한 거래를 하고, 때로는 절반의 성과에 만족하는 실용주의자였던 "서로우 위드 수어드"이다.[11] 다니엘 S. 크로프츠는 "각 수어드는 캐리커처였지만, 상호 공생적이고 모순적인 두 경향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11]
수어드에 대한 칭찬은 남북 전쟁 중 그의 활동에도 이어진다. 스타는 수어드가 "국가의 외교를 능숙하게 관리하여 남부 연합이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다.[12] 그러나 남북 전쟁 전장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기울였다. 수어드는 12명의 전기 작가가 있지만, 링컨에 관한 책은 수천 권에 달한다.[13] 크로프츠는 "수어드와 링컨은 전쟁 전 이상주의와 당파 정치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두 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다. 물론 링컨은 항상 수어드를 능가할 것이지만, 1860년 이전에는 수어드가 링컨을 능가했다."라고 언급했다.[11]
링컨의 암살은 그의 위대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고, 수어드의 전기 작가 존 M. 테일러는 "그의 동료들을 조연의 지위로 격하시켰다."라고 말했다.[14] 링컨 사후 수십 년 동안 그를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칭송하는 수많은 전기가 쓰이면서, 링컨은 수어드가 오를 수 없는 공공 존경의 위치에 올랐다.[14] 수어드는 생전에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암살 시도에서 입은 상처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수어드는 링컨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나는 거기서 죽을 만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5]
수어드는 내각 재직 시절 미국의 확장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그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미국 영토에 추가된 것은 알래스카 매입뿐이었다.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땅은 시베리아와 같은 위도에 있었고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수어드 사후 수년이 지나서야 금이나 석유 또는 기타 중요한 광물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영향력은 이후 미국의 영토 확장에도 미쳤다. 그의 친구 해밀턴 피시는 1875년 하와이 왕국과 상호 무역 조약에 서명하여 하와이 합병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친구 윌리엄 에버츠는 1877년 사모아 제도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수어드의 제자였던 링컨의 부속 비서관 존 헤이는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수어드의 후임으로 재직하며 푸에르토리코, 괌, 아메리칸 사모아, 필리핀, 파나마 운하 지대를 획득했다.[16]
스타는 수어드의 영향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껴진다고 믿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Seward believed in a commercial and diplomatic empire as well as a territorial one. He encouraged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always seeing it as a source of strength ... was prepared to back words with arms, and believed that Washington should be the locus of inter-American and international discussion. If he were alive today ... he would not be surprised to learn that many of the most prominent Americans are first- or second-generation immigrants, or that New York City is the world's financial center, or that the headquarters of both the World Bank and 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are located in Washington. Seward would not be surprised by these developments; he would be delighted.영어
- 1981년에 발행된 50달러 국채에는 수어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 국채는 희귀하여 경매에서 약 5만 달러에 거래된다.
- 오번에 있는 수어드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 오번 시에는 수어드의 이름을 딴 수어드 애비뉴가 있다. 오번에는 수어드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딴 프랜시스 스트리트, 어거스터스 스트리트, 프레데릭 스트리트가 있으며, 수어드 애비뉴와 함께 하나의 블록을 구성한다.
- 뉴욕주 스케넥터디에도 수어드 애비뉴가 있으며, 유니온 칼리지 캠퍼스의 서쪽 경계를 이룬다.
- 수어드의 모교인 유니온 칼리지에는 "수어드의 어리석음"(Seward's Folly)을 패러디한 수어드의 트롤리라는 캠퍼스 내 교통 수단이 있다.
- 오번 시는 초등학교 중 하나에 수어드의 이름을 붙였다. 수어드가 태어난 플로리다 마을에는 유일한 고등학교에 수어드의 아버지 이름인 새뮤얼 스와지 수어드를 붙였다.
- 네브래스카주 수어드 타운, 알래스카주 수어드 타운, 수어드 반도는 수어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워싱턴주 시애틀의 수어드 공원, 워싱턴 D.C.의 수어드 스퀘어 공원, 뉴욕주 수어드 타운도 마찬가지이다.
- 오번 시의 수어드 공원, 뉴욕시의 매디슨 공원, 시애틀의 볼런티어 공원에는 수어드의 동상이 있다. (시애틀의 동상은 알래스카를 향하고 있지 않다.)
- 플로리다에는 수어드의 기념비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제작한 흉상이 있다.
- 뉴욕주 애디론댁 산맥의 수어드 산(4,361피트, 1,329m)은 전 상원의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프랭클린 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수어드 공원과 수어드 공원 주택회사는 수어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856년 구아노 섬법은 미국 시민이 다른 국가의 통치권하에 있지 않은 구아노가 퇴적된 섬을 점거할 경우, 연방의 영토로 간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구아노는 바닷새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비료이다. 이 법을 통해 미국은 실제로 태평양에서 많은 섬을 자국 영토로 선포했다.
6. 1. 외교 정책 및 영토 확장
수어드의 외교 정책은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남북 전쟁 중 남부 연합의 승인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861년 4월 남부 동맹이 사략선을 승인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수어드는 미국 외교관들에게 1856년 해상법에 관한 파리 선언에 미국이 참여할 것이라고 통보했다.팔머스턴 경 정부는 남부 동맹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고려했다. 수어드는 영국이 그렇게 할 경우 전쟁을 벌일 의향이 있었고, 런던 주재 미국 공사인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에게 외무장관인 러셀 경에게 전달할 강경한 서한을 작성했다.
1861년 11월, 찰스 윌크스 함장이 지휘하는 USS ''샌 재신토''호는 영국 우편선 RMS ''트렌트''호를 나포하여 남부 동맹의 외교관 두 명, 제임스 머레이 메이슨과 존 슬라이델을 연행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과 미국은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수어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두 외교관을 석방했다.
수어드는 알래스카 매입을 통해 미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부터 러시아령 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졌으며, 1864년 러시아가 이 지역을 매각할 의향이 있음을 알게 되자 협상을 추진했다.[17] 1867년 3월, 수어드는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 드 스토클과 협상하여 7200000USD에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8] 이 조약은 1867년 3월 30일 이른 아침에 체결되었고, 4월 10일 상원에 의해 비준되었다.
수어드는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킨 것도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 이끌었다.
6. 2. 노예제 폐지 및 인권 옹호
수어드는 노예제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흑인의 인권과 평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러한 그의 신념은 인권과 평등을 중시하는 현대 대한민국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1861년 9월, 메릴랜드 주 의회가 연방 탈퇴를 위한 투표를 계획하자, 수어드는 이들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 그의 아들 프레더릭은 아버지에게 반역적인 의원들이 투옥되었다고 보고했다.[3] 탐정 앨런 핑커턴이 제공한 증거를 바탕으로, 수어드는 1862년 남부 동조자였던 워싱턴 사교계 명사 로즈 그린호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린호는 남부로 보고서를 계속 보냈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이 활동을 이어갔다. 워싱턴의 올드 캐피톨 감옥에서 "반역자 로즈"는 남부 연합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될 때까지 신문 인터뷰를 제공했다.[4]
수어드는 전 대통령 피어스가 연합에 대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듣고 피어스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피어스는 분개하며 이를 부인했고, 이 문제는 날조된 것으로 밝혀져 행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862년 2월 14일, 링컨은 구금에 대한 책임을 전쟁부로 이관하도록 명령하여 수어드의 구금 관련 역할은 종료되었다.[5]
1862년 7월, 링컨이 내각에 노예 해방 선언을 읽었을 때 수어드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은 수어드가 원칙적으로는 노예 해방에 찬성했지만, 노예들은 연방군이 진격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이후의 두 기록에 따르면 수어드는 아직 발표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링컨은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E. 리의 북부 침입을 저지한 앤티텀 전투의 격전 이후에야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그동안 수어드는 외국 강대국들이 노예 해방 선언에 어떻게 반응할지 신중하게 조사하여, 그들이 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낮출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11]
수어드는 1863년 11월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로 유명해진 짧은 연설을 하기 위해 게티즈버그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다. 연설 전날 밤, 링컨은 수어드를 만났지만, 수어드가 연설 내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설 후,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는 질문에 수어드는 링컨만이 그 연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수어드는 또한 링컨에게 전국적인 추수감사절을 선포할 것을 제안하고, 그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추수감사절 행사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수어드의 제안으로 추수감사절이 국가적인 행사로 처음 공식화되었다.[13]
6. 3. 대한민국과의 관계
수어드가 추진했던 알래스카 매입은 대한민국의 원양 어업 및 자원 개발과 관련하여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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